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자왕은 과연 폭군이고 탕자였을까?

부여의 부소산성과 낙화암, 그리고 삼천궁녀의 전설을 찾아서

우리민족이 5천년 역사에서 가장 넓은 국토를 차지하고 웅지를 펼쳤던 시기는 아마 삼국시대일 것이다. 드넓은 만주벌판을 호령하며 중국대륙을 통일한 수나라와 당당히 맞서 싸워 이기고 당태종의 오만한 콧대를 꺾었던 고구려의 역사는 얼마나 자랑스러운 우리민족의 기상인가.

▲ 삼충사 의열문
ⓒ2005 이승철
그런가 하면 그 시대 삼국의 한 축인 한반도의 서남부지방에는 기름진 평야지대를 가꾸며 지형처럼 부드러우면서도 아름답고 찬란한 문화를 일궈내 멀리 일본에까지 전하였던 백제가 있었다. 그렇지만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나당연합군에게 패망하여 오늘 날은 삼천궁녀의 슬픈 죽음과 타락 방탕한 마지막 왕이라는 왜곡되고 폄하되어 더욱 초라한 모습으로 남은 것이 백제의 모습이다.

지난 8월 31일 백제의 고도 부여를 찾았다. 부소산성에 들어서 잠깐 올라가니 백제의 세 충신 성충, 흥수, 계백장군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 나타났다. 이 세 사람의 충신은 모두 백제의 마지막 왕 의자왕의 충신들이었다.

▲ 옛 우물터
ⓒ2005 이승철
성충은 타락하여 정사를 돌보지 않는 의자왕에게 직언으로 간하다가 미움을 받아 유배되어 유배지에서 굶어 죽었다고 한다. 또 흥수도 귀양생활 중에 나당연합군의 침공을 받은 의자왕이 계책을 묻자, 당나라군대는 백강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신라군은 탄현을 넘지 못하도록 막으라고 일러주었으나 이를 지키지 않아 결국 패망하였다는 일화가 전하는 사람이다.

계백장군은 그 유명한 황산벌 전투에서 5천명의 결사대를 이끌고 신라의 대군과 맞서 싸우다가 패하여 장렬히 전사한 백제의 마지막 보루와 같았던 장군이다. 이들 세 명의 위패를 모신 사당인 삼충사를 지나 조금 더 올라가노라니 날아갈 듯 멋진 누각이 나타난다.

▲ 영일루
ⓒ2005 이승철
이 누각이 바로 영일루다. 당시 백제의 왕들이 멀리 계룡산 연천봉 위로 떠오르는 태양을 맞이하면서 하루 일과를 계획하였다는 누각이다. 또 조금 더 나아가니 왼쪽 언덕에 군대용 곡식을 보관하였던 것으로 추정되는 군창지가 나타났다. 서기 5~6세기경의 것으로 추정되는 병영터는 수혈식 주거형태로 온돌을 사용하였던 흔적이 남아 있었다.

이 부소산성은 백제의 성왕이 국가의 부흥을 꿈꾸며 도읍지로 옮긴 곳이다. 1972년에 부여군수가 세웠다는 반월루에 오르니 부여 시가지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부여의 진산이라는 부소산을 감싸고 돌아온 백마강이 흘러내리는 넓은 평야를 안고 있어서 넉넉한 식량과 물, 그리고 천혜의 지형을 이용한 좋은 도읍지의 조건을 갖추고 있는 셈이었다.

▲ 수혈식 온돌형태의 옛 병영터
ⓒ2005 이승철
이 사비성으로 천도 이후 백제는 남하하는 고구려와 맞서기 위하여 신라와 나제동맹을 맺는다. 그러나 신라의 배신으로 동맹관계는 깨어지고 후발국인 신라와 치열한 영토다툼을 벌이게 된다. 그러나 결국은 궁지에 몰린 신라가 당나라에 도움을 청하게 되고 당나라와 연합한 나당연합군에게 패망하는 비운을 맞게 되는 것이다.

백제의 수도로 123년간 영화를 누렸던 백제의 도읍지 부소산성, 그러나 세상 사람들에게 남긴 역사의 흔적은 영광이 아니라 부패한 폭군 의자왕과 삼천궁녀의 슬픈 이야기다.

백화정, 휘돌아가는 백마강변의 뾰족한 바위투성이 작은 봉우리에 날아갈 것 같은 작은 육각정자가 쓸쓸한 낙조를 안고 서 있는 모습은 가히 천하의 절경이다. 정자에 올라서니 발 아래 절벽 밑을 흐르는 백마강의 풍경이며 강물 위를 떠가는 유람선이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아름다운 모습이다.

▲ 반월루
ⓒ2005 이승철
그러나 바로 밑에 삼천궁녀의 슬픈 전설이 깃든 낙화암이 있으니 어찌 아름답다고만 할 수 있으랴. 조선 숙종 때 홍춘정이라는 사람은 백제에 대한 그리움과 낙화암의 쓸쓸함을 이렇게 시로 읊었다고 전한다.

나라가 망하니 산하도 옛 모습을 잃었구나.
홀로 강에 멈추듯 비치는 저 달은 몇 번이나 차고 이지러졌을까
낙화암 언덕엔 꽃이 피거니
비바람도 그 해에 불어 다하지 못했구나.


초가을이라고 하나 낮 기온은 여름처럼 무더운 날씨였다. 그래도 백화정과 낙화암은 강바람으로 시원한 편이다. 무려 10대의 관광버스를 타고 의정부에서 왔다는 많은 사람들 중의 일부는 백화정에서 내려올 줄을 모른다.

▲ 백화정
ⓒ2005 이승철
“여기가 바로 삼천궁녀가 물로 뛰어내렸다는 낙화암 맞아요?”
“네, 그렇답니다.”
“그런데 정말 궁녀가 삼천 명씩이나 있었을까요?”
“말도 안 되는 소리, 무슨 삼천 명이 있었겠어. 삼백 명이라면 또 모르지만…. 이 조그만 성에 어떻게 궁녀가 삼천 명씩 살았겠어?”

그러자 옆에서 듣고 있던 50대로 보이는 신사가 한 마디 거든다.

“다, 의자왕을 방탕한 폭군으로 인식시키기 위해서 후세의 사가들이 그렇게 쓴 것이지요.”
“정말 그럴까요?”
“나라가 망하면 이긴 쪽에서 역사를 쓰기 때문에 그렇게 왜곡하는 거지요.”
“왜 그렇지요? 사실대로 쓰면 될 걸.”
“그래야 백성들이 옛 왕조를 섬기는 마음이 사라지거든요. 너희들의 옛 왕은 이렇게 형편없이 나쁜 왕이었다, 그러니 잊어버려라. 뭐 이런 뜻이지요. 조그만 나라의 임금이 궁녀를 삼천 명씩이나 거느렸다면 절대 좋은 왕이 아니잖아요? 그런데 사실 백제의 마지막 왕 의자왕은 그렇게 나쁜 왕이 아니었답니다.”
“그걸 어떻게 알 수 있죠?”
“어떤 기록에 의하면 왕이 당나라로 잡혀갈 때 수많은 백성들이 길거리에 엎드려 대성통곡을 했다는 기록도 있답니다. 그렇게 방탕한 폭군이었다면 백성들이 그렇게 슬퍼했겠습니까?”
“듣고 보니 그렇기도 하네요.”

낙화암에도 몇 사람의 여자들이 절벽 밑을 바라보며 가늠을 해보고 있었다.

“아이쿠 무서워, 여기서 떨어지면 꼼짝없이 죽겠구만.”
“그런데 이 좁은 바위에서 삼천 명씩이나 뛰어내렸으면 시간도 많이 걸렸겠네,”
“무서워서 어떻게 뛰어 내렸을까?”
“나라가 망해도 여자들을 죽이지는 않았을 텐데 죽긴 왜 죽어, 바보들 같이….”

▲ 백화정 옆에서 내려다본 낙화암과 백마강
ⓒ2005 이승철
여성관광객들의 이야기를 뒤로하고 낙화암에서 다시 조금 올라와 고란사로 향했다. 스피커에서는 “백마강 달밤에 물새가 울어 잃어버린 옛날이 애달프구나, …낙화암 그늘에서 울어나 보자” 구슬픈 옛 노래가 울려 퍼지고, 낙화암에 있던 여성관광객 몇 사람이 노래를 따라 부르고 있었다.

백제 말기에 세워진 것으로 전하는 고란사는 원래 백제왕들의 정자였다고 전한다. 절벽 아래 고즈넉하게 자리 잡은 조그만 사찰에는 경치가 좋아 많은 관광객들이 구경하고 있었다. 절 뒤에는 고란정이라는 샘이 바위 밑에 있어 시원한 물을 한 모금 마시고 살펴보니 샘 입구에 세워 놓은 유리관 안에 고란초가 보호되고 있었는데 이 고란초는 원래 샘 위의 바위 사이에서 자라던 것이라고 한다.

▲ 고란사
ⓒ2005 이승철
고란정 입구 바위에 고란초의 독백이라는 시 한 수가 새겨져 있었다.

사시상청 푸른 절개
천추에 전한 삼천궁녀 넋이 다 내 맘이라오.
무명무상절일체(無名無相絶一切)도 내 맘 이라오.
약수에 내 몸 띄워 님께 바쳐온
백제의 그 정신이 내 맘이라오.

-임현상의 시 '고란초의 독백' 마지막 부분


무왕의 맏아들로서 한때 해동증자라는 칭호를 받을 만큼 부모에 대한 효성이 지극하고 형제간의 우애도 두터웠던 의자왕이었다고 한다. 왕권을 강화하고 나제동맹을 깨뜨린 신라의 수많은 성들을 빼앗아 국토를 넓히기도 하였던 왕이었다. 그러나 패망한 나라의 마지막 왕에게는 다 부질없이 일이었다.

▲ 고란사 뒤 바위 밑 샘터 앞 유리상자 속의 고란초
ⓒ2005 이승철
삼천궁녀의 슬픈 전설과 함께 후세의 사가들에 의하여 그는 형편없는 폭군이며 방탕한 군주라는 이름으로 전하여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삼국사기를 쓴 신라왕실의 후손인 김부식의 다음 말을 음미해보면 역사의 기록에 대한 우리 나름대로의 평가도 가능할 것 같다.

"백제가 말기에 이르러 행동이 도리에 어긋나는 것이 많았으며 또한 대대로 신라와 원수를 맺어 고구려와 함께 화친을 계속함으로써 신라를 침공하고 유리한 조건과 적당한 기회만 있으면 신라의 중요한 성과 큰 진들을 빼앗아 가기를 그치지 않았으니 소위 인자(仁者)와 친하고 이웃을 잘 사귀는 것이 나라의 보배라는 것과 다르다. 이에 대하여 당나라 천자가 두 번 조서를 내려 백제와 신라 사이의 원한을 풀라고 하였으나 겉으로는 순종하는 체하면서 안으로는 위반함으로써 대국에 죄를 졌으니 그가 패망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오마이뉴스 / 이승철 기자 2005-9-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