령통사의 ‘노지심’

개성의 고려박물관 강사 리옥란은 송악산 연봉의 지형이 만들어내는 윤곽을 설명했다. 임신한 여인이 머리를 풀고 누워서 분만하려는 듯한 자세라는 것이다. 남북이 힘을 합쳐 복원한 ‘영통사’는 그러한 송악산 끝자락의 오관산에 있는데 그 자리가 명당이다. 두 산줄기 사이의 배꼽 아래쯤 되는 아늑한 자리에 터를 잡았다. 조선왕조 때 집성된 ‘동국여지승람’은 “영통사는 골안(洞府)이 깊숙하고 산은 둘러싼 형세이며 물은 멀리 굽이돌아 흐르고 나무는 울창하다”고 모체로 기록했다.

영통사 낙성식의 주인공은 양산박 호걸 ‘노지심’처럼 생긴 스님이다. 키가 짤막하고 옆으로 딱 바라진 대한불교 천태종 사회부장 무원 스님은 넉넉하게 웃는 얼굴로 휘젓고 다니며 행사를 총괄한다. 친화력이 좋고 유들유들하지만 긴장하면 잠깐 눈 고리가 사납게 치켜 올라간다. 김무원 사무총장은 이 노지심을 ‘무대뽀’(일어인 ‘無鐵砲’에서 유래한 속어)라고 단정했다.

6·15정신 강조하는 ‘조불련’

영통사 복원을 위해 앞뒤 가리지 않고 저돌적으로 남측 사업을 총괄한 것이 무원 스님이다. 뻣뻣하고 자존심이 센 북측 당국자들도 노지심이 뻗서면 고개를 저으며 수그러들었다고 한다. 그는 왕건릉 잔디밭에서 북측 조불련(조선불교도련맹)과 조평통의 관계자에게 점심 도시락을 접대하던 여신도에게 눈을 부릅뜨며 농담을 건넨다. “잘하란 말이여. 여자의 기도 듬뿍 드리라우.” 이런 거침없는 말을 여신도는 즐겁게 받아넘기지만 북측의 순박한 사내들은 겸연쩍어 몸 둘 바를 모른다. 24년 째 천태종 총무원장직을 역임하고 있는 종단 최고 실력자 정운덕 큰스님은 무원의 추진력에 큰 신뢰를 보내는 눈치다.

이번 행사 중 가장 기대했던 대목은 ‘령통사 복원 락성식’(북측 표기)에 이어 열린 학술토론회다. 북측은 평양건설건재대학 위영철 교수가 ‘령통사 복원과 그 력사적 의의’를, 사회과학원 리창언 박사가 ‘령통사는 조선 천태종의 성지’를, 해외 측은 재일본 조선력사고고학협회 전호천 회장이 ‘령통사 유적의 조사발굴 정형에 대하여’를 발표했다. 남측은 천태불교문화원 상임연구원인 김연태·이영자 명예교수가 발제를 했다. 그러나 아쉽게도 토론은 전혀 없이 발제문을 10분씩 요약하여 낭독하는 것으로 토론회는 끝났다.

조불련 중앙위원장 박태화 대선사를 비롯하여 북측 발언자들은 령통사 복원 사업에서 김정일 위원장의 직접적인 령도가 절대적인 추진력이었음을 거듭해서 강조했다. 북측의 령통사 복원 경과보고서는 ‘실정을 료해하신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 장군님께서 령통사 터를 원상대로 복구할데 대한 가르치심을 주시었다’고 전제하고, ‘사회과학원 고고학연구소 주최로 방대한 력량이 동원되어 1998년부터 불과 2년이라는 짧은 기간에 발굴을 성과적으로 완성했으며, 유적지 발굴이 끝나자 위원장의 가르침을 받아 안은 건설자들은 결사관철의 정신으로 2000년부터 5년이라는 짧은 기간에 보광원 등 26개 동의 건물을 복원해냈다’고 알린다.

또 ‘령통사가 복구된다는 소식에 접한 남녘의 천태종 스님들, 신자님들은 10여 차례에 걸쳐 기와 40여만매와 단청자재, 건설기재들, 마감자재와 수많은 건설가공구들, 여러 수종의 많은 묘목들을 보내주어 령통사 복원과 환경을 꾸리는데 적극 기여했다’고 불교천태종의 참여를 강조했다. 북측은 령통사 건설이 6·15 공동선언을 받들고 협력과 연대를 강화해나가려는 뜨거운 지성이 깃든 사업이라고 해석한다.

첫 통일국가 위용 떨친 고려

북측은 송도(개성)에 도읍한 고려는 ‘민족사에서 고구려를 계승하고 첫 통일국가로써 위용을 떨친 왕조’라고 해석한다. 개성 고려박물관 경내는 천년을 자란 몇 아름드리나 되는 은행나무들의 황금 낙엽이 천년 역사의 향기를 풍긴다. 그런데 개탄할 장면이 벌어진다. 유물 전시관 실내에서 남측 관광객들이 플래시를 번쩍 번쩍 터트리며 사진 촬영을 하고, 천년 된 화강암의 암수 용머리를 밟고 서서 다투어 기념사진을 찍지만 이를 금하는 규칙이 없다. 박물관 강사 리옥란은 귀중한 유물들의 보관 상태가 허술한 점을 인정하며 속이 상한다고 했다.

그런데 그녀는 공민왕의 현명한 인사정책 하나를 소개한다. 무신(武臣)은 최고령자를 최전열에 내세워 위기를 막아내도록 했고, 문신(文臣)은 최고령자를 최측근에 두어 지혜를 간하도록 했다는 얘기다. 알다시피 공민왕은 대외적으로 반원정책을 펴고 대내적으로 국가의 공공성 회복을 꾀해 개혁을 여러 차례 시도한 ‘한 때의 명군’이었다. 현명한 인사정책에 힘을 얻어 그만큼이라도 했던 모양이다.

<경원대학교 초빙교수·언론학>

(내일신문 2005-1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