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핵 6자회담 타결] 6자회담 공동성명 전문

한반도와 동북아시아 전반의 평화와 안정이라는 대의를 위해, 6자는 상호 존중과 평등의 정신 하에, 지난 3회에 걸친 회담에서 이루어진 공동의 이해를 기반으로, 한반도의 비핵화에 대해 진지하면서도 실질적인 회담을 가졌으며, 다음과 같이 합의하였다.

1. 6자는 6자회담의 목표가 한반도의 검증 가능한 비핵화를 평화적인 방법으로 달성하는 것임을 만장일치로 재확인하였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하 북한)은 모든 핵무기와 현존하는 핵 계획을 포기할 것과, 조속한 시일 내에 핵확산금지조약(NPT)과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안전조치에 복귀할 것을 공약하였다. 미국은 한반도에 핵무기를 갖고 있지 않으며 핵무기 또는 재래식 무기로 북한을 공격 또는 침공할 의사가 없다는 것을 확인하였다.

한국은 1992년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에 따라 핵무기를 접수 및 배치하지 않는다는 약속을 재확인하고 자국 영토 내에 핵무기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하였다. 1992년도 ‘한반도 비핵화에 관한 남·북 공동선언’은 준수, 이행되어야 한다.

북한은 핵에너지의 평화적 이용에 관한 권리를 가지고 있다고 밝혔다. 여타 당사국들은 이에 대한 존중을 표명하였고, 적절한 시기에 북한에 관한 경수로 제공문제에 대해 논의하는 데 동의하였다.

2. 6자는 상호 관계에 있어 국제연합헌장의 목적과 원칙 및 국제관계에서 인정된 규범을 준수할 것을 약속하였다. 북한과 미국은 상호 주권을 존중하고, 평화적으로 공존하며 각자의 정책에 따라 관계 정상화를 위한 조치를 취할 것을 약속하였다.

북한과 일본은 평양선언에 따라 불미스러운 과거와 현안사항의 해결을 기초로 하여 관계 정상화를 위한 조치를 취할 것을 약속하였다.

3. 6자는 에너지, 교역 및 투자 분야에서 경제협력을 양자 및 다자적으로 증진할 것을 약속하였다. 중국, 일본, 한국, 러시아연방 및 미국은 북한에 대해 에너지 지원을 제공할 용의를 표명하였다.

한국은 북한에 200만㎾의 전력 공급에 관한 2005년 7월12일자 제안을 재확인하였다.

4. 6자는 동북아시아의 항구적인 평화와 안정을 위해 공동 노력할 것을 공약하였다. 직접 관련 당사국들은 적절한 별도 포럼에서 한반도의 영구적 평화체제에 관한 협상을 가질 것이다. 6자는 동북아시아에서의 안보 협력 증진을 위한 방안과 수단을 모색하기로 합의하였다.

5. 6자는 ‘공약 대 공약’,‘행동 대 행동’ 원칙에 입각하여 단계적 방식으로 상기 합의의 이행을 위해 상호 조율된 조치를 취할 것을 합의하였다.

6. 6자는 5차 6자회담을 오는 11월 초 베이징에서 협의를 통해 결정되는 일자에 개최하기로 합의하였다.

(서울신문 2005-9-20)

[6자회담 타결] ‘핵 카드’ 포기 배경

북한이 그동안 신주단지처럼 모시던 ‘핵 카드’를 포기한 배경은 무엇일까. 19일 6자회담 합의로 북한이 핵을 포기하는 대가를 쏠쏠하게 챙겼다고 판단했을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북한은 4차 6자회담 기조연설에서 ▲미국의 핵위협 제거 ▲한반도 비핵화 ▲북·미관계 정상화 ▲경제적 보상 문제 등을 요구했다. 결과적으로 북한의 요구는 대부분 받아들여진 것으로 볼 수 있다.

우선 북한은 미국의 대북 침략의사가 없다는 점을 공동성명을 통해 문서로 확인받았다. 여기에는 핵무기와 재래식 무기로 인한 위협까지도 명시됐다. 북한은 그동안 미국의 대북 적대시 정책으로 인한 핵 보유를 주장해온 만큼 이런 상황에서 핵 보유의 당위성은 없어지는 셈이다.

고유환 동국대 교수는 “제네바 합의에서는 핵공격을 하지 않겠다는 부분만 있었고 재래식 무기로 침공의사가 확인된 적은 없었다”며 “체제 보장에 대한 확고한 의미를 담은 것”이라고 설명했다.

북한의 핵포기 결정은 북한이 겪는 경제적 어려움, 특히 에너지 어려움에 대해 국제사회가 수요를 적절히 만족시켜주겠다는 약속을 한 것도 요인으로 꼽힌다. 우리 정부의 2백만㎾ 전력 제공도 비핵화를 전제로 한 조건이었다. 미국이 다른 참가국과 함께 에너지 제공 의지를 밝힌 부분도 소득이다. 북한은 미국이 3차 6자회담에서 회담 참가국들의 경제적 보상을 허용하면서 직접 제공을 거부한 것을 두고 대북 적대정책이 변하지 않았다는 근거로 반발해왔다.

북한은 당초 주장해온 ‘평화적 핵 이용 권리’에 따른 경수로 건설도 미래의 권리로 보장받았다. 여기에는 북한이 기존의 모든 핵프로그램을 폐기하고 핵확산금지조약(NPT)에 복귀하며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협약을 이행해야 하는 전제가 깔려 있다. 비록 경수로 건설의 ‘적절한 시점’은 확약받지 못했지만 경수로의 완전 포기로 결정된 것은 아니다.

북한은 핵포기로 남한과 미국, 일본으로부터의 대북 투자도 기대하게 됐다. 국내외 투자자들이 대북사업에 나서기를 꺼린 가장 큰 이유가 ‘북핵 리스크’였기 때문이다. 그만큼 북한의 경제 활성화 측면에서도 상당한 도움이 될 전망이다.

그러나 6자회담의 타결이 곧바로 북한의 성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백학순 세종연구소 남북관계실장은 “북한은 지금부터 핵무기 포기 과정에 들어가지만 미국은 북한의 핵포기가 끝난 뒤 마지막에 충족해주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경향신문 / 안홍욱 기자 2005-9-20)

2단계 제4차 6자회담 뒷얘기

송민순-힐, 서로 얼굴 붉히기도

`극적 타결'에 성공한 2단계 제4차 6자회담은 숱한 뒷얘기를 남기고 그 이행조치를 위한 후속협상을 기약하고 막을 내렸다.

한반도 상공에 먹구름을 끼게 한 제2차 북핵위기가 불거졌던 2002년 10월로부터 35개월만에 한반도 비핵화를 위한 원칙과 해법을 세운 것이다.

남.북한과 미국, 중국, 일본, 러시아 6개국은 7월26일부터 13일간, 그리고 지난 1주일간의 산고끝에 공동성명 합의라는 `옥동자'를 낳았다.

특히 13일부터 시작해 일주일간 진행된 2단계 회담은 반전을 거듭했고 그런 만큼 얘깃거리도 많았다.

◇ 미국의 몽니였나 = 중국이 16일 공동성명의 원본인 4차 초안의 수정본을 낸 후 내내 `부정'으로 흐르던 분위기는 18일 밤 `긍정'으로 반전됐다는 후문이다.

자칫 왕따가 될 상황을 우려했던 미 대표단이 뒤늦게 `좋은 안'(good draft)이라며 찬성하고 나섰던 것.

그 때까지 최대 우려였던 미국이 방향전환을 하자 회담장 안팎에 `타결되는 것 아니냐'는 관측이 돌았다.

이미 다음 날인 19일 오전 8시30분(현지시간) 6개국 대표단이 모두 참석하는 전체회의 시간은 예약된 터였다.

이런 기대감 탓인 지 전체회의 개막전 분위기는 약간 들떴다.

그렇지만 그 시각이 되어서도 회의는 열리지 않았다.

미국측의 요청으로 전체회의가 지연되고 있다는 소문도 들려왔다. 워싱턴이 정치적 결단을 주저하고 있는 게 아니냐는 관측도 뒤따랐다.

그러나 사실인 즉 이랬다. 미 대표단이 공동성명 2조의 두 번째 문장 표현 가운데 `평화공존'을 의미하는 `co-existence peacefully'의 수정을 요구했다는 것.

미측 수석대표인 크리스토퍼 힐 국무부 동아태 차관보는 해당 표현은 냉전 시대의 용어라며 다른 표현으로 바꿔야 한다고 했고 이 때문에 막판 줄다리기가 벌어졌다. 결국 문제의 표현은 `exist peacefully together'로 낙착됐다.

사실상 별 것 아닌 논쟁이었던 셈이다.

이와 관련해 회담장 안팎에서는 힐 차관보가 마지막까지 노력했다는 것을 보여주려 한 것 아니냐는 분석도 나왔다.

◇ 난데없는 만찬장 호출 = 18일 중국의 다이빙궈(戴秉國) 외교부 상무부부장이 주최한 추석 명절 만찬장에서 각국 수석대표들이 차례로 본국 정부로부터 전화를 받고 자리를 떴다.

만찬장에서 남북한을 제외한 수석대표들이 갑작스럽게 그 것도 한 사람씩 불려가 듯 전화를 받은 탓에 주목을 끌었다. 공교롭게도 모두 직속상관인 자국 외교장관들로부터의 호출이었다고 한다.

각 국 대표들은 원인을 몰라 어리둥절했다.

그러나 이내 그 까닭이 밝혀졌다.

반기문(潘基文) 외교통상부 장관이 그 첫 단추를 누른 것이었다.

반 장관이 바로 그 시점에 콘돌리자 라이스 미 국무장관을 포함해 일본, 러시아, 중국의 외교장관들에게 전화를 걸어 수석대표들을 격려해줄 것을 요청했고 외교장관들이 그 요청을 곧 바로 실행하면서 만찬장 해프닝이 벌어졌던 것이다.

◇ 송민순-힐 얼굴 붉히기 = 서로 속내를 터놓고 얘기할 정도로 친분을 과시하는 한미 양국의 수석대표인 송민순 외교통상부 차관보와 크리스토퍼 힐 미 국무부 동아태 차관보가 이번 회담에서 서로 얼굴을 붉혔던 때가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경수로를 둘러싸고 북미간에 팽팽한 긴장이 계속되자 송 차관보가 15일 오전 "우리는 북한이 장래에 경수로를 가질 기회의 창을 열어 두고 있다"며 북한 달래기에 나섰던 게 화근이었다.

이 말은 미국과 사전협의 없이 했던 것으로 그 후 미측 대표단의 반응이 냉랭했고 10년 지기인 힐 차관보도 같은 날 송 차관보에게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고 한다.

송 차관보의 이 발언은 17일(현지시간) 콘돌리자 라이스 미 국무장관과 회동한 후 우리는 중국의 4차 초안 수정본을 수용하기로 했다며 미국도 이를 받아들이라는 반기문 외교통상부 장관의 뉴욕 발언과 함께 미측에 상당한 파문을 일으켰다고 현지 외교소식통은 전했다.

이를 둘러싸고 미 조야에서는 자칫 한국이 미국과 같은 선에 서지 않을 수도 있다는 관측이 제기되기도 했다는데, 결과적으로 이러한 우려가 긍정적인 작용을 했다는 분석도 있다.

◇ 서로 밑지지 않는 장사 = 2단계 회담이 공동성명 합의로 타결되기까지 송 차관보는 북미 양국의 수석대표들에게 `윈-윈'을 강조했다고 한다.

우선 미국의 힐 차관보에게는 이번 회담이 타결된다면 이는 외교를 통한 첫 핵비확산을 실현하는 것으로 조지 부시 행정부의 `외교의 승리'이며 미국내 온건파와 강경파 누구도 밑진 장사가 아니었다고 역설했다는 것.

송 차관보는 또 북한의 수석대표인 김계관 외무성 부상에게는 문제를 해결할 줄 아는 힐 차관보 같은 인물을 도와야 한다며 원칙을 합의하면 건설적인 행동이 나타난다며 결단을 촉구했다는 게 회담 관계자들의 전언이다.

◇ 핵 포기인가 폐기인가 = 남.북한과 미국, 중국, 일본, 러시아 6개국이 한때 회담장에서 논란을 벌인 끝에 공동성명에 `폐기'(dismantlement)라는 단어가 아닌 `포기'(abandonment)를 쓰기로 결정했다.

비슷한 의미를 가진 두 단어는 북한내의 핵무기와 현존하는 핵프로그램을 모두 없앤다는 표현에 적합했지만 당초 미측은 폐기를 선호했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측 대표단은 포기는 포괄적 해석이 가능한 단어로 "꿈을 포기한다고 하지 폐기한다고 하지 않는가"라며 핵무기를 만들려는 장래의 꿈까지 싹을 자르는 표현으로 포기가 적당하다는 유권해석을 건넸고 미측이 이를 수용했다는 것.

이런 해석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그 의도를 의심받을 수 밖에 없었던 북한은 아무런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북한은 포기라는 단어가 피동이 아닌 능동의 뜻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더 선호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 中 언론의 이례적인 강공 = 중국의 관영 신화통신은 종전의 6자회담 보도태도와는 달리 2단계 제4차 6자회담 내내 적극적이면서도 공세적인 보도를 해 눈길을 끌었다.

북한측 수석대표인 김계관 외무성 부상이 13일 평양 순안공항을 출발하기전 인터뷰를 했는 가 하면, 같은 날 각 국 수석대표들이 베이징 서우두 공항에 도착하자이를 모두 `긴급' 기사로 처리해 눈길을 끌었다.

그 이후에도 적지 않은 사안들을 긴급 기사로 처리하는 열의를 보였고 다른 참가국들의 취재진은 신화통신의 이런 새로운 시도에 주목할 수 밖에 없었다.

특히 회담 폐막일인 19일 댜오위타이(釣魚臺) 팡페이위안에서 공동성명 타결 전체회의 직후 중국 당국은 통상 영어로 된 문건을 먼저 돌리는 국제관례를 깨고 중문으로 된 공동성명을 제시했고, 이로 인해 해독이 가능한 중국 취재진 만이 그 내용을 보도할 수 있었다.

영어로 된 공동성명은 10여분이 넘은 뒤에야 배포된 것.

그런 탓에 1분 1초가 승부를 가르는 취재현장에서 중문 해독이 불가능한 중국 이외의 여타 국가 기자들은 발만 동동 굴러야 했다.

(연합뉴스 / 인교준 정준영 이상헌 기자 2005-9-20)

"역시 협상의 귀재"…힐, 6자회담 최고스타로

“오늘은 위대한 날이다.”

19일 극적으로 타결된 북핵 제4차 6자회담의 최고 인기스타를 꼽으라면 단연 미국측 수석대표였던 크리스토퍼 힐 국무부 동아태 차관보이다. 그는 적극적이고 거침없는 행보와 화려한 비유로 북핵 회담장 안팎의 분위기를 주도하며 얽히고 설킨 북핵 문제의 타결을 이끌었다.

그는 개막날인 13일 북한이 주장하는 평화적 핵 이용권에 대해 묻는 기자들에게 “그런 논의조차 받아들일 수 없다”며 6자회담의 핵심은 “북한이 핵 프로그램을 포기할 준비가 돼 있느냐의 여부”라고 말했다. 이는 미국이 북한에 핵의 ‘ㅎ’자도 있는 것을 용인치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으로 해석됐다. 15일 북한의 경수로 건설 문제가 주요 의제로 떠오르자 힐 차관보는 논의 확산 차단에 나섰다. 그는 “한마디로 오늘은 ‘경수로의 날’이었지만 ‘경수로의 주간’이 돼서는 곤란하다”며 “경수로가 협상타결을 가로막는 장애물이라는 용어를 쓰고 싶지 않지만 엉뚱한 것을 테이블 위에 놓고 얘기했다”고 말했다. 16일엔 ‘여전히 비지니스를 하고 있다’고 말해 협상의 여지를 내비치기도 했다.

그러나 북한측이 이날 “신뢰의 기본 척도인 경수로를 주지 않겠다고 계속 주장한다면 우리로서는 우리식의 평화적 핵활동을 순간도 멈출 수 없게 될 것”이라며 배수진을 치자 그는 고민에 빠졌다. 뉴욕타임스는 힐이 이날 오후 내내 전화를 붙잡고 워싱턴과 협의를 벌였다고 전했다. 추석날인 18일 오후 늦게까지 장고에 장고를 거듭하던 미 본국으로부터 낭보가 전해졌다. 경수로에 관한 내용을 공동문건에 포함시켜도 좋다는 허락이었다. 힐 차관보는 “19일 오후엔 비행기를 탈 것”이라며 한껏 기대를 부풀게 했다. 이어 약속했던 마지막날 그는 “합의는 서로 ‘윈윈’한 것으로 오늘은 위대한 날”이라며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지난 2월 6자회담 미국측 수석대표에 임명된 직후 “훈령만 읽는 협상자가 되지는 않겠다”며 그동안 ‘오버’라고 느껴질 정도로 적극적인 행보를 벌여온 힐 차관보가 결국 ‘일’을 내자 워싱턴의 외교 소식통들은 “역시 협상의 귀재”라며 높이 평가했다. 힐 차관보는 코소보 사태 당시인 지난 1999년 마케도니아 대사로 근무하며 슬로보단 밀로셰비치 전 유고 대통령과 담판을 벌여 보스니아 분쟁 협상을 성사시켰다. 또한 우리측 수석대표인 송민순 외교통상부 차관보와 인연을 맺었던 2003년 폴란드 대사 시절 이라크 전쟁이 발발하자 폴라드의 파병을 이끌어 내 조지 W 부시 대통령의 각별한 신임을 얻기도 했다.

워싱턴 정가 소식지인 ‘넬슨 리포트’의 발행인인 크리스토퍼 넬슨은 “힐은 북측 대표들이 회담장에서 떠나갈 구실을 주지 않으면서, 유머러스하고 기분좋게 ‘노’(NO)라고 말할 수 있는 방법을 아는 사람”이라고 평가했다. 또 다른 외교 소식통들은 그가 ▲강력한 추진력 ▲실용주의 ▲유연하고 집요한 협상력으로, 네오콘의 입김 아래 운신의 폭이 극도로 제약됐던 제임스 켈리 전 차관보와 달리 자신감있는 행보로 자신의 목소리를 적극 반영했다고 평가했다.

그의 노력 덕분으로 ‘힐사모’(힐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 회원을 중심으로 한 한국 네티즌의 힐 예찬은 다시 사이버를 뜨겁게 달구고 있다. 차관보가 주한 대사로 활동하던 시기 개설했던 인터넷 카페(http://cafe.daum.net/usembassy)의 게시판엔 ‘힐이 있었기에 타결이 가능했다’ ‘힐 차관보, 수고했습니다’는 축하 글들이 계속해 올라오고 있다. 힐 차관보의 한국 이름을 이용한 ‘한덕, 위대한 날’이라는 제목의 글도 눈길을 끈다.

(세계일보 / 송민섭 기자 2005-9-20)

[북핵 포기 합의] 추석 새벽 '한·미 외무 접촉'이 전환점

결렬로 가파르게 치닫는 듯했던 4차 6자회담은 19일 극적으로 합의문을 만들어 냈다. 완벽한 반전이다. 13일 시작돼 6일 동안 팽팽하던 대립이 갑자기 방향을 튼 것이다.

정동영 통일부 장관은 미국의 입장 변화를 가장 큰 요인으로 꼽았다. 그는 "반기문 외교장관과 콘돌리자 라이스 미 국무장관이 접촉해 '어떻게든 중국의 중재안을 중심으로 타결하자'고 미국을 설득했다"고 설명했다. 특히 그는 "반 장관과 라이스 장관의 여섯 차례 회동이 결정적이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17일(현지시간)까지만 해도 상황은 '시계 제로'였다. 평양에서 열린 장관급회담(9월 13~16일)은 공동보도문을 낼 만큼 분위기가 좋았지만 베이징(北京)은 달랐다. 베이징에선 결렬 전망이 나오기 시작했다. 북핵 폐기 범위와 경수로 제공 문제를 둘러싸고 미국과 북한은 평행선을 달렸다.

이 상황에서 한국은 '서울의 국가안전보장회의(NSC)가 중심이 된 3원 체제'로 막판 노력을 기울였다. 원칙은 중국이 제시한 4차 초안 원안을 유지하되 북핵 문제를 다룬 1조2항만 손을 댄다는 것이었다.

우선 평양의 장관급회담에 참석하고 있던 정동영 통일부 장관이 움직였다. 정 장관은 북한의 고위층에 "이번에 받지 않으면 어렵다"고 압박했다. 핵과 관련된 북한의 권리와 의무를 추상적으로 규정한 1차 초안에 경수로 부분을 추가하되 북한은 모든 핵을 포기한다는 안을 제기했다. 정 장관과 이종석 NSC 사무차장은 이미 8.15축전 참석차 북한 방문단이 서울에 왔을 때 이들을 극비리에 면담했다. 이 자리에서도 "이번엔 반드시 핵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남측의 입장을 전달했다.

타개의 실마리는 뉴욕에서 풀렸다. 핵심 관계자는 "16~18일에 걸쳐 뉴욕에서 집중적인 한.미 접촉이 있었다"고 했다. 회담, 전화접촉, 리셉션대화 등 모든 자리가 활용됐다. 가장 중요한 계기는 추석인 18일(한국시간) 새벽 한.미 외무장관회담. 40분 회동에서 반 장관은 "이번에 합의하는 것이 한반도 비핵화 목적을 달성하는 길" "이번이 핵문제뿐 아니라 보다 큰 차원의 평화체제로 가는 로드맵을 대승적으로 만들 수 있는 기회"라고 했다. "(경수로 문제를)논의할 수는 있는 것 아니냐" "중국이 만든 공동성명 초안은 상식적인 것" "그 정도면 봐줄 수 있는 것"이란 말도 했다. 라이스 국무장관은 백악관과 협의에 들어갔다.

미국에 대한 설득과 병행해 정동영 장관은 일본.러시아의 외무장관들과 통화했다. 중국도 독자적으로 움직였다. 워싱턴 포스트는 중국 리자오싱 외교부장이 16일에 이어 18일 밤 라이스 장관에게 전화를 걸었다는 신화통신 보도를 인용해 보도했다. 크리스토퍼 힐 6자회담 미국 대표도"라이스 장관이 다른 6자회담 참가국 외무장관들과 협의했다"고 밝혔다.

마침내 미국의 긍정적인 입장이 전달됐다. 18일 늦은 오후 서울의 회담 관계자는 "너무 비관적일 필요는 없다. 결론을 기대할 만하다"고 했다.

미국은 "입에도 올리지 말라"던 경수로 문제를 합의문에 넣는 데 동의했고, 북한은 '모든 핵무기와 핵 프로그램'으로 핵폐기 범위를 넓히도록 물러섰다. 6자회담 핵심 쟁점인 경수로 제공 문제는 '미래의 기회'를 열어 놓는 쪽으로 정리되면서 연착륙 토대가 마련됐다.

(중앙일보 / 최상연.서승욱 기자 2005-9-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