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벼락 높을수록 사회적 책임 크다

◆ 세계의 부자동네 (上) ◆

찰리 채플린, 마이클 더글러스 등 내로라하는 역대 미국 영화배우들이 줄줄이 거주해온 로스앤젤레스 북서쪽의 부자동네 '베벌리힐스'. 멀찍이 베벌리힐스가 보일 만한 곳에 이르면 '베벌리힐스 안내지도'를 파는 상점이 먼저 눈에 들어 온다. 영화배우들의 저택을 골목골목마다 표시한 지도로 이곳을 찾는 관광객들에게 인기만점이다.

샌프란시스코 남쪽으로 두 시간 거리의 몬테레이에 있는 고급 주택가를 낀 세 븐틴마일스 도로는 관광객들에게 아예 통행료를 받는다. 관광객들은 베벌리힐스, 몬테레이와 같이 소문난 부자동네들을 둘러보며 감탄을 아끼지 않는다. 관광객들을 부럽게 하는 것은 먼저 아름답고 웅장하게 꾸며놓은 집들이요, 그 다음으로는 그런 집들을 관광지 삼아 둘러볼 수 있도록 하는 경색되지 않은 사회 분위기이다.

◆ 미국 부자들도 은둔을 선호하기는 마찬가지=화려한 나무담장과 정원수로 뒤덮인 베벌리힐스를 둘러보며 관광객들은 감탄사를 연발하지만 사실 미국에서 부자동네를 열거하다 보면 베벌리힐스나 몬테레이는 부자촌에 겨우 턱걸이하는 수준이다.

올해 4월 미국 광고전문사이트인 애드에이지닷컴(AdAge.com)이 미국 50대 부자 촌을 분석했을 때 베벌리힐스는 부자동네 50곳 중 35위에 오르는 데 그쳤다. 특히 평균소득에 있어서는 50대 부촌 중 겨우 49위에 올랐다.

미국에서 가장 잘사는 1위 부자동네로는 샌프란시스코의 애서턴(Atherton)이 꼽혔고 50대 부자동네 중 24곳은 뉴욕, 5곳은 보스턴에 몰려 있었다.

베벌리힐스나 몬테레이를 둘러보며 "미국의 부자동네는 관광지처럼 개방된 곳" 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 미국에서도 진짜 부자동네는 소문나지 않은 곳에 조용히 가려있음을 의미한다.

미국 남부 대표적인 부자동네 가운데 하나인 스타아일랜드도 농구선수 샤킬 오닐이 2300만달러짜리 주택을 구입해 주목을 받았으나 일반 관광객은 둘러볼 엄두조차 낼 수 없는 곳이다. 마이애미 앞바다 비스케이만에 인공섬을 만들어 부자동네로 탈바꿈시킨 이곳 스타아일랜드는 다리 하나로만 육지와 연결돼 있으며 외부인 출입이 제한된다.

비스케이만을 운행하는 유람선을 타면 멀리서 스타아일랜드 별장들에 관한 설명을 들을 수 있으나 그리스ㆍ로마 신화를 듣는 것과 다름없을 정도로 일반인 들에겐 별세계일 뿐이다.

미국 동부의 어지간한 부자동네들도 일반인의 통행을 직접적으로 차단하지는 않는다고 하더라도 일반인이 접근할 만한 틈이 없다. 쇼핑시설도 놀이시설도 없이 높은 담장들만 이어지는 부자들의 동네를 일반 서민들이 굳이 찾아나설 만한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관광지로 소문나 있는 베벌리힐스나 몬테레이에서도 막상 동네에 들어서서는 높은 정원수와 담장에 가로막혀 마당을 구경하기는 고사하고 길거리에 주차할 엄두조차 내기 힘든 게 바로 미국 부자동네의 분위기이다.

◆ 빈부격차 심할수록 높아지는 부자동네 담벼락=부자들이 경외의 대상으로 평가되는 대표적인 자본주의 국가 미국에서 부자동네들이 은둔 속에 감춰져 있다면 빈부격차가 심한 아시아ㆍ중남미ㆍ동유럽ㆍ아프리카권 국가들의 부자동네 담벼락은 말할 나위도 없다.

남아공화국 요하네스버그 근교에 여러 채의 단독주택들이 밀집된 타운하우스 형태의 부자동네인 '데인펀골프촌'은 아예 방범용 전기펜스로 울타리를 둘러쳐 놓고 있다.

순찰대원들이 24시간 방범순찰을 도는 것은 기본이다.

멕시코 인도네시아 브라질 이집트 등 대다수 개발도상국가에서는 신흥 부자동네가 고급아파트 단지로 하늘 높이 건설되고 있는 추세다.

인도네시아 부자들이 1998년 경제위기 때 시민폭동으로 곤욕을 치른 후 고급아파트를 선호하는 현상이 부쩍 심화됐는데 이들 국가에서 고급아파트 선호현상이 전반적으로 확산되고 있는 것도 비슷한 이유에서다.

러시아 우즈베키스탄 등 옛소련권 국가들에서는 당간부들이 주로 거주하던 단독주택단지에 신흥 부자들이 합류하면서 부자동네가 여전히 단독주택단지 모습을 띠고 있다.

모스크바 외곽순환도로 인근에 위치한 루블료브카, 타슈켄트 시내중심가 등이 바로 이런 지역에 해당한다. 이들 지역 대저택들도 예외없이 전문 경비인력의 순찰지원을 받고 있고 타슈켄트 중심부 저택들은 높이 3m에 이르는 담장을 둘러쳐 아예 집안을 둘러볼 엄두조차 내지 못하게 하고 있다.

◆ 부자의 사회적 책임=인도에서는 "교통사고를 내면 우선 도망가라"는 조언을 자주 듣게 된다.

현장에서 사태를 수습하려다가 자칫 군중에게 집단폭행을 당할 수도 있기 때문 인데 경찰마저도 때로는 "일단 현장을 벗어나고 수습은 나중에 하라"고 조언할 정도라고 한다. 이는 빈부격차가 극심한 인도에서 부유층에 대한 일반 서민들의 인식이 얼마나 나쁜지를 대변해주는 사례라 할 수 있다.

반면 미국 유럽 일본 등 선진국에서 부자와 서민 사이의 갈등이 부각되는 일은 그다지 많지 않다. 이는 사회적 책무를 다하는 부자들의 자세와 무관하지 않다 .

부시 미국 대통령은 감세정책의 일환으로 상속세 폐지를 단계적으로 추진해왔다. 부자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을 것처럼 보이는 이 세제개편안은 그러나 정작 빌 게이츠, 조지 소로스, 워런 버핏, 록펠러 가문 등 내로라 하는 부자들의 반발에 부딪혔다. 이들은 뉴욕타임스에 광고까지 내가며 "상속세가 폐지되면 기부문화가 타격을 받고 빈부격차가 더 확대되는 등 부작용이 크게 나타날 것" 이라며 반발했다. 워런 버핏은 올해 4월 워싱턴에서 열린 '책임지는 부자'라는 이름의 모임에서 "미국에서 가장 잘사는 1만3000가구의 소득이 못사는 2000만 가구의 소득과 맞먹는 현실에서 부시 대통령이 추진하는 상속세 폐지법안은 얼토당토 않은 것"이라고 일갈했다.

미국 서부 네브래스카주 작은 도시 오마하에 45년째 살고 있는 '세계 제2의 부자' 워런 버핏은 지난 2003년 "내가 거주하는 50만달러짜리 집의 재산세는 1만 4401달러"라고 소개한 적이 있다. 물론 미국의 재산세율은 주별로 1~3%로 차별화되고 소득공제 등의 혜택 때문에 일률적으로 비교하기도 곤란하다.

그러나 미국 제일 부자동네로 꼽히는 샌프란시스코 애서턴에 위치한 래리 엘리슨 오라클 사장의 저택은 침실 7개, 일본식 정원, 테니스코트, 분수 등을 포함해 공식가격이 2500만달러(약 250억원)에 달한다. 캘리포니아주의 재산세가 다른 주에 비해 낮은 점을 감안해도 이 정도 저택이면 연간 수억 원대 재산세를 납부하는 것이 당연하게 받아들여진다. 애서턴 지역의 지난해 평균 주택가격은 250만달러(약 25억원)였다.

시가 5억원짜리 아파트를 보유하고서도 연간 50만원 안팎의 재산세만 납부하는 한국과 비교하면 부자동네에 대한 인식이 다를 수밖에 없는 구조이다.

[기획취재팀]

富村, 누구나 살고싶은 '꿈의 땅'

◆ 세계의 부자동네 / (1) 높은 세금이 부자동네 만든다 ◆

미국 베벌리힐스, 일본 덴엔초후(田園調布)와 같은 유명한 '부자동네'가 국내에서도 부상할 것인가.

정부가 보유세 인상, 다주택 소유자 누진과세 등을 내용으로 하는 부동산 세제 개편안을 내놓은 뒤 국내에서도 부자동네가 보다 뚜렷하게 부각될 것이라는 분석이 제기되고 있다.

일본에서도 지난 80년대 말 이후 부동산값 폭등과 함께 눈덩이처럼 불어난 부동산 보유세ㆍ상속세 부담이 덴엔초후 같은 곳을 보다 뚜렷한 부자동네로 거듭나게 하는 계기가 됐다.

재산세ㆍ상속세를 감당하지 못한 주민들이 하나둘 마을을 떠나기 시작했고 덴엔초후는 그야말로 '진정한 부자'들만이 거주할 수 있는 부자동네로 거듭나게 된 것이다.

나카소네 야스히로 전 총리, 이시하라 신타로 도쿄도지사 등의 거주지로도 잘 알려진 덴엔초후는 이제 일본인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살아보고 싶어하는 '재패 니즈 드림(Japanese Dream)'의 상징이 되고 있다.

물론 국내에서도 정치인ㆍ문화예술인과 일부 재벌 총수가 다수 몰려사는 평창동 구기동 이태원동 일대는 전통적인 부촌으로 인식되고 있으며 최근에는 압구정동 대치동 잠원동 등 서울 강남지역이 새로운 부자동네로 떠올랐다.

그러나 이들 동네는 도시화 진행 초기부터 거주해온 주민과 새로 이주해온 부유층 주민들이 자연스럽게 뒤섞여 사는 사례가 대부분이고 부자들만 배타적으로 동네를 형성한 사례는 아직 찾아보기 힘들다. 고소득층과 저소득층 사이의 소득ㆍ자산 격차가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그리 심각한 수준으로 확대되지 않았던 데다 부동산 보유에 따른 세금 부담도 그리 크지 않았기 때문에 유지될 수 있었던 현상이다.

이제 서울 강남지역을 중심으로 부동산값이 크게 오른 상태에서 보유세금이 덩달아 높아지면 사정은 달라지게 된다.

부동산 보유세금을 부담할 만한 소득이 없는 가구는 자연스럽게 부자동네에서 밀려날 수밖에 없다. 미국에서도 부자동네로 거론되는 주요 마을에서는 연간 부동산 보유세금만 5만달러(약 5000만원)를 웃도는 대저택이 수두룩하다. 그 결과 주택 유지보수비용, 소비수준 등을 감안할 때 연봉 100만달러(약 10억원) 이하 소득계층은 견뎌내기 힘든 동네들도 적지 않다.

부자들만 오밀조밀 모여사는 동네는 사회 내부의 빈부격차를 뚜렷이 보여준다는 점에서 부정적 측면도 없지 않다.

그러나 부자와 저소득층이 서로 지역적인 거리를 두면 한데 어울려 살던 때에 비해 오히려 빈부갈등을 줄일 수도 있다. 특히 "부자동네에서는 저소득층이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의 세금을 납부한다"는 인식이 정착되면 부자들에게 경의를 표시하는 사회분위기가 정착될 수도 있다. 즉 뚜렷한 부자동네의 차별화는 '빈부격차'의 상징적 산물이 될 수도 있지만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부자들'의 모습을 대변하는 상징물일 수도 있다는 분석이다.

[기획취재팀=최경선차장ㆍ팀장 / 뉴욕 = 전병준 기자 / 도쿄 = 김대영 특파원]

(매일경제 2005-10-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