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 그들은 누구인가] <상> '대한민국 민족주의' 뜬다

한국인, 한민족 핏줄보다 국적 더 중시
중앙일보·EAI 공동 한국인 정체성 조사

'대한민국 민족주의'의 정체가 드러났다. 혈연 민족주의가 아니라 국적 민족주의다. '한민족 되기'보다 '대한민국 국민되기'를 중요시하는 경향이다. 한국인은 자신을 한민족(64%)보다 한국 국민(77%)에 더 가까운 것으로 느끼고 있다.

한민족이나 한반도 같은 혈연.지연적 특성보다 대한민국이라는 정치공동체의 소속감이 한국인의 정체성 (正體性) 을 만드는 핵심 요소가 됐다. 남한만의 민족국가적 정체성이 형성된 것이다. 60년 전 해방공간에선 '한민족 민족주의'가 잉태기였던 대한민국 민족주의를 압도했다.

동아시아연구원(EAI.원장 김병국)과 중앙일보는 광복 60년, 중앙일보 창간 40주년을 맞아 '2005년 한국인의 정체성' 설문조사를 바탕으로 한국인의 의식을 재구성했다.

한국인은 진정한 한국인이 되기 위한 조건으로 '대한민국에서 출생'(82%)하거나 '한국인의 혈통'(81%)을 가져야 한다거나 '평생 대한민국에서 거주'(65%)하는 것보다 '대한민국 국적을 유지'(88%)하는 것을 중시했다.

그래서인지 한국인은 대한민국 국적을 취득한 외국인을 한민족으로 봐줘야 한다(28%)는 관대한 의식을 일부 갖고 있는 반면, 국적을 포기한 한국인을 한민족으로 봐주는 것엔 매우 인색하다(9%).

대한민국 민족주의, 혹은 남한만의 민족주의가 등장하면서 북한을 바라보는 시각도 과거와 사뭇 달라졌다. 이전의 한국인은 북한 땅을 회복해야 하는 '미수복 영토'로 간주하거나 혹은 남북통일을 민족 결합을 위한 지상 과제로 간주했다. 그러나 이번 조사에서 한국인은 남한과 북한이 현실적으로 별개의 독립적인 국가(78%)라는 인식을 하고 있다. 대한민국 국민이라는 정치 공동체의 소속감이 중요하다는 2005년 한국인의 인식은 한국 사회의 성장과 체제에 대한 우월감 등 국가적 자긍심이 커진 결과다.

한국인이 사회 내부적으로 느끼는 정체성도 과거와 다른 모습이었다. 사회적으로 가깝게 소속감을 느끼는 대상이 과거 시.도와 같은 전통적이고 지역적인 것에서 부자와 빈자, 노동자와 사용자, 정규직과 비정규직 같은 산업사회의 구체적 이해관계에 따른 것으로 바뀌었다. 이는 우리 사회의 정치적 갈등이 과거 지역주의적 균열에 기초해 있었다면 이제는 사회 계층 간 격차와 그로 인한 갈등이 정치적으로 보다 중요한 요인으로 부상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한국인은 대립감을 느낄 가능성이 있는 14개 갈등의 축 가운데 빈부 간 거리가 가장 멀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지역 간 거리감은 과거의 심각한 증세에선 벗어났다.

설문조사는 한국리서치가 8월 31일부터 9월 16일까지 1038명을 상대로 개별면접 방식으로 진행했다. 표집 오차는 95%신뢰 수준에서 ±3.0%포인트다.

(강원택 숭실대 정외과 교수, 신창운 여론조사 전문기자)

진보-보수보다 빈부 갈등이 더 심각

지역감정 정치적으로 부풀려져

국가보안법 철폐에서 맥아더 장군 동상 철거 문제까지 노무현 정부 들어 숱한 사회적 논란이 거듭되고 있다. 이런 논란은 단순하게 보수와 진보의 이념적 갈등으로 치부돼 왔다.

그러나 중앙일보와 동아시아연구원의 공동조사는 한국 사회의 균열 구조가 보다 복잡하고 다층적일 가능성을 보여준다.

14개의 갈등 그룹을 설정해 그룹마다 대칭되는 두 집단의 체감 거리감을 물어봤다. 측정 결과 잘사는 사람과 못사는 사람 간의 거리감이 가장 크게 나타난 것(매우 크다 51.5%, 대체로 크다 38.1%, 합계 89.6%)을 비롯, 기업가와 노동자(76.0%), 정규직과 비정규직(75.2%), 대기업과 중소기업(73.9%) 간의 거리감이 크게 드러나는 등 경제적 차원에서 거리감이 매우 큰 것으로 나타났다.

경제적 측면의 거리감은 자신이 중하위 이하의 계층에 속한다고 밝힌 응답자에게서 더욱 두드러졌다. 양극화로 중산층이 무너지고 있는 것이 우리 사회 전반에 경제적 거리감을 키운 것으로 보인다. 눈길을 끄는 것은 노동시장의 유연화에 따라 정규직과 비정규직 간의 거리감이 커졌다는 점이다.

이는 빈부, 노사 간에만 사회적 거리감이 존재하는 게 아니라 노와 노, 사와 사 내부에도 균열이 있음을 보여준다.

빈부의 거리감에 이어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 간의 거리감(86.0%)이 둘째로 강했다. 여야가 앞다퉈 상생의 정치를 외치기도 했지만 국민은 탄핵에서 법사위 점거 농성까지 상대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여야 간 정쟁을 뚜렷이 기억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장애인과 비장애인(75.4%), 학력(71.8%), 세대(63.5%), 이념(62.8%) 간 거리감은 경제적.정치적 거리감의 뒤에 있었다.

영.호남 간의 거리감(59.8%)은 비교적 크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한국 정치의 병폐로 꼽는 지역감정의 근원지라고 할 수 있는 영남과 호남 지역에서도 영.호남 거리감은 심각하지 않다.

세대별로는 50대(70.0%)의 영.호남 거리감이 가장 컸다. 40대와 30대에서는 지속적으로 줄어들어 20대는 50대에 비해 20%포인트 정도 낮았다. 50대의 정치의식은 박정희와 김대중이 경합했던 1971년 대통령선거에서 비롯돼 그 이후의 80년 광주사태에 이르러 깊어졌다고 볼 수 있어 지역감정의 기원을 암시한다.

이는 역대 대통령에 대한 영.호남의 평가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이승만 정부에 대한 평가는 영.호남에서 차이가 크지 않지만 박정희 정부 이후부터는 역대 대통령에 대한 영.호남의 평가가 뚜렷이 구분된다. 지역감정이 정치적 이유로 발생된 것이며, 아직도 지역구도가 논란이 되는 것은 정치인들이 실제 이상으로 지역감정을 정치적으로 마케팅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권위주의 시대의 주요 균열 축이었던 군과 민간인(35.9%) 간의 거리감은 이제는 의미가 없을 정도로 약화됐다.

사회집단별 주요 정치 이슈에 대한 입장을 보면 ▶박정희에서 김대중에 이르는 전직 대통령의 평가에선 지역 간의 차이가 크게 드러나는 반면 ▶과거사 인식에는 연령과 학력 간 차이가 ▶국제주의의 수용 여부에는 학력과 소득 간 차이가 크게 영향을 미친 것으로 나타났다.

경제적인 측면의 정서적 거리감이 가장 크게 나타나긴 하지만 소득 수준이나 계층 의식이 각 이슈에 대한 태도에 일관되고 체계적으로 영향을 주는 현상을 발견하긴 어려웠다. 이는 모든 계층에서 대체로 분배보다 성장을 중요시하는 물질주의적 성향과 연관된 것으로 보인다.

집단별 정당 지지를 보면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은 모두 지역적 지지 기반을 축으로 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세대 간의 차이 역시 큰 것으로 나타났다.

열린우리당 지지가 20대와 30대에서 상대적으로 높은 반면, 한나라당은 40대 이상에서 상대적으로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양 정당 모두 진정한 의미의 전국정당이 되기 위해선 '동진정책'이나 '서진정책' 못지않게 세대 간 소통을 위한 정책과 전략을 마련하는 것이 중요함을 의미한다.

민주노동당은 서민과 노동자들의 정당을 표방하고 있으나 주로 젊은 고학력층이 지지 기반인데, 이 역시 민노당의 한계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지지하는 정당이 없다고 대답한 응답자가 전체의 44.1%나 된다는 것은 현 정당구도가 정치권의 지각변동에 취약할 수밖에 없음을 보여준다.

(김민전 / 경희대 교수)

"나는 대한민국 국민이고 싶다" 71%
"내가 사는 시.도 가깝게 느껴" 38%

'국민 정체성(正體性)'은 각 개인이 지닌 여러 형태의 사회적 정체성 중 하나다. 정체성은 나와 내가 속한 집단을 동일시하는 심리적 감정이다. 그래서 소속 집단이 잘되면 내 일처럼 기뻐하고 집단이 잘못되면 내 일처럼 좌절하거나 슬퍼한다. 그리고 집단의 발전을 위해 다양한 방법으로 노력한다. 국민 정체성의 경우 내가 소속한 집단은 나라다. 강한 국민 정체성은 때론 애국심으로, 때론 민족주의적 정서로 표출돼 오늘날 세계에 현존하는 국민국가의 초석을 이룬다.

세계화와 지방화의 두 가지 상충하는 추세에 따라 국민 정체성은 안팎에서 도전을 맞고 있다. 국가 안의 지역 정체성이 강하면 그 나라는 분열의 위험이 있다. 국가 밖의 초국가적 정체성이 강하면 그 나라는 흡수의 위험이 있다. 한국인은 자기의 정체성을 어느 집단에서 찾고 있을까.

조사 결과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국민은 국민 정체성이 매우 강한 것으로 나타났다. 자신이 속한 지역단위인 읍.면.동, 일반 시.군.구, 서울과 부산등 광역시.도, 대한민국, 한민족, 아시아, 세계에 대해 가깝게 느끼는 정도를 물어봤을 때 대한민국을 선택한 경우가 가장 많았다 (76.8%).

또 "나는 어떤 다른 나라 사람이기보다 대한민국 국민이고 싶다"는 진술에 대해 70.5%가 "매우 그렇다" 내지 "대체로 그렇다"고 긍정적으로 응답했다.

세계인(27.1%)이나 아시아인(44%)의식은 낮았다. 국가 내부의 하위 단위에 대한 정체성과 초국가적 정체성은 낮은 것으로 나타났다. 나라 안의 경우 읍.면.동과 일반시.군.구에 대해서는 과반수 정도, 서울과 부산 등 광역시/도의 경우 절반 이하만 가깝게 느낀다고 대답했다. 반면 분단국가의 특수성을 감안해 포함시킨 한민족 정체성(63.9%)은 다른 분야보다 높았으나 대한민국에 비해서는 낮게 나타났다.

국민 정체성이 강한 것은 단일민족으로서 오랜 역사를 반영하는 동시에 민주화 이후 국가에 대한 주인의식이 고양됐기 때문으로 보인다. 반면 하위 단위에 대한 정체성이 약한 것은 중앙집권 체제의 전통이 강한 데다 빠른 산업화와 급속한 인구이동으로 지역공동체가 해체된 결과로 해석된다.

서울.인천.경기 등 수도권 지역 주민들의 지역 정체성이 특히 낮은 것이 이를 반영한다. 초국가적 정체성이 약한 것은 강한 국민 정체성의 다른 측면인 동시에 잦은 외세의 침탈과 식민지 경험에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이 같은 분석 결과는 여러 가지 현실적 의미를 지닌다.

첫째, 강한 국민 정체성은 나라 발전의 기반이 될 수 있다. 국민이 국가를 위해 자신의 사적 이익을 희생할 의지가 높기 때문이다. 둘째, 상대적으로 낮은 지역 정체성은 지역감정이 정치적으로 과장됐음을 보여준다. 이와 동시에 전면 시행한 지 10년이 지난 지방자치제가 아직 뿌리를 내리지 못했음을 의미한다. 셋째, 초국가적 정체성이 낮다는 것은 동북아 공동체와 같은 초국가적 프로젝트에 대한 국내 토양이 취약하다는 얘기다. 오랜 연방제의 경험으로 지역 정체성이 강한 유럽에서 유럽연합이라는 초국가적 프로젝트가 성공하고 있는 것을 보면 지방자치제를 활성화해 보다 균형 잡힌 정체성을 정립하는 게 필요하다.

(김태현 / 중앙대 국제대학원 교수)

박정희 전 대통령, 경제·정치 발전 1위

노 대통령 택한 유권자 중 65% "지지 철회"
한국전 책임, 북한 43% 미국 20% 소련 14%

정치 발전, 경제 성장, 남북 화해의 세 영역으로 조사한 전.현직 대통령 평가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의 점수가 가장 높았다. 박 전 대통령이 경제 성장뿐 아니라 정치 발전 평가에서도 가장 높은 점수(66.6)를 받은 것은 흥미롭다. 한국인은 정치발전을 민주주의나 인권 보호뿐 아니라 국가 안정이나 국가 성장이라는 의미로 넓게 받아들이고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7명의 대통령별로 3개 영역씩 전체 21개 부문 평가에서 단지 4개 부문에서만 50점 이상의 긍정적 평가가 나왔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2개 분야에서, 김대중.노무현 전.현 대통령이 남북 화해 분야에서 각각 50점 이상을 받았다. 국민이 대통령들의 역할에 전반적으로 불만스러워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노무현 대통령의 지지도와 관련, 2002년 대선에서 노 대통령을 택했던 유권자 가운데 65%가 지지를 철회했다. 대선과 2004년 총선 때 다 같이 노 대통령과 열린우리당을 찍은 지지자 중에선 57.5%가 현재 대통령의 직무를 부정적으로 평가했다. 이런 낮은 직무 평가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영역은 경제성장이었다. 존경하는 역사적 인물엔 응답자의 38%가 이순신 장군을 꼽았고, 세종대왕(14.5%)이 둘째였다. 근.현대사 인물로는 박정희 전 대통령이 유일하게 3위(10.6%)에 올랐다.

학생층은 전체 평균(52.9%)보다 우리 역사에 대해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지만(61.9%), 특정 인물을 언급하지 않는 비율(30%)이 매우 높다. 학생들의 역사 자긍심이 지식에 기반하지 않고 감성에 치우쳐 있기 때문인 것으로 해석된다. 한국전쟁 발발에 가장 큰 책임이 있는 국가는 북한(43.5%), 미국(20.5%), 소련(14.4%)과 남한 정부(10.2%)순으로 조사됐다. 그러나 20대에서는 북한 대 미국의 책임을 31% 대 29%로 비슷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30대는 20대와 40대 이상의 중간 지점에 위치했다.

해방 정국에서 김일성의 역할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사람은 20~30대(7.5%)보다 40대 이상(12.3%)에서 많았다. 특히 30대는 김일성은 부정적, 김구는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비율이 다른 세대에 비해 가장 높았다. 이승만 대통령과 미국 정부의 역할에 대해선 젊은 세대일수록 부정적이었다.

해방.전쟁 시기 김일성의 역할에 대한 평가와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자부심을 느끼는 정도는 별 관계가 없었다.

'나는 어떤 다른 나라 사람이기보다 대한민국 국민이고 싶다'는 항목에 70.5%가 '그렇다'고 답했는데, 김일성의 역할을 긍정적으로 평가한 응답자 중에선 86%가 대한민국 국민이고 싶어했다. '대한민국 국민이고 싶다'가 '한민족의 역사에 대해 자랑스럽게 생각한다'는 응답(52.9%)보다 높은 것도 주목할 만하다. 대한민국 국민됨의 자부심은 50대 이상에서 상대적으로 높았다. 30대가 제일 낮았고, 20대는 한민족에 대한 자부심이 제일 높았다.

대한민국 국민으로서의 자부심이 김일성의 역할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사람들에게서 높게 나타나고, 한민족 역사에 대한 자긍심보다 높게 나타난다는 사실은 한민족으로서의 민족적 정체성과 별개로 '대한민국 국민'으로서의 정체성이 독립적으로 형성됐다고 볼 만하다.

(이현우 /  경희사이버대 영미학과 교수)

(김장수 / 고려대 BK21 연구전임강사)


바뀌는 통일 의식

"통일은 조심스레 추진" 82%
"통일 비용 부담 않겠다" 30%

한국인의 통일의식이 바뀌고 있다. 통일의 당위성에 대한 물음에 '여건을 봐가며 속도를 조절해 추진해야 한다'는 응답이 54.6%에 달했다. '통일을 서두를 필요가 없다'(19.6%)는 의견과 '굳이 통일할 필요가 없다'(7.9%)는 의견을 합하면 82.1%가 통일에 조심스러운 태도를 보였다.

반면 '빨리 통일을 해야 한다'는 의견은 17.4%에 불과했다. 1996년 세종연구소 국민의식조사에서 '통일은 민족의 지상 과제이므로 반드시 이뤄져야 한다'고 응답한 비율이 30.4%나 되었던 것과 비교하면 지난 10년간 감성적 통일지상주의는 줄어들고 통일에 대해 신중하거나 소극적인 태도가 증가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통일 방식에 대해선 남한 체제를 유지하면서 남한의 주도하에 통일할 것을 지지하는 의견이 다수였다. '남한식 체제로의 통일'을 지지하는 의견이 35.3%, '각각의 체제를 유지하면서 공존하는 방식으로 통일'을 지지하는 의견이 52.9%였다. 통일에 대한 태도가 변한 것은 북한 체제의 실상이 알려지고 통일 비용과 과정이 만만치 않다는 것을 국민이 인식하게 됐기 때문으로 분석된다.

'남한과 북한은 현실적으로 별개의 독립적인 국가'라는 점에 77.7%가 공감했다. 통일을 위해 1년에 얼마 정도의 추가 비용을 부담할 의향이 있느냐는 질문에 '전혀 부담하지 않겠다'는 대답이 30.4%였고, 10만원 미만을 부담하겠다는 의견도 39.5%에 달해 전체 응답자의 70%가 통일비용의 부담에 대해 소극적이었다.

(이내영 / 고려대 정외과 교수)

어떻게 조사했나

정체성 관련 183개 설문 1038명 개별 면접 조사

1945년 광복 이후 한국의 역사는 '격동의 역사'다. 60년 사이 대한민국은 세계 10위의 무역대국으로, 민주화의 신화를 이룬 중진 국가로 발전했다. 냉전이 끝났지만 남과 북은 갈라져 있고, 내부의 숱한 분열들이 대한민국의 발목을 잡고 있다.

명과 암의 격동 60년을 거치면서 형성된 한국인은 누구인가, 그 자의식의 지도를 그려봤다. 2005년 한국인의 정체성 조사는 그 지도를 그리는 작업이었다. 우리의 좌표를 섬세하게 확인하고 개인과 나라의 행복을 위해 어느 쪽으로 좌표 이동을 해야 하는지를 보여주자는 뜻이었다.

동아시아연구원(EAI)의 '시민정치패널'과 중앙일보는 광복 60주년 기념으로 7월 '한국인의 정체성 여론조사'를 기획했다.

국민이 생각하는 '한국인은 누구이며 우리에게 대한민국은 무엇인가'를 주제로 59개 항목 183개의 설문을 작성했다. 한국인의 의식 속에 과거와 현재, 미래가 어떻게 투영돼 있는지를 묻는 질문들이었다.

8월 31일부터 9월 16일까지 한국리서치(대표 노익상)에 의뢰해 개별 면접조사를 실시했다. 지역별.성별.연령별 인구비례에 따른 할당 추출법으로 뽑은 전국 성인 남녀 1038명을 대상으로 했다. 표집 오차는 95% 신뢰 수준에서 ±3.0%포인트. 조사 내용을 시민정치패널 소속 10명의 연구진이 한달 가까이 분석, 토론한 연구 결과를 내놓는다.

(김병국 / EAI 원장.고려대 교수)

◆ 정체성 연구 참여자 ▶EAI 시민정치패널=강원택(위원장.숭실대 정외과 교수), 김병국(EAI 원장.고려대 정외과), 김민전(경희대 교양학부), 김장수(고려대 BK연구전임강사) ,김태현(중앙대 국제대학원), 이내영(고려대 정외과), 이재열(서울대 사회학과), 이현우(경희사이버대 영미학과), 정원칠(EAI 선임연구원), 정한울(EAI 선임연구원)

(신창운 여론조사전문기자, 전영기 정치부 차장)

(중앙일보 2005-10-13)

[한국인 그들은 누구인가] <하>

북핵 영향 … "한국도 핵무기 가져야" 67% 

한국인은 어떤 가치관을 지녔을까. 다른 나라 국민과 어떤 차이가 있을까.

미국의 정치학자 잉글하트는 국가 발전의 목표에서 물가와 인플레 억제, 사회질서 유지를 강조하는 경제주의적 태도를 '물질주의'로, 언론자유 보장과 정부정책 결정에 국민의 의견수렴을 우선시하는 문화주의적 태도를 '탈물질주의'로 정의해 각 국민의 가치관을 비교분석한 바 있다. 이번 조사엔 잉글하트의 방법론에 따른 항목도 포함됐다. 여기서 물질주의는 '대한민국 국정운영의 화두가 주로 부국강병과 관련된 것'이어야 한다는 입장이며, 탈물질주의는 경제보다 '참여와 인간적 가치, 환경 등 탈인습적 가치'를 강조하는 입장이다. 혼합형은 두 가지 모두에 어느 정도 긍정하는 사람들을 뜻한다.

이 척도를 이용해 분석해 본 결과 응답자의 36.7%가 물질주의자로, 5.8%가 탈물질주의자로, 나머지 57.5%가 혼합형으로 분류되었다.

국제적으로 비교하면 비교대상이 된 국가 중 중국 다음으로 한국인의 물질주의자 비율이 높다. 물질주의자 비율은 중국·한국·독일·일본·미국·스웨덴 순으로 낮아진다. 독일의 물질주의자 비율이 높은 이유는 통일 후 물질주의적 가치관이 강한 동독 주민들이 대거 표본에 포함되었기 때문이다. 한편 미국이나 유럽 국가들에서는 국민의 20% 이상이 탈물질주의자로 분류되곤 하는데, 이들은 환경보호와 언론자유, 그리고 소수자의 인권보호 등에 매우 민감한 태도를 보였다. 이들을 지지기반으로 녹색당과 같은 사회운동단체나 정당이 그 사회에 뿌리깊이 내리고 있다.

한국인 중에는 단기적으로는 여전히 물질주의자의 비중이 크지만, 장기적으로는 감소세를 보인다. 지난 25년간 물질주의자의 비중을 보면 외환위기를 겪은 직후인 1998년 57%로 최고에 달했다가 서서히 낮아지고 있다. 한편 탈물질주의자의 비중은 6% 수준에서 고정되어 있다. 가까운 미래에 서구의 녹색당과 같은 신종 정당이 출현할 수 있는 기반은 마련되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앞으로 한국 사회에서 탈물질주의적 가치를 지닌 집단이 부상한다면 어떤 사람들이 주력이 될까?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대학생과 청년층이다. 이들의 탈물질주의적 태도는 경제적 불황과 취업난으로 인해 10% 내외에서 억제돼 있지만, 앞으로 경제 상황이 호전되면 매우 빠른 속도로 증가할 것으로 예측된다.

'보수적 물질주의자'들은 고도성장기에 대한 강한 향수를 기반으로 독자적인 목소리를 낼만한 수적 비율을 확보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물질주의와 탈물질주의의 지향은 지금까지의 진보 대 보수의 갈등 전선을 다원화해 나가는 요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흥미롭게도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 지지자 간에는 물질-탈물질주의적 가치관 구분에서 전혀 차이가 나지 않는다. 탈물질주의는 민주노동당 지지자들에게서 10% 수준으로 가장 두드러지는데, 이는 민노당 지지층 중 상당 부분이 고학력·중산층·화이트칼라에 집중된 결과를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보면 여전히 경제 문제는 한국인의 관심을 끄는 핵심 사항이다. '경제안정과 범죄소탕'을 인간적인 사회나 창의성보다 중요한 국가 목표라고 우선적으로 고른 비율은 87%로서 작년에 이어 최고 수준이었다. 환경 개선이나 개인발언권 확대보다 '높은 경제성장과 방위력 증강'을 선택한 비율은 82%였으며, 언론자유나 국민참여보다 '물가, 인플레 억제와 사회질서 유지'를 선택한 비율도 72.8%로서 압도적이었다. 한국인의 대다수는 여전히 '문화적 가치'와 생활정치가 주는 매력보다는 '부국강병'을 원하는 현실주의자들인 셈이다.

<이재열 / 서울대 사회발전연구소장>

위축되는 중산층 의식 

설문조사에서는 스스로 최상위 계층에 속한다고 답한 응답자는 0.1%, 중상위 계층에 속한다는 응답자는 3.3%로 극히 적었다. 중산층이라고 느끼는 응답자는 36.4%였다. 반대로 자신을 중하위 계층에 속한다고 본 응답자는 전체 41.9%에 달했고, 최하층에 속한다고 한 응답자도 16.4%였다.

시기별로 계층의식을 따라가면 심각성이 저절로 느껴진다. 이번 설문의 일부 문항은 통시적 분석을 위해 계층의식을 오랫동안 연구했던 서울대 사회발전연구소의 조사들과 같은 내용으로 설계했다. 1984, 90년, 95년 조사에서 스스로를 중산층이라고 응답한 비율은 37→44→40%로 증가하다가 완만하게 감소했다. 95년 중산층의 감소는 하위 계층이 아니라 상위계층의 증가(9→12%)로 이어졌다. 80년대 중반에서 시작돼 외환위기를 맞기 전인 95년까지 이어진 호황기가 반영된 응답이었다.

그랬던 것이 외환위기 직후인 99년 조사에서 중산층 의식을 가진 사람이 33%로 급감했고, 2000년에는 외환위기를 극복하면서 39%로까지 회복되는가 싶더니 이번 조사에서는 다시 36%로 떨어졌다. 대신 자신을 하층 계층으로 느끼는 응답자가 58%까지 치솟고 있다.

스스로를 중산층이라 생각하는 사람이 줄어들면 계층 간의 심리적 거리감이 더욱 부각되게 마련이다.

사회보장제도가 취약한 한국 사회에서 소득 양극화 현상이 극단적인 계층 간 대결로 번지지 않은 것은 중산층 의식이 상당한 완충 역할을 해왔기 때문이다.

스스로 하위 계층(최하층+중하층)이라고 평가하는 집단과, 상위 계층(최상층+중상층)이라고 보는 집단들은 현실 평가에서 날카롭게 대립하고 있다. 자신을 상위 계층 이상으로 보는 응답자의 경우 '1년 전에 비해 가계경제가 나빠졌다'는 인식이 12%에 불과했지만 하위 계층은 41%였다.

하위 계층으로 생각하는 사람일수록 대한민국을 부끄럽게 여기는 경향이 강하며 사회갈등을 더 민감하게 받아들이는 경향도 있었다. '대한민국에 대해 부끄럽게 느끼는 점이 있는가'라는 질문에 상위층의 32%가 '그렇다'고 응답한 반면, 하위층은 53%가 '그렇다'고 대답했다. 또 하위층이라고 생각할수록 노사 문제, 세대 등 계층별 관계를 보다 갈등적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사회 갈등구조에서 중산층은 상층과 하층 사이에 균형자 역할을 하고 있다. 계층갈등을 완화하기 위해 소득 양극화 현상에 대한 근본적 처방과 함께 사회적·경제적 허리를 강화하기 위한 중산층 대책이 강구돼야 할 것이다.

<정한울·정원칠 / EAI 선임연구원>

배타적 대외인식 

한국인은 다른 나라들에 대한 불신이 크며 경쟁적인 국제 관계 속에서 국익을 지키기 위해 힘, 특히 군사력이 필요하다는 인식이 강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번 조사엔 다른 나라와의 협력을 강조하는 '국제주의적 인식'과 군사력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군사주의적 인식', 국가경제와 세계경제의 관계에 대한 인식, 주요 주변국에 대한 인식을 묻는 질문이 포함됐다.

국제주의와 관련된 질문에서 대체로 부정적인 응답이 나왔다. 가난한 나라에 원조를 늘려야 한다(40.7%), 외국인의 한국국적 취득을 쉽게 해야 한다(30.0%), 한국의 입장과 다르더라도 국제기구의 결정에 따라야 한다(37.5%) 등의 진술에 긍정적인 응답은 절반을 넘지 못했다.

정치·군사적 측면에서 한국이 국제무대에서 제대로 대접받지 못하고 있다는 인식이 높고(67%) 국제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군사력이 강해야 한다(72.7%)는 사람들이 많았다. 핵무기를 보유해야 한다는 응답자도 66.5%에 이르렀다.

1년 전 조사에서 50.7%에 불과했던 (중앙일보 2004년 9월 30일자) 핵무기 보유 주장이 크게 늘어난 것은 올 초 북한의 핵보유 선언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분석된다.

무역의존도가 70%가 넘지만 대외경제 관계에 대한 인식은 여전히 배타적이다. 68.9%의 응답자가 어떠한 대가를 치르더라도 쌀시장 개방은 막아야 한다고 했다.

주변국 불신도 컸다. 북한·중국·일본·미국·러시아 등 주변국을 신뢰하는가에 대한 질문에 매우 신뢰 또는 대체로 신뢰한다는 응답은 대부분 7%를 넘지 않았다. 반면 불신한다는 응답자는 신뢰한다는 응답자의 10배쯤 됐다. 특히 일본에 대한 불신이 컸다. 미국은 예외적으로 신뢰한다는 응답자가 20%나 됐다. 불신한다는 응답자(44%)와의 차도 크지 않았다.

주변 4강이 곧 세계 4강인 지정학적 조건, 오랜 민족의 분단, 세계시장 의존도가 높은 지리경제적 조건으로 국제적인 삶을 살아야 하는 게 한국의 숙명이다. 배타적인 대외인식은 이런 의존적 숙명에서 나온 측면이 없지 않다. 이는 우리 외교에 커다란 도전이 된다. 이 도전을 이겨내고 세계 속의 국가이익을 증진하기 위한 정치적 리더십이 절실하다.

<김태현 / 중앙대 국제대학원 교수>

정체성 연구 참여자

EAI 시민정치패널=강원택(위원장·숭실대 정외과 교수)·김병국(EAI 원장·고려대 정외과)·김민전(경희대 교양학부)·김장수(고려대 BK연구전임강사)·김태현(중앙대 국제대학원)·이내영(고려대 정외과)·이재열(서울대 사회학과)·이현우(경희사이버대 영미학과)·정원칠(EAI 선임연구원)·정한울(EAI 선임연구원)

중앙일보=신창운 여론조사전문기자, 전영기 정치부 차장

(중앙일보 2005-1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