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류마저 두려운 러시아 고려인들

"전쟁을 피해 타지키스탄에서 러시아로 이주했어요. 그래도 이곳은 전쟁이 없어 살기에는 괜찮아요" 23일 오후 러시아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시에서 10여km 떨어진 쁘따라야레치카 농수산물 시장에서 고려인 4대째 후손인 리나리사(43.여)씨가 가건물 내 모퉁이에서 과일을 팔고 있었지만 손님은 뜸했다.

가판대에 수박과 사과, 바나나, 포도, 오렌지, 멜론 등 10여가지의 과일을 진열해 놓고 과일 1kg 당 평균 500원에 판매하는 리나리사씨에게 근황을 묻자 "이곳은 그래도 괜찮다"며 환하게 웃어 보인다.

그녀는 지난 93년 타지키스탄에서 내전을 피해 살기에 좋다는 러시아 연해주로 이주, 현재까지 과일과 야채 등을 팔며 하루하루를 근근이 살아가고 있다.

취재진이 리나리사씨와 몇 마디 나누던 중 갑자기 건장한 체격의 30대 러시아인 2명이 나타나 "허락 없이는 취재를 할 수 없다"고 제지했다.

이곳에서 암거래가 종종 이뤄지기 때문인지 이들은 취재를 하고 싶다면 시장 총관리인으로부터 허락을 받아 지정된 상인과 장소에서만 취재할 수 있다고 외쳤다.

관리인과는 연락도 안되고 우리 일행을 계속해서 따라 다니는 러시아인 때문에 취재는 더 이상 불가능했다.

리나리사씨처럼 스탈린 정권에 의해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 당한 고려인들이 러시아 연해주로 재이주를 시작한 때는 구 소련 정권이 무너지기 시작한 지난 90년대 후반부터 2000년 초반까지.

이 시기에 구 소련으로부터 12개 국가가 독립하면서 고려인들은 어쩔 수 없이 연해주로 다시 이동해야만 했다.

왜냐하면 독립국가들이 자국민 우월 정책을 펴는 데다 공용어였던 러시아어 마저 쓰지 못하게 하자 소수 민족이었던 고려인들은 인종 차별을 피해 다른 곳으로 떠나야했기 때문이다.

부모 세대로부터 연해주가 살기 좋았다는 얘기를 들은 고려인 후손 1만5천~2만명은 이후 우즈베키스탄과 카자흐스탄 등 여러 독립국가들을 떠나 연해주에 모였다.

한국에서 연해주로 첫 이주가 시작된 때는 지난 1863년.

조선시대 때 함경도 13개 가구가 가난과 기근, 관리들의 수탈을 피해 러시아 연해주에서 이민생활을 시작했다.

이민 인구는 이후 꾸준히 늘어나 현재 러시아에 거주하는 고려인들은 모두 15만명, 연해주에는 3만명~4만명인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나 정확한 통계조치 없다.

독립국가까지 포함하면 고려인은 전체 55만여명에 이를 것이라고 고려인 지원 단체는 판단하고 있다.

그러나 러시아에 거주하는 고려인 가운데 40%~50% 가량이 러시아 국적을 갖지 못한 상태여서 일상 생활에서 불이익을 받기는 다반사다.

러시아 정부가 '이중 국적'을 이유로 고려인들에게 비자를 발급하지 않아 불법 체류 신세인 고려인들에게 취직은 '하늘의 별따기'이고 거주와 이동에 대한 제약이 많다 보니 대부분 농촌에서 농사일을 하고 있다.

또 의료 혜택도 받지 못해 병원조차 마음대로 드나들 수 없으며 경찰의 검문 검색을 받으면 으레 벌금을 내야하는 등 무국적자의 한을 고스란히 감내해야 한다.

특히, 가난의 대물림 속에 고려인에 대한 교육 지원도 거의 없어 한국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고려인 대다수가 고졸 이하의 학력을 갖고 있다.

학력이 낮고 체류 상황이 불법이다 보니 이들 70~80%가 농사를 짓거나 재래시장에서 농수산물을 판매한다.

리나리사씨 처럼 재래시장에서 농수산물을 판매할 경우 한달에 50만원~100만원을 벌 수 있단다.

하지만 시장이 아닌 농장에서 일하는 고려인들의 사정은 더욱 나쁘다.

연해주 내 협동 농장에서 밀과 콩, 토마토, 고추 등의 농사를 짓는다면, 풍작이라 하더라도 1년에 한 가구당 400만원~500만원의 수입을 올린다고 한다.

연해주 인근의 10여개 농촌 지역에는 고려인 40~50명이 협동농장에서 일을 하며 하루하루를 버티고 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고려인들이 합법적으로 체류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와 한국기업의 지원, 고려인에 대한 정부의 관심이 절실하다고 고려인 관련 단체들은 지적한다.

고려인돕기 운동본부 러시아 연해주 본부장 김재영(36)씨는 "고려인 대부분은 독립운동가 후손들이지만 사실상 이들에 대한 지원은 거의 없는 상황"이라면서 "정부는 고려인들이 합법적으로 국내에서 일할 수 있는 여건 조성을, 기업에서는 고려인들에 대한 지원과 채용 문제 등에 관심을 갖길 바란다"고 말했다.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극동대학교 한국어학과 남창희(60) 교수도 "고려인 동포들이 대학교에 진출하는 경우가 의외로 적다"며 "고려인들이 러시아 내 대학교에 진출, 우수한 인재로 거듭 태어날 수 있게끔 이들에 대한 지원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연합뉴스 / 한상용 기자 2005-9-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