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유사, 일연 혼자 쓴 책 아니다”

일연스님이 말년에 ‘삼국유사’를 완성했던 곳으로 알려진 군위 인각사. 그러나 삼국유사는 일연스님 생전에는 완성되지 않은 것으로 드러났다.

‘삼국사기’와 함께 국내 최고의 사서로 꼽히는 ‘삼국유사’는 일연(一然:1206~89) 개인의 작품이 아닌 그의 문도를 비롯한 여러 사람의 공동 저술이라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또 간행 시기도 고려시대가 아닌 조선 개국 직후인 1394년이라는 주장도 함께 제기됐다. 하정용 송광사 성보박물관 전문위원은 최근 펴낸 연구서 ‘삼국유사 사료비판’(민족사)을 통해 “삼국유사는 미완성작으로 고려시대에는 간행된 바 없고, 일연 혼자서 쓴 작품도 아니며 축차적(逐次的)으로 만들어졌다”고 밝혔다. 이같은 주장은 10년 이상 ‘삼국유사’의 텍스트를 연구해온 소장 역사학자인 하씨가 삼국유사의 활자본, 필사본 등 여러 종의 판본 연구 및 사료비판, 내용에 대한 치밀한 서지학적 분석을 바탕으로 한 것이어서 주목된다. 공동 저술의 근거는 여러 곳에서 확인된다. ‘삼국유사’에서 일연이 편찬자로 명기된 것은 권(卷) 제5에 ‘인각사 주지 원경충조 대선사 일연 찬’이라는 구절이다. 일연을 삼국유사의 저자로 보는 것은 이 구절을 책 전체의 편찬자로 확대해석한 데 따른 것. 그러나 하씨는 5권의 편찬자가 일연이라고 해서 삼국유사의 모든 편목을 일연의 저작이라는 보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말한다. 하씨는 먼저 ‘삼국유사’의 책 이름이 문도들이 세운 일연의 비문인 ‘보각국존비문’에 나타나지 않았음을 들어 일연 생전에는 편찬이 완성되지 않았다고 밝혔다. 또 ‘삼국유사’에 일연의 제자 무극(無極)이 쓴 ‘전후소장사리’조나 ‘관동풍악발연수석기’조와 같은 글이 포함돼 있는 점도 공동 저술의 가능성을 높여준다. 하씨는 삼국유사의 체계가 고르지 못하고 편목당 항목 수가 2배 이상 차이가 나는 등 심한 불균형을 보이는 점도 여러 사람이 썼다는 증거로 꼽았다. 특히 책 맨 앞의 ‘왕력’편이 목차 표시 없이 권 제1 ‘기이’편 앞에 들어간 것은 체제가 갖춰진 뒤에야 끼워넣어졌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삼국유사’의 첫 간행본(1394년)으로 추정되는 ‘모씨소장고판본’. 통용되는 정덕임신본(1512년)보다 간행상태가 깨끗하다.
‘삼국유사’의 피휘(避諱:고려조 임금의 이름자를 다른 글자로 바꿔쓰는 일)의 용례가 일관성이 없는 점도 편찬자가 한 사람이 아님을 보여준다. ‘삼국유사’의 전편에서 대부분 피휘가 지켜지고 있는데 반해 일연이 찬한 게 확실한 권 제5에서만은 피휘법이 적용되지 않고 있다. 이에 대해 하씨는 “‘삼국사기’처럼 ‘삼국유사’도 내용이나 분량, 주제에 따라 편찬자가 분담됐을 가능성이 있다”며 “일연의 단독 저작설은 고려 후기 혼란스러웠던 시대상황에서 민족사학을 강조하며 일연을 과대평가한데서 나온 것 같다”고 밝혔다. 그는 “삼국유사의 편찬은 일연 개인 저술도, 문도들과의 공동 저술도 아니다”라며 일연 문도 이후에도 제3자가 개입해 완성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주장했다. ‘삼국유사’ 간행에 대해서는 일연 사후에 제자 무극이 처음 펴냈다는 견해가 지금까지의 학계 통설이다. 간행 추정 시기는 대략 1308~22년. 그러나 하씨는 현재 남아 있는 ‘삼국유사’의 고판본을 근거로 초간본의 간행 시기를 태조 3년 1394년으로 보고 있다. 간행 시기와 관련, 하씨는 ‘삼국유사’의 기이편 고조선조를 주목했다. 고조선조에는 단군 왕건이 도읍지를 정한 아사달을 설명하는 주석에 ‘지금의 백악궁(白岳宮)’이라는 내용이 들어 있다. 문제는 백악궁의 완성 시기가 1360년 11월이라는 점. 이를 근거로 하씨는 삼국유사 초간본은 1360년 이후라고 밝혔다. 이와 함께 하씨는 ‘1394년 경주에서 삼국사기가 간행됐다’는 ‘삼국사기’ 임신본(1512년 간행)의 발문 내용과 권근 등의 ‘동국사략’(1403년 간행)에 ‘삼국유사’의 내용이 그대로 보이는 점을 들어 삼국유사의 첫 간행을 1394년일 것으로 추정했다. 현재 전하고 있는 ‘조종업구장고판본’이나 ‘모씨소장고판본’이 바로 1394년 간행된 최초의 ‘삼국유사’ 판본이라는 것이다.

(경향신문 / 조운찬 기자 2005-9-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