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시가 미국을 망치고 있다"

미국의 현실주의 대외전략가 즈비그뉴 브레진스키가 이라크전쟁 등 부시 행정부의 대외정책에 대해 작심한 듯 강도 높은 비판에 나섰다.
  
브레진스키는 9일자에 실린 '미국의 파탄'이란 제목의 칼럼을 통해 지난 4년여간 부시의 대외정책은 한마디로 미국의 파멸을 스스로 초래하는 '자멸적 국정운영(suicidal statecraft)'이라고 규정했다.
  
브레진스키는 이 글에서 부시행정부가 국제테러의 원인을 직시하기보다는 이슬람권의 서방에 대한 문화적 증오감 때문이라는 일방적 주장을 되풀이함으로써 무슬림들의 반미의식을 더욱 부추기고 있으며, 핵무기 확산저지 정책에서도 인도의 핵프로그램 지원 등 이중기준을 적용함으로써 국제적 신뢰를 잃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어 지난 수십년간 미국은 인권존중의 보루로서 국제적인 존경을 받았으나 이라크전쟁 이후 관타나모 및 아부그라이브 수용소의 고문 사례 등이 드러나면서 미국의 도덕적 위상마저 땅에 떨어졌다고 개탄했다.
  
특히 브레진스키는 "현재 미국의 안보관련 예산(국방부 및 국토안보부의 예산)은 다른 어떤 나라의 예산보다도 많다"면서 투자, 과학기술 개발, 교육 등 생산적 분야에 사용될 예산이 무모한 대외 군사개입에 낭비됨으로써 미국의 장기적 국력이 저하될 것을 우려했다.
  
그는 동아시아와 유럽, 라티아메리카 등 미국의 전통적 우방들도 미국의 정책을 공개적으로 비판하는 것은 물론 미국과의 협력을 외면한 채 자기들끼리의 지역협력을 조용히 추진하고 있다면서 이같은 미국의 지정학적 소외는 결국 잠재적 적국인 러시아와 중국을 이롭게 할 뿐이라고 경고했다.
  
그는 결론적으로 부시행정부는 지난 4년여간 "기본적으로 지역적 연원을 가진, 심각하기는 하지만, 통제 가능했던 도전을 국제적 파탄으로 만들어버"림으로써 "외견상 확고했던 미국의 세계적 우위를 위험할 정도로 약화시켰다"면서 이제라도 민주당과의 초당적 합의를 통해 건설적인 대외정책 형성에 나서라고 촉구했다.
  
카터행정부때 국가안보보좌관을 역임한 브레진스키는 헨리 키신저와 함께 미국의 대표적인 현실주의 전략가로 꼽힌다. 이 두 사람은 힘의 외교를 중시한다는 점에서 도덕성을 앞세우는 현 부시행정부의 네오콘과는 성향을 달리한다. 그러나 브레진스키 등이 대표하는 현실주의 계열이 미국 보수파의 양대 조류 중 하나라는 점에서 그의 공개적인 부시 비판은 이라크전쟁과 관련한 미국내 논쟁에 중대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실제로 미국 진보학계의 거두인 이매뉴얼 월러스틴은 최근 자신의 정기 칼럼을 통해 이제 이라크전쟁과 관련한 논쟁의 초점은 "미군이 이라크에 머물 것이냐, 철수할 것이냐'가 아니라 '언제 어떻게 철수할 것인가'로 옮겨갔다고 지적한 바 있다.
  
그는 10월 1일자 칼럼 '탈출전략(Exit Strategy)'을 통해 최근 미국 제도권을 대변하는 외교전문지 '포린어페어즈'조차 "부시독트린은 붕괴했으며" 이제 "현실주의를 채택해" "실용주의로 선회해야" 한다는 내용의 기사를 싣는가 하면, 차기 대권 주자로 꼽히는 민주당의 러셀 파인골드 상원의원은 물론 공화당의 척 헤이글 상원의원까지도 미군의 조기 철수를 주장하는 등 부시의 입지는 갈수록 좁아들고 있다고 지적했다. 파인골드 의원은 2006년말까지 부분 철수를 공개적으로 요구하고 있다. 한편 지난 9월말에는 수도 워싱턴에 20만 가까운 시민들이 모여 대규모 반전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최근 미국의 여론조사에 따르면 미 국민의 3분의 1은 이라크 주둔 미군의 즉각 전면 철수를, 3분의 1은 일부 감축을, 나머지 3분의 1은 현상유지를 원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월러스틴은 현재 '미군의 이라크 계속 주둔'을 주장하는 세력은 체니 일당뿐이며 이들이 마음을 바꿔먹을 가능성은 거의 없지만 나머지 대다수는 '즉각적인 전면 철수'와 '일정 시점의 부분 철수'를 놓고 논쟁을 벌이고 있다.
  
결국 부시는 이라크 현지에서의 전투에서 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라크전쟁을 둘러싼 미국내 여론싸움에서도 갈수록 수세에 몰리고 있다는 것이다. 부시의 '이라크 불장난'이 어떤 결과를 낳을지 주목된다.
  
다음은 브레진스키 칼럼의 주요 내용(http://www.commondreams.org/views05/1009-20.htm)
  
'미국의 파탄(American Debacle)'
  
약 60년 전, 영국의 역사학자 아놀드 토인비는 그의 기념비적 저작 <역사의 연구>에서 제국 붕괴의 궁극적 원인은 "자멸적 국정운영"이라고 결론지었다. 불행하게도 9.11 대참사 이후 미국이 취하고 있는 정책들이야말로 갈수록 ("자멸적 국정운영"이라는) 이 현란한 구절에 딱 들어맞아 가고 있는 것 같다.
  
최근 들어 부시행정부가 이라크 군사개입의 목표들을 재검토하고 있다는 조짐들이 나타나고 있었다. 그러나 지난 6일 부시 대통령은 기자회견을 통해 2004년 대선 당시 자신이 일으킨 전쟁을 정당화하기 위해 주장했던 선동적인 내용들을 되풀이함으로써 결코 궤도수정은 없을 것임을 분명히 했다.
  
한줌밖에 안 되는 정책결정자들이, 아직도 전모가 밝혀지지 않은 동기들에 의해, 잘못된 주장들을 바탕으로 대중들을 설득해 시작한 이번 전쟁은 당초 예상보다 훨씬 더 많은 인명과 금액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또한 이라크전쟁은 전 세계적인 비판을 불러 일으켰다. 특히 중동지역에서 미국은 대영제국의 후계자, 나아가 아랍민중을 군사적으로 탄압하는 이스라엘의 동맹국으로 각인됐다. 공정성 여부와는 관계없이 이러한 대미 인식은 이슬람세계에 광범위하게 확산됐다.
  
그러나 이제 미국은 이라크에서의 정책목표를 수정하는 것 이상의 일을 해내야만 한다. 테러 위협의 정치적 배경이 무엇인지를 정직하게 바라보려 하지 않는 미국 정부의 완고한 태도가 갈수록 더 많은 무슬림들로 하여금 테러리스트에 동조하게 만들고 있다. 추상적인 "자유에 대한 증오"가 테러리스트들의 주요 범행동기이며, 이들의 행동은 뿌리 깊은 문화적 증오감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미국인들에게 되풀이 강조하는 것은 자기기만에 불과하다. 만일 이러한 주장이 사실이라면 스톡홀름이나 리오 데 자네이로도 뉴욕만큼이나 위험해야만 한다. 게다가 뉴욕 시민만이 테러공격의 주요한 희생자들은 아니다. 인도네시아 발리의 호주인, 마드리드의 스페인 사람, 텔아비브의 이스라엘 국민, 시나이반도의 이집트인, 런던의 영국인들도 국제테러에 희생되고 있다.
  
이들 사건들을 연결하는 분명한 정치적 끈이 있다. 테러의 대상자들은 갈수록 심화되고 있는 미국의 대중동 군사개입을 돕고 있는 미국의 동맹국 및 피후견국 국민들이라는 점이다. 타고난 테러리스트란 없다. 테러리스트는 사건과 경험, 인상, 증오, 인종적 신화, 역사적 기억, 종교적 광신, 그리고 의도적인 세뇌에 의해 만들어진다. 또한 TV에서 본 이미지들이 테러리스트들을 만들어낸다. 특히 자신과 같은 종교를 믿는 신도들이 중무장한 외국 군인들에 의해 야만적 탄압을 받는 장면에 분노할 수밖에 없다. 미국, 영국, 이스라엘에 대한 불타는 정치적 증오가 중동지역뿐만 아니라 에티오피아, 모로코, 파키스탄, 인도네시아, 그리고 멀리 카리브지역에서까지 테러 지원자들을 양산해내고 있다.
  
핵무기 확산을 막기 위한 미국의 능력 또한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군사적으로 취약한 이라크에 대한 침략과 핵무장한 북한에 대한 자제라는 미국의 상반된 태도는 이란으로 하여금 핵무기만이 자신의 안보를 보장할 것이라는 믿음을 강화시켰다. 게다가 최근 미국은 이라크전쟁에 대한 인도의 지원을 얻어내고, 인도를 중국에 대한 견제세력으로 활용하려는 의도에서 인도의 핵프로그램을 돕겠다고 결정함으로써 이제 국제사회에서 미국은 제 입맛에 맞는 나라에게는 핵무기를 전파하는 국가인 것처럼 비쳐지고 있다. 이러한 이중기준은 이란 핵문제의 건설적 해결을 더욱 복잡하게 만들었다.
  
더욱이 최근 미국의 도덕적 위상마저 실추됨에 따라 이러한 정치적 딜레마는 더욱 심화되고 있다. 지난 수십년간 정치적 억압과 고문, 그리고 기타 인권침해에 대해 일관되게 반대해왔던 미국이 이제는 인권방조를 묵인하고 나아가 방조하는 국가로 전락했다. 더욱 개탄스러운 것은 관타나모와 아부 그라이브의 인권 남용과 고문의 실상이 미국 정부가 아닌 언론들에 의해 드러났다는 사실이다. 더욱이 미국 정부의 대응은 몇몇 말단 범법자들을 처벌하는 것에 그쳤다. "강압적 심문(즉 고문)"을 승인한 국방부와 국가안보회의(NSC)의 고위 민간 및 군사 정책결정자 가운데 단 한 사람도 문책을 받거나 기소되거나 사임하지 않았다. 부시행정부가 국제사법재판소(ICC)를 한사코 반대해 온 것이 결국은 이기적인 이유 때문이었음이 분명히 드러난 셈이다.
  
마지막으로, 전쟁과 관련된 경제적 추세가 이처럼 한심한 대외정책 성과를 더욱 악화시키고 있다. 현재 미국의 안보관련 예산(국방부 및 국토안보부의 예산)은 다른 어떤 나라의 예산보다도 많다. 이 예산은 계속 늘어날 것이 분명하다. 갈수록 늘어나는 재정 및 무역적자로 이미 오래전에 미국이 세계 최대의 빚쟁이국가가 된 마당에 말이다. 동시에 이라크전쟁의 직ㆍ간접적인 비용도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다. 부시행정부의 당초 예상은 말할 것도 없고 초기 전쟁반대론자들의 비관적인 전망치보다도 훨씬 많아지고 있다. 이라크전쟁에 투입되는 돈은 투자나 과학적 혁신, 또는 교육에 사용되는 것이 아니다. 치열한 국제경쟁의 시대에 이들 분야야말로 미국경제의 장기적 우위를 유지시킬 핵심적인 부문인데도 말이다.
  
한편 사려 깊은 미국인이라면, 전통적으로 미국을 좋아했던 나라들마저 이제는 미국의 정책을 공개적으로 비판하는 상황에 특별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그 결과 동아시아와 유럽, 라틴 아메리카의 국가들은 조용히 그들만의 지역협의체 구성을 추진하고 있다. 환태평양(transpacific)이라든가 대서양 양안(transatlantic), 또 서반구(hemispheric) 차원의 협력 등 미국과의 연계를 될수록 줄이려 하고 있는 것이다. 미국의 지정학적 소외는 장기적인 위협이 될 것이다.
  
특히 이러한 경향은 미국의 역사적 적국이자 미래의 라이벌을 이롭게 할 것이다. 옆자리에 눌러앉아 미국의 무능을 비웃고 있는 러시아와 중국이 그런 나라들이다. 러시아는 아프간과 체첸에서 자신들이 저지른 범죄에도 불구하고 무슬림들의 분노가 자신이 아닌 미국으로 향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리하여 미국을 반이슬람 동맹으로 끌어들일 수 있다는 점에서 즐거워하고 있다. 중국은 최선의 승리는 적이 스스로 무너지게 만드는 것이라는 고대 전략가 손자의 가르침을 따라 조용히 (미국의 몰락을) 기다리고 있다.
  
아주 현실적인 의미에서 부시 팀은 지난 4년간 외견상 확고했던 미국의 세계적 우위를 위험할 정도로 약화시켰다. 기본적으로 지역적 연원을 가진, 심각하기는 하지만, 통제 가능했던 도전을 국제적 파탄으로 만들어버렸기 때문이다. 미국은 예외적일 정도로 강력하고 부유하기 때문에, 과장된 수사로 포장되고 역사적 맹목으로 추진되고 있는 현재의 정책을 당분간은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미국은 적대적인 세계에서 점차 고립될 것이며, 갈수록 테러 공격에 취약해지는 반면, 세계에 건설적인 영향력을 발휘할 능력은 상실해 갈 것이다. "후퇴란 없다"고 소리 높여 외치면서 벌집을 들쑤시는 것이야말로 파국적 리더십의 표본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반드시 그렇게 돼야 할 이유는 없다. 아직도 진정한 궤도수정은 가능하며, 이는 대통령이 민주당 의회 지도부와 함께 초당적 대외정책을 만들려는 진지한 노력을 시도함으로써 시작될 수 있다. 초당적 합의를 통해서라면 이라크에서의 승리 목표를 낮춰 잡는 것은 물론 실제 철수도 쉬워질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내년에 가능해질 수도 있을 것이다. 미군의 철수가 이르면 이를수록 시아파와 쿠르드족과 수니파의 정치적 합의도 빨라질 수 있을 것이다.
  
초당적 대외정책을 형성하고 이라크문제를 해결하고 난 뒤에는 보다 광범위한 중동정책을 세우는 것도 쉬워질 것이다. 그리고 이를 통해 이란 핵문제와 이스라엘-팔레스타인 평화과정에 건설적으로 개입함으로써 미국의 세계적 역할의 정통성을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


(프레시안 / 박인규 기자 2005-1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