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통일 15년> ① 동독은 독일에 통합됐는가

독일 통일의 문제는 동독의 문제다. 서독은 통일을 준비해오기는 했지만 1989년 11월 베를린 장벽 붕괴와 1990년 10월의 통일 조약 체결 과정에서 동독이 오히려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장벽을 쌓은 것도 동독이지만 갑작스럽게 장벽을 허문 것도 동독이었다.

독일 통일을 설명할 때 서독에 의한 동독 흡수 통일이라는 말을 많이 하고 있지만 엄밀하게 따지면 동독이 서독에 편입되기를 희망한 것이다.

베를린 장벽 붕괴를 전후해 동독에서는 혁명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구 집권층이 물러나고 과도정부가 들어섰으나 이것도 오래 가지 못했다. 1990년 3월 동독에서는 자유선거가 실시됐고 통일을 지지하는 우파 연합이 압승했다. 동독의 마지막 총리인 로타르 드 메지에르는 통일을 위한 거국 내각을 구성했다. 동독은 이처럼 적극적으로 통일에 임했으며 서독은 이를 받아들였다.

통일 후 15년 동안 독일의 최대 과제는 동독을 독일화하는 것이었다. 진정한 통합은 동독이 동독으로 남아 있지 않고 서독화하는 것을 의미했다. 애초 동독인들이 원한 것도 그것이었다.

독일 정부는 이를 위해 막대한 노력을 기울였다. 1990년 이후 독일 정부가 동독 개발을 위해 쏟아부은 돈은 1조5천억달러에 달한다. 매년 국내총생산(GDP)의 약 5%에 해당하는 800억유로(약 1천억달러)가 동독의 사회간접자본 시설 확충, 공장 및 주택 건설, 그리고 사회복지 비용 등으로 들어갔다.

독일 정부는 동독 지원금 부담으로 재정상황이 유럽연합(EU)의 재정 안정화 조약을 위반할 정도로 악화됐다. EU의 `안정 및 성장협약'은 회원국의 재정적자 규모를 최대 GDP의 3%로 제한하고 있는데 독일의 재정적자는 GDP의 4% 수준에 육박해 EU 집행위원회로부터 제재를 받을 위기에 처해 있다.

이 같은 막대한 투자에도 불구하고 동서독간 경제적 격차는 줄어들기보다 오히려 확대되고 있다.

통일 직후인 1991년부터 1996년까지는 동독 지역은 서독 지역보다 높은 경제성장률을 나타냈다. 그러나 그 이후부터는 서독지역은 연평균 1.3% 성장한 반면 동독 경제는 1.0% 성장하는 데 그쳤다.

그 결과 90년대 후반 이후 동서독의 경제적 격차는 더욱 확대되고 있다. 한 때 동독의 임금 수준이 서독의 80%까지 육박한 적도 있으나 더 이상 오르지 못하고 있으며 동독 지역의 실업률 증가로 가계 소득 격차는 더욱 벌어지고 있다.

특히 세계화가 진행되면서 글로벌 기업들이 싼 임금과 낮은 세금 등 유리한 기업 환경을 찾아 전세계로 생산기지를 이전함에 따라 동독 지역은 더 큰 타격을 받고 있다.

통일 이후 독일의 실업률은 두 배 가까이 증가했다. 1990년에는 6.4%였으나 현재는 12%내외를 나타내고 있다. 동독 지역의 실업률은 서독 지역의 두 배에 달하고 있다. 특히 베를린을 둘러싸고 있는 브란덴부르크주와 메클렌부르크-포어폼메른주의 경우에는 공식적인 실업률이 25%에 달하고 실제 실업률은 이보다 더 높을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동독 지역 편입으로 독일의 내수 시장이 확대될 것이라는 기대도 깨졌다. 독일은 지난해 7천310억유로어치를 수출해 세계최대의 수출국이 됐다. 올해도 8천억유로 이상 수출할 것으로 예상되고 있지만 내수 부진으로 경제성장률은 예상보다 낮아질 것으로 전망된다. 국제통화기금(IMF)은 최근 독일의 경제성장률 전망치를 하향 조정했다. IMF는 독일 경제가 올해는 당초 예상치보다 0.2% 포인트 낮은 0.8%의 성장률을 보이고 내년에는 전망치에 비해 0.1% 포인트 적은 1.2%의 성장률을 기록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통일 이후 독일 정부의 동독 경제 통합 노력이 성과를 보이지 않음으로써 정치적인 문제도 발생하고 있다. 지난 달 실시된 조기 총선에서 높은 실업률과 경제난에 시달리고 있는 동독 지역은 서독 지역과 판이한 투표 행태를 보였다.

동독 지역에서 보수 야당인 기민-기사당 연합이 철저히 외면당했다. 야당의 총리 후보인 앙겔라 메르켈 기민당 당수가 동독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기민-기사당 연합은 동독 지역에서 지난 2002년 총선보다 3% 포인트 낮은 25.3%의 지지율을 얻는데 그쳐 사민당(30.5%), 좌파연합(25.4%)에 이어 제 3당으로 전락했다.

구 동독 공산당의 후신인 민사당과 사민당을 탈당한 좌파 정치인들이 통합한 좌 파연합은 동독 지역에서 돌풍을 일으키며 제 2당으로 부상했으며 전체적으로도 8.7% 의 득표로 54석을 확보하는 성과를 올렸다. 그러나 좌파연합은 서독지역에서는 4.9% 의 낮은 득표율을 보였다.

동독 지역의 주의회 선거에서도 민사당과 극우파 정당들이 약진함으로써 기존의 정치 질서를 거부하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이처럼 동서독 지역간 경제적, 정치적인 이질화 현상이 심화되면서 일부 동독 지역 주민들은 `2등 국민'이라는 자괴감을 표출하기도 한다. 심지어는 통일 이전으로 돌아가기를 희망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같은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통일은 올바른 결정이며 돌이킬 수 없는 대세라는 것을 동독 지역 사람들도 인정하고 있다. 어쨌든 동독 주민들은 독일 사회보장제도에 편입돼 혜택을 보고 있으며 대부분의 경우 통일 이전보다 생활 수준이 향상됐다.

아직 동서독 주민간에 서로를 경원시하는 심리적 이질감은 해소되지 않고 있으나 이는 분단 체제하의 생활 습관을 버리지 못하고 통일 후에는 상대적 빈곤(동독)을 겪었거나 경제적 피해의식(서독)을 가졌던 세대들이 사회 일선에서 퇴장하고 분단체제를 경험하지 않은 신세대들이 사회의 주축을 이룰 경우 이 문제는 해결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독일 통일 15년> ② 동서독 통일과 한반도 통일 (끝)

아직 분단을 극복하지 못한 한반도가 독일을 바라보는 시각은 남다르다. 2차대전 전후 처리 과정에서 이유와 과정은 다르지만 비슷한 시기에 분단을 강요당한 동서독과 남북한은 모두 통일을 당위로서 받아들이고 목표로서 지향해왔다.

동서독은 이미 15년 전에 통일을 성취하고 민족통합이라는 과제를 성공적으로 수행해오고 있다. 그러나 남북한은 이제 상호체제 인정과 인적, 물적 교류를 통해 민족 통합을 위한 기초를 마련하는 단계에 와 있다. 이미 법적 제도적 통일을 완수하고 진정한 통합을 위해 꾸준히 노력하고 있는 독일의 사례는 통일시대를 준비하는 한반도에 적지 않은 시사점을 주고 있다.

동서독은 1989년 갑작스러운 베를린 장벽의 붕괴와 국제적 여건의 호전으로 1990년 10월 3일 생각보다 빠르게 통일을 성취했다. 물론 이 때문에 많은 부작용과 시행착오를 겪기는 했지만 통일 이전과 이후의 착실한 준비와 적응과정을 통해 통일 과업을 완수할 수 있었다.

동서독은 분단 직후부터 통일될 때까지 지속적으로 인적, 물적 교류를 계속해왔다. 독일의 통일 과정이 급격하게 진행됐음에도 불구하고 양측 모두 통일로 인한 충격을 흡수할 수 있었던 것은 분단 상태에서도 꾸준히 인적, 물적 교류가 이루어져 왔기 때문이다.

분단 이후 동서독 주민 간의 왕래는 동독의 잦은 제한 조치로 어려움을 겪기는 했지만 원칙적으로는 항상 가능성이 열려 있었다. 1953년 11월 서방 3개국이 점령지역간 여권 제도를 폐지한 이후 동독인을 포함한 모든 독일인들은 서독 기본법에 따라 서독 내외로 자유로이 여행하는 것은 물론 거주지도 옮길 수 있었다.

1950년대에 동독 정부는 동독에 부모, 형제를 두고 있는 서독인에 한하여 1년에 1회 방문하는 것을 허용했다. 이 경우 최장 4주간 머물 수 있었으며 서독 주민이 서베를린을 통해 동베를린을 하루만 방문하거나 상업여행, 라이프치히 박람회 참관, 동독 공공기관의 초청에 의한 방문 등은 예외적으로 허용됐다. 이 같은 과정을 통해 매년 평균 240만명의 서독인이 동독을 방문했다.

1953년 6월 동독 민중봉기 이후 동독 주민의 서독 지역 방문 조건이 크게 완화돼 매년 250만명의 동독인이 서독을 방문했으며 이중 상당수가 서독에 정착하기도 했다.

그러나 1961년 베를린 장벽 구축 이후에는 동독인의 서독 방문이 거의 차단돼 1962년에는 겨우 2만7천명이 서독을 방문했다.

동독 주민의 서독 방문은 1972년 교통조약 체결을 계기로 급격히 늘어나 80년대 중반까지 매년 150만명 이상이 서독을 방문했다.

80년대 후반에는 서독을 방문하는 동독인이 500만명 이상으로 급격히 늘어나고 헝가리와 오스트리아 등 제 3국을 통한 탈출 행렬이 이어져 동독 주민의 서독 방문 열기가 1989년 11월 베를린 장벽 붕괴의 직접적인 원인이 됐다.

서독 정부는 분단 40여년간 꾸준히 동독인을 받아들이는 정책을 폈다. 분단 이후 통일 직전까지 서독으로 이주한 동독인은 500만명을 넘었다. 반면 서독에서 동독으로 넘어간 사람은 50만명에 불과했다.

이처럼 많은 동독 주민이 서독을 방문하고 서독에 정착할 수 있었던 것은 서독 정부의 적극적인 재정지원이 큰 힘으로 작용했다. 서독 정부는 서독을 방문한 동독 주민에게 1인당 100마르크의 환영금을 나눠주었으며 정착을 원하는 동독인에게는 정착 보조금을 지급하고 각종 사회보장 혜택과 직장을 알선해 주었다.

또한 서독은 동독 체제에 저항하다 투옥되거나 서독으로 탈출하려다 붙잡힌 동독인들 중 약 3만4천명을 비밀 거래를 통해 서독으로 데려왔다. 서독은 동독 정치범을 서독으로 데려오는 조건으로 1977년까지는 1인당 4만마르크, 그 이후에는 1인당 9만6천마르크 상당의 현물을 동독측에 제공했다.

동서독간의 경제적 교류는 국가간 교역이 아닌 내독 교역의 성격을 띠는 것으로 관세가 부과되지 않았으며 서독측이 동독측의 이익을 보장하기 위해 여러가지 편의를 제공했다.

동서독간 내독 교역은 제 3국에 손해를 끼칠 수 있는 불공정 거래로 다른 국가들의 불만을 사기도 했으나 동서독은 1951년 9월 양독 간 상품교역에 관한 `베를린 협정'을 체결함으로써 내독 교역의 법적 토대를 만들었으며 내독 교역이 유럽공동시장에 교란을 주지 않도록 주의한다는 조건으로 주변국의 승인을 얻었다.

내독 교역의 규모는 50년대 이후 꾸준한 증가세를 보여 교역 초기 8억마르크에 불과했으나 1988년에는 160억마르크로 20배나 증가했다.

내독 교역은 동독에게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것으로 서독은 소련에 이어 두번째의 교역 상대였다.

서독은 규모상으로 동독과의 교역이 큰 비중은 차지하지 않았으나 내독 교역이 민족의 동질성을 유지하고 동독을 하나의 독일이라는 틀 속에 묶어두는 의미로 내독 교역을 장려했다.

이 같은 인적, 물적 교류와 함께 동서독 주민 간에는 분단 시기에도 항상 통신이 이뤄졌다. 동서독 간에는 서신과 전화가 가능했다. 또한 동독인들은 자유롭게 서독 TV 방송을 시청했다. 한 조사에 따르면 분단시기에 동독 주민의 80%가 서독 TV 방송을 시청했다.

통일 이전의 동서독 간 물적, 인적 교류의 정신은 통일 이후 동서독 통합 과정에서도 기본적인 토대를 제공했다.

그러나 동서독 간 통합은 적지 않은 진통과 시행착오를 겪었다. 특히 동서독 경제 통합의 시발점인 통화통합 과정에서 너무 성급했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동서독 화폐 교환비율에 따라 서독인들은 재정적 부담을 감수해야 했으며 동독인들은 통일 독일에서의 생활수준이 결정되는 중요한 문제였다.

당시 헬무트 콜 총리 정부는 동서독 통합 과정을 가속화하고 동독인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기 위해 동독인들에게 매우 유리한 교환 비율을 책정했다. 동독인들의 임금과 연금은 서독 마르크에 대해 1대 1로 교환해 주었으며 동독인의 현금 자산과 예금은 2대 1로 교환해 주었다. 이에 더해 자산액중 6천마르크까지는 1대1로 교환해 주었다.

이는 동서독 화폐의 구매력이 약 10배의 차이가 나는 점을 고려할 때 동독인들에게는 엄청난 횡재를 가져다는 주는 것이었다.

헬무트 콜 총리 정부의 선심성 정책으로 단행된 통화통합은 당장은 동독인들에게 경화를 안겨주는 기쁨을 주었으나 이는 과잉평가된 동독 산업의 기반이 붕괴되는 결과를 초래함으로써 장기적으로 통일 비용을 증가시킨 것으로 지적되고 있다.

또한 통일 직후 동독 국영기업의 민영화와 매각 작업을 담당한 신탁청은 동독 기업들의 낮은 생산성 때문에 경쟁력이 없다고 판단하고 동독 기업을 대부분 헐값에 처분하는 방식을 택했다. 이에 따라 통일 이후 동독 지역은 산업 공동화 현상이 지속되고 있으며 막대한 사회간접 자본 투자에도 불구하고 동독 지역의 경제는 살아나지 않고 있다.

통일후 15년이 지난 지금 동서독 간의 정치적, 제도적 통합을 사실상 마무리된 것으로 평가되고 있지만 아직 진정한 내적 통합을 가로막는 심리적 장벽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특히 동서독 간 경제적 격차가 지속되고 세월이 지나면서 오히려 확대되는 양상을 보임에 따라 그 동안의 통합 노력이 무색해지고 있다.

특히 지난 달 실시된 독일 총선에서 동서독 지역간 확연하게 표가 갈리는 현상이 나타나는 등 지역감정이 심화되는 경향까지 보이고 있다.

이제 동서독 간 경제적 격차와 지역 감정 문제는 단순히 통일의 후유증 차원을 넘어서는 장기적인 정책 과제로 남아 있다.

독일의 통일 과정을 전체적으로 보면 분단된 직후부터 통일이 시작된 셈이며 통일 후 지금까지도 통합을 위한 과정이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독일 통일과 통일 후의 통합 과정은 한반도 통일이 불가능한 것도 아니며 아주 멀리 있지도 않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남북한은 동서독이 분단 직후부터 시행해온 인적, 물적 교류의 물꼬를 트기 시작했으며 이것이 가장 확실한 통일의 길임을 독일의 통일 경험이 입증하고 있다.

또한 독일 통일 15년의 경험은 민족의 동질성을 유지하고 진정한 화해와 나눔을 배우는 것만이 통일 이후의 후유증을 최소화하고 통합을 가속화하는 지름길임을 웅변하고 있다.

(연합뉴스 / 송병승 특파원 2005-9-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