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단에 막혀 에돌아 가보니 중화제국 야망이

꼭 10년만의 해외나들이다. 마냥 축하라도 하듯, 가랑비 내리는 가운데 이륙한 비행기는 곧장 기수를 서북쪽으로 돌린 뒤 황해 창공을 가로지르며 베이징을 향한다. 며칠 간 밀렸던 피로감이 몰려와 온몸이 호졸곤해진다. 눈을 감았으나 졸음 대신 그 시절 일들이 주마등처럼 뇌리를 스쳐간다.

베이징, 그곳은 지금 찾아가는 실크로드의 꿈을 키워준 고장이다. 50여 년 전 그 곳에서의 대학시절, 20세기 초 영국 탐험가 스타인이 남긴 내륙아시아 탐험기를 읽은 것이 그 길과의 첫 만남이었다. 그때 실크로드는 그저 모험과 신비의 길로 젊은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러나 문명교류에 눈 뜨기 시작하면서 그 길은 문명을 소통시키는 창조와 지혜의 길로 자리잡기 시작했다. 남해의 뱃길로 유학 길에 올랐고, 50년대 중국 외교부 근무시절 공무로 신장까지의 오아시스 육로와 모스크바까지의 시베리아 초원로를 몇 차례 오가다보니 실크로드의 꿈은 자꾸만 부풀어갔다.

베이징은 기원전부터 육로를 한반도에 이어주는 고리였다

베이징은 삼각형 모양인 화베이 평야의 정점에 있다. 역사적으로 2000여 년 전부터 중국 동북부 국경지대의 중요한 군사·교역 중심지이자 오아시스 육로의 요지였다. 북은 몽골을 비롯한 북방 유목민족들, 동쪽은 한반도, 서쪽은 중앙아시아, 남쪽은 중원의 여러 지방들을 연결하는 십자로 구실을 해왔다. 특히 13세기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700여 년 동안 여러 제국의 수도가 되어 동서문명의 융합도시로도 발달해 왔다. 13세기 중엽 몽골제국이 ‘대도(大都)’란 이름의 수도를 건설할 때는 아랍인이 도시설계를 총지휘하도록 하여 내성의 4각형 성벽과 12개 문은 중국 전통 양식을 쓰고, 실내와 주거공간은 몽골· 중앙아시아 양식대로 지었다. 명대 이후엔 서구인들이 들어와 장춘원(長春園) 같은 바로크식 궁정 건축물들을 다수 남겨놓았다.

베이징은 일찍부터 오아시스 육로를 한반도에 이어주는 고리 구실도 해왔다. 기원전 전국시대 베이징 근방의 ‘계’란 곳에 도읍한 연나라는 그 길의 동쪽 끝에 해당하는 ‘명도전로(明刀錢路)’를 통해 한반도와 교역했다. 연나라 화폐 명도전이 계로부터 요동반도를 거쳐 한반도에 이르는 여러 지역에서 출토되었는데, 명도전로는 그 출토지들을 연결한 최초의 한·중 육로가 된다. 신라시대에는 경주에서 출발한 오아시스 육로가 한주(서울)와 평양을 거쳐 유주(幽州:당나라 때 베이징 이름)에 이르러 낙양으로 남하한 뒤 서행해 장안을 지나갔다. 여러 연행록에서 보다시피, 고려·조선시대에도 수많은 사신, 학자들이 그 길을 따라 베이징에 드나들면서 중국과의 교류는 물론, 전래된 서양문물까지 받아들였다. 선조들이 발이 닳도록 오간 그 길을 지금은 분단 장벽에 가로막혀 가지 못한다. 길 아닌 길을 에돌아 가는 셈이니 무슨 옛길 답사냐 싶다.

이윽고 희읍스름한 대지가 시야에 들어온다. 다들 중국이 하루가 다르게 변한다고 한다. 그렇다면 10년 전 그 모습과는 어떻게 다를까. 더욱이 50년 전 그 시절 우리가 바라고 그리던 그 모습과는…. 종잡을 수 없는 상념과 의문들이 비행기가 내려앉을 때까지 꼬리를 문다.

50년대 대학시절 탐험기에 사로잡혀

첫 답사지는 교통이 사통팔달했다는 데서 유래한 베이징 서북쪽 빠다링(八達嶺)의 만리장성이다. 달에서 보이는 지구상의 유일한 인공건조물이라는 장성은 600년 전 명나라 때 쌓았다. 포장 도로를 45분쯤 달려 장성 언저리에 도착했다. 빠다링 중턱에 수북히 우거진 숲을 바라보니 모래바람 맞으며 부근에 묘목을 심던 추억이 떠오른다. 지금은 그 숲이 무색하게 사막이 족히 100미터는 내려앉아 길 양 쪽에 방사림대를 겹겹이 늘어 놓았다. 성문 어귀부터 사람들로 붐빈다. 정작 장성에 오르니 발 디딜 틈이 없다. 그날따라 짙은 안개가 낮게 깔려 30미터 안팎도 분간하기 힘들다. 결국 몇십 미터밖에 안되는 정상 망루에 오르는 일은 포기하고 말았다. 현장 해설원 말을 들으니, 이날을 포함해 평시 약 4만명이, 명절 때는 10여 만명이 찾아온다고 한다. 이를테면 ‘장성붐’이 일고 있는 셈이다. 15년 전 이맘때 찾아왔을 적과는 너무나 판이한 광경이다.

연나라 화폐 명도전 요동 거쳐 우리땅에

지금 중국은 왜 장성인가 ? 장성 들머리 왼쪽 벽에는 ‘불도장성비호한(不到長城非好漢)’, 즉 “장성에 와보지 않은 자, 사내 대장부가 아니다”란 뜻의 대문짝 만한 글씨판이 붙어있다. 어떤 이는 이 말을 중국 속담으로 아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고 정치가 마오쩌둥의 ‘어록’이다. 일꾼들이 성벽을 쌓다가 죽으면 그 자리에 묻혔으므로 세계에서 가장 긴 무덤이라는 장성은 그 옛적엔 어마어마한 존재였겠지만, 지금은 한낱 유물로 남아있을 뿐이다. 별로 높지 않고 가파르지도 않아 오르기 어렵지않고, 또 현대 교통수단으로는 와보기에도 별 문제가 없다. 그럼에도 마오쩌둥이 ’장성에 와보는 것‘을 강조한 것은 무슨 까닭일까. 비상을 꿈꾸는 이 시대 중국인에게 장성이 안겨주는 호기(豪氣)와 자부의 상징성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관람객들이 즐겨 사입는 티셔츠에는 “나는 장성에 올랐다”라는 호방한 글자가 찍혀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요컨대, 그런 호기와 자부 때문에 지금 중국은 장성이 필요하고, 사람들은 그 체험 때문에 찾아오는 셈이다.

장성에서 받은 충격의 여운이 채 가시기도 전에 시내 텐안먼 광장 옆의 역사박물관을 찾았다. ‘진귀품전시회’를 돌아봤으나 교류 관련유물은 별로 없었다. 대충 둘러보고 나오는데, 마침 정화(鄭和)의 출항 600주년을 기념하는 특별전시회가 눈에 번쩍 띄었다. 실크로드에 관한 얘기치고는 더 없는 호재다. 97년 미국 <라이프>지는 지난 1000년을 만든 세계인 100명을 순위별로 골랐는데, 11명밖에 안되는 동양인 가운데 내로라하는 위인들을 다 젖히고 단연 앞 순위(14위)에 오른 사람은 뜻밖에도 정화였다. 7차에 걸친 그의 ‘하서양(下西洋)’, 즉 서양으로 가는 항해가 선정이유였다.

연 1억5천만명 “나는 장성에 올랐다”

그는 28년 간(1405~1433) 약 19만㎞의 바닷길을 누비면서 30여 개 나라를 찾아갔다. 실크로드 해로사에서 일찍이 없었던 장거다. 그의 ‘하서양’은 15세기 말 이른바 ‘신대륙’을 ‘발견’했다는 콜럼버스나 ‘인도항로’를 개척했다는 바스코다가마보다 시간적으로 약 90년 앞설 뿐 아니라, 선단 규모나 선박의 구조면에서도 월등하다. 정화의 보선이 길이가 138m인데, 다 가마의 기함은 2에 불과하고, 그 적재량은 1,500톤 대 120톤이며, 승선인원의 경우는 2만7000명 대 160명이니, 실로 비교가 안된다. 정화 선단이 아메리카 대륙에까지 이르렀다는 설도 있다.

7월 11일은 정화가 첫 배를 띄운 지 600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중국 정부는 이날을 공식 기념일로 정하고 거국적인 기념행사를 치렀다. 그 행사의 하나로 전시회가 열린 것이다. 전시장에는 보선 모형과 배의 잔해를 비롯한 유물 190여 점이 선보이는 중이었다. 왜 이 시점에 정화가 뜨는 걸까? 그것은 ‘세계무대에서 국력을 과시하고 있는 중국 외교노선의 변화와 무관하지 않다’는 지적이다. ‘하서양’의 목적 중 하나가 이민족(몽골)의 압제 아래 추락한 중화제국의 명예를 되돌리고 국위를 과시하려는 것이었으니, 현 중국 외교노선과 그 속내는 피장파장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 귀감으로 600년 전의 정화가 필요한 것이다.

박물관 정문을 나서니 텐안먼 광장 저 쪽에 웅장한 인민대회당 건물이 한눈에 안겨왔다. 세월의 풍상에 찌들어서인지 이제는 고색이 감돈다. 들머리 정면에 늘어선 12주의 대리석 기둥만이 여전히 빛을 뿌리고 서있다. 1만 4천명을 수용할 수 있는 대회의장을 비롯해 고궁 면적과 맞먹는 연건평 17여만㎡의 이 덩치 큰 건물은 공화국 창건 10주년을 기념해 1959년 완공됐다. 당시 중국 외교부에서 일하던 필자에게 기억되는 것은 그 때 화려한 건물 준공식 장면보다 낮에는 근무하고, 밤이면 땀 훔치며 나무동발을 타고 벽돌이며 시멘트 따위를 지어 올리던 공사장 일이다. 그 즈음 중국은 ‘대약진’이니, ‘인민공사’니, ‘총노선’이니 하면서 유례없는 기염을 토하고 있었다. 우리는 밤이면 손수레 끌고 시내를 돌며 파철을 주워 직장 뜨락의 용광로에서 쇳물을 뽑기도 했다. 200년 걸쳐 달성한 영국의 강철생산량을 30년 안에 앞지른다는 야심 찬 목표를 내걸고 전 인민이 쇳물 뽑기에 나섰던 것이다. 무모한 과욕으로 훗날 대가를 톡톡히 치렀지만, 그때의 분발심만은 새 중국의 가상스러운 기상으로 추억에 남기고 싶다.

‘하서양’ 600돌…왜 지금 ‘정화’ 가 뜨나

어느덧 떠날 채비를 하는데, 조선족 안내원이 불쑥 하얀 종이에 정성껏 싼 물건을 건넨다. 풀어보니 1998년에 만든 베이징대학 창립100주년 기념배지다. 일정이 빡빡해 모교에 들릴 수 없는 서운함을 달래주려고 손수 구해왔다는 것이다. 너무나 고마웠다. 나는 이 대학 56회 졸업생이다. 그 시절 실크로드의 꿈을 키워준 전당을 뒤로 하고 그 길에 들어서자니 왠지 발걸음이 무겁다. ‘짜이잰(다시 만납시다), 베이징!’ 한마디를 남기고 시안으로 길을 떠났다.

<정수일 / 문명사연구가>

고조선 화페 교역로에서 조선 연행로까지

한반도와 육로 실크로드

한반도로 뻗은 육로 실크로드는 고조선 때부터 있었다고 학계는 보고 있다. 고대 교역 화폐였던 연나라 명도전의 출토지가 계속 동진해 한반도 남쪽까지 확산되고 있기 때문이다.

정수일씨가 명도전로로 명명한 이 길은 연나라 도읍이었던 계(베이징 서남쪽 대흥현)에서 승덕-요동반도 연안을 거쳐 압록강 중류의 통구, 동황성(평안도 강계)-영변-영원-평양으로 이어졌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 길은 삼국시대에 중국 동북 지역을 장악했던 고구려 강역으로 대부분 들어간다.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는 고구려 강역에서 베이징-중국 동북지방 사이를 잇는 영주(조양)까지 이어졌던 남북 갈래의 전쟁로도 언급하고 있다. 두 길 모두 평양에서 시작해 동황성 지나 압록강을 건넌 뒤 통구에서 갈라져 북도는 내륙의 심양-영주로, 남도는 요동반도를 지나 영주에 이른다. 여기서 오아시스로가 서남쪽으로 틀어져 유주(옛 베이징)와 옛 도읍 장안으로 내닫는 것이다.

한반도 실크로드는 조선 시대엔 연행로로 불리웠다. 사신들이 청나라 수도 연경(베이징)을 다녀오는 길이라 하여 그렇게 이름지은 것이다. 명나라 때 조천(朝天)이라고 높여 불렀던 이 길은 중국·조선의 국경 출입이 엄격히 통제되었던 상황에서 소중한 문화교류의 물꼬였다. 사신들은 한양에서 평양을 거쳐 의주에 도착한 뒤 압록강을 넘어 청나라 관문인 책문으로 들어갔다. 여기서 봉황성, 요양, 광녕, 영변위, 산해관, 통주를 거쳐 베이징에 도착했다. 조선의 지식인들은 이 길을 통해 연경의 선진 문물을 답사하고 두툼한 서화와 책 뭉치들을 꾸려 돌아오곤 했다. 18세기 실학자 박지원의 저 유명한 <열하일기>도 사절단원으로 이 연행로를 걸으며 쓴 비공식 일지라고 할 수 있다.

노형석 기자

(한겨레신문 2005-1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