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노하는 미래세대] 국민연금·나라빚

"빚 떠넘기고 가지 마세요" 20대의 외침
대학생들 국민연금 실상고발 다큐 제작

우리 사회의 비용 부담을 놓고 세대 간 갈등이 시작됐다. 국민연금 2047년 고갈, 청년실업 34만명, 25년간 매년 2조원씩 공적자금 상환…. 기성세대가 장래로 돌린 부채 고지서에 미래세대가 “왜 우리는 혜택 없이 비용만 부담하느냐”며 반발하기 시작했다.

아주대 4학년 이승민(24·컴퓨터공학과)씨는 3일 하루 종일 무비카메라를 들고 서울 삼성동 일대를 돌았다. 길거리 한쪽에서 열심히 구두를 만지고 있는 30대 구두 수선공이 그의 카메라 앵글에 잡힌다.

“국민연금에 대해 아세요? 국민연금 기금이 고갈된다는데, 누가 채우죠?” 이씨가 던지는 질문에 구두 수선공은 냉소한다.

“난 받는 것 포기했어. 어떻게 되겠지. 아니면 다같이 망하는 거고.”

이씨가 다큐멘터리 제작에 나선 지 4개월째. 이달 중순이면 ‘국민연금 위기’라는 20분짜리 작품이 완성된다. 다큐 제작 때문에 이번 학기엔 수업의 절반을 빼먹었다.

“지금 퇴직하는 사람들은 자기가 낸 돈보다 훨씬 많이 받는데, 우린 앞으로 40년 가까이 돈만 내고 한 푼도 못 받을 수 있다니 말이 안 되잖아요.”

◆ “우리가 왜 희생돼야 하나”

컴퓨터 조립을 좋아하는 평범한 공대생이던 이씨가 국민연금 문제를 알게 된 것은 2년 전이었다. 2003년 겨울 용돈을 벌 생각으로 형(26)과 함께 LCD모니터 조립·판매에 나섰으나 손해만 보았다. 망연자실한 두 형제 앞으로 국민연금 보험료를 납부하라는 고지서가 날아왔다. 수입도 없는데 국민연금이라니….

돈을 못 내자 국민연금관리공단 직원의 독촉이 시작됐다. “돈이 있는데 버티는 것 아니냐. 당신 같은 사람들 때문에 연금 운영이 어렵다”며 미납 사유서와 각서를 작성하라고 했다. 억울했지만 서류에 사인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올 8월까지 납부를 유예받았다.

이씨는 인터넷을 뒤지고 신문 스크랩을 하며 국민연금에 관한 자료를 모았다. ‘2035년 적자 시작, 2047년 기금 완전 고갈’(보건복지부·2003년 자료)….

이씨가 54세가 될 무렵 국민연금은 구멍나기 시작하고, 연금 수령 나이인 66세 때는 한 푼도 남아 있지 않게 된다는 얘기다. 이 모든 일이 자신을 포함한 젊은 세대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벌어지고 있었다.

유예기간 만료를 한 달 앞둔 지난 7월 이씨는 ‘국민연금 고발작전’에 들어갔다. 대학 전체에 이메일을 띄워 함께 다큐멘터리를 제작할 스태프를 찾자 취지에 동감한 두 명의 학생이 선뜻 참여했다. 한 선배는 100만원의 제작비를 빌려주기도 했다.

거리에서 설문을 진행하고, 국민연금관리공단 직원과 전문가를 인터뷰했다. 국민연금 주무 부서인 복지부 직원에게 인터뷰를 청했더니 “나중에 다 해결된다. 어린 학생이 벌써 연금 걱정이냐”며 거부했다.

이씨는 “국민연금의 운명을 알면서도 가만히 있는 어른들이 너무 뻔뻔하다”며 “감정적으로 접근하기보다 치밀하게 분석했다”고 말했다.

이씨는 다큐멘터리가 완성되면 인터넷을 통해 유포할 생각이다. 영상매체와 인터넷에 친숙한 젊은 세대의 지지를 끌어내기 위해서다. 그의 다큐멘터리에 등장하는 20대들은 한결같이 “내가 왜 기성세대를 위해 희생해야 하는가. 이대로라면 결국 미래세대가 빚더미에 허우적댈 것”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 미래세대, 말문을 열다

자유기업원 시장경제사랑단 대학생모임의 김우성(22·한양대 경영학과3)씨. 그는 최근 모임에서 다른 회원들과 국민연금의 재정에 대해 토론했다. 고갈 시기가 더 앞당겨질 가능성은 없는지, 자신들이 은퇴할 때 받게 될 연금은 얼마나 되는지 등이 주제였다. 김씨는 “2047년 고갈이라는 것은 경제가 5% 정도 성장할 때를 가정한 것”이라며 “지금처럼 경제가 나쁜 상황에선 고갈시기가 훨씬 앞당겨질 수 있는데도 국민연금 개혁을 미루는 것은 기성세대의 착취”라고 말했다.

성균관대 대학원생 김혜주(여·25·경제학)씨는 석사학위 논문 주제로 국민연금을 생각하고 있다. 사회에 갓 진출한 선배들은 그에게 “국민연금 이야기만 들으면 가슴이 쓰리다”는 말을 했다.

젊은 세대가 기피하는 국민연금이 왜 꼭 필요한 걸까? 미래세대의 부담을 덜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이에 대한 해답은 결국 젊은 세대의 몫이라는 게 그의 생각이다. 김씨는 “기성세대가 자발적으로 기득권을 포기할 수는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해 6월 인터넷상에선 국민연금의 불합리한 구조를 고발하는 ‘국민연금의 8대 비밀’이라는 글이 유행했다. 이 글을 기폭제로 고조된 반대 여론은 20·30대 주도의 촛불시위로 이어졌다.

이대로라면 연금 고갈이 불가피하다는 것은 기성세대도 인정하는 사실이다. 하지만 정부가 국회에 국민연금 개혁법안을 제출했지만, 아직 본격 논의조차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3년 전 발족한 국민연금발전위원회도 아무런 진전이 없다.

이런 기성세대의 부작위(不作爲)에 미래세대가 반격을 개시했다. 인천대 전영준 교수는 “국민연금 개혁이 미루어지는 것은 정치권이 기성세대의 눈치를 보기 때문”이라며 “젊은 세대들도 이를 인식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국가채무 49조'도 인터넷 통해 문제 제기

20代 "복지예산 확대는 우리를 도산으로 몰수도"

49조원의 공적자금 빚과 부풀어가는 국가 채무에 대해서도 젊은 세대는 자신들에게 청구돼 올 막대한 계산서를 놓고 계산기를 두드리며 의문을 제기하기 시작했다.

대학생 25명이 만든 ‘자유포럼’. 사회 현안을 놓고 토론하는 이 모임의 최근 주제는 ‘작은 정부와 예산’이었다. 복지 예산 확대에 따른 재정 적자문제가 주로 토론됐다.

이 모임 운영진인 이원우(22·홍익대 경영학부 2학년)씨는 “GM은 과도한 복지비용 부담으로 도산 위기에 몰렸다”면서 “한국의 복지 예산 확대도 우리 세대를 GM과 비슷한 처지로 몰아넣을 수 있다”고 말했다. 그를 포함한 자유포럼 회원들은 곧 대학생 상대 웹진(인터넷잡지)을 창간해 기성세대를 겨냥한 문제 제기를 해나갈 계획이다.

한국납세자연맹 간사로 활동 중인 김상미(여·24)씨. 그는 “매년 2조원씩 25년간 공적자금 상환에 투입키로 한 정부의 공적자금 상환 계획을 보면 분통이 터진다”며 “외환위기는 현 세대가 초래한 것인데 그 비용을 다음 세대에 전가하는 것이 정당하느냐”고 따졌다.

박종규 한국금융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비용 부담을 둘러싼 제도적 문제를 빨리 해결하지 않으면 세대 간 갈등이 걷잡을 수 없이 폭발하고 말 것”이라며 “이미 그런 징후들이 곳곳에서 감지되고 있다”고 말했다.

 

 

박종세, 염강수, 이성훈 기자

(조선일보 2005-1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