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커스] MBC특집 다큐멘터리 'CEO로서의 세종대왕 집중분석'

조선시대 왕들의 행적을 기록한 조선왕조실록은 놀라울 정도로 상세하고 꼼꼼하다.

왕들의 일거수일투족은 물론 기침을 한 횟수 등도 기록돼 있을 정도다.

하지만 한글창제로 유명한 세종대왕의 행적을 적은 '세종실록'에는 정작 한글창제와 관련한 기록을 찾아보기 어렵다.

당시 집권 사대부층이 한글창제에 얼마나 완강하게 반대했는지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MBC가 한글날 특집 다큐멘터리 '천년의 리더십,CEO 세종'(9일 오후 1시10분)을 방송한다.

2001년부터 한글특집 다큐를 기획,제작해 온 최재혁 아나운서의 작품이다.

이 프로그램은 한글의 우수성을 부각하는 데 중점을 둔 전작들과 달리 한글 창제를 비롯 다양한 문화정책을 이끌었던 세종의 탁월한 리더십에 포커스를 맞췄 다.

제작진은 세종이 집권 중반기 세자인 문종에게 서무결재권을 넘겨주고 의정부에 권한을 대폭 이양한 것이 건강 때문이 아니라 일생의 프로젝트인 한글을 창제 하기 위해서였다고 분석한다.

또 세종 4년 1월1일 중국에서 만든 역법을 사용해 개기일식을 관측한 결과 시차 가 있다는 것을 확인한 것을 계기로 '조선은 중국과 다르다'는 사실을 깨닫고 한글을 창제하기로 결심하게 됐다는 내용도 전한다.

조세개혁을 추진하던 세종이 신하들의 거센 반발에 부딪히자 당시로는 획기적인 총 17만호(약 100만명)를 대상으로 여론조사를 실시했다는 점도 눈길을 끈다.

세종은 무려 17년에 걸친 설득을 통해 마침내 모든 신하들로부터 만장일치의 찬성을 이끌어냈다.

(한국경제 / 김재창 기자 2005-10-7)

[한글날 특집] 천년의 리더십, CEO 세종

21세기 정보화 사회 , 지식기반 사회를 향한 무한 경쟁은 이미 시작 되었다.  격변하는 국제 정세 속에서 누가 21세기를 이끌어 갈 대표주자가 될 수 있을까?  국가와 기업 , 그리고 가정을 이끌 수 있는 이 시대 참다운 리더십은 무엇인가?

최근 한 여론조사에서 우리 국민이 가장 복제하고 싶은 인물 1위로 단연 세종이 꼽혔다. 역사상  가장 훌륭한 지도자로 온 국민의 마음속에 각인돼있는 세종. 과연 그의 실체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조선의 4대 임금, 세종은 학문을 좋아하고 백성을 향한 어진 품성을 가진 왕으로 흔히 알려져 있다. 그러나 수많은 역사적 사건에서 볼 수 있듯, 어질고 똑똑하다고 해서 반드시 좋은 지도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세종이 왕위에 올랐던 600년 전의 조선은, 쿠데타에 이어 두 번에 걸친 왕자의  난을 딛고 겨우 왕조의 틀을 잡아가기 시작한 때였다. 홍수와 가뭄, 끊이지 않는 기근으로 경제는  어려웠고 사회질서는 문란했으며 도덕은 땅에 떨어진 시대였다.

강력한 카리스마를 가졌던 아버지 태종과는 달리, 학문과 문화를 좋아했던 세종은 22세의 어린  나이로 조선이라는 신생 왕조를 명실상부한 국가로 끌어올려야하는 역사적 과제를 안고 있었다.   만만찮은 국정경험과 노회한 연륜을 가진 신하들을 진두지휘하며 32년간 쉼 없이 개혁정책을 추진해온 세종. 조선의 CEO로서 그가 발휘한 리더십의 요체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이 프로그램은 한글 연작 시리즈로 독보적인 기획력을 발휘해온 MBC 아나운서국 최재혁 아나운서가 내놓은 다섯 번째 다큐멘터리로서 600년 전, 왕조와 시대의 운명을 온 몸으로 짊어졌던 국가 CEO로서의 세종을 조명한다.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세종이 선택한 구체적인 국가 정책의 실현과정을 전문가의 철저한 고증을 거쳐 사극 수준의 재연과 화려한 3D CG로 재현하고, 아울러 세종은 왜 마지막 승부수로 한글창제를 고집했으며, 이 역사적 과업을 완수하기 위해 그는 어떻게 준비했는가를 살펴봄으로써 세종이 꿈꾼 이상국가 ‘조선’과 이를 현실에서 실현해낸 세종의 탁월한 추진력을 알아보고자 한다.

(MBC 2005-9-30)

[세종의 리더십] 1. 과학적 회계와 통계

조선 500년의 버팀목이었던 세종. 그는 문치를 강조하면서도 문약에 빠지지 않았고, 명나라에 사대를 하면서도 우리의 힘을 키웠다. 한글날을 앞두고 '정치가 세종'의 국가 경영 능력을 재조명하는 기획을 마련했다. '세종의 리더십'을 소주제별로 나누어 6회 연재한다. 기고는 한국학중앙연구원(옛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산하 세종국가경영연구소(소장 정윤재) 연구원들이 맡았다.

제리드 다이아몬드는 퓰리처 상 수상작인 '총, 균, 쇠'에서 인류가 문자를 창안한 이유를 회계의 필요성 때문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 수메르의 설형문자에서 한글에 이르기까지 모두 그렇다는 것이다. 한글과 회계는 무슨 상관이 있는 것일까?

세종 원년인 1417년 8월에 태종은 왕위를 넘기면서 나라 살림의 출납 위조를 방지하기 위해'감합법'(勘合法.서류의 좌우 대조 확인)을 도입한다. 출납 책임자의 서명.인장만을 사용했던 기존 방식에 덧붙인 시책이다. 이듬해 8월 세종은 태종에게서 회계장부.마적(馬籍).군적(軍籍)을 인수하면서 정사를 시작한다. 1421년 1월 16일 세종은 다시 사헌부의 건의로 감합제도 위에 '중기'(重記.복식부기의 필수 요건으로 동일 사항을 두 번 기입) 제도를 또 도입한다. 이후 각종 부정부패 행위는 중기 제도에 걸려 적발됐다. 1421년 11월 17일 제용감(왕실 물자를 관리하는 관청)에서 회계부정이 적발된 것이라든지, 1423년 1월 17일 수원부사가 미곡의 중기를 없애버리고 나라 곡식을 빼돌리다 적발된 사건들이 그 예다.

15세기 세종이 회계제도를 통해 국가 경영의 주요 기틀을 세운 것은 18세기 미국의 건국 과정과 매우 유사하다. 조지 워싱턴.프랭클린.제퍼슨 등 당시 미국 지도자들은 모두 회계전문가들이었다. 청교도의 노동윤리에 기초해 부를 창출하는 게 미국 시스템이다. 그 기초에는 정직성과 성실성을 요구하는 회계체계가 존재했던 것이다.

회계와 함께 세종시대 과학적 국가경영의 또 하나의 축은 통계(Statistics)다. 통계는 그 어원적 의미가 State(국가)+Technique(Craft.기술)이기 때문에 그 자체가 국가경영이다. 세종실록지리지의 내용은 전국 군.현 단위로 호수와 인구 수, 경지면적, 논과 밭의 비율 등 오늘날 국세 조사와 유사한 통계로 이뤄져 있다.

이러한 통계는 이를 생성하는 회계체계가 뒷받침돼 있었기에 가능했다. 회계는 인류만이 지닐 수 있는 '쓰기 기술'의 종합 체계이자 기록학의 꽃이다. 그래서 서양의 지성 괴테는 회계를 "인류가 창안한 가장 위대한 문명"이라고 극찬하기도 했다.

그런 회계체계가 세종 때 구체화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우리 고유의 회계용어는 세종실록과 훈민정음 서문에 보이듯 대개 이두문자로 돼 있다. 이두문자는 한자를 기본수단으로 우리말을 적은 글로 그 음과 뜻이 중국과 다르다는 특징이 있다. 나라 말씀이 중국과 다르다는 것은 곧 우리의 생명을 보존해 오고 물질적인 풍요를 보장하는 주요 기술이 중국과 다르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대표적인 예를 회계용어에서 발견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장부와 어긋나는 부정행위를 지칭하는 용어를 보자. 글은 '反作'으로 썼으며 발음은 '번질'이었다. 오늘날에도 감쪽같이 속이는 부정행위를 지칭할 때 이 용어를 사용하기도 한다. 재고조사를 뜻하는 '反庫(번고)'도 이두로 쓴 회계용어다. '色'은 한자로는 색채의 뜻이나 그 뜻은 '빚'이다. 이를 국어 학계에서는 행정용어로 이해하고 있지만 실제 그 기원은 회계용어로 금융행위를 지칭한다. 돈이나 물건을 빌려갈 때 썼던 '改色'(색갈이.호남 지방에서는 색걸이)이란 용어도 이두다.

이와 같이 소리글자와 뜻글자의 결합체인 이두문자를 통해 우리 고유의 회계용어가 정립됐다는 것의 최종적인 의의는 무엇인가. 회계의 본래 목적이 기록과 계산을 넘어섬을 의미한다. 즉 회계의 목적은 재산을 은닉하는 것이 아니라 공개 장소에서 큰소리로 낭독하는 투명한 보고 행위에 있었던 것이다. 서구에서 회계감사를 'Audit'라고 하는 것도 회계와 듣는 행위의 연관성을 보여주는 사례다.

전성호 세종국가경영연구소 비교연구실장 한국의 전통 조직에서 정기총회를 '강신회(講信會)'라고 했던 데에서도 회계의 중요성을 확인할 수 있다. 연말결산 보고서를 '낭독(講)'하고, 부정이 없는 것을 확인함으로써 서로의 '신뢰(信)'를 도모한다는 의미가 들어 있다.

전통은 무조건 폐기해 버려도 좋은 구시대 유물이 아니다.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회계.통계 체계에 기반을 둔 세종시대의 국가경영 리더십은 첨단 과학시대를 산다는 오늘 우리의 모습을 새삼 되돌아보게 한다.

[세종의 리더십] 2. 지방 수령 6년 임기제

지금까지 우리에게 세종은 문화(한글 창제)와 과학(농업 및 측량기구) 쪽의 업적으로 주로 알려졌다. 현실정치가로서의 면모는 별로 주목받지 못했다는 말이다. '정치가 세종'의 면모를 잘 살펴볼 수 있는 게 '지방수령 6년 임기제', 즉 수령육기제(守令六期制)의 도입과 제도화 과정이다.

수령이라는 지위는 군주의 뜻을 백성에게 펴고, 백성의 생각은 위로 전달하는 '관절'과 같은 위상을 갖는다. 그런데 고려시대와 조선 초기 수령의 임기는 3년이었다. 세종은 그게 너무 짧다고 보았다. 지역 사정을 알 만하면 떠나게 된다는 것이다. 이래선 지방 아전들에게 휘둘리다가 제대로 된 정책을 펴보지 못한다.

지방 수령 임기 6년제는 세종의 독단적 결정에 의해 추진됐다. 문제는 관료들의 이해였다. 당시 서울과 지방 간에는 현격한 문화적 차이가 있었다. 지방은 단순히 서울과 떨어진 곳이 아니라 '야만의 땅'이었다. 양반은 서울을 벗어나려 하지 않았다. 3년이면 잠시 다녀오는 기분이지만, 6년이면 '촌놈'이 되고 마는 형국이었다. 또 하나는 승진 문제. 지방에 있다 보면 승진에 누락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는 고과에 흠이 잡히면 평생을 지방직을 전전하는 '떠돌이 신세'가 된다는 불안감이 있었다.

따라서 그들의 저항은 지속적이고 집요했다. 관료들의 6년 임기제 비판은 첫째, 유교경전에 그 근거가 없다는 점을 든다. 유교 국가인 조선에서 경전의 의의는 마치 오늘날의 '헌법'과 다를 바 없기 때문에 치명타를 날릴 수 있는 문제 제기였다. 둘째, 중국의 역사와 선왕의 사례(태조.태종)에도 걸맞지 않다는 점이다. 왕조 국가에서 '전통'은 경전과 더불어 정책의 정당성을 버티는 핵심적 사안이므로 이 역시 근본적 비판이었다. 셋째, 관료 자신들의 입장에도 문제가 많다는 것이다. 요컨대 지방에 오래 있으면 승진 기회가 서울에 있을 때에 비해 줄어든다는 것이다. 넷째, 6년은 긴 기간이어서 처음에는 큰 뜻을 품은 수령도 나태해져 부패할 가능성이 크다는 점, 또 당시 수령들의 자질로는 도리어 악정의 기간을 6년으로 더 늘리는 것에 지나지 않다는 점을 든다.

이에 대해 세종은 첫째, 6년 임기제가 수령의 빈번한 교체로 인한 업무 연속성의 문제를 개선하기 위한 개혁정책임을 환기시킨다. 둘째, 수령이 자주 바뀜에 따른 영송(迎送:환영 및 환송식)의 폐단이 크다는 점을 예로 든다. 셋째, 경전에는 수령 임기 9년제도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무엇보다 세종은 관료의 반대가 사적인 이해관계와 불편을 의식한 탓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즉, 이 문제를 '공익 대 사익'의 차원으로 몰아간 것이다.

'공익 대 사익'의 대결구도는 맹자로부터 연면한 경학적 테마다. 세종은 이 구도를 형성하고 또 장악했다. 이후 6년 임기제를 비판한 관료들은 사익을 추구하는 모리배로 몰리게 된다. 이를 계기로 6년 임기제는 완전히 제도화되고, 조선 후기까지 변함없이 유지된다.

여기서 보이는 세종의 리더십은 '텍스트(經史)에 대한 이해'와 '정치적 해석 능력'에서 비롯된다. 세종은 유교경전과 역사서에 대한 깊은 독서(이해)를 바탕으로, 이를 당시 조선의 정황에 걸맞게 정치적으로 해석해 냄으로써 구체적 전략으로 형성하는 데 성공했다. 그는 경전과 역사서 그 자체를 진리의 현현(顯現)으로 절대화하지 않았다. 정치적 필요성에 따라 도구적으로 사용할 줄 알았다는 말이다. 스스로 딛고 서 있는 현실세계를 중심에 놓고, 과거에 매몰되지 않으면서 미래를 과제로 삼는 주체적이고 능동적 자세를 그가 가지고 있었다는 뜻이다. 이것이 정치가로서 세종의 시공간 감각이라고 판단된다.

<배병삼 영산대 교수.세종국가경영 연구소 연구위원>

[세종의 리더십] 3. 비밀 프로젝트 한글

세종은 중화 문물에 버금가는 유교적 문명국가를 달성하는 것을 치세의 목표로 삼았다. 그런데 풍속은 날로 흉포해져 범죄가 늘어나고 급기야 아들이 아버지를 죽이는 범죄까지 생겼다. 세종은 풍속을 바로잡기 위한 기존의 방법이 범죄 예방에 효과가 없다고 생각했다. 행실의 모범자를 그림으로 그려 본받게 하는 데는 한계가 있으며, 한문과 이두로 된 법조문은 내용을 알기 어렵기 때문이다. 중국의 학술을 받아들이고 사대 외교를 제대로 하기 위해서도 우리 구강 구조에 맞춰 형성된 문자가 필요했다. 여기에 우리가 이적(夷狄)으로 무시하던 여진.일본.몽고.티베트 등이 모두 고유의 문자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은 세종에게 충격을 주었다. 문자를 따로 지니는 것은 이적과 같아지려는 것이라고 신하들은 반대 논리를 폈다. 이와 달리 세종은 이적도 지닌 문자를 우리가 지니지 못하는 것이야말로 민족적 자존심이 훼손당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세종은 자신이 구상한 국가경영책을 실행하는 과정에서 백성과의 직접적인 소통의 필요성을 인식했는데, 훈민정음이 바로 그 소통 수단이었다. '반나절이면 익힐 수 있는' 정음은 결과적으로는 국가의 명령체계를 아래로 전달하기 쉽게 함으로써 통치의 효율성을 증가시키는 데 기여했다. 세종 연간의 일련의 문화정책이 모두 정음이 있음으로 해서 가능한 사업이라는 점은 세종이 정음을 구상하던 단계에서부터 활용을 염두에 두고 있었음을 말해 준다.

그렇다면 이런 효율성을 지닌 문자의 창제를 왜 비밀리에 추진했는가. 그것은 몇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우선 세종은 신하들이 중국과의 사대 관계를 들어 반대할 것을 예견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공개적이고 대대적으로 추진하는 것이 정책 수행에 비효율적이라고 판단했다. 다른 한편으로는 자기 사후에도 세자가 일관성 있게 정책을 지속하기를 원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세자의 신진 친위세력을 만들어 놓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는데, 그럴 경우 필시 훈구세력의 저항이 있을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사실 신하들이 내세운 중국과의 관계 악화는 구실에 지나지 않았다. 조선이 사대정책을 준행하는 한 중국은 내정의 자율성을 보장했다. 더구나 중국 사상의 올바른 수용과 사대 외교를 위해 문자를 만든다는 데 반대할 명분은 없다.

정음 사업을 세종은 세자와 소수의 근신만으로 비밀리에 수행했다. 일종의 태스크포스팀을 구성했다. 성삼문.신숙주.이개.이선로.박팽년.최항 등이다. 이들은 한글이 창제되기 한 해 전(1442년.세종 24년) 겨울 임금에게 특별휴가를 받아 복정산에서 함께 과업을 수행했다. 창제 한 해 전에 임무를 부여했다는 점은 세종이 이미 사전에 초안을 구상하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따라서 이들은 정음에 관한 구체적인 실무작업을 했을 것이다. 한글 창제 전후 세종은 세자와 안평대군, 진안대군으로 하여금 이들을 물심양면으로 지원하게 했다. 이러한 인사정책은 이 작업에서 소외된 세력의 저항을 불러들이게 마련이다. 하지만 세종은 자신의 인사정책과 정책 수행에 대한 비판을 정공법으로 타개하는 리더십을 발휘했다. 자신의 정책이 무엇보다 '백성을 위한' 것이라는 명분에 의거해 반대세력을 논박했다.

세종 리더십의 핵심은 명분만 내세우는 수사(修辭) 정치와 책략 정치가 아니라 정책의 비전에 대한 자신감이라는 데 있다. 정책 수행에 대한 저항에는 오직 실력으로만 승부하게 했다. "네가 운서(韻書.'고금운회' 등 중국의 음운서)를 아느냐. 사성 칠음에 자모(字母)가 몇이나 있느냐. 내가 운서를 바로잡지 않는다면 누가 바로잡겠느냐"('세종실록' 인용:최만리의 반대상소에 대한 세종의 반박)는 말은 확고한 자신감에서 나온 것이다. 실력은 함께 정책을 수행하는 신하에게도 요구됐다. 우리의 운서를 만들기 위해 성삼문과 신숙주를 중국인 황찬에게 13번이나 보내 조언을 구하게 한 것이라든지, 정음을 만들고 나서 3년 동안 해례서를 만들게 한 일은 이론적 보강에 만전을 기하려는 철저함과 치밀함을 말해준다.

<유미림 서봉한국학연구소장.세종국가경영 연구소 연구위원>

(중앙일보 2005-10-7)

[세종의 리더십] 4. 약자들에 대한 배려

"굶는 백성 있으면 관리들 용서 않겠다"

세종 시대에도 사회적 약자들의 고통은 존재했다. 굶주림·질병·형옥, 그리고 관리들의 수탈과 노역 등이었다. 이에 대해 세종은 눈에 잘 띄지 않는 백성들의 고통까지도 민감하게 배려하는 리더십을 보여줬다. 그림은 죄인의 목에 북을 매달고 치면서 거리를 오가는 모습을 담은 19세기 후반 풍속화. 기산 김준근 작.

즉위하던 해 세종은 "내가 궁중에서 나고 자랐으므로, 민생의 간고한 것을 다 알지 못한다"고 고백한다. 그는 백성의 고통을 몸소 체험하고자 했다. 세종 7년, 가뭄이 혹심하자 왕은 벼농사 상황을 직접 살펴보기 위해 도성 밖으로 나갔다. 그는 일산(왕실용 햇빛 가리개)과 부채를 쓰지 않았다. 벼가 잘되지 못한 곳을 보면 반드시 멈추어 농부에게 까닭을 물었고, 점심을 먹지 않고 돌아와서 "오늘 보니 눈물이 날 지경"이라고 말했다. 가뭄을 걱정한 세종은 10여 일 동안 앉아서 밤을 새웠고, 병이 났어도 신하들에게 알리지 말도록 했다.

그 시대에도 사회적 약자들의 고통은 존재했다. 백성을 가장 괴롭힌 것은 굶주림.질병.형옥, 그리고 관리들의 수탈과 노역이었다. 이에 대처한 세종의 리더십은 '사회적 약자들의 숨은 고통에 대한 보살핌'으로 요약할 수 있다.

이를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가 약노(藥奴) 사건. 세종 7년 왕은 "옥(獄)이란 죄 있는 자를 징계하자는 것이지 사람을 죽이자는 것이 아니거늘, 옥을 맡은 관원이 마음을 써서 살피지 않고 심한 추위와 찌는 더위에 사람을 가두어 질병에 걸리게 하며, 혹은 얼고 주려서 비명에 죽게 하는 일이 없지 아니하니, 진실로 가련하고 민망한 일"이라고 말했다. 약노 사건은 이 같은 간절한 언급에 어긋나는 사건이었다.

약노는 곡산 여자로 주문을 외워 살인을 했다는 혐의로 투옥됐다. 그런데 10년 동안 그 진위를 밝혀내지 못한 상태에서 형조는 살인죄로 처리하려고 했다. 이에 대해 세종은 주문으로 살인을 한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며, 좌부승지 정분을 파견해 진상을 다시 조사토록 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약노 자신이 스스로 유죄를 자백하며 빨리 죽여 달라고 애원했다. 정분이 세종의 말을 전하며 안심시키자 약노는 비로소 크게 울면서 "고문과 매를 견디지 못해 거짓 자복했습니다. 태장을 당하는 것이 한 번 죽는 것만 같지 못하니 빨리 죽여주시기 바랍니다"라고 털어놓았다.

약노가 처한 상황은 혁명과 자살의 갈림길이다. 좋은 정치란 이런 상황에 얼마나 민감하게 대처하며 고통을 줄여줄 수 있는가에 달려 있다. 형조는 마치 법의 자동기계 같았다. 그러나 세종은 민감했다. 자신의 측근을 보내 진상을 살피게 했고, 마침내 10년 동안 절망의 끝에 있던 한 생명을 구원했다.

세종은 관대한 리더였다. 세종 6년 이런 일도 있었다. 토지소송에서 억울한 일을 당한 조원이라는 사람이 "임금이 착하지 못해 이 같은 수령을 임용했다"는 말을 퍼뜨렸다. 당시의 법으로는 참형이나 장 100대, 유배 3년에 해당하는 난언죄에 해당했다. 그러나 세종은 "무지한 백성의 말이니 다시 묻지 말라"고 했다.

'무지한 백성'에겐 관대했지만 백성의 안위를 어지럽히는 일에는 용서가 없었다. 세종 26년 경기감사 이선이 기민(饑民) 구제를 소홀히 한다는 보고를 받자 그를 직접 불러 문책했다. "내가 백성들의 일에는 비록 가까운 족친이라 하더라도 오히려 용서하지 않았으니, 만약에 한 사람이라도 굶어 죽는 일이 있으면 경을 용서하지 않겠다". 세종 8년 둘째 형 효령대군의 종들이 스님들의 땅과 식량을 빼앗자 종들에게 장형을 가하고 해당지역의 관리는 파면하기도 했다.

조선시대 기본 법전인 '경국대전'에서 노비는 소나 말처럼 취급된다. 대개 말값의 3분의 1 정도로 매매됐다. 그런데 세종 12년 최유원이라는 사람이 노비를 때려죽이자, 세종은 "노비도 사람인데 사적인 형벌로 죽인 것은 인덕(仁德)에 어긋나므로 처벌하지 않을 수 없다"고 했다. 또 관가 노비가 아이를 낳고 7일 만에 다시 일을 시작하는 것을 불쌍히 여겨 100일을 더 쉬도록 했으며, 나아가 산기가 임박한 경우 임산부를 한 달 쉬도록 했을 뿐만 아니라 남편까지 한 달 쉬게 한 적도 있다.

세종은 "천재지변은 인력으로 할 수 없는 것이지만, 배포와 조치를 잘하고 못하는 것은 사람의 힘으로 다할 수 있는 것"이라고 했다. 인간의 고통에 완전히 대처할 수 없지만 덜 고통스럽게 할 수 있고 위로할 수 있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김영수 국민대 연구교수.세종국가경영연구소 연구위원>

(중앙일보 2005-10-10)

[세종의 리더십] 5. 싱크탱크 집현전 확장

"조선에 맞는 법제 만들어야"
집현전서 정치적 지혜 구해

창업기의 어수선함을 안착시키고, 법과 제도에 따라 국정이 운영되도록 하는 수성(守成)의 리더십을 시대는 세종에게 요구하고 있었다. 그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고안한 것이 집현전. 집현전은 세종의 국가경영 리더십의 손발 역할을 했다. 세종은 그 이전까지 명목뿐이던 집현전을 대폭 정비해 젊은 학자들의 연구와 토론을 위한 상설기구로 발전시켰다. 우리나라와 중국의 고전을 연구하고 외국의 사례를 비교해 조선에 적실한 법제를 마련하도록 했다.

"중국과 다른 조선의 실정에 맞는 제도를 만들어야 한다." 즉위한 다음해 어전회의에서 벌어진 논쟁은 이 같은 세종시대의 문제의식을 잘 보여준다. 참찬 김점은 명나라 영락제의 정치 운영방식을 인용하며 "중국 황제처럼 모든 정사를 친히 결정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라고 말했다. 이 자리에서 예조판서 허조는 "중국 제도는 본받을 것도 있고, 본받지 못할 것도 있다"며 '위임정치론'을 주장했다. 관(官)을 두어 직무를 분담했으면 책임을 지워 성취하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자 김점은 "신이 친히 뵈오니, 황제는 위엄과 용단이 측량할 수 없이 놀라워 6부의 장관이 정사를 아뢰다 착오가 생기면, 즉시 호위관을 시켜 모자를 벗기고 끌어내린다"면서 '국왕 친정론(親政論)'을 재차 주장했다. "그렇지 않습니다." 허조의 반박이 뒤따랐다. "임금은 우선 어진 이를 구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인재를 얻었으면 맡겨야 하고, 맡겼으면 의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에 김점은 노기 띤 얼굴로 "황제가 친히 죄수를 끌어내 자상히 신문하는 것을 직접 보았다"면서 "신하들에게 맡기는 것은 부당하다"고 극력 주장했다.

결국 이날 논쟁은 '임금이 자잘한 일에까지 관여해 신하의 할 일까지 하려고 해서는 안 되며, 신료의 말 한마디 착오 때문에 대신을 욕보여서는 안 된다'는 위임론이 승리했다. '대신에게 모두 위임하고 유능한 관료를 뽑아 맡길 때 국가가 번창할 수 있다'는 집현전 학사들의 의견에 세종이 힘을 실어주었던 것이다.

세종은 집현전 학사들의 지원과 협력에 힘입어 일을 추진해 나갔다. 집현전은 국왕에게 필요한 정제된 지식과 당면한 정책과제를 풀어나갈 정치적 지혜를 적시에 제공하는 싱크탱크였다. 재위 24년 35일간 진행된 '첨사원(詹事院) 논쟁'이 대표적 사례. 세자를 도와 국정을 수행할 보좌기구를 설치하려는 국왕의 뜻이 신하들의 강력한 반대에 부닥쳤다. "명령이 두 곳에서 나오는 폐단으로 인한 혼란이 즉위 초 '강상인 사건'에서 이미 나타나지 않았느냐"는 반대였다. 안질 때문에 국정 수행이 곤란하다는 국왕의 하소연에도 신료들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아직 임금의 나이가 한창인데 경미한 질병으로 "정권을 쪼개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러자 세종은 집현전 학사들로 하여금 첨사원 제도의 역사적 전거를 찾아보게 했다. 다행히 집현전에서는 '대당육전(大唐六典)'에서 '태자첨사부(太子詹事府)'라는 제도를 찾아냈다. 세종은 이를 근거로 "첨사원 제도는 내가 처음 만든 것이 아니고 예부터 있었다"라고 주장했고, 마침내 설치할 수 있었다. 덕분에 국정의 상당 부분이 세자와 의정부 신하들에게 위임되었고, 국왕은 한글 창제 등 집권 후반기의 핵심 국책사업에 주력할 수 있었다.

'국가 일을 내 자신의 임무로 여기며'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일하는 집현전 인재들은 1456년 세조에 의해 해체되기까지 37년간 100여 명이나 배출됐다. 그들에 의해 조선왕조는 수성의 안정기로 진입할 수 있었고, 빛나는 문명의 시대로 나아갈 수 있었다.

<박현모 세종국가경영연구소 전통연구실장>

(중앙일보 2005-10-12)

[세종의 리더십] 6. 리더십의 요체 爲民

백성들 불만 생기기 전에 …
미리미리 정책 세워 실천

오늘날 너도나도 민주주의를 말하듯 조선의 왕이나 사대부들은 위민(爲民)을 강조했다. 문제는 '백성을 위한다'는 그 많은 말.말.말들이 얼마나 정책으로 구현되는가에 있었다. 세종의 국가경영에서 위민은 단순한 이데올로기적 수사가 아니라 구체적 실천으로 이어졌다. 세종 리더십의 특징을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세종은 상당한 균형 감각을 가지고 국가를 경영했다. 가령 세법(稅法) 개정 과정에서 그는 신료와 일반 백성들, 그리고 중앙과 지방의 여론을 골고루 들었다. 왕조시대였음에도 정책 수행에 앞서 여론을 충분히 수렴하는 공론 정치를 선보였던 것이다. 형을 집행하거나 인재를 등용하는 과정에서는 사정(私情)과 공의(公義)의 조화를 지향했다. 그리고 한글 창제 과정에서 보듯 세종은 중국에 대한 사대외교와 내부적 국력 신장이라는 두 가치의 묘합을 추구했다.

둘째, 세종은 예방적 조치를 많이 취했다. 백성들의 불만이 적극적으로 표출되기 전에 필요한 정책을 미리미리 마련하고 주변을 설득해 나갔다. 우마(牛馬) 취급을 받던 노비들에게까지 배려를 아끼지 않은 것은 세종 리더십의 본질이 인간성의 발현과 무관하지 않음을 보여준다. 각종 과학기구의 발명, 그리고 백성의 계몽에 필요한 고전의 편찬 사업 등은 아름다운 풍속이 꽃피는 문명국가로 나아가는 주춧돌을 놓는 작업이었다.

셋째, 세종은 깊이 생각하고 여러 번 의논하는 '숙의(熟議) 정치'를 실천했다. 세밀한 현황 조사, 심도 있는 토론을 통해 갈등을 관리해 간 사례는 파저강 토벌, 고약해 사건, 약노 사건 등 무수히 많다.

이 같은 세종의 리더십은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왕위 계승 과정을 통해 세종은 '택현'(擇賢.인재 발굴)의 어려움과 중요성을 절감했다. 아버지 태종은 당초 적장자 상속 원칙에 따라 끝까지 양녕을 왕으로 세우고자 했다. 양녕이 안 되면 양녕의 아들에게 왕위를 잇게 하려 했다. 결국 왕위 계승자를 세종으로 결정한 뒤 태종은 통곡했다고 한다. 세종의 능력을 불신해서가 아니라 적장자 원칙을 지키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 때문이었다. 하지만 세종에겐 훌륭한 리더십 교육이 되었다.

아버지 태종의 리더십으로부터 배운 것도 많다. 태종이 왕조의 기반을 다지기 위해 자신의 외척과 아들 세종의 외척까지 매몰차게 멸문시키는 것을 보고 정치와 권력의 냉혹함을 체험한다. 장점 못지않게 단점도 있었던 황희를 채용하고, 다른 신하들의 질시와 반대에 굴하지 않고 허조를 중용했던 태종의 용인술도 배웠다. 또 태종이 자신의 지시를 따르지 않았던 강상인을 냉정하게 처단하는 것을 보고, 군주로서 계통에 따라 신료들의 보고를 철저하게 받고 토론하는 요령도 체득했다.

무엇보다 세종 리더십의 기반인 독서의 중요성을 빼놓을 수 없다. 그는 폐세자된 양녕을 대신해 2개월 만에 왕위에 올랐다. 세자 수업은 2개월뿐이었지만, 그에 앞서 수많은 경전을 읽으며 왕자 수업을 착실하게 받았다. '논어' '맹자' '대학' '중용' '효경' '자치통감강목' 등이 기본 교재였다. 세종의 건강을 걱정해 태종이 환관을 시켜 서책을 감춘 적이 있는데, 세종은 방안에 남아있던 '구소수간'(歐蘇手簡.송나라 문인 구양수와 소동파의 글 모음)을 수도 없이 반복해 읽었다고 실록은 전한다.

지금은 물론 왕조시대가 아니다. 하지만 '국민을 위함'(for the people)은 동서고금, 체제의 다름과 관계없이 국가경영 리더십의 요체다.

고전 읽기와 정치현실에 대한 꼼꼼한 관찰을 통해 실력을 쌓고 지혜를 얻어 32년간 조선을 탄탄하게 경영했던 세종의 리더십은 지금도 벤치마킹의 귀중한 대상이 되기에 충분하다.

<정윤재 세종국가경영 연구소 소장>

(중앙일보 2005-1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