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눈] 中 ‘文明 훔치기’ 구경만 할건가

미국의 정치학자 새뮤얼 헌팅턴은 21세기가 서구, 정교, 이슬람, 힌두, 중화, 일본, 라틴아메리카, 아프리카의 7, 8개 문명 간 충돌의 시기가 될 것이라 말했다. 그렇다면 한국은 어느 문명권에 속할까.

많은 한국인은 일본이 하나의 문명으로 분류된다면 한국도 그 이상의 독자적 문명을 지녔다고 힘주어 말한다. 우리가 그렇게 말할 때 그 독자성의 증거는 무엇인가?

고대의 대표적 증거는 아마도 신석기시대에는 빗살무늬토기, 청동기시대에는 비파형동검일 것이다. 이들 유적은 한반도뿐만 아니라 만주와 보하이(渤海) 만 일대에서도 출토되는데 중국도 이를 동쪽 오랑캐(동이·東夷)들의 문물로 해석해 왔다. 중국 문화의 본류라고 주장해 온 황허(黃河)문명에서 출토되는 붉은칠무늬토기나 직인(直刃)동검 등과 다르기 때문이다.

그러던 중국이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태도를 바꿨다. 동이족의 문물도 중국 문명의 일부분이라고 주장하고 나선 것이다. 정부 간행물과 관광 안내판에서 대놓고 “고구려인은 은(殷)나라인의 후손이고 고구려 벽화는 염황(炎黃)문화의 내용을 표현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중국이 왜 전설 시대의 국가와 인물까지 끌고 나오는 것일까. 그것은 1980년대 이후 랴오허(遼河) 유역에서 발굴되고 있는 신석기-청동기 유적과 관련 있다. 빗살무늬토기나 비파형동검이 대거 출토된 이들 유적에서 황허문명보다 앞선 시기의 유물들이 출토되고 있기 때문이다.

중국 학자들이 고민 끝에 내놓은 해결책이 ‘중국 문명은 황허문명뿐 아니라 랴오허 유역의 동북 문명이 합쳐져 이뤄졌다’는 논리다. 동북아의 고대 문명사를 훔쳐 중국 문명사를 다시 쓰려는 시도인 셈이다.

이 논리대로라면 고구려는 물론 고조선, 부여, 발해, 요, 금, 몽고 등 만몽(滿蒙) 지역 국가는 모두 중국 문명의 아류에 불과하다. 이는 삼국시대 이전의 한국 고대사를 왜곡하는 일본의 식민사관과 묘하게 맞물려 한국을 철기시대 이후 한반도 남부에 등장한 기생(寄生)세력으로 전락시키는 결과를 낳는다.

우리가 한반도라는 좁은 공간과 근현대사라는 토막 역사에 묶여 아옹다옹하는 동안 중국과 일본은 우리의 조상까지 바꾸려 한다. 헌팅턴이 예언한 문명 충돌은 서구와 중동에만 해당하는 것이라며 넋 놓고 있을 때가 아니다.

(동아일보 / 권재현 기자 2005-9-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