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징에 가면 알아서 몸조심 하시라?

베이징 한국인 사회가 계속되는 악재로 공포에 떨고 있다. 이달 들어 여성 직장인 납치 미수사건에 이어 고등학생 살해사건까지 발생하자 교민들은 대책마련을 호소하고 나섰다.

한국인 납치미수 및 살해사건 연달아 발생

지난 10월 8일 밤 11시경. 베이징 코리아타운인 왕징에 거주하는 28세의 김아무개 여성은 과외강습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다가 자동차에 납치될 뻔한 일을 겪었다. 학생들과 헤어져 집 방향으로 걸어가던 김씨를 갑자기 한 남자가 덮치면서 차에 밀어 넣으려 했던 것. 김씨가 급히 중앙선 방향으로 뛰어가자, 용의자들은 김씨의 가방만 챙긴 채 차를 몰고 달아났다.

김씨는 다음날 곧바로 병원을 찾았고 비슷한 사건의 재발을 우려해 영사관 등에 이 사건을 알렸다. 김씨 사건이 발생한 지역은 수만 명의 한국인이 살고 있는 왕징4취(區)와 하도가원(夏都家園)의 중간지역으로 밤늦은 시간까지 많은 한국인들이 왕래하는 곳이다.

사건 발생장소 인근에는 왕징4취라는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있다. 거주자의 절반 이상이 한국인이다. 중국말 한마디 못해도 생활하는데 전혀 지장이 없을 만큼 한국인들에 맞게 정비된 아파트 단지다.

▲ 베이징 왕징 입구. 납치미수 사건은 신호등 근처에서 일어났고, 살인사건은 뒤에 보이는 건물에서 일어났다
ⓒ2005 조창완
그런데 10여일 뒤, 이 아파트 419동에서 또다시 끔찍한 사건이 벌어졌다. 김씨 납치미수사건이 벌어진 곳에서 불과 50미터 거리밖에 안 되는 곳이다.

20일 오후 8시40분 경, 조기유학생 김아무개군(16)이 자신의 수학선생인 조선족 과외교사가 휘두른 흉기에 찔렸다. 이 장면을 목격한 김군의 동생이 급히 경비원에게 이를 신고했지만 경비원들이 경찰과 함께 현장에 도착했을 때 김군은 이미 숨진 상태였다. 아버지를 한국에 두고 어머니와 아이 둘이 조기유학을 온 가정이었기에 그 충격이 더 컸다.

한인들 공황 상태... 조선족 성토 '빗발'

베이징에는 왕징을 중심으로 적게는 15만에서 많게는 30만 명 정도의 한국인이 살고 있는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그 중 왕징은 90년대 후반부터 중국정부가 의도적으로 개발한 코리아타운으로 일종의 특구와 같은 곳이다. 이곳에는 경제적으로 여유 있는 중국인들과 한국인들이 주로 살고 있다.

하지만 연달아 악재가 발생하자 왕징은 물론이고 대학생들이 주로 거주하는 우다코우는 공황상태에 빠졌다. 평소 관리에 별 신경을 쓰지 않던 왕징의 아파트들도 인력거의 내부 출입을 막는 등 출입자 통제를 강화하고 있다. 조선족 동포들이 상권을 잡고 있는 인근 거리의 양고기, 꼬치구이 가게에도 중국인들만 가끔씩 들를 뿐, 한국인들은 거의 눈에 띄지 않는다. 특히 밤 시간에 대한 공포가 극대화되면서 조기 귀가 현상이 일어나 평소 늦은 시간까지 붐비던 호프집들도 한산해졌다.

▲ 살인사건 3일 전에 유학생 커뮤니티에 올라온 한탄의 글. '아무래도 누가 하나 죽어야 영사관이 정신 차리려나 봅니다'라는 이 글이 쓰여진 뒤 3일만인 10월 20일, 김모군이 살해당했다.
ⓒ2005 조창완
유학생 커뮤니티인 '북경유학생모임'에는 사망한 김군을 추모하는 사이버 조문소가 만들어졌으며, 최근 사건들에 대한 다양한 의견이 올라오고 있다. 특히 이번 사건의 용의자가 조선족으로 밝혀지면서 조선족에 대한 성토는 물론, 영사관 등 한국교포 관련기관의 무능을 질타하는 글들이 많이 눈에 띈다.

교민 안전망 '총체적 부실'

중국에서는 외국인에 대한 범죄를 가중처벌 하기 때문에 그동안 한국인들을 상대로 한 범죄는 거의 없었다. 그런데 최근에 왜 이런 범죄가 늘어난 것일까.

현지에서는 최근 중국의 급속한 고도성장으로 물신풍조가 팽배해지면서 상대적으로 현금을 많이 갖고 다니는 한국인들이 범행대상이 된 것으로 파악한다. 또 왕징의 경우, 한국인 사회를 배경으로 살아가는 이들이 많지만 그들과 한국인간에는 일정한 거리가 있어서 순식간에 가해자로 돌변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조선족에 의한 김군 살해사건에서 보듯 조선족 사회의 붕괴도 재중한인사회를 불안하게 하는 요소 중 하나다. 현재 고향을 떠나서 베이징 등 대도시에서 살아가는 청년층의 상당수는 92년 한중 수교 이후 부모들이 한국으로 간 경우가 많다. 때문에 애지중지하는 조부모의 밑에서 자라면서 씀씀이가 헤퍼져 도박의 유혹에 빠진 조선족들이 상당수에 이른다. 김군 살인사건의 용의자도 도박 빚을 갚기 위해 범행을 저지른 것으로 알려졌다.

또한 누군가 공격이나 피해를 받아도 별 도움을 주지 않는 중국인들의 무관심과 책임회피도 지적되고 있다. 실제 납치미수사건 때도 주변에 경비원을 포함한 중국인들이 있었지만 아무도 도움을 주지 않았고, 김군 살인사건 때도 경비원이 급히 올라가 조치를 취했다면 김군이 사망에 이르지 않았을 수도 있었는데 경비원들은 공안이 올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을 뿐이다. 이를 두고 교민들은 "경비원들이 공안이 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현장에 가는 바람이 범인도 놓치고 김군도 사망한 것"이라며 분통을 터뜨렸다.

하지만 가장 지탄을 받는 것은 대사관이나 영사관의 소홀한 교민안전 관리다. 납치미수 사건 피해자인 김모씨는 "다음날 영사관에 신고했을 때 내가 들을 수 있었던 건 주변 파출소에 신고하라는 말 뿐이었다"며 "내가 중국어에 익숙하지 않다고 했지만 영사관은 친구나 통역을 구해서 가라고만 했다"고 분노했다.

올 초에 발생한 일명 '비전사건'은 영사관의 교민관리가 어느 정도 허술한지 보여준다. 비전사건은 '비전'이라는 식당에서 조선족 종업원들에게 고기가 탄 것에 대해 항의하다 집단폭행 당한 한 교민이 영사관에 도움을 요청했다가 영사관의 미온적 태도에 반발해 국적포기를 선언한 사건이다.

또 지난해 3월에는 중국을 오가며 사업을 해온 ㅅ모씨(62·인천)가 선양(瀋陽) 주재 총영사관 민원실(13층)에서 창문을 열고 투신, 사망한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당시 ㅅ씨는 수차례의 사업실패 끝에 어렵사리 마련한 회생자금 5000달러를 들고 다롄(大連) 항으로 가다가 돈을 모두 잃어버렸다. ㅅ씨는 영사관측에 한국행 배편을 무료로 이용할 수 있게 도와달라고 요청했으나 영사관이 부정적으로 답변한 것에 항의해 투신자살한 것으로 알려졌다.

재중 교민사회는 뭐하나

베이징에는 주중한국대사관과 총영사관은 물론 한국인회, 한국 상회, 북경한국투자기업협의회 등 각종 교민관련 단체가 몰려있다. 하지만 교민안전에 대한 체계적 관리는 갖춰지지 않은 상태다.

10월 8일 납치미수사건 발생시 중국어가 부족한 피해자에게 "직접 공안국에 신고하라"고 해 많은 비판을 받았던 영사관의 사건담당 영사는 "사안에 따라 직접 신고하기도 하는데 보통은 신고 후에 처리가 안 되거나 불합리한 결과로 민원이 제기될 경우에만 사건을 처리한다"고 말했다.

▲ 지난 해 열린 재중한인체육대회. 올해는 준비 과정의 실수로 열리지 못했다.
ⓒ2005 조창완
한국인회 등 교민단체 활동이 미미하다는 것도 문제로 지적되고 있다. 실례로 재중한국인회(http://www.koreanc.cn)가 지난 15, 16일 이틀간 개최하려던 재중한인체육대회가 갑자기 취소됐는데 중국 공안의 허가를 받아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재중한국인회 관계자는 "재중한국인회가 정식 등록단체가 아니기 때문에 한국 관련 행사를 치르는 데 적지 않은 문제가 있는 게 사실"이라며 "이번에도 최종 순간에 안전이 문제되어 이런 일이 벌어졌다"고 말했다.

현재 중국 베이징내의 주재원이나 유학생 중 합법적인 거주 비자를 받고 체류하는 사람은 절반 수준에도 못 미치는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자영업자나 유학생활을 마친 이들 대부분이 임시 체류 비자를 연장하면서 살아가기 때문에 당연히 신분이 불안정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현재 베이징에는 이들의 교민복리를 보장하고 위급할 때 안전한 보호막이 되어줄 수 있는 단체를 기대하기 힘든 상황이다.


기자소개 : 조창완 기자는 미디어오늘에서 기자활동을 시작했으며, 99년 결혼과 더불어 아내가 공부하던 중국으로 건너와 지금은 3살 된 용우를 두었다. 글을 쓰고 방송을 만드는데 열중하고 있으며, 한중교류의 다리가 될 여행사(www.aljatour.com)를 만들어 분전하고 있다. <알짜배기 세계여행 중국> <중국도시기행> 등을 출간했다.

(오마이뉴스 / 조창완 기자 2005-10-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