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와 신라가 통했다 가슴 떨리지 않는가?

씨앗을 뿌리는 사람들 / ‘로마문화 왕국, 신라’

2001년 끝 무렵, 일본 독서계를 잘 아는 분이 책 한권을 보내왔다. ‘정말 대단한 책이네. 국내 독자들이 꼭 봐야 할 책이야’라는 메모와 함께.

표지에는 붉은 바탕에 황금빛으로 빛나는 검이 박혀 있었다. <로마문화왕국, 신라>라는 제목과 함께 “고대 한반도에 로마문화 왕국이 존재했다. 그것은 바로 신라다!”라는 부제목이 화살처럼 눈에 박혀왔다. 가벼운 충격과 함께, 오버 잘하는 일본 재야 사학자의 주장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책을 훑어가면서 흥분되기 시작했다. 고대 신라 유물과 흑해 연안의 로마문화권 유물의 비교 사진들, 치밀하게 펴가는 추리와 해설이 흡반 같았다. 역사적 가설을 증명하는 논증은 치밀했다. 저자는 지역적 편견이나 학계 특유의 보수성이 전혀 없었고, 고대 동서양의 교섭 과정을 꿰고 있었다.

알고보니 지은이 요시미즈 츠네오는 국내에도 잘 알려진 고대 문화사의 권위자였다. 1973년에 발표한 <유리길>은 비단길 외에 다른 동서 교역로가 있었음을 밝힌 역작이었다. 1974년 경주 미추왕릉 지구 발굴 과정에서 출토된 상감옥(문양을 넣은 유리구슬)의 중요성을 알아본 이도 그였다. 국보로 지정해도 충분할 만큼 세계에서 가장 아름답고 정교한 상감옥이 로마 유리 기법으로 된 것임을 고증한 그는, 상감옥에 쓰인 각종 색유리와 정교한 동식물 문양, 왕과 왕비의 초상을 전세계의 유물들과 비교하고 세세히 분석하는 데에 최근까지 30여년을 바쳤다.

그 결과 이 유물의 출처가 로마인이 이주해서 살던 흑해 서해안 다키아, 트라키아 지방의 소왕국임을 밝혔고, 함께 출토된 1만5000여점의 각종 유리구슬과 옥, 온통 로마식 누금세공 기술로 된 순금제 장신구들, 그리고 3500여점에 이르는 무기, 갑옷류들 모두가 이 지역, 곧 비잔틴(동로마제국)의 문화 산물임을 증명했다. 더우기 그는 이들 유물의 제작 상태들을 분석하여, 이들 중 다수가 신라에서 제작한 것들임을 증명하고 있는데, 이는 4, 5세기 고대 신라야말로 주위 고구려나 백제와는 계통이 전혀 다른 이질적인 독립 로마문화 집단임을 말하고 있다.

이 책을 만드는 7개월 동안 나는 행복했고 또한 괴로웠다. 일본의 한 학자가 정성들여 쌓고빚은 한국 고대 신라 문화의 탐구 과정을 사진 자료 하나하나와 박물학적인 전문용어 사이에서 따라가는 가슴 두근거림. 작은 유물을 통해 양파 벗기듯 고대의 비밀을 열어가는 고고학적 상상력과 추리의 기쁨. 저자인 요시미즈 선생과의 대화. 국내 여러 박물관에서의 자료 수집. 관련 국내 학자들과의 미심쩍은 논의. 다시 보게 된 고대사 논문들과 출판물. 온통 한글용어로 바꿔야 했던 고대사 용어들. 책상에 자료더미와 교정쇄를 참호처럼 두르고서야 책을 낼 수 있었다.

그리고 편집기획자로서의 기대는 빗나가 이 책은 빛을 못봤다. 출판사의 마케팅 능력 부족 때문일까? “한국 고대사가 바뀐다”는 선언적 카피 때문일까? 요시미즈 선생이 재야 사학자여서일까? 고대 신라에 대한 사학계의 통설에 지나치게 어긋나서일까? 세계적인 보물들을 박물관 창고에 모셔두는 것으로 멈춰버린 우리의 황폐한 문화적 감수성 때문일까? 그도저도 아니면, <로마문화 왕국, 신라>라는 결론이 잘못되었기 때문일까? 한 일본인 저자의 진지한 물음에 한국 독서 문화계는 무덤덤하게 입 다물고 있다.

<조진호 / ‘씨앗을 뿌리는 사람들’ 마케팅실장>

(한겨레신문 2005-11-4)

로마 文化 王國 신라

(월간조선 2002-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