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성, 그리고 美·中 헤게모니 쟁탈전

시공을 넘어 망국의 슬픔과 분단의 한이 교차하는 곳, 개성을 지난 2일 다녀왔다.

‘오백년 도읍지를 필마로 돌아드니 산천은 의구하되 인걸은 간 데 없네….’ 600여년 전 고려의 유신(遺臣) 야은 길재는 망국의 슬픔을 이렇게 노래했다. 판문점에서 불과 10리 거리인 고향 개성을 오랜 세월 힘들게 찾아온 실향민들은 분단의 아픔을 눈물로 달랬다. 가고 싶어도 가지 못하다 이제야 고향땅을 밟을 수 있었다. 어릴 때 선죽교에서 소꿉장난하며 자랐다는 어느 할머니는 55년 만에야 다시 이곳을 찾았다며 출입금지 팻말에도 불구하고 선죽교에 털썩 앉아 눈물을 흘렸다.

기자 개인으로는 지난 78년 판문점을 방문, 철책선 너머로 ‘언제 저곳을…’하며 막연하게 바라본 북녘땅이 바로 개성이다. 우리나라 60년대를 연상시키는 개성 시내 풍경에선 약간의 향수와 실망감을, 황진이가 즐겨 찾았다는 박연폭포에선 낭만을, 우리 기업의 터전으로 탈바꿈하는 개성공단에선 새 희망을 봤다. 해질 녘 휴전선을 지날 때는 만감이 교차했다. ‘언제 다시 올까, 그때는 통일 이후일까 분단 상황일까….’문뜩 중국 땅으로 바뀐 후는 아닐까라는 생각이 스쳤다.

‘웬 흰소리’라고 반문할지 모른다. 기자도 ‘설마 그렇게까지…’라는 마음이 들면서도 작년 이맘때쯤 가진 수출입은행 배종렬 박사와의 만남이 머리에 떠오른다. 그때 들은 얘기가 워낙 강렬해 지금도 기억이 생생하다.

북한 전문가라는 소개를 받은 배 박사는 중국에 대해서도 밝았다. 그는 당시 우리 사회를 뜨겁게 달구었던 중국의 동북공정에 대해 미국과 중국, 한반도를 넘나들며 폭넓게 얘기했다.

그는 중국이 왜 최근 부쩍 동북공정에 열을 올리며 고구려 역사를 왜곡하는지에 주목해야 한다면서 그 배경에 미국과 중국 간의 헤게모니 쟁탈전이 있다고 주장했다. 미국은 중국의 팽창을 막기 위해 북쪽으론 몽골을, 서쪽으론 달라이라마의 티베트를, 남쪽에선 대만을, 동쪽에선 만주족을 지원하고 있다고 말했다. 중국이 이 같은 미국의 의도를 파악하고 만주족, 더 나아가 조선족을 견제하기 위해 만주 지배계층 역사를 왜곡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미국이 북핵에 민감한 것도 한반도에 긴장관계를 조성, 미사일망을 만주까지 겨냥해 중국의 팽창을 막으려는 복선이 깔려 있다는 것이 그의 해석이다.

중요한 것이 한국의 선택으로, 미국과 중국의 싸움이 본격화될 때 중국 편에 서면 최악의 경우 중국 식민지로 전락해 소수민족 처지가 될 수도 있다고 경고했다. 설령 잘 돼 남북이 통일돼도 중국은 만리장성의 끝을 철령으로 보고 그 위쪽은 중국으로 편입시켜 우리 국토는 통일신라 시대의 국토로 줄어들 수 있다고 말했다.

반대로 미국 편에 서면 미국이 골치 아픈 북한을 우리에게 통째로 넘겨줄 뿐 아니라 중국 교란정책을 펼 때 혼란스런 만주를 우리에게 넘길 수도 있다고 주장했다. 지금 우리가 친미냐 친중이냐를 논할 때가 아니라 역사적인 큰 관점에서 1500년 전 고구려 고토를 상당 부분 회복할 선택의 기로에 서 있다는 얘기다.

작년 11월 크리스토퍼 힐 주한 미대사(현재 동북아차관보)를 만났을 때 이 얘기를 들려줬다. 힐 대사는 “그는 중국 전문가일지는 몰라도 미국 전문가는 아니다”라며 질문의 핵심에서 비켜갔다. 이어 “달라이라마를 지원하는 것은 인도적인 차원이고, 몽골은 어려워 경제적 지원을, 대만은 양안문제의 긴장을 완화하기 위한 차원”이라고 설명했다. 그리고 북핵과 관련, “우리는 결코 한반도의 긴장을 원치 않는다”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솔직히 중국이 너무 크는 것을 원치 않는다”며 중국에 대한 미국의 단상을 비쳤다. 그리고 묻지도 않은 개성공단 지원 의지를 여러 번 밝혔다.

기자는 미국의 개성 지원이 중국의 북한 영향력 확대를 견제하려는 의도로 받아들여지면서도 기분이 별로 나쁘지 않았다. 우리의 이해관계와도 맞아떨어지기 때문이다. 통일비용을 줄이려면 북한과의 경제력 격차를 줄여야 하고 북한 주민이 시장경제를 배워야 한다. 그 한복판에 개성공단이 있다. 이래저래 많은 생각을 하게 한 개성 방문길이었다.

(헤럴드경제 / 권충원 경제부장 2005-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