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 “군수물자조달 한국이 알아서 하라” 새협정 거부

《6월 한미군수협력위원회(LCC)에서 신속한 전시 군수지원을 위해 새 협정을 체결하자는 한국의 요청에 대한 미국의 답변은 한마디로 ‘(한국이) 알아서 해결하라’는 것이었다. 유사시 탄약 등 각종 전쟁물자의 대미 의존도가 높은 한국의 처지를 잘 아는 미국이 이 같은 반응을 보인 데는 참여정부가 자주국방을 강조하며 독자적인 국방정책을 표방해 온 것이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정부 “새 협정 맺자”=국방부가 미국에 신속한 전시 군수지원을 위한 새로운 협정의 체결을 요구한 것은 지난해 말 종결된 긴급소요부족품목록(CRDL) 계획과 2006년 말 폐기될 예정인 전쟁예비물자(WRSA) 프로그램의 공백을 메우기 위한 것이었다.

CRDL과 WRSA 프로그램은 유사시 한미 연합작전계획(OPLAN)에 따라 미 본토에서 대규모 증원 병력과 장비가 한국에 도착하기 전까지 한미연합군이 개전 초 북한군을 저지하는 데 필수적이라는 평가를 받아 왔다.

WRSA의 99% 이상, CRDL의 상당부분이 전시대비 탄약으로 이는 한반도 유사시 초기에 소요될 것으로 예상되는 탄약의 60% 이상을 차지한다. 한국군의 전시 탄약 보유량이 10여 일치에 불과하기 때문에 WRSA와 CRDL의 군사적 의미는 더욱 클 수밖에 없다.

노무현(盧武鉉) 대통령 취임 초인 2003년 6월 LCC에서 미국이 WRSA 폐기 방침을 공식 통보했을 때 한국은 주변국들에 한미동맹의 약화로 비칠 수 있다며 재고해 줄 것을 강력히 요청했다.

그 후 국방부는 미국의 WRSA 폐기 방침 통보에 관한 본보 보도(올해 4월 18일자)로 논란이 불거지자 “WRSA 탄약 중 상당부분을 한국에서 생산할 수 있으며 WRSA가 없어도 유사시 한국군의 전쟁 수행능력에는 별 문제가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국방부가 이면에선 미국 측에 새 협정 체결을 요구해 온 사실이 알려짐에 따라 지난봄 국방부가 WRSA와 CRDL의 폐기가 초래할 ‘안보 공백’의 문제점을 국민에게 제대로 알리지 않았다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 미 “우리에 의존 말라” = 미국이 한국의 요청을 거부한 것은 한국의 경제적 능력을 감안할 때 유사시 필요한 각종 군수물자의 조달을 미국에 의존하지 말고 한국이 스스로 맡아야 한다는 논리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

미국 측은 한국이 평시에 자원과 재정을 적절히 배분해 유사시 예상물자 소요에 대비하도록 권고하는 한편 전쟁 발발 시 초기 30일 동안 소요될 탄종과 탄약을 한국이 파악해 자체적으로 마련할 것을 요구한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은 현실적으로 한국이 이들 물자를 미국에 의존하는 게 불가피하다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한국이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물론 미국은 1984년 한미가 CRDL과 WRSA 가동 등 전시 군수물자 지원을 위해 체결한 관련 협정을 일단 계속 유지하는 방안을 검토해 보겠다고 답변했으나 큰 기대를 걸기는 어렵다.

지난해 5월 폴 울포위츠 당시 미 국방부 부장관이 조영길(曺永吉) 국방부 장관에게 보낸 공식서한에서 “기존 (CRDL과 WRSA 가동에 관한) 협정은 수정 또는 종결시켜야 할 협정”이라고 이미 못을 박았기 때문이다.

군의 한 관계자는 “미국은 한국과 전시지원을 위한 어떤 종류의 새 협정도 체결하지 않기로 내부 방침을 정한 것으로 알고 있다”며 “갈수록 안보책임의 많은 부분이 한국군에 넘어올 것으로 예상된다”고 말했다.

긴급소요부족품목록(CRDL) :

Critical Requirements Deficiency List = 미국이 보유하고 있는 전투장비 가운데 유사시 한국군이 북한군을 저지하기 위해 긴급히 사용하겠다고 요청한 장비와 물자의 목록을 말한다. 한반도에 전쟁이 발발할 경우 한국군은 개전 초기 최소 30일간 주한미군의 기지와 미국 본토 미군기지들에 배치 또는 비축돼 있는 브래들리 장갑차, M1A1 전차, 곡사포, 다연장로켓, 탄약 등 미군의 각종 전투장비와 물자를 사용하겠다고 요청할 수 있다. 이에 관한 목록이 CRDL이다. 미국은 지난해 5월 당시 폴 울포위츠 국방부 부장관이 조영길 국방부 장관에게 보낸 공식 서한을 통해 CRDL을 같은 해 12월 종결하겠다고 통보했다. 이에 따라 CRDL은 폐기됐다.

(동아일보 / 윤상호 기자 2005-11-8)

무기도입·무기체계 ‘미국의존’ 바뀌나…보다 좋은 조건 요구 등 변화

그동안 미국에 거의 의존해왔던 우리 군의 무기 및 개발체계 도입 관행에 변화의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 현재 진행중인 무기 도입·개발체계 선정 과정에서 다른 국가 제품의 선정 가능성이 부각되고 있고, 정부가 무기 구매와 관련해 미국에 “보다 좋은 조건을 보장해달라”고 요구하는 등 과거와는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형 헬기(KHP) 사업과 관련, 국방부 KHP사업단 관계자는 7일 “우리가 일관되게 추진해왔던 시스템 체계가 있는데 ‘ 그보다 더 좋은 시스템을 제공하겠다’는 제의를 한다고 해서 받아들이긴 어렵다”고 말했다. 이는 유력한 후보였던 미국의 벨사가 핵심부품 개발이라는 정부 요구를 무시하고 자사의 개발방식을 고집한다면 협상에 있어 불리할 수 밖에 없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올 연말 업체 선정을 앞두고 있는 공중조기경보통제기(E-X)사업 역시 미국 보잉사와 이스라엘 엘타사 제품에 대한 분석이 진행중인 가운데 엘타사 제품이 국방부 기준을 충족할 경우 가격경쟁력에서 유리하다는 게 업계 안팎의 관측이다.

국방부 관계자는 “정부는 실리 위주의 국익을 고려한 결정에 최우선 가치를 두고 있으며 무기체계 선정시 좋은 기술을 더 싸게, 적극적으로 제공하겠다는 업체를 선정할 수 밖에 없다”며 “무기체계를 도입하면서 동맹관계는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다”고 잘라 말했다.

정부는 또 미국 측에 무기수출통제법 개정도 공식 요구한 상태다. 미국으로부터 무기를 가장 많이 구매하는 국가 중 하나임에도 불구하고 의회 심의 범위와 계약 행정비용 등에서 NATO나 일본·호주·뉴질랜드 등과 비교했을 때 불리한 조건을 적용받고 있기 때문이다.

미 의회조사국(CRS)에 따르면 한국은 1996년부터 2003년 사이에 외국으로부터 모두 88억달러어치(구매계약 완료 기준)의 무기를 구매했으며 이중 62억달러(70.4%)를 미국에서 수입, 이 기간중 세계 4위의 미국 무기 수입국이었다.

(국민일보 / 정승훈 기자 2005-1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