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사전에 패전은 없다, 연개소문

(1) 중국과 전투 '백전백승' 불멸의 장수

당나라는 고구려 정벌 실패 여파로 무너진 수나라를 뒤이은 나라로 중국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차지한 대국이었지만 건국 초기부터 고구려와 상대한다는 것은 무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고구려에게 화평을 제의했고 고구려는 심각한 논란 끝에 이 제안을 수락했다.  

고구려의 침공 위협이 사라졌다고 생각한 당나라는 내부적 안정을 회복하면서 곧바로 주변의 동돌궐과 서돌궐, 토번, 고창국(지금의 중국 신강성 돈황에 있던 나라) 등을 차례로 복속시켰다. 642년까지 당에 굴복하지 않은 나라는 고구려뿐이었다.

이 때 당나라를 세계 최강의 부국으로 만드는데 기초를 쌓았다는 태종 이세민이 등장한다. 중국 역사상 가장 화려하고 강대했던 시기 중의 하나가 바로 당 태종의 집권기였다. 그가 집권한 시기를 ‘정관의 치(貞觀之治)’라 할 정도로 영화로운 시대이므로 중국인들은 그를 모택동이 이끈 ‘문화혁명’에서 진시황제를 복권시키기 전까지만 해도 중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황제로 꼽았다.

당태종 "치밀한 준비 없이 고구려 정복불가"


고구려를 제외하고 변방을 모두 제압했다고 생각한 당의 태종은 곧바로 고구려 정복에 착수했다. 물론 당태종은 서두르지 않았다. 수나라와의 혈투에서 승리한 저력 있는 고구려이므로 치밀한 준비가 없이는 고구려를 정복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태종의 철저한 준비에도 불구하고 당은 고구려를 점령할 수 없었다. 그의 아들 고종도 고구려와의 전투에서는 결코 승리할 수 없었다. 그것은 ‘나의 사전에 패전은 없다’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중국과의 전투에서 단 한 번도 패배하지 않은 연개소문이 있었기 때문이다. 고구려가 배출한 걸출한 인물인 연개소문에 대해 3회에 걸쳐 설명한다.

   
 
고구려와 당의 전쟁 상황도, 연개소문 지휘하의 고구려는 당나라와의 전투에서 단 한 번도 패전하지 않았지만 그의 사후 아들들의 내분으로 멸망하고 말았다.


<고구려 정복을 위한 당태종의 집념>

전쟁이 일어나기 4년 전인 641년 태종은 직방낭중 진대덕(陳大德)을 고구려에 사신으로 보낸다. 직방낭중은 6부(部) 가운데 병부(兵部)에 속하며, 지도를 관리한다. 『삼국사기』에 기록된  그의 행적은 다음과 같다.

‘진대덕은 지경으로 들어와서 이르는 성읍마다 관수(官守)들에게 비단을 후하게 주면서 “나는 우아하고 산수를 좋아하니 이곳에 좋은 곳이 있으면 나는 구경만 하겠다”하니 관수들이 기뻐하며 이를 인도하니 온갖 곳을 유람하여 이르지 않은 곳이 없었다. 이로 인하여 자세한 부분까지 모두 알 수 있었고 또 한인(漢人)으로서 수나라에 종군하다 죽지 않고 살아 있는 자를 보면 그 친족들의 존망을 말하여 주니 사람마다 눈물을 흘렸다. (중략) 진대덕은 사신으로 온 것을 인연으로 우리나라의 허실을 엿보았으나 우리나라 사람들은 이를 알지 못하였다.’

진대덕은 고구려의 도로, 지세, 산세 등을 파악하는 염탐자로 현대로 따지면 간첩이었다. 그것은 『한원』에 기록되어 있는 그의 보고서를 보아서도 알 수 있다.

‘신성-남소성 70리, 평양성-국내성 670리, 평양성-오골성 700리, 안시성-은성 100리, 평양성-압록수 450리’

"신라 괴롭히면 전쟁 일으킨다" 고구려 협박


이와 같이 고구려에 대한 철저한 자료를 수집한 태종은 전쟁을 일으킬 명분을 찾는다. 우선 당나라와 신라의 우호적인 관계를 핑계 삼아 상리(商里) 현장(玄獎)을 사신으로 보내 신라를 괴롭히면 전쟁을 일으키겠다고 고구려를 협박했다. 당의 이런 협박에 연개소문은 굴하지 않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가 신라와 간극이 벌어진 지는 벌써 오래다. 지난번 수나라가 쳐들어왔을 때 신라는 그 틈을 타 우리 땅 500리를 빼앗아 그 성읍을 모두 차지했으니 그 땅을 돌려주지 않으면 싸움은 그칠 수 없을 것이다.”

이러한 보고를 받고 태종은 다시 644년에 장엄(蔣儼)을 보내 협박했지만 연개소문은 이를 일축하고 그를 토굴에 가둔다. 이로서 전쟁의 빌미를 제공했다.  

‘요동은 원래 중국 땅인데 수나라가 네 번이나 군사를 일으켰으나 취하지 못했다. 내가 지금 동정(東征)함은 중국을 위해 자제(子弟)의 원수를 갚고 고구려를 위하여 군부의 치욕(연개소문이 영류왕을 시해한 것)을 씻으려 할 뿐이다. 또 사방이 크게 평정되었는데 오직 고구려만 평정되지 않았으니 내가 더 늙기 전에 이를 취하려 한다.’

 
당의 공성용 신무기 당차, 당나라에서 사용한 최첨단 무기로 성벽이나 성문을 공격할 때 사용했다.


위의 내용을 보면 당태종의 명분은 크게 세 가지이다.

첫째 영류왕을 시해한 연개소문을 응징하고 백성을 구원한다는 것이고, 둘째는 고구려와 수나라와의 전쟁 때 전사한 백성의 원수를 갚는다는 것이며 셋째는 사방이 크게 평정되었는데 오직 고구려만 평정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신채호는 당태종이 수나라가 고구려에 패배한 이유를 면밀히 검토하여 다음과 같이 고구려를 공격할 작전을 세웠다고 적었다. 영류왕 시해부분은 뒤에 다시 설명한다.

첫째, 수양제의 패인은 정병(精兵)을 가리지 않고 오합지졸까지 동원하여 군사는 비록 400만에 달했다고 하나 실제로 전투에 참가할 장병은 수십만에도 못 미쳤다. 그러므로 태종은 10년 동안 철저하게 훈련시켜 양성한 군사 중에서 20만 명을 차출했다.

당군 고구려 작전 "요동 점령후 평양침입"


둘째, 수나라는 고구려의 변경부터 잠식해 들어가지 않고 곧바로 대군으로 평양에 침투했지만 보급선이 끊어지고 후원군이 없었다. 당군은 평양으로 곧바로 침입하지 않고 먼저 요동에 있는 각 고을을 먼저 점령한다.

셋째, 수나라는 진군 중에 자기가 먹을 양식을 장병이 각자 지참하고 추후에 수군(水軍)이 식량을 공급하기로 했으나 수군이 고구려군에게 패배하여 식량을 확보하지 못했다. 당 군은 소ㆍ말ㆍ양 등을 각 장병에게 분배하여 말로 이동하고 양식도 직접 지고 가지 않고 소로 운반하게 했다. 또한 전쟁터에 도착해서 수군이 공급하는 식량에 의존하지 않고 소ㆍ말ㆍ양 등의 고기로 이를 충당한다.

넷째 수양제는 오로지 수나라 군대로만 작전에 임했으나 당나라는 신라와 공수동맹을 맺어 고구려의 남방을 교란시키게 했다.

이와 같이 고구려와의 전투에 대비하여 주도면밀하게 준비한  태종은 정예군 6만 명을 유주에 집결시키고 세 갈래 길로 진군하기 시작했다. 총사령관인 이세적이 선발대 6만 명을 이끌었고 당 태종의 친정군 20만이 뒤를 따랐다. 또한 장량(張亮)이 수군 4만3천 명을 500척의 배로 이끌었다. 스스로 천하의 중심이라고 했던 당나라와 불과 30년 전 수나라를 멸망시킨 고구려가 결국 피할 수 없는 숙명의 전쟁은 시작한 것이다.

 
안시성 내부 모습, 안시성 산허리는 대부분 과수원으로 개간되어 있으며 제법 큰 마을이 있다. 멀리 산성이 보인다.


당시 당이 택한 전략은 수륙양면작전으로 수나라의 실패를 거울삼았으므로 매우 효율적으로 진군했다. 물론 이세적이 고구려의 보루라고 볼 수 있는 신성(新城) 공격에 실패했지만 육군은 개모성을 장악했다. 개모성 전투에서 고구려는 인구 2만 호와 양곡 10만 석을 잃었다. 장량은 요동반도의 끝 해안 절벽에 위치한 요충지 비사성도 함락시켰다.  

북쪽과 남쪽의 중요한 요새를 점령하여 기선을 잡은 당군은 비로소 요동방어망의 중심이며 정문이라 볼 수 있는 요동성으로 진격했다. 이때 당군이 고구려로부터 탈취한 군량미는 원정군이 기본적으로 갖고 있는 고질적인 식량문제를 확보할 수 있었고 태종휘하의 군대도 요하에 도착하여 사기를 높였다.

고구려 신성에 병력 4만 요동성 급파


고구려도 당군의 공격이 예사롭지 않음을 파악하고 곧바로 신성의 병력 4만을 요동성으로 급파했다. 마침 신성의 구원군이 요동에 도착했을 때 당군의 숫자가 많지 않았다. 이세적의 주력은 도착하지 않았고 당태종의 군대도 요하에서 발목이 잡혀 있었다.

기회를 포착한 고구려군은 당군을 공격하여 패퇴시켰다. 그러나 당의 장군인 도종은 도주하다가 고구려 군에 허점이 생기자 수천 기를 거느리고 고구려 군을 기습하였다. 이때 마침 이세적군의 주력이 도착하여 고구려군은 대패하고 신성의 지원군은 요동성에 합류하지 못하고 패주했다.

당군은 곧바로 수양제가 100만 명을 동원하고도 점령하지 못했던 요동성을 공격했다. 이 공격에 당은 지금까지 보지 못한 거대한 투석기를 동원했다. 수양제가 고구려군을 침공할 때 사용한 공성구가 효과를 보지 못한 경험을 살려 당군은 강력한 포차를 제작했다. 이 신형 포차는 300근 짜리 돌을 무려 300보(450미터)나 보낼 수 있었다. 고구려가 자랑하는 맥궁의 사격거리가 240보나 되지만 당군의 피해는 전혀 없이 고구려군이 일방적으로 피해를 보는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동성은 원군이 도착하지 않은 상태에서 요동군 자체로만 12일간이나 버텼지만 결국 요동성은 함락됐고 포로가 된 병사만 1만, 민간인 포로가 4만, 탈취당한 군량미가 50만 석이나 되었다.

다음 공격 목표는 고구려와의 전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백암성이었다. 백암성은 강으로 둘러싸여 삼면이 절벽이고 출입구는 서남쪽뿐이므로 수비에 절대적인 이점을 갖고 있었다.

백암성 성주 손벌음 당군과 내통 항복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암성은 쉽게 함락되었다. 성주 손벌음이 당군과 내통하여 항복했기 때문이다. 당태종은 항복한 손벌음을 계속하여 백암성주로 인정하는 등 선무정책을 베풀면서 항전의지를 불태우는 고구려군의 사기를 저하시키는데 치중했다.

다음 목표는 당연히 고구려의 요충지 건안성(建安城)이다. 그런데 건안성 공격을 앞두고 당나라의 진열에서 이견이 생긴다. 건안성이나 오골성이 중요하지만 안시성을 점령하지 않으면 배후로부터 공격을 받아 당나라의 군량미 수송에 차질이 생긴다는 것이다.

 
당태종 이세민, 중국 역사상 가장 유명한 황제 중에 한 명인 당태종은 고구려 정복에 실패하자 고구려 정복을 포기하라고 유언했다.
<안시성 혈투>

안시성은 원래 고구려가 요동을 정복한 404년에 쌓은 산성으로 고구려가 멸망한 후에도 3년이나 당군과 맞서 항쟁한 곳이다. 그만큼 안시성은 우리 민족에게 널리 알려진 전승지이지만 놀랍게도 그 구체적인 위치조차 근래까지 잘 알려지지 않았다.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신의주가 한눈에 보이는 중국의 국경도시 단동은 예로부터 중국에 들어가는 관문으로 한국전쟁 때 파괴된 압록강 철교가 아직도 남아있다. 단동을 지나면 지금도 고려문이라는 지역이 있고 그 문을 지나면 천혜의 요새인 봉황성이 나타난다. 과거에는 봉황성을 안시성으로 부르기도 했으나 연암 박지원이 사료를 근거로 하여 봉황성이 안시성이 아니라고 밝혔다.

근래에 확인된 바에 의하면 안시성은 산의 기복에 따라 산 능성을 둥글게 이어 쌓은 판축(版築)의 토성으로 여러 개의 산을 환형(環形)으로 묶은 고로봉 산성이다. 학자들에 따라 약간의 이견은 있으나 대체로 요령성 해성시 영성자촌에 있는 토성으로 추정된다.

안시성 북쪽 해성하 · 서쪽 해자 절벽 산성이점


안시성은 높고 험한 산위에 있지 않은데다가 성내 넓이는 동서 1킬로미터, 남북 0.5킬로미터에 총길이 4킬로미터 내외의 작은 성이다. 그러나 산은 비록 높지 않지만 북쪽으로는 해성하(태자하 지류), 서쪽으로는 팔리하를 해자로 한 절벽이 있어 산성으로서의 이점을 갖고 있다.

현재 성안에는 농경지와 마을이 있고 마을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두 군데의 성문 자리가 있으며 대부분 산허리는 복숭아 과수원으로 개간되어 있다. 안시성의 정확한 위치는 북위 40도 45분 32.6초, 동경 122도 47분 31초이며 외부인의 출입을 철저히 금지하는 표지판이 설치되어 있다.

원래 안시성은 북으로 백암성, 서쪽으로 건안성이 지켜주는 요충으로 평양성으로 향하는 통로를 지키는 고구려의 간성인데다가 이 지방의 철광을 지켜주는 보루였다. 지금도 이지역의 철과 해성 부근의 마그네슘 생산은 중국을 대표한다. 바로 수와 당이 고구려와 피나는 쟁탈전을 전개한 이유이다. 안시성 대첩과 연개소문에 대해서는 (「안시성대첩과 연개소문」, 국정브리핑, 2004.5.15)에 약간 설명하였지만 이를 보완하여 설명한다.

당태종은 백암성과 건안성을 함락한 여세를 몰아 안시성에 대한 총공격을 명하고 수항막(受降幕)을 설치하여 성 함락 후의 기념식까지 준비했다. 이때 동원된 당의 무기는 포차와 당차(撞車)였고 고구려 측도 포노(砲弩, 쇠뇌로 여러 개의 화살이 동시에 발사되는데 마차에 의탁하여 이동이 가능하며 주(周)이래 한(漢)대에 크게 활용되었음)와 포차를 동원했는데 학자들은 고구려와 중국의 무기는 비슷하였을 것으로 추정한다.

'안시성 혈전' 3개월간 치열한 대접전


안시성의 혈전은 6월부터 9월까지 3개월여에 걸쳐 치열한 대접전으로 진행됐지만 성은 끝내 함락되지 않았다. 일반적으로 성주인 양만춘의 전략에 의해 승리했다고는 하지만 ‘지형이 험하고 군졸이 용감했다’는 『신당서』의 기록을 볼 때 안시성 싸움의 승리는 안시성의 천혜적인 지형과 군졸들의 사기가 중요 요인인 것 같다. 이적(李勣)이 당태종에게 “성이 함락되면 남자들을 모두 죽이자”고 한 사실도 이 전투의 치열함을 말해 준다.

당군이 안시성 공격을 결정했을 때 안시성 안에는 주민을 비롯한 고구려인 10여만 명이 공격에 대비하여 주둔하고 있었다. 그러나 초기의 전투는 고구려에 매우 불리했다.

 
수ㆍ당의 공격에 맞선 고구려군.


연개소문은 안시성을 지원하기 위해 북부욕살 고연수와 남부욕살 고혜진이 이끄는 15만 명의 고구려 지원병을 급파했다. 지원병 안에는 최소 5천 명 이상 되는 말갈병이 포함되어 있었다. 욕살은 여러 성을 관장하는 광역 행정망의 책임자로 임용한 박사는 고구려의 광역행정망은 동서남북의 방위명을 딴 5부였으므로 이 중 남부와 북부의 병력이 총 동원된 것으로 추정했다.

그런데 고연수가 첫 전투에서 대패하고 휘하 장병 3만 6천명을 거느리고 당태종에게 항복했다. 당태종은 고구려의 지휘관 3500명은 당나라로 압송하고 고구려의 용병이던 말갈병 3300명은 생매장했다.

여기서 당태종은 매우 놀라운 결정을 내린다. 당태종이 항복한 나머지 고구려 병사를 모두 석방했다는 것이다. 고구려와의 전투에 그만큼 자신이 있었다는 이야기이다.  

이 부분에서 황 원갑은 안시성 결전을 앞두고 포로가 된 고구려 군을 풀어주었다는 『당서』의 기록은 전적으로 허구라고 지적했다. 그는 고연수의 항복에 따르지 않은 고구려 군이 온전히 남아서 연개소문의 지휘에 따라 끈질긴 유격전으로 당군의 보급선과 진격로를 차단하는 등 적 공격에 앞장섰을 것으로 추리했다.

고연수가 당태종에게 항복했는데도 그를 따르지 않는 병사가 많이 있자 이를 숨기기 위해 당태종이 마치 방면한 것처럼 위장했다는 것이다.

여하튼 고연수의 패배로 인한 고구려의 손실은 엄청나 당 군이 노획한 말이 3만 필, 소 5만 두, 명광개 5천 개, 기타 장비가 5천 점이었다.

고연수의 패배는 또한 고구려의 다른 성주에게 큰 충격을 주어 석황성, 은성 등이 점령당했으며 인근 주민들이 모두 도망 가 수 백리 사이의 인가가 모두 비었다고 할 정도였다. 그러나 학자들은 이것이야말로 고구려의 유명한 청야 작전의 일환으로 모든 사람들이 철수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설명한다.

안시성 고작 10만대군에도 항전태세 불태워


여하튼 당나라와 고구려의 운명은 안시성으로 좁혀졌다. 당나라는 100만 명이나 되는 대군이고 안시성에는 고작 10여 만 명이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도 안시성은 항복은 커녕 당태종과의 결전에 대비하여 항전태세를 불태우고 있었다. 이때가 7월이다.

고구려의 지원군을 섬멸한 당 태종은 항복하지 않으면 이적의 조언대로 성 안의 남자를 모조리 구덩이에 생매장하겠다고 협박했다. 또한 장병들에게 성을 함락하면 약탈을 허용하겠다고 사기를 북돋았다. 그러나 고구려는 이들의 심리전에 굴하지 않고 성벽에 올라가 북을 울리며 고함을 지르고 당 태종에게 온갖 욕설을 퍼부었다.

문제는 기후였다. 중국으로서는 1개월 내에 안시성을 반드시 함락시켜야 했다. 당태종의 원래 목표인 평양을 겨울 전에 함락시키려면 안시성을 1개월 내에 함락시켜야만 평양을 공격할 시간을 2〜3개월 확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당군의 작전은 안시성의 고구려 군이 예전부터 잘 알고 있는 것들이었다. 안시성을 도우려고 출동한 지원군이 패퇴했지만 2〜3개월만 버티면 당군은 스스로 물러나지 않을 수 없다는 점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고구려 군이 당군의 계략에 말려들지 않고 접전을 피하면서 고구려 특유의 지구전으로 대처하자 당 태종은 난공불락의 안시성을 함락하기 위해 방안을 짜낸다. 안시성 동남쪽에 연인원 50만 명을 동원하여 무려 60일 만에 거대한 토산을 완성했다(이 당시 당나라군이 쌓았다는 토산은 근래 위성사진으로도 확인되었다). 이 토산은 성벽보다 높았고 정상부에만 수백 명이 주둔할 수 있는 규모였다. 더구나 고구려의 성벽과의 거리는 수 장(1장은 3미터)에 불과했다.

대형 전쟁에는 항상 돌발사고가 생겨 승패를 결정짓는 경우가 많다는 말처럼 이번에도 극적인 사건이 생긴다. 당군이 토산을 통해 안시성을 공격하기 직전에 토산이 안시성 쪽으로 무너지면서 고구려 성벽 일부도 무너져 토산과 성이 저절로 연결된 것이다.

 
해룡천 산성 정상, 일반적으로 안시성으로 추정하는 영성자산성이 매우 협소하다는 것 등을 근거로 안시성이 해룡천 산성이라는 주장도 있다(김일경 사진).


고구려 성벽밖 토산점령…당군 접근 못해


이것이 고구려 측에겐 기회였다. 원래 토산이 안시성과 연결되었으므로 당군에 유리했음에도 불구하고 고구려가 재빨리 성벽 밖으로 나와 이를 점령하고 나무를 쌓아 불을 지르니 당군은 접근조차 하지 못했다. 이때의 토산의 수비 책임자인 부복애는 마침 자리에 없었는데 추후에 토산을 지키지 못한 죄목으로 참수되었다. 태종은 패전의 결과가 어떤 것인가를 보여주기 위해 부복애의 잘린 목을 군사들에게 돌렸다.

당군은 최종적으로 3일에 걸쳐 안시성을 맹공격했으나 안시성은 끄떡도 하지 않았다. 당 군은 더 이상 안시성을 공략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퇴각한다.

당군이 곧바로 철수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은 기후가 고구려를 도왔기 때문이다. 예년에 비해 추위가 일찍 찾아와 풀이 마르고 물이 얼어 병마가 더 이상 머무를 수 없게 된 것이다.

이 당시의 기록은 다소 연극의 한 장면과 같다. 당태종이 퇴각할 때 안시성주인 양만춘이 성에 올라 절을 하자 황제가 안시성을 굳게 지킨 것을 가상히 여겨 비단 100필을 보냈다고  『삼국사기』에도 적혀있다.

그러나 단재 신채호는 만주 토착민 사이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고 기술했다.

‘당 태종이 철군을 명하자 안시성주 양만춘이 성문을 열고 나와 공격하는 바람에 당군이 큰 혼란에 빠져 인마가 서로 밟혔는데, 그 와중에 당 태종의 말이 진흙 구덩이에 빠져 허우적거렸고, 급기야 왼쪽 눈에 화살을 맞고 사로잡힐 위기에 몰렸다. 당의 장수 설인귀(薛仁貴)가 달려와 그를 구출했다’’

안시성주 양만춘에 대해서는 많은 설이 있다. 성호 이익은 『성호사설』에서 하맹춘이란 사람이 지은 『여동서록』에서 안시성주는 양만춘이라고 기록했다고 적었다. 그런데 하맹춘은 명나라 때 사람이라 시대가 매우 떨어진다. 그러므로 학자들은 안시성 전투가 중국에서 워낙 유명한 사건이므로 오랫동안 구전되어 오다가 하맹춘이 구전에서 채집한 것이 아닌가 추측한다.

<꼬리를 무는 안시성 위치>

지금까지의 설명은 안시성을 영성자산성으로 비정하여 설명한 것이다. 그러나 학계 일각에서는 아직도 영성자산성이 안시성이 아니라는 주장이 있다.

"영성자산성 안시성 아니다" 안시성 미스터리


영성자산성이 안시성이 아니라는 데는 여러 근거가 있다. 첫째, 산성의 지형이 험하지 않고 산도 높지 않으며 토성이어서 견고하지 않다. 성벽이 좁은 데는 너비가 2미터에 지나지 않는다. 당시 당나라의 포차ㆍ충차의 경우 2미터 정도의 흙덩어리는 얼마든지 뚫을 수 있는데 이런 토성에서는 당나라 100만 대군의 공격을 3개월이나 막아낼 수 없다는 것이 첫 번째 지적이다.

둘째는 영성자산성의 규모가 너무 작다는 것이다. 성내는 주로 좁은 협곡으로 이루어져 있고 평탄한 곳이 적어 10만 명의 군사가 주둔할 수 없다는 것이다.

셋째, 기록에 의하면 산성 동남쪽에 인공 토산이 있다는데 그 토산은 너비가 20미터도 채 안되고 산등성 중간이 바로 동쪽 성벽의 토대로 보인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인공위성이 촬영했다는 영성자산성의 토산 흔적도 확실한 증거가 되지는 못한다고 지적한다. 일부 학자들은 이 성벽의 경우 인공 토산이 아니라 동쪽 성벽이 허물어진 흙더미로 추정하기도 한다.

중국의 일부 학자들도 영성자산성이 안시성이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는데 사학자 김 일경은 만주 대석교 인근의 해룡천산성이 안시성이라고 주장했다.

해룡천산성은 산성을 견고하게 쌓은 것은 물론 둘레의 길이가 3000여 미터나 된다. 산성 안은 넓고 수원이 풍부하며 성 안에서 전형적인 고구려의 붉은 색 무늬기와가 많이 발견되었다. 안시성은 적정을 파악하는 곳으로 특별히 중요성이 있는데 성 북쪽의 해룡천 주봉과 그 가운데의 산등성이가 점장대 역할을 했으며 성내에도 두 곳에 점장대가 설치돼 있다.

성에서 서쪽으로 약 4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초소(보루성)가 있는데 현지 사람들이 그곳을 ‘고려성’으로 부르는 것도 심증을 굳혀 준다는 것이다. 아직 이 부분은 학계에서 정설로 확정되지 않았는데 근래에 인공위성 촬영으로 영성자산성에 무너진 토산이 발견되자 영성자산성이 안시성이라는 과거의 설이 보다 지지를 받고 있다.

실제로 필자가 안시성을 방문했을 때도 10여 만 명이 거주하기에는 다소 작은 감을 받았다. 그러므로 일부 학자들은 안시성(영성자산성)에서 당나라와 혈투를 벌였던 고구려 군은 10만 명이 아니라 다소 적은 인원이었을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이종호 / 과학저술가

(국정브리핑 2005-9-26)

(2) 4천년 역사에 첫째로 꼽을 만한 영웅

<당태종을 추격한 고구려>

당태종이 비단을 양만춘에게 주고 퇴각했다고 하지만 학자들은 당태종의 행보에 매우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첫 번째는 당태종이 선정한 퇴각로가 정상적이 아니라는 점이다. 중국과 고구려의 쟁패지로 볼 수 있는 요하(遙河)는 발해만(灣)으로 들어가는 하류로 내려갈수록 강폭이 넓어진다. 요하 하류는 지금도 비가 오면 강물이 범람해서 곳곳에 자연 늪이 생길 정도이다. 대와시(大洼市)라는 지명도 늪지의 갈대라는 뜻에서 유래했고 곳곳에 못이 많아 이 지역을 요택(遙澤)이라고 부르는데 당시에는 지금처럼 둑이 없었으므로 요하 하류는 전체가 늪지대였다. 자치통감과 삼국사기에 당시의 상황이 잘 설명돼 있다.

황제가 직접 말채찍으로 나무를 묶어


‘황제는 1만 명의 군사에게 풀을 베어 진흙길을 메우게 하고 물이 깊은 곳에서는 수레를 다리 삼아 건너게 했다. 황제가 직접 말채찍으로 나무를 묶어 이 일을 도왔다. 발착수(渤錯水)에 이르니 바람과 눈보라가 몰아쳐 군사들이 많이 얼어 죽었다. 당 태종은 (원정이) 성공하지 못했음을 깊이 뉘우치고 탄식하여 이르되 위징(魏徵)이 만일 있었다면 나로 하여금 이 원정을 하게 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고구려의 전략은 청야(淸野) 전술이다. 전쟁이 일어나면 적군이 성 밖에서 양식을 구할 수 없도록 들판을 모두 태워버리고 산성 안으로 들어간 후 길목의 요지마다 쌓은 성을 이용해 적군의 보급로를 차단하는 것이라고 앞에서 설명했다.

고구려의 이런 전략을 잘 알고 있는 당나라는 수군을 활용하여 수륙양면작전을 채택했다. 육로로 돌파하기 힘든 요하전선에 수군을 이용하면 많은 군사와 군량미를 운송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안시성 전투 당시 당나라군은 요동반도 아래에 있는 비사성을 공격했다. 기암괴석으로 둘러싸인 비사성은 고구려 해안 방어의 전진기지였다. 요동반도를 중심으로 동서의 바다를 감시할 수 있는 지리적인 위치 때문에 전쟁이 발발하자 당나라 수군이 제일 먼저 비사성을 공격하여 점령하고 배를 정박시켰다. 비사성을 교두보로 선택하고 곧바로 압록강 어귀로 향하려 했음이 분명하다.

당나라 수군, 고구려 수군에 저지 의미


 
연개소문.
당태종이 고구려를 침략하기 전에 수륙양면 작전을 일찍부터 예상했고 또 그의 작전대로 수군과 육군을 동원하여 고구려의 침공에 나섰다는 것이 정설이다. 그런데 그 후에 당나라의 수군의 역할을 적은 기록은 어디에도 없다. 이것은 당나라 수군이 고구려 수군에게 저지당했음을  의미한다.

학자들에 따르면『구당서』에 고구려군 만여 명이 오호도(烏胡島)를 공격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오호도는 당이 요동반도 길목에 만든 여러 수군기지 중 하나이다. 그러므로 이 기록은 고구려의 수군이 당나라의 수군을 격파하거나 적어도 꼼짝할 수 없도록 만들었음을 시사해준다.

'자치통감'과 '신당서'의 기록도 이를 증빙하는데, 자치통감에는 '645년 11월 수군 총관 장문한을 참수했다', 신당서에는 '수군 책임자 장량을 옥에 가두었다'고 적혀있다.

이와 같이 당나라 수군 책임자들이 전쟁 후 모두 처벌된 것은 이들이 고구려의 수군에 완전히 격파 또는 봉쇄되었기 때문으로 추측된다.

당나라 수군 비사성서 봉쇄…늪지대 건너 퇴각


그 당시의 시나리오는 안시성 전투 당시 북쪽에서는 고구려 육군이 당나라군을 압박했고 수군은 비사성 일대에 주둔한 당나라 수군을 철저히 봉쇄했다. 결국 이와 같은 여건 때문에 당태종이 늪지대인 요택을 건너 당나라로 퇴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당태종이 계속 요택으로 도망갈 수밖에 없었던 두 번째 이유는 고구려 군이 보다 공격적이었다는 사실이다. 기록에는 퇴각하던 당 태종이 만리장성 끝에 있는 임유관(臨渝關)에서 태자의 마중을 받고 처음으로 옷을 갈아입었다고 한다. 그만큼 태종의 퇴각이 긴박했다는 것을 뜻한다.

당시 당군에 잡힌 고구려 첩자는 막리지(연개소문)가 조양(朝陽)에 올 것이라고 전했다. 임유관 인근에 있는 조양은 중원으로 가는 길목이다. 중국인민대학교의 황 유복 교수는 북경 인근에서 고구려군의 활동을 증명해주는 단서로 당나라 군사의 창고였던 황량대(謊糧臺)에 주목한다.

황량대는 하북성 풍윤현 평원에 솟아오른 모래언덕 위를 말하는데 그곳은 당나라군이 고구려 군을 속이기 위해 만든 가짜 양곡저장지로 임유관에서 북경 인근까지 모두 10개가 있었다. 당태종이 이런 쇼를 벌인 것은 고구려가 적어도 1일 권 안에 있음을 반증한다는 것이다. 황 교수가 발견한 황량대를 연결하면 고구려 군이 활동하던 곳은 북경 근처로 추정된다. 당시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본다면 연개소문이 이끄는 고구려 군대는 중국 깊숙이 지금의 북경까지 들어갔음을 증명한다고 볼 수 있다. 고구려에게 북경이 결코 먼 땅이 아니었다.

고구려군 이미 북경서 1시간 거리 고북구까지 진출


고구려군은 이미 북경에서 1시간 거리에 불과한 고북구까지 진출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그들은 서기 49년인 5대 모본왕 때 ‘장수를 보내 한나라의 북평, 어양, 상곡, 태원 등지를 습격했다. 또한 광개토대왕 때에도 고구려가 어양을 공격한 적이 있다. 신채호는 북경 인근의 순의현(順義縣)에 고려영(高麗營)이라는 표시가 많은데 그곳이 고구려 군이 주둔했던 곳이라고 주장했다.

반면 이 지역의 역사를 기록한 '북경 순의현지'에는 고려영의 유래가 당나라 때 고구려인이 이주해왔기 때문이라고 기록돼 있다. 이 기록에 의하면 고구려군의 주둔지였다는 명확한 증거는 되지 못하지만 많은 학자들은 고구려  군이 만리장성 너머 북경까지 당 태종을 추격한 것은 틀림없다고 믿고 있다.

 
당태종의 침입경로와 고구려의 대응, 당 태종의 비정상적인 퇴각로는 고구려군이 당나라군을 중국 중원까지 추격하였음을 추정케 한다.


중국 역사상 가장 훌륭한 황제로 알려진 당 태종이지만 고구려 원정에서는 처절한 참패를 당한 것이다. 원래 당태종의 고구려 원정은 처음부터 신하들의 극심한 반대에 부딪혔다. 자치통감에는 이 당시 신하들의 반대 이유가 적혀있다.

‘요동은 길이 멀어 군량 수송이 어렵고 고구려인들은 수성(守城) 전술이 뛰어나 성을 쉽게 함락시킬 수 없습니다.’

당태종 유언 "고구려 공격 그만두라"


그러나 645년 고구려에 침공했다가 철저한 패배를 당하고 철군하지 않을 수 없었던 당태종은 연개소문에게 당한 치욕을 잊을 수 없었다. 그는 2년 후인 647년 이세적 등을 시켜 다시 고구려를 공격했으나 실패했고 이듬해 다시 설만철을 시켜 압록강 하구의 박작성을 공격했지만 역시 실패한다. 드디어 649년 5월 당 태종은 고구려를 정복하지 못한 채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기고 숨을 거두었다.  

“고구려 공격을 그만두라(罷遼東之役). 아비의 실패를 되풀이하면 사직을 지키기 어렵다.”

당태종의 사망에 대해서는 많은 설이 있는데 단재는 '구당서', '태종본기', '신당서', '자치통감'에 나오는 당 태종의 사인(死因)이 서로 다른 것을 역사 왜곡의 증거라고 설명했다. 당 태종의 사인을 내종(內腫), 한질(寒疾), 이질(痢疾) 등으로 서로 다르게 적었는데 황제의 죽은 병을 늑막염인지 장티푸스인지 모르게 기록한 것은 고구려인의 화살에 맞은 치욕을 기록에 남기지 않으려는 의도라는 주장이다. 특히 요동에서 얻은 병 때문에 사망했다는 기록은 모두 동일한 것으로 보아 이는 양만춘의 화살의 여독으로 죽은 것이 분명하다는 설명이다.

〈고구려의 우환은 백제신라가 아니므로 당나라를 공격하자〉

안시성의 혈투 기간 동안 성주는 양만춘이었으므로 그가 당나라군을 격퇴한 장본인이지만 당시 당나라와의 혈투를 총지휘한 사람은 연개소문으로 연개소문이 진정한 안시성 대첩의 승리를 갖고 온 인물이라 볼 수 있다.

삼국사기에는 잔인하고 포악한 독재자로 그려져


그러나 연개소문이 당나라의 100만 대군에 맞서 승리한 고구려의 장군임에도 불구하고 삼국사기에는 642년 쿠데타를 일으켜 영류왕을 비롯하여 수백의 대신들을 죽이고 665년 사망할 때까지 23년간 한 마디로 잔인하고 포악한 독재자로 군림했던 인물로 그려져 있다. 삼국사기에 적힌 내용은 다음과 같다.

‘그 부친인 동부(東部) 대인(大人) 대대로(大對盧)가 죽자 개소문이 마땅히 그 자리를 잇게 되었는데, 나라 사람들이 그 성품이 잔인하고 모질다고 미워하여 그 자리를 얻지 못했다. 소문은 여러 사람들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사죄하고 그 자리에 임시로 있어 보아서 만일 불가한 일이 있으면 폐하여도 후회하지 않겠다고 간청하므로 여러 사람들이 가엽게 여겨 허락하였다.

그런데 아버지의 뒤를 이은 개소문은 여전히 흉악무도함으로 여러 대인이 왕과 더불어 비밀히 의논해 죽이려다가 일이 누설되었다. 연개소문이 휘하의 군사를 다 모아 사열하는 것처럼 꾸미고 성의 남쪽에 주찬(酒饌)을 성대히 베풀어 대신들을 초청했다. 그들이 오자 모두 죽이기를 백여 명이나 하고 궁중으로 달려가 왕을 시해하고 몇 토막으로 잘라 개천 속에 버렸다.’

 
박작성 전경, 천혜의 요충인 박작성을 당태종은 철저하게 공격했으나 결국 점령하지 못하고 퇴각했다. 현재의 장성은 명나라때 재건축 됐다.


이 기록에 의하면 연개소문은 간교한 꾀로 대인들을 모이게 한 후 왕과 함께 죽이고 그 시신을 토막 낸 희대의 악한이다. 그가 정변을 일으킨 것도 그의 흉폭한 성격을 두려워한 국왕과 대인들이 그를 죽이려 한 데 대한 반발에서였다.

‘개소문은 전국을 호령하고 나라 일을 제멋대로 하며 위엄이 있었는데, 몸에 칼 다섯 자루를 차고 있어 좌우 사람들이 감히 그를 쳐다보지 못했다. 말에 오르내릴 때는 항상 귀인무장을 엎드리게 하여 발판으로 삼았고 출행할 때는 반드시 대오(隊伍)를 벌여서 앞에서 인도하는 자가 긴 소리로 외치면 사람들이 구렁텅이나 골짜기라도 가리지 않고 달아났으니, 나라 사람들이 심히 괴롭게 여겼다’

고구려, 당에 화평 VS 강경 세력 양립


그런데 이들 설명이 퍽 과장되었다는 것은 고구려 남자들이 일상적으로 몸에 칼 다섯 자루와 숫돌을 차고 다녔다는 '학원'의 일반적인 남자들 복식 묘사에 비추어 알 수 있다.  

근대에 들어와서 연개소문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은 그가 살던 당시의 특별한 세계 정황 때문이다. 당시 고구려는 위로는 당, 아래로는 신라와 긴장관계에 있었다. 이 중에서도 수나라를 멸망시키고 새로 등장한 당나라는 고구려의 안보를 위협할 정도의 대제국이었다. 고구려는 당나라와 외교적인 유화책을 유지하여 평화를 구가하자는 세력과 당에 저자세를 취할 필요가 없다는 강경한 세력이 양립되어 있었다.

고구려의 영류왕은 수나라를 격파한 영양왕의 동생인 건무이다. 그는 을지문덕과 함께 수나라를 격파하여 고구려를 지켰지만 을지문덕과는 전략적인 면에서 다소 다른 견해를 갖고 있었다.

영류왕은 왕이 되기 전부터 강성한 중국과는 화평을 청하고 신라와 백제를 먼저 굴복시켜야 한다고 강조한 반면 을지문덕은 수나라가 대 고구려 전 패전과 반란으로 힘이 줄어들었으므로 중국 대륙을 공격하여 이를 장악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영류왕땐 을지문덕 고립…신라 · 백제 공격


그런데 영류왕이 영양왕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르자 당나라와 화평을 하는 것이 최우선이라며 을지문덕을 고립시키고 당나라와의 화평에 앞장섰고 신라와 백제를 줄기차게 공격했다.

 
고구려를 침공한 당나라 군대, 당태종과 고종은 철저하게 고구려를 분석하고 군을 재편하여 공격했으나 모두 실패했다.
연개소문은 을지문덕과 같이 영류왕의 정책을 강력히 반대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고구려의 우환이 될 것은 당이지 신라와 백제가 아니다. 지난날 신라와 백제가 동맹하여 우리나라의 땅을 빼앗은 적이 있으나 이제는 신라와 백제가 서로 원수가 되었으므로, 남쪽에는 견제책을 사용하여 신라와 동맹하여 백제를 막거나 백제와 동맹하여 신라를 막는다면 남쪽의 걱정이 없게 되므로 이 틈을 타서 당과 결전하는 것이 옳다. 서쪽은 우리나라와 언제나 양립할 수 없는 나라이니 이것은 지난 일을 되돌아보면 분명히 알 수 있다. 왕년에 몇 백만 수나라 군사를 격파했을 때 곧 대군을 내어 토벌했다면 중국을 평정했을 것인데 그 천재일우의 좋은 기회를 놓친 것이 아쉽기 그지없다.’

양국 교류 확대…도교 수입 당 국학에 유학생 파견도


영류왕 5년(622) 당은 고구려에 남아 있는 수나라군 포로들을 돌려보내달라고 요청했다. 고구려는 전국을 수배하여 1만 명의 생존자를 찾아서 송환했다. 물론 이 숫자가 모두가 아닌 것은 분명하다. 641년 진대덕이 곳곳에서 살고 있는 수나라 포로들을 만났다고 했는데 이들 중에는 결혼하여 가정을 꾸미고 있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중엔 송환을 거부한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그래도 1만 명이나 됐으면 고구려로서는 대단한 성의를 보인 것이다.

이후 양국의 교류는 확대되어 문화·종교·학문에서 괄목할 만한 진전을 보인다. 고구려는 당에서 도교를 수입했고 당의 국학에 유학생을 파견했다.

<고구려의 일급비밀인 지도를 중국에 보낸 영류왕>

영류왕이 중국의 요청이라면 모든 것을 들어 줄 자세가 되어 있었던 것은 고구려가 중국과 평화 정책을 유지하는 한 적어도 중국이 고구려를 침략하지는 않으리라는 판단이었다.

그러므로 영류왕 11년(628) 고구려의 일급비밀이라 볼 수 있는 고구려 영토의 지도인 봉역도(封域圖)를 당에 보냈다. 왕이 고구려의 일급비밀이라고도 볼 수 있는 지도를 중국으로 보내자 고구려의 강성파들은 모두 분개했다.

고구려 일급비밀 영토지도 당에 보내


전통적으로 고구려는 험준한 산악지대를 거점으로 중국과 전투하였고 중국도 이를 두려워 했는데 고구려의 지도를 보냈다는 것은 고구려를 침투할 수 있는 길을 알려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설상가상으로 631년에는 당의 사신인 장손사(長孫師)가 와서 수나라 전사자들의 유골을 수습해 매장하고 위령제를 지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수나라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것을 기념해 세운 경관(京觀)을 당장 허물어 줄 것을 요청했다. 경관은 수나라 전쟁 때의 전몰장병의 유해를 묻은 전몰기념묘지 또는 기념탑 같은 것으로 고구려인들의 자부심이 담긴 성역으로 볼 수 있다.

영류왕은 그들의 요청대로 경관을 헐어버린 것은 물론 640년에는 세자 환권(桓權)을 당에 보냈다. 세자의 입조는 고구려 역사상 매우 획기적인 조처로 볼 수 있다. 중국에서 왕이나 세자 혹은 왕자들이 친히 입조할 것을 요구한 것은 장수왕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왕이나 세자의 입조는 위험부담도 크지만 그만큼 상징성도 높은 것이 사실이다.

연개소문 당나라에 드디어 화친 주장


그런데 고구려는 항상 이를 거절했고 이것이 양국 충돌의 빌미가 되곤 했는데 이 해에 드디어 이것이 이루어진 것이다. 이런 일련의 사태에 직면하여 당시의 실권자인 연개소문도 당나라와의 화친을 찬성했다는 주장도 있다. 그것은 연개소문이 영류왕에게 도교의 도입을 건의하자 영류왕이 자신의 이름으로 도사의 파견을 당나라에 청한 것으로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도교는 노자가 당나라 왕실의 조상이라는 것 때문에 당나라 왕실로부터 적극적인 지원을 받고 있었다. 영류왕의 요청이 있자 당은 곧바로 도사를 고구려에 파견하여 도덕경의 강론이 고구려 궁전에서 매일 이루어지게 했고 마침내 세력은 불교의 사찰들이 도사들이 머무는 도관(道館)으로 바뀔 정도로 강해졌다. 연개소문이 고구려에 도교를 도입하도록 한 것은 당나라의 비호를 받고 있는 도교를 도입해 당나라와 외교적 마찰을 일길 생각이 없음을 보여주려는 의도가 있음을 나타낸 것이다. 물론 중국에서 유교ㆍ불교ㆍ도교가 함께 발전하고 있는 것을 보고 고구려 문화를 당나라와 같은 수준으로 끌어올리려 보려는 의도도 있었음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신채호는 이 부분을 거짓이라고 단정했다).

답례사절 진대덕은 고구려 지형 · 산천 염탐 간첩


 
고구려 영류왕, 태자시절(건무) 당나라와의 전투에서 혁혁한 공을 세웠으나 왕위에 오른 후 당나라와의 화친 정책으로 연개소문과 갈라서고 결국 쿠데타로 살해되었다(그림 성병예).
그런데 문제는 당나라였다. 당나라는 초창기 고구려와 평화협상을 벌여 시간을 끌면서 638년부터 토번ㆍ서돌궐ㆍ고창국 등을 복속시킨 후 고구려와 일전을 불사할 계획을 착착 진행시키고 있었다. 우선 641년 당은 진대덕을 세자의 입조에 대한 답례 사신으로 고구려에 보냈다. 그런데 진대적의 본 목적은 답례 사절이 아니라 고구려의 지형과 산천을 염탐하기 위한 간첩이었다는 것은 앞에서 이미 설명했다.

진대덕이 “고구려가 고창의 멸망을 듣고 매우 두려워하여 사신 접대가 매우 후했습니다.”라고 보고하자 당태종은 이렇게 말했다.

“고구려는 본래 4군(郡)의 땅이다. 내가 수만의 군대를 내어 요동을 치게 되면 그들은 반드시 모든 국력을 기울여서 요동을 구원하러 나올 것이다. 이때에 수군을 동래(東萊)에 보내 바닷길로 평양으로 가서 수군과 육군을 합치면 고구려를 점령하기 어렵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산동 주현(州縣)들이 전쟁의 상처가 아직 회복되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그들을 괴롭히지 않으려 한다.”

당태종은 고구려와 아무리 평화협상을 하더라도 그것은 위장전술에 지나지 않으며 제반 여건만 갖추어지면 고구려를 침공하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임 용한 박사는 당태종이 고구려와 화해한 것처럼 제스처를 쓴 것은 중국 내부의 사정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당태종은 644년 10월 고구려와의 전쟁을 선포하는데 이는 수양제가 제2차 고구려 원정에서 대패한지 30여년이 지나서였다.

수양제는 당시 전 국민의 5퍼센트가 넘는 인원을 동원했는데 이때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다. 간단하게 말해서 중국인 특히 고구려와 인접한 산동지역의 주민 일가친척 중에서 이런 상처가 아물려면 적어도 한 세대는 족히 지나야 한다는 것이다.

연개소문 중국 고구려 침공 파악…영류왕 저자세 강한 불만


아무튼 당태종이 고구려를 침공할 계획을 착착 진행시키자 무장 출신의 연개소문은 중국의 간교를 파악하고 영류왕의 저자세에 강한 불만을 품었다. 영류왕의 시해사건이 바로 여기서 비롯됐다는 것이 근래 학자들의 주장이다.

연개소문도 초창기에는 어느 정도 당나라와 유화정책을 펼치는 것이 좋을 것으로 판단했으나  당태종이 강경책으로 나오자 그가 제거했던 강경파들을 포섭하여 강경론자들 전면에 나서게 된 것이다.

말하자면 연개소문은 독자적인 천하관을 지닌 정치세력을 대표하는 인물로 볼 수 있다는 설명이다.

그 무렵 남쪽에서는 백제와 신라가 치열한 접전을 벌이고 있었다. 의자왕이 즉위 이듬해인 642년 친히 군사를 이끌고 신라의 40여 성을 빼앗았고 장군 윤충은 대야성을 함락하고 김춘추의 사위인 성주 김품석 내외를 살해했다.

신라보다 백제와 손잡는것이 더 유리 판단


다급해진 선덕여왕은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는 한편 김춘추를 고구려로 보내 구원을 요청했다. 하지만 김춘추는 연개소문에 의해 감금당했다가 아무 소득도 없이 도망치다시피 귀국해야 했다. 연개소문은 신라보다 백제와 손잡는 것이 더 유리하다고 판단했다. 학자들은 그 당시 만약 고구려가 백제를 적으로 삼는다면 백제와 당의 수군이 황해에서 연합함대를 형성해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갈 경우 대안이 마땅치 않았을 것으로 생각했음이 틀림없다는 설명했다.

<쿠데타 아닌 반정>

연개소문이 삼국사기에서 천하의 악한으로 묘사된 데는 편찬자들이 이용했던 거의 모든 자료가 자치통감, 북사, 수서, 구당서, 신당서 등 중국 측 자료이기 때문이다. 삼국사기에 그려진 연개소문의 모습은 그에게 패한 당나라 인들이 증오심으로 묘사한 연개소문의 모습이다. 특히 중국 송나라 사마광이 11세기 후반에 편찬한 자치통감에 많이 의지했다. 이것은 다음 사실로도 알 수 있다.

 
신채호의 옥중 사진, '역사라는 것은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이다'라는 명제를 내걸어 민족사관을 수립, 한국 근대사학의 기초를 확립했으나 독립자금 조달차 타이완으로 가던 중 체포돼 여순감옥에서 옥사했다(자료 snow4343).
연개소문(淵蓋蘇文)의 성은 연씨인데 삼국사기에는 천씨(泉氏)로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중국 측 자료를 그대로 옮겼기 때문이다. 현재 중국 하남성 개봉도서관에는 연개소문의 아들인 남생 등의 묘지명이 보관돼 있는데 연개소문 일가의 묘소와 묘지명이 출토된 곳은 하남성 낙양의 북망산이다. 그 곳의 묘지명도 한결 같이 성이 천씨이다.

이것은 당나라 고조의 이름이 이연(李淵)이기 때문에 기휘(忌諱) 즉 이를 피하기 위해 연씨를 천씨로 둔갑시킨 것이다. 자치통감은 ‘고려 동부대인 천(泉)개소문이 그 왕을 시해했다. 천은 성이며 개소문이란 자는 혹 개금이라고도 불린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는 신당서의 내용을 그대로 적은 것으로 삼국사기도 연개소문을 고구려인들이 그린 연개소문의 참모습이 아니라 그의 적이었던 당나라 인들이 변모시킨 연개소문의 모습을 담고 있다.

신채호 중국 발로 누비며 연개소문 활약상 추적


연개소문에 대해서는 단재 신채호가 집중적으로 연구했다. 그는 중국 곳곳을 발로 누비며 현지의 각종 전승(傳承)과 비사들을 중심으로 연개소문의 활약상을 추적했다. 신채호의 결론은 연개소문이 ‘4천 년 역사에서 첫째로 꼽을 만한 영웅’이라는 설명이다.

연개소문의 평가에서 중요한 것은 그가 일으킨 쿠데타가 승리한 반정으로 볼 수 있는지 또는 실패한 것인지에 따라 다르다.

역사적으로 고구려는 제26대 영양왕(재위 590~618) 때 수(隨) 문제의 위협에 맞서 수나라를 선제공격했으며, 수문제와 수양제와 벌인 전투에서 승리하여 수나라를 멸망케 했다. 그런데 영양왕의 뒤를 이은 영류왕(왕자 때 이름 건무)은 수나라와의 혈전 당시 수나라의 수군을 전멸시키는 등 수나라에 큰 타격을 주었지만 고구려 역시 많은 피해를 본 것은 사실이므로 이를 시급히 수습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국내 문제 해결을 최우선으로 생각하고 중국과 전투할 여력이 생길 때까지 당나라와의 화해에 몰두했다는 것도 어느 정도 수궁이 가는 이야기다.

그런데 영류왕으로서는 연개소문은 아무래도 자신의 사람이 아니다. 그러므로 영류왕은 연개소문을 제거하기 위해 그를 장성(長城) 축조 감독이라는 한직으로 명령을 내리고 임지로 출발하기 전 왕에게 하직인사를 하러 올 때 체포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연개소문, 영류왕 · 대신 찾아내어 살해 혁명


하나 이 계획이 누설되자 연개소문은 역으로 평양성 남쪽에서 크게 열병식을 거행하면서 180여 명의 대신들을 유인한 후 그들을 모두 제거하고 왕궁에 있던 영류왕도 찾아내어 살해하는 정변을 일으켰다. 그리고 그의 아우인 보장을 새 왕으로 내세웠다. 이 덕일 박사는 영류왕이 대당 강경파를 무력화시키기 위해 연개소문을 제거하려고 했으나 연개소문이 이를 정변으로 대응했으므로 이는 고구려의 건국이념을 되살리자는 ‘반정’이자 혁명이었다고 평가했다.

연개소문이 정변을 일으켰다는 소문을 듣고 당태종은 쾌재를 불렀다. 고구려를 칠 명분을 찾고 있던 그에게 연개소문의 영류왕 살해가 절호의 기회를 만들어 주었다.

당 태종은 고구려 침공을 결심한 후 전쟁에 반대하는 신하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근본을 버리고 곁가지를 취하며, 높은 데를 버리고 낮은 데를 취하며, 가까운 것을 버리고 먼 것을 취하는 이 세 가지는 모두 좋지 않은 것인데, 고구려를 치는 것이 이러함을 나도 안다. 그렇지만 연개소문은 임금을 시해하고 대신들을 도륙했으니 한 나라의 백성들이 모두 목을 늘이고 구원해 줄 것을 기다리고 있다.”

당 태종은 자신이 고구려와 전쟁을 벌인 명분을 얻은 것이다.

그러나 당 태종 이세민에겐 이것은 명분이 될 수 없다. 이세민은 당나라를 세운 고조 이연의 둘째 아들이었고 그의 형 건성이 태자였다. 그런데 그는 624년 수도 장안의 북문인 현무문에서 황태자 건성과 동생 원길을 죽이는 소위 ‘현무문의 변’을 일으켰다. 이 쿠데타로 이세민은 권력을 장악했고 당나라를 일으킨 고조를 감금했다가 퇴위시키고 자신이 황제로 즉위했다. 친형과 동생을 주살하고 아버지를 몰아낸 인물이 ‘시해’, '도륙‘ 운운하면서 고구려를 침략하겠다는 것은 언어도단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김부식의 삼국사기에는 당 태종에 대해 보다 후한 점수를 주었다.

‘당태종은 성명(聖明)하여 세상에서 드문 왕이었다. 난을 제거한 것은 탕왕ㆍ무왕에 비할 수 있고 다스림을 이룬 것은 성왕ㆍ강왕에 가까웠다. 군사를 쓸 때에 이르러서는 기이한 꾀를 냄이 무궁하여 향하는 곳에 대적할 자가 없었다.’

김부식, 당태종과 맞서 싸웠던 연개소문 낮추어 적어


김부식이 이러한 시각에서 태종을 평가한 것으로 볼 때 당태종과 맞서 싸웠던 연개소문을 낮추어 적었음은 당연한 일이다.

여하튼 당태종은 645년 안시성의 참패에도 불구하고 647년 우진달을 청구도행군총관으로 삼아 산동성 내주에서 바다를 건너 공격토록 하고 이세적을 요동도행군총관으로 삼아 육로로 침공토록 했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 고구려군의 맹렬한 반격에 아무 소득 없이 패퇴했다.

648년에도 설만철이 청구도행군대총관이 되어 3만 명을 이끌고 내주에서 바다를 건너 압록강으로 들어와 박작성을 공격했지만 고구려군의 결사항전으로 퇴각했다.

이종호 / 과학저술가  

(국정브리핑 2005-10-4)

당시 동아시아 전쟁사 유일한 중심인물

<단 한 번의 패전이 없는 연개소문>

당태종이 649년 세상을 떠나면서 고구려와의 전쟁을 중단시켰다는 것은 앞에서 설명했다. 황 원갑은 이 부분도 허구라고 적었다. 당 태종은 죽기 직전까지 고구려에 설욕하지 못한 것을 평생의 한으로 여겨 수많은 전함을 건조하고 30만 대군으로 제4차 고구려원정을 꾀하다 사망했다. 만약 원정을 피하라는 그의 유언이 있었다면 태종의 뒤를 이은 고종이 고구려를 공격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사실 고종은 당 태종의 한을 풀어주기 위해 보장왕 14년(655) 정명진과 소정방을 보내 고구려를 치게 했으나 실패했다. 보장왕 17년(658)에도 정명진과 설인귀 등을 보내 고구려를 침공했으나 실패했고 660년 백제를 멸망시킨 여세를 몰아 대군을 공격했지만 역시 승리를 거두지 못했다. 662년 소정방이 평양성을 포위해 고구려의 위기가 고조됐지만 연개소문이 직접 나서 당의 장수 방효태와 그의 아들 13명 및 전군을 사수(蛇水) 전투에서 몰살시키는 등 대승을 거두자 소정방이 평양 포위를 풀고 물러갈 수밖에 없었다.

고구려, 20여년간 당나라와 전쟁서 계속 승리


당나라와 고구려간의 싸움에서 연개소문은 단 한 번도 패배한 적이 없다. 그가 죽을 때까지 고구려는 무려 20여 년간 당과의 전쟁에서 줄곧 승리한 것이다.

결국 중국은 고구려를 치기 위해 신라와의 연합에 박차를 가한다. 나ㆍ당 연합에 대해 연개소문은 백제와 연합하고 일본에 사신을 보내 반당 연합세력을 형성한다.

결론적이지만 연개소문이 665년에 사망할 때까지 당나라는 고구려를 상대로 단 한 번도 승리하지 못했다. 그러나 연개소문이 사망하자 연개소문의 큰아들 남생과 그 밑의 남건, 남산간의  권력 싸움 등 내부 갈등이 심화되어 남생은 당에 항복하고 연개소문의 동생 연정토는 신라에 투항하자 신라와 당은 이를 틈타 668년 고구려를 멸망시켰다.

연개소문과 설인귀의 전투 장면 그림, 칼 한 자루를 쥐고 말 탄 장수가 연개소문이고, 화살을 겨누는 장수는 설인귀, 칼 4자루가 날아가는 곳에 있는 말 탄 사람이 당 태종 이세민이다.
고구려가 멸망될 당시의 상황은 『자치통감(資治通鑑』의 가언충의 이야기로 자세히 알 수 있다. 그는 668년 2월 시어사로 요동 전선에 파견되었는데 고종에게 고구려는 반드시 평정된다고 말했다. 고종이 어떻게 아느냐고 묻자 가언충은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수 양제가 동쪽으로 정벌에 나섰으나 승리하지 못한 것은 원한으로 민심이 떠났기 때문입니다. 선제(태종)께서도 이들을 함락시키지 못한 것은 고구려가 빈틈없었기 때문입니다.

지금 고구려는 쇠약해졌고 권신이 제멋대로 날뛰고 있습니다. 연개소문이 죽운 후에 남건 형제가 서로 다투고 있습니다. 남생은 내부(來附)가 되는 쪽으로 마음을 정하고 저의 길 안내자가 되었습니다. 저는 그의 진실과 거짓을 모두 알고 있습니다.

폐하께서는 명철하시고 초인적인 도덕과 지혜를 지니셨고 국가는 부강하며 장교와 병사들은 최선을 다하고 있으니 고구려 내의 권력 다툼을 이용하면 반드시 이길 수 있습니다. 또한 고구려는 여러 해 계속 기근이 들었고 종종 괴이한 자연 현상이 발생해 민심은 놀라 불안해하고 있습니다. 고구려의 멸망을 단 시간 내에 볼 수 있을 겁니다.“

연개소문 사후 고구려 멸망


그의 예리한 분석은 정확하게 적중했다. 668년 9월 당나라군이 총공격을 위해 압록책으로 진격하자 고구려도 반격했지만 이적 등에 대패했다. 설필하력의 군대가 먼저 평양성에 도착했고 이적의 군대도 합류하여 평양을 한 달 가량 포위했다.

고구려의 왕 보장(고장으로 적힘)은 천남산(연래 연남산이지만 당 고조 이연의 이름과 같으므로 연을 천으로 사용했다)에게 수령 98명을 인솔하고 백기를 들고 가서 이적을 배알하고 항복의 뜻을 전하도록 했다.

반면에 천남건(연남건)은 문을 굳게 잠그고 여러 차례 고구려 군을 독려하여 당군과 맞섰으나 모두 패배했다. 천남건이 군사 일을 신성(信誠)에 의지했는데 그는 몰래 사람을 보내어 이적을 배알하고 내통했다. 5일 후 신성은 평양성문을 열어주었고 이적의 군대가 들어왔다. 천남건은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했지만 끝내 생포되면서 고구려는 완전히 멸망했다.

668년 12월 당나라 조정은 항복을 받아들이는 성대한 의식을 거행한 후 당고종은 항복한 고구려 지배자들에게 무마책을 벌였다. 보장왕을 사평태상백, 왼외동정으로 삼았고 천남산은 사재소경, 신성을 은청광록대부, 천남생은 우위대장군에 임명했다. 반면에 당나라에 항복하지 않고 저항하다가 생포된 남건은 검증으로 유배되었다.

고종은 5부, 176성, 69만여 호로 되어 있는 고구려를 9도독부, 42주, 100현으로 나누고 평양에 안동도호부를 두어 통치하는 등 고구려의 광대한 영토는 당나라의 영토로 편입되는 운명에 처해진다.

죽을 때까지 중국을 괴롭힌 연개소문에 대해 중국인들이 극도로 부정적인 감정을 갖는 것은 당연하다. 정종목에 따르면 중국인들은 연개소문의 명예를 깎기 위해 연개소문은 태종의 침공을 받은 후에도 교훈을 얻지 못하고 더욱 포악한 행동을 자제하지 않았다는 표현을 사용했다.

<중국 경극에도 나오는 연개소문>

연개소문은 중국의 경극에도 등장할 정도로 중국인들이 두려워했던 인물이다.  연개소문이 등장하는 경극은 여러 종류이다. 「독목관(獨木關)」, 「분하만(汾河灣)」, 「살사문(殺四門)」, 「어니하(淤泥河)」등 확인된 종류만 해도 네 종류가 된다. 어니하와 분하만은 독목관과 줄거리가 비슷하다고 네티즌 ‘21세기 무인’은 적었다.

당 태종 이세민이 연개소문에게 쫓겨 위기에 처하자 설인귀(薛仁貴)가 구해준다는 이야기로 연개소문과 설인귀가 주연이고, 당 태종이 조연이다.

‘당 태종 이세민은 봉황산(鳳凰山)에서 연개소문에게 쫓겨 도망간다. 그가 위기에 처했을 때 백포(白袍)를 입은 설인귀가 등장한다. 연개소문은 특유의 비도(飛刀)를 사용해 대항하지만, 설인귀에게 패해 죽는다. 당태종은 위지공(尉遲公)에게 설인귀를 찾게 하는데, 설인귀를 시기하는 상관 장사귀(張士貴)는 그를 만나는 것을 방해한다. 설인귀는 산신묘(山神廟)에서 달을 보며 신세 한탄을 하다가 위지공이 몰래와 끌어안자 놀라서 도망가다가 병을 얻고 만다. 당(唐)나라 군사들이 고구려 군사들로부터 독목관을 빼앗으려 공격했으나, 오히려 고구려 장군 안전보(安殿寶)에게 장사귀의 아들과 사위가 포로로 잡힌다. 장사귀는 할 수없이 설인귀에게 출전 명령을 내렸는데, 먼저 설인귀의 부하 주청(周靑) 등이 안전보와 싸웠으나 상대가 되지 못하자, 설인귀가 병든 몸을 이끌고 출전해 안전보를 죽이고 독목관을 탈환한다.’

 
대전광역시 중구 어남동 신채호 생가, 단재는 연개소문이야말로 우리나라의 4천 년 역사에서 첫째로 꼽을 만한 영웅이라고 극찬했다(사진 지열쓰 jiyouls).


경극에 비춰진 연개소문은 용맹한 장군으로 묘사된다. 가장 인상적인 것은 바로 나르는 칼이라는 비도(飛刀)를 차고, 등에 깃발 모양의 고기를 하였는데, 이는 이민족임을 상징한다는 설명이다. 푸른빛의 얼굴 화장은 동방 즉 고구려의 장군이라는 것을 암시한다.

중국인들, 연개소문에 대한 공포 경극 통해 표현


이들 경극에서 중국인들은 연개소문에 대해 두려워하며, 무술이 뛰어난 인물로 보면서 잔인하고, 사납고, 포악한 인물로 묘사했다. 연개소문에 대한 부정적인 묘사나, 설인귀가 죽이지도 않은 연개소문을 죽였다는 것은 연개소문을 두려워했던 중국인들의 바램이라고 볼 수 있다.

사실 중국인들의 연개소문에 대한 공포는 앞에 설명한 패주하는 당나라를 추격하는 또 다른 설명으로도 알 수 있다. 이 단원의 많은 부분을 이동식 KBS팀장의 『길이 멀어 못갈곳 없네』에서 인용한다.

당태종은 안시성을 점령할 수 없다고 판단하자 고구려 정복을 포기하고 645년 9월 철수하기 시작하여 10월에 임유관 즉 현재의 산해관에 입성한 후 11월에 유주(幽州)에서 군사들에게 큰 잔치를 베풀었다.

당나라 때 유주는 현재의 북경으로 당나라 동북방 방위의 거점도시이다. 그런데 패주하는 당 태종을 고구려군이 아무 탈 없이 임유관에서 북경까지 보낸 것은 아니다. 이 문제에 대해 철저하게 추적한 사람이 단재 신채호이다.

신채호는 앞에 설명한 황량대로 불리는 지명이 10여 곳이 있는데 그 중에 하나는 북경 조양문 밖 7리 되는 곳에 있다고 설명했다. 여기에서 조양문 밖이라면 현재의 북경시 조양구이다.

이동식은 천진 계주 동남쪽 20여 리 떨어진 왕강장(王杠庄)에서 이리점(二利店) 사이에 20여 기의 합장 분묘가 있음에 주목했다. 당나라 군사들은 고구려 군의 추적을 받아 계속 패주하다가 계주 방면에서 숨을 돌리고 죽은 병사들의 시신을 수습했다. 태종 스스로 구덩이를 파기 시작하여 모두 20개의 크고 깊은 구덩이가 파졌고 한 구덩이마다 만여 구의 시체가 들어갔다. 여기에 흙을 덮으니 마치 돈대(墩臺)와 같아 적골돈(積骨墩, 시체가 쌓인 돈대라는 뜻)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태종은 3년 후에 이곳을 찾아 적골돈 대신에 ‘적곡돈(積穀墩)’으로 바꾸었다. 시체가 아니라 곡식이 쌓인 돈대로 바뀐 것이다. 이를 태종이 고구려의 추격을 겁내 흙을 쌓아 토산을 만들고 군량미로 겉을 가려놓아 고구려군이 양식이 많을 것으로 보고 쫓아오는 것을 겁나게 했다는 설명도 있다.

계주는 오늘날 계현인데 북경에서 동쪽으로 9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다. 적곡돈의 이야기는 황량대와 비슷하다. 단재가 이 지역을 지나다가 적곡돈이라는 촌사람들의 말을 듣고 황량대라는 용어를 사용한 것으로 추정한다.

 
연개소문이 사망한 후 당에 투항한 남생의 묘지석, 중국 하남성 낙양 근처에서 출토되었다(이덕일 사진).
여기에서 우리들의 관심은 실제로 고구려군이 어디까지 추격했는가이다. 북경 동쪽에 경동에서 제일이라는 반산(盤山)이 있다. 전설로는 고구려군이 이곳까지 추격했는데 당태종이 왕강장에 살고 있던 한 노인과 청년에 의해 극적으로 고구려군의 추적에서 벗어났다고 한다. 이를 기리기 위해 반산과 계현 일대에 절을 세우도록 했는데 보적사, 천성사, 반곡사, 감화사 등이 그것이라는 것이다.

천진시 계현에서 산해관 쪽으로 20킬로미터를 가면 마신교진(馬伸橋鎭)이라는 곳이 나오는데 이곳에도 고구려병과 당 태종의 전설이 전해진다. 이곳에서 당태종이 어마(御馬)에 의해 극적으로 구출되자 석재로 된 말과 다리 10여 개를 설치하게 하고 지명을 어마신요구가교(御馬伸腰救駕橋, 어마가 허리를 펴서 황제의 가마를 구한 다리)라 부르도록 했으며 마을 안에 어마묘(御馬廟, 어마를 모시는 사당), 삼의묘(三義廟) 등을 세우게 했다. 후에 다리 이름을 ‘마신교(馬伸橋)라 불렀다.

고구려군 북경 인근까지 진출설도


이러한 전설들을 토대로 하면 당 태종이 북경 인근의 반산까지 쫓겨 들어갔다는 말이 신빙성을 갖는다. 한편 신채호는 북경 인근의 순의현(順義縣)에 있는 고려영(高麗營)을 고구려 군이 주둔했던 곳이라고 주장했는데 반해 이동식은 당나라가 고구려인들을 옮겨서 정주하도록 했다는 것이 오히려 설득력이 있다고 적었다. 또한 고구려군이 북경까지 진출했을 것이라는 추정도 북경이 아니라 북경 동쪽 90킬로미터까지가 보다 합리적이라는 설명이다.

여하튼 고구려군이 북경 바로 동쪽까지 진출했다는 것은 과거의 많은 학자들이 한국이 어떻게 중국의 중원까지 진출했을 수 있느냐며 부정적으로 보던 시각과는 매우 다르다고 볼 수 있는데 근래 학자들의 설명은 단호하다. 중국의 경극에서 비도(飛刀)를 휘두르는 주인공으로 등장할 정도로 중국인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던 연개소문과 고구려군의 활약은 앞에 설명한 것보다 오히려 더 탁월했을 것이라는 설명이다.

<베일에 가려있는 연개소문의 생애>

연개소문의 업적에 대해서는 많은 역사적 증거가 있지만 정작 연개소문의 탄생과 성장에 대한 자료는 많지 않다. 그런데 단재는 당나라 사람 장열(張悅)의 『규염객전』을 소개하면서 규염객이 곧 연개소문이라고 밝히고 있다. 김병기 박사의 글에서 인용한다.

‘규염객은 부여국 사람이다. 수나라 양제 때 중국의 태원에 이르러 이정(李靖)과 교분을 맺고 이정의 처 홍불지(紅拂枝)와 남매의 의를 맺었다. 중국의 제왕이 되기를 도모하다 당공(唐公) 이연의 아들 이세민을 보고는 그 영명한 기운에 눌려 이정에게 중국의 제왕됨을 단념한다고 고한 후 귀국해 난을 일으켜 부여국왕이 되었다.’

단재는 여기서 부여국이란 곧 고구려를 뜻하는데, 당 태종의 기운에 눌려 중국의 제왕됨을 단념했다는 것은 중국의 권징적 필법일 뿐이라고 했다.

또한 단재는 연개소문의 탄생 및 성장과 관련한 중국 소설 『갓쉰동전』을 소개했다. 갓쉰동이라 연개소문의 이름 개소문에서 개(蓋)를 ‘갓’으로 소문(蘇文)은 ‘쉰’으로 읽으므로 갓쉰동은 곧 연개소문을 의미한다.

『갓쉰동전』은 국내 지명에서도 그 근거를 찾을 수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원주목의 속현인 주천현이 일명 학성(鶴城)인데, 갓쉰동을 내다 버렸다는 원주 학성과 같다. 본래는 고구려의 주연현(酒淵縣)이었으나 신라 때 주천현(酒泉縣)으로 고쳤다는 것이다.

당 고조의 이름 이연(李淵)을 피해 중국 기록들이 천(泉)씨라고 적었다는 것이 학계의 정설이지만 ‘주연현’, ‘주천현’ 등 연과 천은 서로 상통하는 글자이기 때문에 실제 이 연의 이름을 피해 바꾼 것인지는 앞으로 더 연구해야 할 과제라는 지적도 있다.

강화도 일대서 무예 닦았다는 전설 남아


강화도 일대에도 연개소문과 관한 전설이 남아 있다. 연개소문이 강화도 고려산 북쪽 시루미산에서 태어나 치마대(馳馬臺)와 오정(五井)에서 무예를 갈고 닦았다는 것인데, 이곳에는 현재 연개소문의 유허비가 세워져 있다. 유허비는 세계 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는 하점면 부근리 고인돌이 있는 ‘고인돌 공원’ 에 있다.

단재 신채호는 『독사신론』에서 연개소문을 다음과 같이 극찬했다.

‘연개소문은 우리 4,000년 역사에서 첫째로 꼽을 수 있는 영웅이다. 아, 우리 연개소문은 우리 광개토왕의 자손이며, 을지문덕의 어진 동생이요, 우리 만세의 후손들에게 모범이 되거늘 이제 『삼국사기』를 읽으매 첫째는 흉악한 사람이라 하며, 둘째는 역적이라 하여 구절구절마다 오직 우리 연개소문을 저주하는 말 뿐이다. 이것은 무슨 까닭인가. 아. 나는 이것으로서 후세 역사가들의 어리석음을 꾸짖는 바다.'

 
강화도 연개소문 유허비.


신채호가 연개소문을 극찬한 것은 다음 같은 이유에서다.

‘연개소문은 고구려 전통의 호족공화(豪族共和)라는 구제도를 타파하고 정권을 통일했으며, 장수왕 이래 철석같이 굳어온 서수남진(西守南進) 정책을 변경해 남수서진(南守西進) 정책을 세웠고 이를 위해 국왕 이하 대신 호족 수백 명을 살해해 자신의 독무대를 만들고 당 태종을 격파해 중국 대륙을 공격했으니, 그 선악 여부는 별개로 하더라도 당시 고구려뿐 아니라 동아시아 전쟁사 속에 유일한 중심인물이었다.’

<수‧당이 고구려와 혈투를 벌인 이유>

수나라가 612년에 고구려를 침공할 때부터 668년 당나라에 멸망할 때까지 중국은 지속적으로 고구려를 침공했다. 이 끈질긴 침공 기사를 읽으면 누구라도 이런 의문이 든다. 도대체 수와 당은 고구려와 전생에 무슨 원수를 졌다고 그처럼 집요하게 고구려를 공격했는가이다.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많은 학자들이 여러 각도에서 제시했는데 이곳에서는 임용한 박사의 글을 많이 참조했다.

중국이라는 거대한 국가를 진시황제 이후 실질적으로 지배한 민족은 한족과 북방기마민족(흉노)이다. 한족의 왕조가 쇠퇴하면 북방기마민족이 치고 들어와 영토를 점거하고 중원의 패권을 차지했다.

진시황 이후 중원 패권 북방기마민족이 차지


그 시작이 오호십육국(1五胡十六國)이었고 이를 회복하고 중국을 통합한 나라가 수와 당이라고 설명된다. 그런데 실상을 보면 매우 놀라운 점을 알 수 있다.

중국에서는 대체적으로 이 시대를 '혼란기' 혹은 '암흑기'라 해서 상당히 부정적인 시각으로 보기도 하는데, 그것은 이시기에 서진이 흉노족에게 점령당한 후 한족이 대거 강남땅으로 이동했기 때문이다.

조조의 위나라를 이어받은 서진이 단명하자, 사마예가 강남땅에서 동진을 일으키고 화북지역에는 소위 오호십육국 시대라 해서 갈, 저, 흉노, 선비, 강족 등 많은 왕조가 들어서기도 하고 망하기도 했다. 그런 와중에서 저족 출신의 부견이 모든 부족을 통합하여 전진왕조를 세우고 강남의 동진과 대치한다.

중국의 역사에 있어서 한족은 외래문명에 대해 보수적인데도 불구하고 이 시기에 이민족인 다수의 기마민족 왕조가 세워지자 자연적으로 한족도 외래 문명을 긍정적으로 수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중국의 불교수용도 그 중 하나로 설명된다.

 
고구려 멸망 때의 상황.
후한 말에 들어온 불교가 이때에 이르러 중국 전역에 퍼지게 됐는데 이는 북방의 소위 ‘오랑캐 왕조' 즉 기마유목민족 계열이 들어선 덕분이라고 볼 수 있다. 학자들이 중국사에서 이 시기를 매우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번한잡거' 현상 때문이다.

이것은 이민족과 한족이 같은 화북 땅에 살기 시작하면서 민족의 동화가 이루어진다는 뜻이다. 중국의 통치를 사실상 흉노계열이 지배하고 있는 상황에서 당연할 결과로 볼 수 있다. 북조 중에서도 북위 효문제 시대에 적극적인 한화정책을 폈는데 그는 선비족이 한족의 옷을 입고 한족의 문화를 수용하고 한족과 결혼을 하는 것을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수문제 · 당고조 모두 한족아닌 이민족 출신


그런데 중국을 통일했다는 수나라와 당나라도 족보를 따진다면 모두 흉노의 일파인 선비족이라는 점이다. 수문제는 황제가 되기 전 북주(北周)의 승상으로 북주는 지금의 내몽골 지역의 음산 산맥에 위치한 군사기지인 무천진 군벌로 대부분 한족이 아닌 선비족 출신이다.

당나라를 세운 당고조 이연도 한족 출신이 아니다. 이연도 선비족인 척발씨(拓跋氏)의 후손으로 역시 같은 북방민족 출신인 수나라에 항복하여 북방민족 제압의 근거지였던 태원에서 군사령관으로 복무하고 있었다.

이연은 당 왕조를 세운 후 한족들의 민심을 얻기 위해 자기의 선조가 춘추시대의 노자(노자의 성은 이씨임)라고 선전했다. 그리고 그에 맞춰 노자의 『도덕경』을 발간하고 도교를 장려했다. 학자들은 이연이 통상 북방민족이 항복해 오면 중국 역대 왕조들이 이씨 성을 하사하는 관례에 따라 이씨 성을 받았다고 추정한다.

당태종의 충복으로 볼 수 있는 장손무기는 당고조 이연과 같은 척발씨로 북위 때 전공을 많이 세워 성씨를 장손(長孫)으로 바꾼 사람이다. 할아버지는 북주의 표기대장군이고 아버지는 수나라의 우효위장군이며 그의 여동생이 태종의 처 문덕황후다. 그는 혈통이 척발씨이므로 어렸을 때부터 이세민과 절친하게 지냈다.

태종의 또 다른 충복인 우지녕도 선비족의 귀족 출신이다. 그의 할아버지는 수나라에서 동주총관을 지냈고 아버지는 수나라에서 내사사인을 지내는 등 정통적인 북방기마민족 가문이다.

중국을 사실상 통치한 오호십육국들의 원래 시발점은 고구려처럼 북방기마민족으로 부족체제의 작은 집단이었다. 그 정도의 작은 집단도 경우에 따라서는 통일왕조로 성장할 가능성이 있는데 그것은 기동력에서 상대적으로 우월한 북방기마민족이기 때문이다.

당시 선비족은 고구려의 부용세력(附庸勢力)


선비는 고구려와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다.

고구려의 역사를 보면 고구려의 정복 활동 때 선비를 활용하는 기록이 자주 나온다. 박 경철 박사는 고구려가 선비 등 흉노에서 파생된 유목국들을 자신이 의도하는 전투에 동원할 수 있었던 것은 선비가 고구려의 부용세력(附庸勢力)이었기 때문으로 설명했다.

 
고구려 정복에 성공한 당 고종, 당 고종은 고구려를 정복해 천하를 통일했으나 왕비인 측천무후가 690년 당나라를 멸망시키고 주(周)나라를 창건해 중국역사상 유일한 여성 황제가 됨으로써 가장 무능한 황제로 낙인찍혔다.


여기에서 부용세력의 의미는 로마제국의 예를 들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당시 로마의 해방노예들은 그들의 옛 주인인 자유민을 보호자(patronus)로 삼는 대신 노역 및 군역에 봉사했다. 이는 로마의 정복지역 통치방식 중의 하나로 부용민(clientes) 제도라고도 한다. 부용은 원래 소국 그 자체를 의미하면서 그것이 대국에 복속되어 있는 상황을 나타내기도 하는데 고구려와 선비의 관계가 그와 같다는  것이다. 이 부분은 (「고구려와 흉노의 친연성에 관한 연구」, 이종호, 백산학보 제67호, 2003)을 참조하기 바란다.

인간이 역사적 경험으로부터 자유롭기는 쉽지 않다. 사실상 중국의 역사는 수·당의 우려가 기우가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오호십육국은 제외하더라도 몽골족의 원나라, 거란족의 요, 여진족의 금, 만주족의 청나라 등 모두 고구려보다도 더 열악한 부족단위에서 시작하여 천하를 제패했다.

그런데 고구려는 중국의 머리 부분에 위치한, 넓은 영토를 지닌 강국으로 수나라와 당나라를 세운 선비족을 부용세력으로 지배하던 세력이다. 더구나 요동방어선을 장벽으로 삼고 있는 제국중의 제국이다.

고구려 중국 선제공격 사실 잘 알려져


요동방어선은 중국의 고구려 침공을 막기 위한 방어적인 의미가 강하다. 그런데 선비를 부용세력으로 여기고 있는 고구려가 내부를 단속한 후 축적된 힘을 중국을 점령하여 지배하고 있는 선비족의 수나라와 당나라에게 표출할 때 고구려의 공격을 효과적으로 막을 수 있는가는 미지수였다.  

고구려가 중국의 공격을 막는 데만 급급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중국을 선제공격했다는 것은 역사적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는 사실이다. 특히 을지문덕은 중국 수나라의 공격을 격퇴하고서는 그 여세를 몰아 중국을 공격한다면 대륙을 장악할 수 있다고 주장할 정도로 중국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비록 수나라와 당나라가 중국을 점령했지만 선비족으로서 자신들보다 큰 세력을 계속 유지하고 있는 고구려는 반드시 집고 넘어가야하는 걸림돌이었다. 그러므로 수와 당은 왕조의 안정과 생존의 차원에서 고구려가 강성하여 자신들을 직접 공격하기 전에 고구려를 쳐 없애보려 한 것이다.

수·당이 국운을 걸고 고구려와 혈투를 벌였는데 결국 수나라는 고구려 때문에 멸망했고 고구려는 당나라 때문에 멸망했다. 아쉬운 것은 고구려의 붕괴가 고구려의 전력이 약해서가 아니라 당나라와 신라의 연합, 고구려 내부의 자중지란 등에서 비롯됐다는 사실이다.

당나라 과거시험에서 고구려 정벌방법 묻기도


최근 국내 학계에서는 당나라가 고구려 침공의 여론몰이를 위해 과거시험에 정벌 방법에 관한 문제를 출제한 문헌이 최근 처음 발견되었다. 돈황 문서로 잘 알려진 『토원책부(兎園策府)』라는 필사본의 '정동이(征東夷)'라는 항목에 고구려 원정에 대한 의견을 묻고 원정의 당위성과 정복의 구체적인 방법을 제시한 대목이 있다고 인천시립박물관의 윤용구 박사가 말했다.

『토원책부』는 당 태종(唐太宗) 이세민(李世民)의 일곱 번 째 아들인 장왕(蔣王)의 지시로 두사선(杜嗣先)이 650년대에 만든 책으로 과거시험에 출제될 예상문제와 모범답안을 자문자답식으로 서술했다.  

모두 30권 분량이었으나 현재는 서문과 권1만이 돈황문서로 전해지는데 자문자답 형태의 질의응답에는 고구려 원정의 필요성과 화전(和戰) 양면의 전술과 모범답안이 무엇인지 노골적으로 나타나 있다.

또 고구려 정복을 통한 천하통일의 정당성을 위해 전쟁을 반대하는 신하들의 의견을 묵살하고, 정벌 여론조성을 위해 과거급제 시험에 ‘유격전, 전쟁터의 지형, 기상, 심리전 등을 논하라’는 문제도 출제돼 있다. 당나라가 고구려 공격에 얼마나 신경을 썼는지를 잘 알려주는 예이다.

돈황문서란 중국 3대 석굴 유적 중 하나인 돈황 막고굴에서 발견된 고문서 일체를 일컫는 말로써 20세기 초반 이후 서구인들에 의해 대규모로 약탈돼 현재는 영국박물관이나 프랑스 루브르박물관 등에 주로 보관돼 있다. 유명한 혜초의 『왕오천축국전』도 돈황문서의 하나로 프랑스로 반출됐다.

이종호 / 과학저술가  

(국정브리핑 2005-1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