미안해 아이들아 우리가 죄인이란다

“밤에 무섭냐”고 물으면 “괜찮다”며 웃던 영인이가 개에 물려 죽기까지

‘나홀로 아동’의 외로움과 죽음을 놓고 어른들은 책임 떠넘기기에 급급

끔찍한 세상에서 꽃 같은 아이들이 스러져간다. 우리나라의 아동학대 정의는 “신체적 구타(폭력), 부적절한 취급(양육), 유기, 신체적·성적 착취나 가해, 그리고 성적인 측면의 한 부분, 또는 그 이상에서 아동의 건강이나 복지를 위협하는 것”(유니세프 한국위원회 1991년)이다. 신체적·정서적·성적 학대와 방임으로 구분한다.

폭넓게는 아이에게 기본적으로 필요한 것을 부모나 공동체가 제공하지 못하는 것을 뜻한다. 최근 이혼한 부모와 기르던 조부모의 방치로 혼자 지내다 도사견에게 물려죽은 9살 영인(가명)이와 한부모 엄마를 대신해 보모에게 맡겨졌다가 보모 부부에게 맞아죽은 3살 하나(가명)의 사례를 들여다봤다.

아이들의 처지에서 만들어지지 않는 보육정책의 허실도 짚어봤다. 우리나라에서는 2000년에야 아동보호법이 전문 개정돼 아동학대예방의 법적 근거가 마련됐고, 전국 48여 개 쉼터와 220여 개 폭력상담소가 있지만 대부분 ‘신고될 만한’ 끔찍한 폭력에 노출되거나 버려진 아이들의 몫이다.

영인이와 하나처럼 ‘멀쩡히’ 양육자가 있어도 사실상의 방치나 폭력으로 숨지는 아이들이 허다하다. 공동체 어른들 모두가 반성하지 않고 지혜를 모으지 않으면 언제라도 바로 우리 집에서, 옆집에서 벌어질 수 있는 일이다.

저출산 극복을 위해 쏟아지는 온갖 탁상공론식 정책 속에서 세상에 태어나고도 제대로 성장하기는커녕 목숨을 부지하지도 못하는 수많은 아이들에게 <한겨레21>은 머리 숙여 사죄한다. 숨진 아이들의 명복을 빈다. / 편집자

▣ 의왕=글 길윤형 기자

영인(9)이의 집에서 학교까지 가려면 작은 여행을 떠나는 것 같은 결심을 해야 한다. 아이가 살던 경기 의왕시 내손동 비닐하우스 집에서 밖으로 나오면 갈미~백운호수 사이에 길을 놓기 위해 발파 작업을 벌였던 공사장과 맞닥뜨린다. 그곳을 가로질러 작은 굴다리를 지나면 저만치에 푸른 물을 한가득 머금고 있는 백운호수가 눈앞에 펼쳐진다. 호수를 끼고 10분쯤 걷다 보면, 지방2급하천 학의천을 가로지르는 ‘학의교’를 건너게 되고, 다시 20분을 더 걸어야 저만치 아이가 3년 동안 다녔다는 의왕 ㄷ초등학교가 눈에 들어온다. 학교는 2007년 10월 완공 예정인 ‘의왕 청계택지개발지구사업’(1970가구) 터 한가운데에 파묻혀 있다. 어른 걸음으로 40분. 이곳을 매일 오갔던 아이 걸음으로는 얼마나 걸렸을지 짐작하기 어려웠다.

머나먼 등굣길, 어른 걸음으로 40분

의왕 ㄷ초등학교 최임복 교감은 “아이의 옷 매무새가 지저분해지기 시작한 것은 9월 초”라고 말했다. 그전까지 보호자가 ‘외할아버지’로 돼 있어 눈길을 모으기는 했지만, 또래와 다름없는 평범한 아이였다. 3학년에 올라와 감기 몸살로 9월10일에 딱 한 번 결석했고, 6월27일에는 교내 한자시험을 봐 ‘한자 1품’ 자격증을 땄다. 아이의 유품을 담은 상장 속에서 찾은 자기소개 카드에는 “장래 희망: 축구 선수, 취미: 축구, 특기: 축구”라고 적혀 있다. 죽기 전날 아이가 학교에서 받은 수업은 듣기·수학·과학·사회·체육이었고, 얼마 전 미술 시간에는 찰흙 빚기 놀이를 해 사람의 얼굴 모양을 만들었다.

이 학교 노복영 교사는 “공부를 잘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1학년 때부터 급식비를 빼먹은 적도 없다”고 말했다. 교사들은 “언론에 알려진 것과 달리 아이의 가정 형편은 그렇게 나쁘지 않았다”고 말했다. <한겨레21>이 둘러본 아이의 비닐하우스집에는 김치냉장고와 텔레비전, 비디오 등이 잘 갖춰졌다. 안방 화장대 옆에는 아이의 공책·스케치북·가정통신문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다. 아이는 또래 아이들이 그렇듯 가끔 할머니 지갑에 손을 대기도 했던 모양이다. 5월28일 쓴 반성문에는 삐뚤삐뚤한 글씨로 “다시은(다시는) 할머니 지갑에 손을 대지 안개습니다(않겠습니다). 할머니 할아버지 용소햇주세요(용서해주세요). 차칸(착한) 영인이가 대게요(될게요)”라고 적었다. 아이의 연습장에 연필과 색연필로 그림을 많이 그렸는데, 대부분 선생님·친구들과 학교에서 노는 장면이다. 또래의 그림 속에서 자주 나타나는 아빠와 엄마는 찾을 수 없었다.

아이는 머나먼 등굣길을 자주 걸어다녔던 것으로 보인다. 원래 담임이었던 이아무개 교사는 출산휴가 중이었다. 아이가 숨질 때 담임교사였던 장광현(54·기간제 교사)씨가 아이를 처음 만난 것은 9월5일이다. 영인이는 날씨에 견줘 옷을 춥게 입었고, 제대로 씻지 못해 얼굴에 땟국이 흘렀다. 장 교사는 10월11일 아이를 불러 첫 면담을 했다. 아이는 그동안 이모, 외할머니, 외할아버지와 함께 살았지만, 9월 중순부터 방치돼 있었다. 아이는 장 교사에게 “이모가 결혼을 한 뒤 서울로 이사갔고,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시골(충남 당진)에 농사 지으러 갔다가 주말에만 온다”고 말했다. 10월29일 아이의 집을 방문한 뒤 장 교사가 학교에 써 올린 출장복명서를 보면, “때로는 차비가 없어 걸어서 등교하여 10월17일 아침부터 학생 집 근처에서 만나기로 하고 함께 등교했다”고 적혀 있다. 아이는 부모의 이혼으로 돌이 갓 지났을 무렵인 1998년부터 외할아버지·외할머니와 함께 이곳에서 살았다. 아이는 할아버지가 집을 비웠을 때 키우는 개·닭·염소에게 직접 밥을 주기도 했던 모양이다. 아이는 일기장에 이따금 “개밥을 줬다. 재미있었다”고 적었다. 아이가 ‘어머니가 재혼한 뒤 동생 둘을 낳았다’는 사실을 알았는지는 지금 와서 확인할 길은 없다.

전기밥솥의 밥은 말라 비틀어졌고…

교사가 둘러본 아이의 집은 엉망이었다. 외할머니는 아이가 먹을 수 있도록 일주일치 밥을 지어 밥통에 넣어뒀지만, 이미 먹을 수 없는 상태로 변해 있었다. 전기밥솥의 밥은 말라 비틀어졌고, 찌개도 먹기 곤란한 상태였다. 전기담요는 끄지 않고 다녀 화재의 위험성이 있었고, 주변에 민가가 없어 이웃에 부탁할 형편도 못 됐다. <한겨레21>이 11월15일 현장을 둘러보니, 살림집 현관에 아이의 신발이 뒹굴고 있고, 인라인스케이트와 한 발로 바닥을 굴러 타는 ‘씽씽이’는 한쪽에 널브러져 있었다. 아이는 장 교사가 “밤에 무섭지 않냐, 밥은 먹었냐”고 물으면 밝은 목소리로 “괜찮다”고 답했다고 한다.

교사들은 아이가 “장 교사를 참 많이 따랐다”고 말했다. 오후 1시가 되어 수업이 끝나면 아이는 선생님들이 퇴근하는 오후 5시까지 장 교사가 일하는 옆에서 놀았다. 장 교사의 부인은 “자가용 뒤에 라면과 빵이 잔뜩 실려 있어 깜짝 놀란 적이 있다”고 말했다. 장 교사는 아침을 거르고 오는 아이에게 라면과 빵을 줬고, 저녁 때는 자장면을 사주기도 했다. 방치된 채 버려진 아이의 집에는 장 교사가 준 신라면 4봉지가 아직도 뒹굴고 있다. 장 교사는 외할머니에게 전화를 걸어 “아이를 혼자 두지 말고, 식구들과 상의해 차라리 당진으로 전학을 시키라”고 권유했다. 가족들은 “11월 중순까지는 추수를 해야 하니 어쩔 수 없다”고만 말했다. 장 교사는 아이를 잃은 충격으로 병원에 입원했다가 11월16일 퇴원했다.

장 교사와 함께 아이의 주검을 발견한 김영근 교사는 “생각하기도 싫은 기억”이라고 말했다. 11월11일 아이가 학교에 나오지 않았다. 장 교사는 1교시 수업을 마치고 같은 반 친구 진용이와 유찬이를 데리고 아이의 집으로 갔다. 일행은 큰 도사견이 풀어져 컹컹 짖어대는 바람에 함부로 집안에 들어갈 수 없었다. 파출소로 연락해 순경 2명과 함께 개를 피해 뒷문으로 비닐하우스에 들어갔다. 아이는 없었다. 전기밥솥을 열어보니 밥 먹은 흔적은 없고, 밥이 오래돼 시커멓게 변해 있었다. 할머니는 휴대전화를 받지 않았다. 아이가 없는 줄 알았고 집 앞쪽에서는 개가 사납게 짖어대 일행은 일단 돌아왔다.

수급자 여부 따지기 좋아하는 공무원들

그날 오후 3시께 다시 찾은 아이의 집에서 아이는 개에 물려 숨진 채 발견됐다. 아이는 비닐하우스 현관 바로 안쪽에서 양말만 신은 채 상·하의가 모두 벗겨져 있었다. 양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엎드린 자세였다. 몸에는 수십 군데나 깊은 상처가 나 있었고, 개에게 끌려다니며 긁힌 듯한 자국도 선명했다. 비닐하우스 밖 마당에는 찢겨진 아이의 옷가지와 책가방이 흩어져 있었다.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과 소방구조대 10여 명은 아이를 물어 죽인 것으로 보이는 잡종 도사견에게 총 세 발을 쏴 죽였다. 개의 몸길이가 130cm.

아이의 주검은 경기도 안양 메트로병원에 3일 동안 방치돼 있다가 11월15일 충남 당진에 묻혔다. 병원의 주검 안치소에서 아이는 ‘고인명 김영인’으로, 그를 물어죽인 개는 ‘고인명 개’로 3일 동안 나란히 보관됐다. 김인태 안양 메트로병원 사무장은 “증거 보존 차원에서 개의 주검도 보관해야 한다”고 말했다.

아이의 죽음을 놓고 어른들은 책임을 떠넘기기에 바빴다. 애초 ㄷ초교에서는 의왕시 사회복지과에 전화를 걸어 “‘나홀로 아동’이 있으니 조치해달라”고 당부 전화를 걸었다. 시 공무원은 아이가 기초생활보장수급자인지를 먼저 물었다. 학교는 “그것은 아니다”고 말했다. 시청에서는 “집에 몇 번 전화를 걸고, 몇 번 들렀다”고 말했다. 사실을 확인할 도리는 없지만, 수급자 여부를 따지기 좋아하는 공무원들이 아이를 위해 최선을 다하지는 않았던 것처럼 보인다. 의왕시는 사고가 터지자 언론에 “이웃 주민의 신고로 보호 조치를 취하기 직전에 안타깝게 변을 당했다”고 말해 면피에 성공했다. 시에서 아이를 위해 마련한 보호 조치는 “보호자와 상의해 국민기초생활보장 수급자로 보호시설에서 생활토록 하는 것”이었다. 영인이는 죽는 것도 싫었겠지만, 가족의 품에서 떨어져 고아원으로 가는 것도 좋아하지 않았을 것 같다.

방치된 집에서 만난 기자와 의왕시 사회복지담당 공무원은 어색하게 명함을 교환했다. 기자는 기사에 적을 만한 아이의 낙서가 필요했고, 그는 상부에 보고할 문서에 첨부할 아이의 집 사진이 필요했을 것이다.

“네가 지켜 주지 못했어, 미얀헤”

어른들의 수많은 잘못과 실수에 희생되는 것은 늘 어린 아이들이다. 영인의 같은 학교 친구 윤호는 학교 홈페이지에 “영인야, 네가(내가) 지겨(지켜) 주지 못했어. 미얀헤(미안해). 좋은 길로 가길 원해”라고, 소영이는 “영인야 부디 좋은 데로 가고 명복을 빌게. 조회하면서 많이 울었지만 그런 티를 안 냈어”라고 썼다. 영인의 같은 반 아이들은 쭈뼛쭈뼛 말이 없었다.

11월15일 아이의 반에서 청소를 안 해 칠판에 이름이 적힌 아이는 나라와 상희였다. 인덕이와 웅섭이는 신발장 청소, 예린이는 창틀을 닦았다. 친구 영인이가 사라진 교실에서 준혁이는 이제 혼자 우유 당번을 해야 한다. 영인이의 외할아버지 김아무개(61)씨는 <한겨레21>과의 통화에서 “당신들과는 할 말이 없다. 자세한 것은 경찰에 물어보라”고만 말했다. 가족들은 학교에 보관된 아이의 유품도 찾지 않았다. 아이의 집은 지금도 방치돼 있다. 아이가 그랬듯 우리에 갖힌 개·염소·닭 등이 굶주림에 지쳐 오가는 인기척에 애타게 신음을 내고 있었다. 아이의 죽음은 곧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혀질 것이다. 그러나 어른들이 저지른 잘못까지 용서를 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영인이의 이른 죽음 앞에서 우리 모두는 죄인이지만, 우리는 종종 그 사실을 잊고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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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지의 사각지대, 조손 가정

방치되기 십상이지만 보호자가 있다는 이유로 사회적 보살핌 못받아

영인(9)이처럼 부모와 떨어져 할아버지나 할머니와 같이 사는 가정을 ‘조손 가정’이라고 부른다. 전문가들은 “조손 가정 아이들은 보호자가 있다는 이유로 적절한 사회적 보살핌을 받지 못하는 복지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다”고 입을 모았다.

화가를 꿈꾸다 지난 11월17일 스스로 목숨을 끊은 광주 ㅂ중 임아무개(15)군은 조손 가정의 비극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경우다. 임군은 초등학교 4학년 때 부모가 헤어져 살게 되면서 누나(16·고1)와 함께 시골 할아버지 집에 맡겨졌다. 할아버지 집에서의 생활은 눈칫밥의 연속이었다. 임군은 유서에 “눈칫밥 먹으며 살다 (지난해) 중2 때 야간 도주로 엄마에게 왔다”고 적었다. 임군 남매는 할아버지의 집에서 살았지만, 서류상 아버지가 부양자로 돼 있어 기초생활수급자 지원대상에서 제외돼왔다.

경북여성정책개발원에서 2003년에 조사한 ‘농촌 여성노인 가구의 손자녀 양육실태와 정책과제’를 보면 경북 읍면 지역에만 할머니 또는 할아버지와 손자가 같이 사는 조손 가구는 모두 2300여 가구로 경제적으로 궁핍한 생활을 하고 있지만 양육비 지원은 거의 없는 것으로 나타난다. 아이들이 할아버지나 할머니에게 맡겨지는 이유는 부모의 이혼·가출·사망 등이 대부분이었다. 조부모에게 맡겨지는 아이들의 20%는 한 살 미만인 갓난아이일 때부터, 60%는 유아기인 5살 이하부터 조부모의 손에서 자라고 있었다.

2000년 현재 전국의 조손 가정은 4만5천여 가구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되지만, 가족 형태로 분류돼 있지 않아 정확한 규모를 알 수 없다. 보건복지부 아동정책과에 따르면 부모의 별거와 경제적 사정 등으로 조부모가 대신 돌보는 가정(아동복지법상의 가정위탁사업에 따라 정부로부터 양육비를 지원받는 가정)은 2001년 810가구(1170명)에서 2004년 3450가구(5196명)로 4배 넘게 늘었다.

아이들은 학교가 끝난 뒤 제대로 된 학습 지도를 받지 못해 도시 아이들에 견줘 교육·문화적 격차를 나타낼 수밖에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영인(9)이도 초등학교 3학년이 됐지만, 한글을 제대로 배우지 못한 듯 맞춤법에 맞게 제대로 글을 쓰지 못했다. 전문가들은 “조부모 가정의 청소년들은 사실상 소년·소녀 가장이지만 ‘서류상’ 보호자가 있다는 이유로 사회적 안전망에서 방치되기 십상”이라고 말했다.

(한겨레21 2005-1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