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고구려… 1300년전 唐나라에 끌려간 망국의 원혼들

연개소문 장남·후손 무덤 찾았다
뤄양(洛陽) 들판에 나란히… 吉林 역사학誌 발표
姓도 '천(泉)'으로 바꿔… 唐고조 이름과 같은 탓
시안(西安)서 찾은 보장王 무덤은 개발로 없어져

연개소문(淵蓋蘇文·?~665년)의 아들 등 직계 후손의 무덤이 중국 뤄양(洛陽)에서 1300여년 만에 확인됐다. 연개소문의 맏아들로 고구려 멸망 직전 막리지(莫離支·왕 다음의 최고실권자)를 지낸 천남생(泉男生·634~679)과 그의 동생(연개소문의 셋째 아들) 천남산(泉男産·639~701), 천남생의 둘째 아들 헌성(650~692), 연개소문의 고손자 비(毖·708~729)의 무덤이다. 고구려 마지막 왕인 보장왕(寶臧王·재위 642~668)의 무덤도 시안(西安)에서 위치를 찾았지만 이미 개발로 인해 없어진 것으로 확인됐다.

이 같은 사실은 중국 지린(吉林)성 사회과학원이 발행하는 고고·역사학 계간지 ‘둥베이스디(東北史地)’ 최근호에서 밝혀졌다. ‘둥베이스디’는 “올 4~6월 조사·발굴을 벌인 결과, 이들의 무덤을 뤄양시 링터우춘 등에서 찾았다”고 발표했다.

천남생과 천헌성, 천비의 무덤은 링터우춘에 나란히 있었고 천남산의 묘는 이곳으로부터 서남쪽으로 4㎞ 정도 떨어진 곳에 있었다고 ‘둥베이스디’는 밝혔다. 무덤은 원형으로, 크기는 직경 16m, 높이 6m 정도였으며, 고구려 기와와 당삼채(唐三彩·다채로운 색깔로 칠한 당나라 도기) 등이 출토됐다.

‘둥베이스디’는 “1922년과 1926년 뤄양에서 이들 묘의 지석이 출토됐지만, 출토 정황이 명확하지 않아 무덤 위치는 알지 못했다”며 “그러나 지석 출토 당시, 고궁박물원 직원 궈위탕(郭玉堂·1888~1957)이 출토지점과 유물 등을 기록한 ‘뤄양출토석각시지기(洛陽出土石刻時地記)’가 지난 4월 출간되면서 이를 바탕으로 발굴·조사 활동을 벌였다”고 밝혔다.

천남생은 연개소문 사망 뒤 막리지에 올랐지만, 동생인 남건(男建·생몰년 미상)·남산이 반란을 일으키자 당으로 피신해 고구려 침공에 앞장섰다. 이로 인해 당에서 ‘우위대장군(右衛大將軍)’ 등에 올랐다. 연개소문의 둘째 아들이자 고구려 최후의 막리지 남건은 당과 끝까지 싸워 유배를 당하지만, 막내 남산은 당에 항복해 역시 관직을 받았다.

이들의 성이 연(淵)에서 천씨로 바뀐 것은 당 고조(高祖) 이연(李淵·재위 618~626)의 이름(淵)을 피하기 위해, ‘못’(淵)의 의미를 지닌 ‘천’(泉)자를 택했기 때문으로 알려져 있다.

백제(660년)와 고구려(668년)의 멸망으로 의자왕(義慈王·백제)과 보장왕(고구려) 등 양국의 왕과 지배층이 대거 당으로 끌려갔는데, 이들의 무덤 위치가 확인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송기호 서울대 교수(국사학)는 밝혔다.

하지만 이번 연구는 ‘동북공정’ 차원에서 진행된 것임을 ‘둥베이스디’는 시사했다. ‘둥베이스디’는 ▲네 무덤 모두 고구려의 무덤 양식인 돌방무덤(봉토석실분·큰 돌 등으로 무덤 방을 만든 뒤 흙을 덮은 무덤)이지만 당삼채가 나오는 등 당과 고구려의 문화가 융합된 특성을 보여주었으며 ▲신·구당서(新舊唐書)의 기록처럼 고구려의 지배층이 뤄양 등 중국에서 묻혔음이 증명됐고 ▲천남생 등 3기의 무덤은 중국의 전통적 무덤 양식인 ‘좌소우목’(左昭右穆·가운데 자리에 선조를 묻은 뒤 그 앞쪽 오른쪽부터 왼쪽 방향으로 삼각형 모양이 되도록 차례대로 후손을 묻는 방식) 형태로 만드는 등 고구려 문화가 당의 문화에 융합·흡수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고 지적했다.

(조선일보 / 신형준 기자 2005-10-18) 

[씨줄날줄] 천남생의 무덤

서기 668년 동북아시아의 패권을 놓고 중국 당나라와 겨루던 고구려가 패망했다. 당 태종의 대대적인 침략을 두차례나 물리친 희대의 영웅, 연개소문이 세상을 떠난 지 5년이 채 되지 않아서였다. 연개소문은 임종시 아들들을 불러놓고 너희는 물고기와 물(魚水)처럼 화합해 벼슬을 다투지 말라고 유언했건만 3형제는 이를 어기고 권력투쟁을 벌였다. 그 결과 장남 남생은 당에 투항, 당군의 선두에 서서 고구려 땅을 침범했다. 후세의 사가들은 ‘막강 고구려’를 멸망케 한 직접적인 원인이 남생 3형제의 내분에 있었다고 한탄했다.

고구려 멸망후 남생과 그 후손의 삶은 어떠했는가.1920년대 초 당의 수도인 낙양 교외 북망산 일대에서 남생과 그의 둘째동생 남산, 아들 헌성, 증손 비의 묘지석이 잇따라 출토됐다. 그런데 그 묘지명들에는 이 일족이 ‘연’씨가 아니라 ‘천’씨로 기록돼 있다. 당나라를 세운 고조 이연(李淵)의 연(淵)자를 피하고자 뜻이 같은 천(泉)자로 바꾸었기 때문이다.

이 묘지명들을 살펴보면 천남생은 고구려 멸망에 협조한 공을 인정받아 벼슬은 정2품, 식읍은 종1품 급인 3000호를 받았다. 46세에 병사하자 그 아들 헌성이 작위를 이어받았다. 헌성은 장군으로서 외적 및 반란군 토벌에 여러차례 공을 세웠지만 모함에 걸려 43세에 비명에 갔다. 헌성의 아들 현은 또한 작위를 이어받았고, 현은의 아들 비는 두살에 작위를 받을 정도였다. 그러니 천남생 이하 4대는 당나라에서 끝없는 영화를 누린 것이다.

중국 고고학계가 지난 4∼6월 낙양에서 천남생·남산·헌성·비 등 4인의 묘를 발굴한 사실이 최근 밝혀졌다. 1920년대 초 묘지석을 발굴한 당시의 기록을 토대로 다시 찾아냈다고 한다. 지난 80년 세월 무관심 속에 덮어둔 이들의 묘를 새삼 발굴해 공개한 까닭이 무엇일까. 동북공정을 통해 고구려가 중국의 지방정권이었다고 강변해온 그들로서는, 고구려에서 투항해 당에서 부귀영화를 누린 이들이야말로 효과적인 선전수단이라고 판단한 모양이다. 조국을 배반해 멸망케 하고 성마저 천씨로 바뀐 천남생과 그 자손들. 그들의 무덤을 찾은 사실이 반갑기보다는 왠지 꺼림칙할 수밖에 없음은 한국인으로서 당연한 정서일 것이다.

<이용원 논설위원>

(서울신문 2005-1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