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관대첩비와 광개토대왕비

북관대첩비가 정확히 100년 만에 되돌아왔다. 그동안 일제 전범들을 제사하는 야스쿠니 신사에 방치되어 있었으니 반환의 의미가 더 크다.

북관대첩비를 밀반출하던 비슷한 시기, 일제는 중국 집안(集安)의 광개토대왕비도 반출을 시도했다. 고종 황제가 쫓겨나기 두 달 전인 1907년 5월 일본 군부는 오자와(小澤德平) 대좌를 만주로 보냈으나, 집안현(集安縣) 지사 우광궈(吳光國)가 거부하는 바람에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때 밀반출되었다면 비문은 일제 침략을 합리화하는 내용으로 변조되었을 것이니 생각하면 아찔하다. 광개토대왕비는 일본군 참모본부에서 파견한 첩보요원 사쿠오(酒勾景信) 중위가 1880년에 발견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보다 훨씬 전의 우리나라 전적(典籍)들에도 이에 대한 기록들이 다수 등장한다.

그러나 우리 선조들은 만주 벌판에 우뚝 서 있는 이 비가 광개토대왕비라는 사실을 몰랐다.

세종 29년(1447) 완성된 ‘용비어천가’ 39편의 주해(註解)는 “(대금황제성의)북쪽으로 7리쯤에 비석이 있다. 또 그 북쪽에는 돌무덤(石陵) 2기가 있다”고 기록했다. ‘동국여지승람’의 강계도호부 조에도 “세상에서 전해오는 말로는 금나라 황제묘라 하는데 돌을 갈아 만들었다”라고 적었다. 고구려 국내성을 금나라 황제성으로, 비석을 금나라 황제비로 잘못 알고 있었던 것이다. ‘지봉유설’을 쓴 이수광 같은 문인들도 이 비에 대해 언급했으나 모두 마찬가지 인식이었다.

이 비가 광개토대왕비라는 사실을 정확히 파악한 최초의 인물이 일제 참모본부 소속의 무인(武人) 사쿠오였다는 사실은 문(文)의 나라 조선의 선비들을 무색케 한다. 그는 이 비문을 이용하면 우리의 과거 역사 일부를 지배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일제는 과거의 역사를 지배하는 자가 현실의 인식을 지배한다는 사실을 알고 100년 전 비의 반출을 시도했던 것이다. 그로부터 100여년 후인 지금 광개토대왕이 중국인으로 변해가는 현실은 우리가 과연 우리의 과거 역사를 지배하고 있는가 하는 질문을 던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덕일·역사평론가>

(조선일보 2005-10-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