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책읽기] 지식인이여, 중국에 답하라

중국이 달려온다. 미국과 맞설 유일한 강대국이란 예측은 이제 진부한 상식이다. 드라마 '대장금'에 중원이 난리라는 소식도 있지만 중국은 향후 우리가 넘어야 할 거대한 암벽과 같다. 우리는 지금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가. 정답은 역사에 있다. 중국의 작은 기침에 일희일비했던 조선시대로 타임머신을 타고 간다. 이 시대 지식인의 책무가 확연하게 드러난다.

조선과 중국의 관계는 평등하지 않았다. 조공을 통해 강대국 중국의 체면을 세워주면서 약소국으로 생존을 담보했던 '조공-책봉 체제'는 조선시대 한중관계의 기본 시스템이었다.

조선의 건설자들은 명과의 관계를 안정시키려고 노력했다. 13세기 초반부터 200년 가까이 혹심한 몽골의 침략과 원 제국의 간섭을 목도한 그들은 몽골을 쫓아내고 들어선 명이야말로 한.당.송으로부터 이어지는 '중화제국'의 정통을 계승했다고 인정했다. 명에 대한 사대와 명 문물의 수입은 무엇보다 우선하는 국가적 대사가 됐다. 성군 세종의 빛나는 치적도 사실은 지성사대(至誠事大)를 외치면서까지 명과의 관계를 안정시킨 바탕에서 가능했다.

15세기 이후 조명관계는 안정됐지만 양국 사이의 인적 교류는 제한적이었다. 두 나라 모두 자국 국민의 국외 출입을 금지했던 상황에서 조천행(朝天行)이라 불리던 조선 사신의 사행(使行)이야말로 가장 주된 교류의 통로였다. 중화의 문물을 선망하던 조선의 지식인에게 황제를 알현하고 문사들과 교유하며 서책을 구입하고 무역까지 하는 사행은 실로 가슴 설레는 이벤트였다.

16세기 이후 상황은 달라진다. 명나라에는 '중화'다운 품위와 아취(雅趣)가 넘치리라 여겼던 조선 사신들의 기대는 압록강을 건너자마자 깨졌다. 주요 도시를 통과할 때마다 뇌물을 요구하는 탐욕스런 관리, 곳곳에 세워진 화려한 불교와 도교 사원, 그리고 양명학과 같은 '이단'에 매몰된 지식인이 그들을 실망시켰다. 급기야 1574년(선조 7) 8월, 조선 사신 허봉은 예의와 염치가 사라져버린 명의 현실을 개탄한다. 허봉은 중국인보다 더 열렬히 '중화인'이 되기를 열망한 조선 지식인의 전형이었다.

야만족으로만 여기던 만주족의 청이 중원을 차지하자 조선 지식인의 중국 인식은 또 달라졌다. 조선 사신들은 압록강을 건너며 목격한 청의 실체를 있는 그대로 보려 하지 않았다. 이제 그들에게 중원은 오랑캐가 풍기는 비린내가 진동하는 곳이었다. 조선 사신들은 사행로 곳곳에 남아 있는 명나라 인물들의 자취를 추념하며 탄식했다. 명이 사라진 이상 중원 어디에도 '중화 문명'은 없었다. 오로지 조선만이 그 계승자일 뿐이었다.

유몽인이나 박지원은 좀 달랐다. 그들은 사행 길에서 만난 평범한 중국인의 실생활에 눈을 돌렸다. 중국 사람이 조선 사람보다 유족하게 사는 이유를 찾으려 애썼다. 그들이 조선에는 없는 수레와 벽돌을 사용하고, 가축 사육에 열심이며, 조선 사람보다 '상업 마인드'에서 앞서 있다는 사실을 주목했다.

대다수 조선 지식인은 한족(漢族)의 중국만을 '짝사랑'했다. 하지만 명이 망한 뒤에도 많은 한족 지식인이 청 조정에서 벼슬하고, 그들을 통해 '중화의 가치'가 계승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18세기 이후 청을 다시 배워야 한다는 북학론이 등장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19세기 중반 이후 서양세력이 몰려들고 일본의 부상이 두드러지면서, 청 조정에 출사한 한족 관료들은 조선을 속방(屬邦)으로 삼으려고 덤볐다. 이제 청, 아니 중국은 조선에 '조공-책봉 체제'가 지닌 최소한의 신의마저 저버린 제국주의 국가일 뿐이었다. 중국의 변화를 제대로 읽어내지 못한 채 '짝사랑'한 결과는 너무 허망했다.

1894년 청일전쟁으로 조선과 중국의 관계는 끊어졌다. 이후 일본이 중국을 대신해 한국 지식인의 '표준'이 되었다. 1945년 해방 이후에도 한국 사회는 50년 가까이 중국과 단절됐다. 이 와중에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과거 조선의 지식인이 축적했던 중국에 대한 경험과 지적 유산은 방치됐다.

중국이 다시 떠오르고 있다. 그저 부상하는 정도가 아니라 전 세계가 '중국 충격' 앞에서 휘청거리고 있다. 오마에 겐이치 같은 일본의 미래학자는 중국의 부상을 '전후 일본이 처음 맞이하는 대전환'으로 규정하고 중국의 변화를 예측하지 못하면 일본의 미래는 없다고 경고하고 나섰다.

우리는 어떤가. 과거 일본은 바다라는 천연 장애물을 통해 중국의 군사적 위협을 피하고 문화 수입의 속도도 조절할 수 있었다. 한국과 중국 사이에는 '바다'가 없다. 중국의 변화를 예측하지 못하면 미래가 없는 정도가 아니라 생존이 불가능하다.

우리는 지금 '표준'의 전환을 강요받고 있다. 중국의 부상은 청일전쟁 이후 지금까지 우리를 지배했던 일본 표준, 미국 표준 대신 중국 표준을 다시 수용하라는 요구의 출발점이다. 중국이 동북공정을 밀어붙이는 까닭도 이 때문이다.

바야흐로 중국산 김치의 납 성분 함량을 걱정해야 할 만큼 중국은 우리 가까이 다가왔다. 허망하게 끝난 과거의 짝사랑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도 중국에 대한 연구를 다시 시작해야 할 때다.

<한명기 / 명지대 교수, 대외관계사>

(중앙일보 2005-1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