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무실로 찾아온 학부형이 제자라니...

일선 중고등학교에서는 신학기가 시작되면 으레 선생님들이 이동한다. 필자가 근무하는 학교에도 선생님 몇 분이 정든 자리를 떠나시고 그 자리를 새로운 선생님들이 채우셨다.

오신 분 중에서 유독 한 분 선생님이 시선을 끌었다. 하얗게 센 머리칼이 제법 노신사다운 풍모를 드러내시는 50대 중반을 넘어선 국어선생님이셨다. 같은 국어과라 필자에게는 하늘같은(?) 선배님이셨다. 아마도 관리자가 되기 위한 길보다는 평교사로 남겠다는 의지로 이제까지 아이들을 가르쳐 오신 듯했다.

몇 분 선생님들의 인사말에 이어, 선배 선생님의 인사말이 이어졌다.

"늙은이가 이 학교에 와서 많은 선생님들이 반기지 않으면 어떡하지 하는 생각으로 밤을 꼬박 지새웠는데, 여러분들이 이렇게 환영주시니 대단히 송구하고 고맙습니다. 앞으로 교직 생활이 얼마 남지 않은 시점에 이 학교에 정확하게 28년 만에 다시 오게 되리라곤 생각지도 않았는데, 이렇게 다시 오게 되어 저에게는 꿈만 같습니다. 하느님이 내게 주신 마지막 선물이라 생각하고 열심히 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선생님의 간단한 인사말이 끝나자, 약간은 교무실 분위기가 숙연해지는 듯했다. 선생님의 28년만의 귀교(귀향)라는 말에 대부분의 선생님들이 무언의 존경을 보내는 듯한 모습들이었다.

대부분 선생님이 하기 싫은 일을 도맡아 하겠다는 열성도 보이시고, 때론 아이들의 상담 역할도 곧잘 해주셨다. 시간이 흐르면서 정말로 아이들을 위해 이제까지 교직 생활을 해오셨구나 싶어 절로 고개가 숙여지는 경우가 많았다.

우연하게 29년 전에 이 학교에 초임교사로 부임해서 근무했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그 시절에는 학생 수가 천 명이 넘었어. 지금처럼 소규모 학교가 아니라, 인근 지역에서도 학생들이 올 정도로 대단히 큰 학교였지. 이십대 후반에 학교에서 내 청춘을 보냈으니 정말로 감개무량하지. 그 때 아이들이 아마 40대 중반은 넘어설 거야. 참 세월도 무심하지…."

선생님의 구수한 입담에 여러 선생님들이 시간가는 줄 모르고 듣기 일쑤였다.

한 선생님께서 지나는 말로 "나도 저 나이쯤 되면 저렇게 되어야 할텐데…"하셨다. 물론 선생님의 자조 섞인 말씀이기도 했다. 이런저런 일로 선배 선생님께서 여러 선생님들과 학생들에게 끼치는 영향은 제법 일파만파로 퍼져 나가고 있었다.

하루는 1학년 아이가 무슨 사고를 쳤는지는 교무실에서 담임 선생님의 말씀을 한참 듣고 나더니 한쪽으로 가서 부모님이 오실 동안 반성문을 열심히 쓰고 있었다.

"너는 무슨 사고를 쳤기에 여기 와서 앉아 있노. 이놈아 선생님 말씀 좀 잘 들어라. 건데… 너 어디서 많은 본 것 같은데…. 혹시 선생님 안면 없나?"
"없는데요. 전 선생님 수업 때 처음 봤는데요."

아이의 퉁명스러운 말에 선배 선생님은 겸연쩍었는지 "그 놈 참 말투도 어디서 들은 것 같은데…" 하시면서 고개를 갸우뚱하시는 것이었다. 아이는 그 선생님의 알지 못할 말에 상관없이 열심히 반성문을 쓰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이의 학부형이라고 하는 사람이 교무실을 찾아왔다. 자식의 잘못을 마치 자기의 잘못처럼 여기는지 부끄러운 표정으로 인사를 하는 것이었다. 그 학부형이 담임선생님을 찾고 잠시 이야기를 나누고는 부끄럽고 미안한 표정으로 교무실 문을 나서려고 하는 참이었다.

"어…. 혹시 너 ○○ 아이가?"
"어! 선생님 아니십니까?"

짧은 순간이었지만 선배 선생님께서 그 학부형을 알아보시고는 말을 건네셨다. 학부형도 깜짝 놀라며 선생님께 인사를 한다.

"이게 얼마만이고! 한 삼십년 되가나?"
"예, 선생님 30년 된 것 같습니다."

두 사람의 만남은 삭막했던 교무실 분위기를 한 순간에 바꾸었다. 서로 악수를 하며 그간의 안부를 묻느라 주변 사람들은 이미 그들의 시선에서 떠나 있었다.

"어째 저 놈이 너의 말투랑 생김새랑 비슷하다 했다. 어디서 분명히 본 듯했는데, 이놈의 기억력도 이제 믿을 것이 못돼."
"그래도 선생님 그 세월에 여전히 저를 기억해 주시고, 저야…."

학부형이 점심식사를 청하고 선배 선생님과 함께 교무실 문을 빠져나가고 나서야 잠시 들뜬 교무실 분위기가 잠잠해졌다.

"삼십 년 만의 만남이라. 십년이면 강산도 변하는 세월인데. 정말로 ○○선생님은 복도 많으신 선생님이야."
"어떻게 그 긴 세월 그 제자를 잊어버리시지도 않으시고…"
"제자의 아들에게서 제자를 떠올리시다니…. 제자에 대한 열정과 사랑, 정말로 대단해."
"제자의 아이를 다시 제자로 가르치시는 선생님의 마음은 어떠실까?"

교무실에서는 그 선생님과 제자의 만남을 두고 한바탕 이야기꽃이 피었다.

이제 겨우 교사의 길이 뭔가를 조금씩 느끼기 시작한 필자로서는 몇 십 년이라는 긴 세월을 뛰어 넘은 그 스승과 제자의 보이지 않는 질긴(?) 인연을 막연하게나마 짐작해 볼 수 있을 뿐이었다.

(오마이뉴스 / 서종훈 기자 2005-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