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짜 논란 `금불상 미스터리` 의혹 증폭

(사진=시사매거진2580에서 소개한 아미타여래좌상)

지난 달 28일 국회 문화관광위원회 소속 김재윤 열린우리당 의원은 문화재청에 삼성문화재단이 보유하고 있는 아미타여래좌상의 진품 여부를 의뢰했다. 당시 유흥준 문화재청장은 자신의 의견을 곁들여 아미타여래좌상이 위작이라고 주장했다. 이와 관련 16일 방송된 MBC ‘시사매거진2580’은 문제의 불상에 대해 의혹을 제기했다.

방송에 따르면 금불상은 부처와 기단, 부처를 감싸고 있는 광배로 구성돼 있다. 9.2cm의 부처는 순금으로 만들어졌고, 3층 연꽃무늬 기단과 광배는 은으로 조각해 금을 입혔다. 금불상이 위작논란에 휩싸이고 있는 이유는 출처나 감정이 석연치 않기 때문이다.

금불상이 세상으로 나온 시기는 40년 전 1966년 경주 일대 유명사찰이 도굴되던 때였다. 얼마 후 금불상은 인사동의 한 유명 골동품상이 입수했다. 금불상은 당시로선 거금인 250만원에 고 이병철 삼성회장의 형인 이영각씨에게 넘겼다.

그때 도굴 사건이 들통 나 도굴꾼은 물론 불상을 사고 판 사람들까지 법적 처벌을 받게 됐다. 그런데 2심 재판에서 감정가들이 위작이라고 판명했고, 재판부는 불상을 이병각씨에게 돌려주라고 판결을 내렸다.

그 후 불상은 이씨 가족을 거쳐 고 김동현씨에게 83년 1천 5백만 원에 팔렸다. 김씨는 고미술 전문가로 불상을 위작이라고 판명했던 인물 중의 한명이었다. 그런데 김씨는 왜 위작으로 판명했던 작품을 거금을 들여 사들였을까. 여기서부터 김씨측과 삼성문화재단의 주장이 엇갈리고 있다.

김씨의 부인은 “재판 당시 남편이 진짜라고 말하면 주변 사람들이 처벌받을 것을 걱정해 위작이라고 판명했다”고 밝혔다. 그 일로 김씨는 신라시대 작품이 모조품이 됐다며 평생을 후회했다는 것이다.

그 후 김씨는 95년 자신이 소장하고 있던 여러 점의 국보급 보물을 이건희 회장에게 45억원에 팔며 문제의 금불상을 함께 기증했다. 이 회장 정도라면 금불상을 세상에 공개해 제대로 된 평가를 받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삼성 호암미술관이 문화재 수집 비화를 적어놓은 카드에도 이런 상황이 기록돼 있다고 방송은 전했다. 김동현씨가 이병각씨가 감옥 생활하는 것이 안쓰러워 금불상이 우리 것이 아니라 중국 송이나 원나라 것이라고 밝혔다는 내용이다.

그런데 97년 삼성문화재단이 발간한 ‘김동현옹 수집문화재 도록’에는 금불상 제작연대를 18,9세기 조선연대라고 밝히고 있다. 이 소식을 들은 김씨는 크게 화를 냈다는 것. 김씨는 끝까지 금불상이 진짜 신라시대 국보급 보물이라고 주장했다.

이에 지난 국감에서 정확한 평가 요구가 있었지만 유 청장은 40년 전 감정 결과를 근거로 위작이라고 확신했다.

한편 40년 전 금불상을 위작이라고 판정한 한 전문가는 취재진이 건넨 금불상 도록을 본 후 “감정에 대한 기억은 없다”면서도 금불상이 통일신라시대 양식을 갖춘 작품이라고 평가했다. 하지만 도록만으로 금불상의 진위여부 판단은 불가능하다고 밝혔다.

결국 금불상을 신라시대에 만들어진 진품이라고 말하는 김씨측과 조선시대 작품이라고 밝힌 삼성문화재단, 위작이라고 평가한 문화재청이 서로의 주장만 내세우고 있는 것이다.

한편 시청자들은 금불상에 대한 진위가 정확하게 가려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 시청자는 “역사의 귀중한 보물을 일단 한 치의 의구심도 없이 밝힌 후 국보라면 국가에 반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면 일부 시청자들은 방송 취지에는 공감하지만 삼성을 겨냥한 보도가 아니냐는 의혹을 보내기도 했다.

(TV리포트 / 진정근 기자 2005-10-17)

MBC 시사매거진2580 금불상의 출세 (다시보기 2005-10-16)

 

北 금동광배·南 금동미륵반가상 결합전시 무산

6일 서울 COEX에서 개막하는 ‘고구려!- 평양에서 온 유물’ 특별기획전에서 가장 관심이 모아졌던 북한의 국보 ‘영강(永康) 7년명 금동광배(金銅光背)’와 우리 국보 118호 금동미륵반가상의 결합 전시가 무산됐다.

금동미륵반가상을 소장한 호암미술관이 “두 유물이 일각의 주장처럼 한몸이었을 가능성이 전혀 없다”며 주최측의 유물 대여 요청을 거절했기 때문이다.

금동미륵반가상은 1941년 평양 평천리에서 일본군이 병기창 공사를 하던중 발견된 것을 개인 소장가가 입수해 광복 후 남쪽으로 가져왔다. 금동광배는 46년 같은 지역에서 출토돼 평양 조선중앙역사박물관이 소장해왔다.

북한은 60년대 역사학자 도유호가 발표한 논문을 토대로 두 유물을 한 몸으로 보고 있고, 일부 일본 학자도 같은 주장을 했다.

그러나 호암미술관의 견해는 다르다. 한 학예연구사는 “보통 반가상의광배는 머리 부분에만 두는데 북한의 광배는 위가 뾰족하고 아래는 편편한 전형적인 입상 여래상 광배”라면서 “불상 머리 뒤에 붙은 광배 꽂이도 반가상은 정사각형에 가까운데 북한측 광배에는 세로로 길쭉한 네모꼴 구멍이 나있다”고 반박했다.

그는 또 “영강7년이란 연호는 5세기나 늦어도 6세기 초ㆍ중반으로 추정되지만(북한은 551년 추정) 반가상은 양식으로 볼 때 7세기 전반기에 만들어진 것”이라면서 “절대 한 몸일 리가 없다”고 잘라 말했다.

하지만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 등 특별전 주최측은 아직 미련을 버리지 않고 있다. 정현곤 민화협 홍보국장은 “내년 3월5일까지인 전시기간내 미술사 전문가들의 조언과 컴퓨터 시뮬레이션 등을 통해 두 유물의 한몸 여부를 확인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한편 같은 내용의 명문이 새겨져 있는 우리 국보 119호 연가(延嘉)7년 명금동여래입상과 북한의 연가7년명 금동일광삼존불의 관계도 궁금증을 불러일으킨다. 일부 학자는 명문의 글자 일부가 다른 점 등을 들어 위작 가능성을 조심스럽게 제기해왔다.

특별전 학술자문위원인 서길수 서경대 교수는 “그동안 북한의 문화재를 접할 기회가 전혀 없었으니 논란이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면서 “이번 전시회를 계기로 본격적인 연구가 이뤄지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한국일보 / 이희정 기자 2002-1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