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 조작설 등 해석 분분한 광개토대왕비 비문

《광개토대왕비 비문 조작설의 진실에 한걸음 다가갈 수 있는 자료들이 하나둘 발굴되고 있다. 고구려연구회(회장 서영수 단국대 교수)는 3∼5일 단국대 서울캠퍼스 서관 11층 국제회의장에서 ‘광개토태왕과 동아시아’를 주제로 제11회 국제학술회의를 개최한다. 이 학술회의에서 쉬젠신(徐建新) 중국사회과학원 세계역사연구소 연구원과 가오밍스(高明士) 국립 대만대 교수가 지금까지 알려진 가장 오래된 광개토대왕비 탁본보다 더 먼저 만들어진 탁본을 발견했다는 내용의 논문을 발표할 예정이어서 주목된다.》

지금까지 알려진 가장 오래된 탁본은 사코 가게노부(酒勾景信) 일본 육군대위가 1883년경 중국 현지에서 입수했다는 묵본이다. 이 묵본의 신묘년 관련 기록인 ‘倭以辛卯年來渡海破百殘□□新羅’가 ‘왜가 신묘년에 바다를 건너 백제, □□, 신라를 깨뜨렸다’로 해석돼 일본이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다는 임나일본부설을 뒷받침하는 증거로 제시됐다. 그러나 후대 탁본에는 ‘渡海破’란 글자가 뚜렷하지 않다는 점 때문에 조작 의혹을 받아 왔다.

▽ 사코 탁본은 비석에 대고 그린 탁본이 아니었다 = 쉬 연구원은 지난해 중국 베이징(北京) 경매장에서 자신이 발견한 묵본이 ‘광서 신묘(1881년)에 얻었다’라는 발문 기록으로 볼 때 가장 오래된 묵본이라고 주장했다. 이 묵본의 존재는 지난해 12월 베이징에서 열린 비공개 한중학술대회에서 이미 발표됐으나 사진과 구체적 내용이 국내에 전해진 것은 처음이다.

이 묵본의 신묘년 관련 기록 내용은 사코의 묵본과 같다. 일단 조작설에 불리한 정황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기존에 쌍구가묵본(雙鉤加墨本)으로 알려진 사코 묵본이나 새 묵본이 모두 묵수곽전본(墨水廓塡本)인 것으로 밝혀져 신뢰도가 더 떨어질 수밖에 없게 됐다.

쌍구가묵본은 비면에 종이를 대서 글자의 외곽선을 따라 그린 뒤 주변에 먹칠을 해서 만든 탁본. 반면 묵수곽전본은 아예 비면에 종이도 대지 않고 글자 형태를 모방해 그린 뒤 주변에 먹칠을 한 탁본을 말한다. 묵수곽전본은 묵본 작성자의 주관적 판단이 개입하거나 조작됐을 가능성이 더욱 높은 판본 형태다.

실제로 사코 묵본과 쉬 연구원이 발견한 묵본만 놓고 봐도 서로 글씨 형태가 다르다. 쉬 연구원이 함께 제시한 베이징대 도서관의 후대 탁본의 경우에는 해(海)자가 황(皇)자로 돼 있다.

▽ 초기 원석 탁본에선 ‘渡海破’ 형태 알아보기 어려워 = 가오 교수는 대만중앙연구원 역사언어연구소 푸쓰녠(傅斯年)도서관에서 새로 발견한 원석탁본을 공개하면서 이 탁본이 사코 탁본 이전에 제작된 초기 원석탁본일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했다.

원석탁본은 비석에 종이를 대고 솜방망이로 먹을 묻힌 뒤 톡톡 두드려 만든다. 지금까지 발견된 광개토대왕비의 원석탁본들은 거의 대부분 1889년 이후의 것으로 확인됐다.

원석탁본은 초기로 거슬러 올라갈수록 종이를 많이 쓰고, 표면이 고르지 못하기 때문에 종이가 찢어지지 않도록 묽은 먹을 사용해 살짝 두드려 탁본한다. 그런데 이번에 발견한 원석탁본은 종이가 162장이다. 48장까지 줄어든 후대 원석탁본은 물론 133장인 사코 탁본보다 많으며 가장 묽은 먹으로 엷게 탁본된 것이다.

가오 교수는 광개토대왕비가 워낙 거대하기 때문에 육안으로 보고 베끼기 힘들다는 점 때문에 묵수곽전본에 앞서는 원석탁본이 존재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이 탁본이 초기 원석탁본일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했다.

이 탁본의 신묘년 관련 기록에선 ‘渡海破’란 글자가 있을 자리가 형태를 알아보기 힘든 상태다.

한편 중국 동북공정의 이론가 중 한사람인 겅톄화(耿鐵華) 퉁화(通化)사범대 교수는 “스자좡(石家莊)과 창춘(長春)에서 여러 가지 다른 시기의 호태왕비(광개토대왕비) 탁본을 발견했다”고 밝혀 광개토대왕비문 최초 탁본 논쟁은 당분간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 ‘渡海破’ 日 통설에 ‘날조-오독’ 반론 ▼

사코 탁본의 ‘倭以辛卯年來渡海破百殘□□新羅以爲臣民’에 대해 국내외 여러 학자는 일본의 통설과 다른 해석을 내놓고 있다. 그 해석은 크게 ‘渡海破’ 등의 글자를 그대로 두고 해석한 것과 이를 다른 글자로 놓고 풀이한 둘로 나뉜다.

▽ 원문을 그대로 인정한 경우

△ 위당 정인보 = 왜가 신묘년에 바다를 건너와 (고구려가) 이를 쳐부수고 백제, □□, 신라를 신민으로 삼았다.

△ 왕젠췬(王健群·중국학자) = 일본 통설과 같음.

△ 박진석 전 연변대 교수 = 신묘년에 왜구가 왔다. (고구려 또는 광개토대왕이) 바다를 건너가 백제를 격파하고 신라를 구원함으로써 <□□를 왕구로 분석> 저들의 신민으로 삼았다.

▽ 원문 글자를 날조·오독했다고 보는 경우

△ 이형구 선문대 교수 = 신묘년 이후<倭를 後로 봄>부터 조공을 바치지 않으므로 <來渡海를 不貢因의 변조로 분석> (광개토대왕이) 백제와 왜구와 신라를 파하여 이를 신민으로 삼았다.

△ 서영수 단국대 교수 = 왜는 신묘년부터 (왕의 세력권에 함부로) 건너오기 시작했다. 그러므로 왕<海를 王으로 분석>은 (왕과 맹세를 어긴) 백제와 (그 동조자인) 왜를 공파<□□를 倭降으로 분석>하고 (왕에 귀의한) 신라는 복속시켜 신민으로 삼았다.

△ 임기중 동국대 명예교수 = 왜가 신묘년에 와 경남 사천<海를 泗로 분석>을 건너서 깨부수었다. (그리고) 백제, □□, 신라를 신민으로 삼았다.

△ 김병기 전북대 교수 = 왜가 신묘년 이래로 백제와 □□, 신라에 대해 조공을 들이기 시작<來渡海를 入貢于의 변조로 분석>하였으므로, (고구려는) 왜도 고구려의 신민으로 삼았다.

(동아일보 / 권재현 기자 2005-11-2)

'最古 광개토왕비 墨本' 학계 주목

고구려연구회가 3일부터 단국대 서울캠퍼스 서관에서 여는 제11회 고구려 국제학술대회에 역사학계의 비상한 관심이 쏠리고 있다.

동북아 고대사의 비밀을 푸는 중요한 유물로 일찌감치 한국과 일본, 중국 학자들의 논쟁이 끊이지 않았던 광개토대왕비문의 최신 연구 성과들이 다수 발표되기 때문이다.

'광개토태왕비의 제문제' '광개토태왕비와 동아시아의 국제질서' 등을 주제로 한 이번 학술대회에서는 특히 쉬젠신(徐建新) 중국사회과학원 세계역사연구소 부교수, 가오밍시(高明士) 대만대 명예교수의 탁본 연구가 논란을 부를 것으로 보인다.

▲ 현존 最古 광개토대왕 묵본 공개

쉬젠신 교수는 학술대회 마지막날인 5일 '고구려 호태왕비 초기 탁본에 관한 연구'라는 발표를 통해 최근 새로 찾아낸 광개토대왕비 묵본(墨本ㆍ비문 글자를 붓으로 모사한 뒤 여백을 먹으로 채운 것)을 사진자료와 함께 국내에 처음 공개한다.

베이징(北京)의 유물경매장에서 확인한 이 '이홍예증반조음본'(李鴻裔贈潘祖蔭本)은 첨부된 4건의 제발(題跋ㆍ탁본의 유래를 적은 글)로 판단할 때 1881년이나 그 이전에 제작된 것으로 볼 수 있다고 쉬 교수는 주장한다.

미리 공개한 발표문에 따르면 이홍예증반조음본은 가로 25㎝, 세로 36㎝ 크기로 재단한 책자 형태이다. 비석 글자는 쪽마다 여섯 자(한 줄에 세 자씩 두 줄)로 134쪽에 걸쳐 편집되었고 여기에 제발이 두 쪽 덧붙었다.

쉬 교수는 "1877년 회인현(현재의 랴오닝성 환런 지역) 담당관으로 임명된 장월이 1880, 81년 비석을 태우고 탁본을 제작했으며, 이 탁본이 몇 사람을 거쳐 1883년에 반조음의 손에 들어간 것"이라며 "현재 광개대왕비문 묵본 중 제일 이른 묵본"이라고 주장했다.

이제까지 묵본과 탁본을 통틀어 가장 오래된 것은 일본군 밀정이던 사카와 가게아키(酒勾景信)가 1883년 회인현에서 얻어 일본 육군참모본부에 건넨 사카와본이었다.

쉬 교수는 또 "새로 발견한 묵본과 사카와본은 둘다 지면이 매우 평평하고 고르므로 같은 범본을 기본으로 하여 탁본을 떴다는 것을 추측할 수 있다"며 "새 묵본은 사카와본에 대한 토론의 근거를 제공할 것"이라고 밝혔다. 유일본이던 사카와본은 입수 경위와 연구 과정 때문에 그 동안 적잖이 변조 시비에 휘말려왔다.

▲ 대만 학자 1883년 이전 초기 원석탁본

하지만 시기가 이르다고 해도 묵본은 원래 비석을 그대로 탁본한 것이 아니라는 한계 때문에 1차 자료 가치가 아무래도 원석탁본보다 떨어진다. 그래서 가오밍시 교수가 대만 중앙연구원 역사언어연구소 촨시녠(傳斯年)도서관에서 4면 자료를 모두 찾아내 소개하는 원석탁본 을본(乙本)의 가치를 눈여겨볼만하다.

가오 교수는 3일 '촨시녠 도서관 소장 호태왕비 원석탁본 을본의 완정한 형태의 발견'이라는 발표에서 "탁본의 용지 수량(162장)이 원석탁본 중에서 가장 많으며 가장 원시적이라는 점으로 미루어 볼 때 작성 연대가 1883년 이전일 가능성이 매우 크다"고 주장한다.

원석 탁본으로 가장 유명한 일본의 미즈다니(水谷)본이나 베이징대 소장본은 1889년께, 중국의 왕씨장본(王氏藏本ㆍ151장)은 1883~1889년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지만 을본은 이보다 "조금 이른 시기에 탁출되었다"는 것이다.

가오 교수는 또 광개토대왕비문 중 논란이 있었던 글자를 을본을 토대로 확인하면서 일본이 임나일본부설의 근거로 삼는 신묘년조 가운데 '倭'냐 '後'냐를 두고 논란이 있던 부분은 '倭'가 맞다고 밝힌다.

▲ 동북공정 이론가 겅톄화도 발표

이번 학술대회에서는 매우 적극적으로 고구려사 왜곡 논리를 개발하고 있는 대표적인 중국 학자인 겅톄화(耿鐵華) 퉁화(通化)사범학원 교수도 참가해 눈길을 끈다.

오랫동안 중국 지안(集安)박물관에 근무하며 지안의 고구려 유적을 직접 발굴하면서 연구 논문을 발표해온 겅 교수는 3일 '중국 호태왕비 연구의 현황과 추세'를 통해 중국의 광개토대왕비 연구 상황을 소개한다.

또 서길수 서경대 교수는 '유럽학계의 광개토태왕비 조사와 연구'를 통해 프랑스인 모리스 쿠랑(1898년)과 에두아르 샤반느(1907년), 러시아인 차를가시노바(1979년) 등 서구 학자들의 연구성과를 설명한다.

이번 학술대회에서는 비문의 금석문적 탐구뿐 아니라 비문 내용을 통해 동아시아 국제 관계를 재조명하는 논문도 여러 편 발표된다.

(한국일보 2005-10-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