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산책> “한국美 원형 고구려 미술품에 숨어있어요”

강우방 이화여대 미술사학과 교수

한 도시를 사랑한 소년이 있었다. 고등학교 시절 경주에 들른 소년은 남다른 도시의 풍광에 반해 어른이 되면 꼭 경주에서 살겠다고 결심했다. 그 꿈은 10년 뒤 이뤄졌다.

미술사학자 강우방(이화여대 미술사학과) 교수는 미술사학이 무엇인지도 모르던 고등학교시절 경주에 여행 왔다가 경주에 푹 빠졌단다.

경주에 살고 싶어서 서울대 독문과를 졸업하던 해 무작정 경주의 한 여고에 찾아가 독어교사로 써달라고 떼 쓴 적도 있단다. 물론 퇴짜 맞았다. 그러나 그는 꿈을 간직한 지 10년 만인 1970년, 국립경주박물관 학예연구관이 되어 ‘경주에 살고 싶다’는 소원을 이뤘다.

이후 1982년 서울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옮길 때까지 13년 동안 ‘강우방의 경주시대’를 꽃 피웠다. 이 시기는 한국미술사 전체 로 놓고봐도 중요한 시기다. ‘발굴시대’라고 할 만큼 다양한 발굴조사가 경주 일원에서 이뤄졌다. 천마총·황남대총 등 한국 고미술사를 뒤흔드는 획기적인 발굴이 이 시기에 진행됐다.

그는 경주 계림로 발굴에 참여, ‘수레바퀴모양 토기’ 등을 찾아냈다. 신라문화유적을 발굴하고 현장조사를 통해 그 의미를 찾 아내는 과정이 중심이 된 그의 작업은 한국미를 찾아가는 과정이기도 했다. 이 한국의 정체성을 확립해가는 중요한 시기와 장소에 강우방이 있었다.

강교수는 그 ‘경주시대’의 황금기를 현장에서 직접 체험하고 참여했다. 한 개인의 소망과 열정, 시대가 절묘하게 만나 한국미 술사의 결정적인 발굴시대를 지켜본 것이다. 이 ‘강우방의 경주 시대’를 좀 확대 해석하면 트로이를 발굴한 슐리만의 일화를 연상케 한다. 어릴 때 호머를 읽고 꿈을 키운 도시를 찾아, 그 도시의 잠들어 있는 고대유물을 발굴하고 자신의 꿈이 현실이었음을 증명해낸 저 낭만적인 일화가 한국에 와서는 강우방의 ‘경주 ’와 제대로 대비된다.

지난 6일 서울 이화여대 후문 근처에 있는 ‘일향한국미술사연구원’에서 만난 강교수는 경주시절이 ‘낭만시대’였음을 전하며 잠시 감회에 젖었다.

― 한국미가 무엇인가란 물음은 곧 ‘한국인은 누구인가’란 질문 과 이어집니다. 스스로는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고등학교 때까지는 특별히 어떤 의식이 없었어요. 독문과도 당시 문리대에서 커트라인이 제일 높아서 갔을 정도였지요. 대학때는 학과 공부는 안하고 열심히 그림을 그렸어요. 서양화를 그리면서 한편으로는 붓글씨도 공부했습니다. 그러다가 고유섭 선생의 글을 읽고 갑자기 미술사를 공부하게 됐어요.

미술사를 보면서 내가 어떤 작품을 만들어도 우리 미술사의 걸작 들보다 훌륭한 작품을 만들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 미술사를 한번 밝혀보는 것도 세상에 태어나서 할 만한 일이 라고 생각했지요. 그후 서울대 고고인류학과로 학사편입했는데 한학기 다니고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관으로 취직이 돼 직장생 활을 시작했습니다. ”

― 경주입성 성공이 특별한 전기가 된 것으로 봅니다만….

“입성 성공이랄 것도 없어요. 당시 경주는 벽지여서 아무도 내려가려 하지 않았어요. 나는 서울에서는 미술사 공부를 할 수 없다고 판단했고 또 청소년 시절 경주에서 살고 싶다는 꿈도 있었기 때문에 거리낌없이 경주로 갔지요. 나에게는 경주가 대학이자 답사현장이자 선생이자 책이자 자료였습니다.

경주에 가서 ‘삼국유사’도 제대로 읽고 답사도 하고 내 공부 방향도 정할 수 있었지요. 그때 책이 없었기 때문에 오히려 다행 이었습니다. 책보다 발굴현장을 먼저 가야했고 책을 통한 공부보다 현장에서 먼저 만나고 나중에 책을 볼 수 있었기 때문에 새로운 생각과 사고를 할 수 있었을 거라고 봅니다. 책을 먼저 보면 책에 적힌 그 이상을 보기는 어렵지요. ”

― 한국미는 어떤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그것을 한마디로 말하지 말자란 것이 내 주장입니다. 물론 통일신라시대에 조성된 조형미가 이후 한국문화의 모태가 됐다고 봅니다. 지금은 고구려문화에서 원형이 있다고 보는 쪽으로 옮아가고 있습니다만….”

― 한국미술 작품중 가장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것은 어떤 겁니까.

“삼국시대의 두 반가사유상입니다. 국보 78호는 장식이 복잡하고 83호는 장식이 제거된 것이 특징이지요. 이 두개의 반가사유상은 세계미술사의 흐름에서 봐도 한 정점을 이룬 것입니다. 반가사유상은 인도에서 중국, 한국으로 이어져오는 것인데 한국에 이르러 조형적인 완성을 이룹니다.

그 시대의 양식을 완벽하게 표현하는 데 성공한 거지요. 이를 인도, 중국의 양식을 모방했다고 말할 것이 아니라 한국에 이르러 더 이상 발전할 수 없을 정도로 완성된 경지를 보여준다고 보는 것이 옳습니다. 이런 정점에 이른 걸작품이 신라미술에서 많지는 않지만 한점씩 나타납니다. 석굴암 본존불, 성덕대왕신종, 불국사 등이 걸작품들이지요. ”

― 예술에서 완성된 경지란 것이 가능합니까.

“그 이상 완벽하게 표현할 수 없는 조형을 이룰 때가 있습니다.

삼국시대 두 반가사유상처럼 완전무결한 조형을 이룬 것은 중국 이나 인도 등에서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것이 신라에서, 그것도 많지 않고 딱 한 점씩 등장하는 것이 불가사의입니다.”

― 한국미의 원형이자 이상은 통일신라시대의 걸작품들에서 찾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까.

“한국미학의 원형이 통일신라에서 완성됐으며 이것이 우리 문화의 모태가 됐다란 것이 제 주장이었는데, 지금은 변했습니다. 고구려가 더 근원이 된다는 생각입니다. 최근 몇년 동안 고구려 관련 공부를 하면서 새로운 흥분을 느낍니다. 고구려 미술품이 가진 다양한 신호를 풀어내면 그 속에서 수많은 한국미학의 출발점 이 숨어있다고 봅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고구려는 망해서 발해로 이어졌다가 사라졌다는 정도로 생각해왔습니다. 그것이 고구려에서 시작해 신라에서 한국미가 완성됐다고 보는 거지요. 처음에는 경주에서 내가 13년을 보내고 다시 경주국립박물관장으로 갈 수 있었던 것이 내 삶에서 큰 행운처럼 여겨졌습니다만, 지금은 고구려를 만난 것도 또 다른 행운이라고 생각하며 매일매일 흥분된 상태로 보내고 있습니 다.

사실 제가 1970년 처음 신라(경주)에 가서 제일 처음 본 책이자 정독한 저작이 북한학자인 주영헌이 쓴 ‘고구려의 벽화 고분’ 이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니 신라에서 고구려책을 처음 정독한 것도 묘한 인연으로 봐집니다.”

― 계획은.

“9월23일부터 11월20일까지 독일 베를린 동아시아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고구려 미술 특별전인 ‘고대 한국의 미술’전 부대행 사인 ‘고구려 고분벽화 국제심포지엄’(21∼23일)에 참가해 주 제발표를 할 예정입니다.”

■ 강우방이 걸어온 길 ▲1941년 서울 생 ▲1967년 서울대 독문과 졸업 ▲1968년 서울대 고고인류학과 중퇴 ▲1985년 미국 하버드대 대학원 미술사학과 박사과정 ▲1968년 국립중앙박물관 미술과 학예연구사 ▲1970년 국립경주박물관 근무 ▲1986년 국립중앙박물관 미술부 부장 ▲1997년 국립경주박물관 관장 ▲2000년 이화여대 미술사학과 초빙교수 ▲2004년 일향한국미술사연구원 개원 ▲저작:원융과 조화, 한국불교의 사리장엄, 감로탱, 한국불교조 각의 흐름, 신라 십이지상, 법공과 장엄, 미술과 역사 사이에서

(문화일보 / 배문성 문화부장 2005-1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