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연호 ‘영락’ 광개토대왕비에 선명

위나암성 남동쪽, 압록강 북쪽 지안역 일대에는 광개토태왕비를 비롯한 광개토태왕릉, 장군총 등의 무덤이 널려 있다.

광개토태왕비 서쪽에는 광개토태왕릉이 있고, 동쪽에는 장군총이 있다. 중국에서는 ‘광개토태왕비'를 ‘하오타이왕 비[好太王碑(호태왕비)]'라고 한다. 광개토태왕의 정식 명칭은 ‘광개토경국강상평안호태왕(廣開土境國崗上平安好太王)'인데, 중국에서는 ‘땅을 넓혔다'는 뜻을 가진 광개토(廣開土)라는 말을 쓰지 않고 그냥 ‘호태왕'이라 하고, 비를 ‘호태왕비(好太王碑)'라 한다.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할 때도 ‘호태왕비'라 했다.

이 비는 장수왕 2년(414)에 광개토태왕의 훈적을 기념하기 위하여 아들인 장수왕이 건립한 것이다. 높이 6.39m, 나비 1.5m, 두께 1.53m의 사면석비(四面石碑)로, 한국에서 가장 큰 비석이다. 받침돌이 없이 비신(碑身)만 있는 것이 특징이다. 문자의 크기와 간격을 고르게 하기 위하여 각 면의 위와 아래에는 가로선을 긋고 매행은 약 13㎝ 간격으로 가는 세로선을 그었다. 필체는 한예(漢隸)의 팔분서(八分書)에 가까운 고구려 특유의 웅혼한 필체로 14∼15㎝ 정도 크기의 문자가 4면에 총 44행(제1면 11행, 제2면 10행, 제3면 14행, 제4면 9행), 1802자가 새겨져 있다. 이 가운데 현재 알아볼 수 있는 글자는 1534자이며 상고사(上古史) 중 특히 삼국의 정세와 일본과의 관계를 적었다.

광개토태왕비에는 분명하게 ‘영락(永樂)'이라는 독자적인 고구려 연호를 사용하고 있는데, 중국에서 중국 연호를 사용하고 있다. 이 또한 고구려의 독자성을 숨기고 자기네 지방정권임을 내세우기 위한 것에 불과하다.

이 비는 1880년을 전후해서 발견된 것으로 전해진다. 17세기 이후에 청나라는 이 지역을 만주족의 발상지로 보고 봉금제도(封禁制度)를 시행해서 잊혀진 상태로 있다가, 봉금제도가 해체되고 화이런 현[懷仁縣(회인현); 桓仁縣(환인현)]이 설치된 뒤에 발견된 것이다. 이 비가 발견된 뒤에 선명한 탁본을 얻기 위해 석회를 발라 비면을 손상시켜 오늘날 연구에 논란을 일으킨 것은 큰 아쉬움이 남는다.

광개토태왕비 서쪽에는 광개토대왕릉으로 보이는 무덤이 있다. 이 무덤에서 발견된 명문전에 ‘원태왕릉 안여산 고여악(願太王陵安如山固如岳)'이라는 문구가 확인되어, 중국에서는 처음에 ‘우산묘구541호묘'로 명명하다가 이제는 ‘태왕릉(太王陵)'으로 부르고 있다. 돌무지무덤 형태에, 정상부에 석실로 되어 있는 형태이나, 돌무지무덤은 많이 훼손되어 보잘것없이 되어 버린 상태이다.

광개토태왕비 동쪽에는 장군총이 있는데, 장수왕릉이라고도 한다. 돌무지무덤에 3단, 5단, 7단식으로 층수를 더하면서 계단식 피라미드 형태로 쌓았다. 정상 부위에 석실을 마련했다. 한때 이 장군총은 광개토태왕의 무덤으로 보기도 했으나, 앞의 ‘태왕릉'에서 명문이 확인되어 그것이 광개토태왕의 무덤으로 보고, 이것을 장수왕의 무덤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도 아직까지 설왕설래하고 있다. 중국측에서 관리를 잘 하지 못하여 한쪽에 무너지고 있는 것이 못내 안타까웠다.

장수왕릉 관람을 마치고 버스를 타고 지안현을 출발하여 선양에 이르는 시간이 무려 7시간이 걸렸다. 이렇게 고구려 유적지 답사가 끝이 났다. 하루 빨리 중국에 있는 고구려 유적과 발해 유적, 그리고 그 역사가 우리의 역사이고 유적임을 만세에 정당하게 천명할 날이 하루빨리 오기를 바란다.

<오창명 전남대 학술연구교수·논설위원>

(제주일보 2005-1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