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농민 봉기할 때 머지 않았다"

반체제인사 한둥팡 주장... "소수가 토지 약탈 봉건시대와 똑같아"

▲ 중국 산시성 린펀시의 농촌에서 아직도 볼 수 있는 토굴집. 중국 경제는 급속하게 발전하고 있지만 중국의 농민들은 여전히 가난하다.
ⓒ2005 오마이뉴스 김태경

"중국에 새로운 농민 봉기의 서막이 열리고 있는 것 아닌가?"

갈수록 빈발하는 각종 시위로 중국이 몸살을 앓고 있는 가운데 중국의 유명한 반체제 인사인 한둥팡이 31일 갈수록 빈발하고 있는 중국 농민 시위를 분석한 글에서 이같이 주장했다.

이날 중국어 뉴스 사이트인 <두웨이신문망>에 따르면 한둥팡은 "중국 역사를 어떤 의미에서는 '농민봉기사(農民起義史)'라고 말한다면 이에 반대할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라며 "최근 중국 각지에서 토지를 지키기 위한 농민들의 시위와 항쟁이 급증하고 있다. 중국에서 새로운 농민 봉기의 조류가 그 서막을 열고 있는 것 아닌가?"라고 질문을 던졌다.

현재 13억 중국 인구 가운데 70%가 농민이다. 한둥팡은 지난 1989년 6·4 천안문 사태 주동자 가운데 한 명으로 1994년 홍콩으로 건너와 인권단체인 '중국노동자통신'을 만들었다.

중국 역사의 중요한 특징 가운데 하나가 수많은 농민 봉기다. 중국 농민들의 봉기는 단순한 불만 표출로 끝나지 않고 아예 왕조 자체를 교체한 경우가 많다.

진시황제의 진나라는 진승과 오광이 주도한 농민 봉기로 멸망했다. 유방이 세운 한나라가 황건적의 반란, 원나라는 백련교도가 중심인 홍건적의 반란, 명나라는 이자성의 농민봉기로 무너졌다. 가깝게는 청나라 역시 1911년 신해혁명으로 공식적으로 멸망하기 전에 이미 1851년 홍수취안이 이끈 태평천국의 난으로 사실상 왕조의 생명은 거의 끊어졌다.

마오쩌둥의 사회주의 혁명도 중국 역사상 빈발했던 농민 봉기의 연장선상에 있다는 해석도 있다. 즉 정통 마르크스·레닌주의가 노동자 중심의 혁명을 말하는데 비해 마오쩌둥은 농민군을 이끌고 혁명에 성공했는데 이 것 자체가 봉건 왕조 시대의 농민 봉기와 유사하다는 것이다.

"소수가 힘없는 농민들 토지 약탈"

한둥팡이 분석한 중국 역사상 농민 봉기가 발생한 배경은 비슷하다. 재화와 토지가 소수에게 집중되고 농민들은 토지를 잃고 떠돌이 생활을 하게 된다. 아무 것도 없는 농민들은 재산과 토지의 균등한 분배를 요구하게되고 결국 폭력적인 수단에 의존한 봉기로 발전한다.

한둥팡은 "현재 중국 사회의 극소수인 관리와 관리와 결탁한 소수인들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않고 불쌍한 농민들의 토지를 빼앗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최근 벌어진 몇건의 농민 시위를 분석했다.

올 해 3월 26일 광둥성 푸산시 난하이구 정부는 싼산진에 있는 400무(1무는 약 170평)의 토지에 대한 개발에 착수했다. 그러나 이미 이곳에는 수백명의 농민들이 채소 농사를 짓고 양어장을 운영하고 있었다. 현지 농민들은 크게 반발했다.

놀라운 것은 농민들도 모르게 자신들의 토지가 이미 1992년에 싼산진 관리와 난하이구 정부 사이에 매매 계약이 체결된 상태였다는 점이다. 농민들은 합법적인 거래 문서를 공개하라고 했지만 난하이구 정부는 내놓지 않았다.

대치가 계속되던 중 5월 31일 1000명의 경찰이 중장비를 앞세우고 들이닥쳐 토지를 갈아엎었다.

올 7월 7일 쓰촨성 안위에현 위에양진 구이안촌에서 농민 수십명이 몰려들어 다리 공사를 막았다. 안위에현 정부가 다리를 시공하면서 농민들의 일부 토지를 아무런 사전 협의나 보상없이 무단으로 사용했기 때문이다. 공권력 동원이 여의치않자 현 정부는 깡패들을 동원해 농민들을 공격했고 9명이 부상했다.

현 정부가 무단으로 사용한 토지는 1무 정도에 불과하다. 그런데 농민들이 들고 일어난 것은 이유가 있다. 지난 1993년 안위에현 정부는 경제기술개발의 명목아래 구이안촌 옆마을인 베이바촌의 350무 토지를 수용하면서 90무밖에 보상을 해주지 않았다. 나머지는 강제로 그냥 빼앗았다. 농민들이 들고일어났지만 경찰에 진압당했다. 구이안촌 농민들은 이번에 다리 공사 때문에 1무의 토지를 그냥 빼앗기면 나중에 전 촌의 토지를 빼앗길 것을 우려하고 있다.

중국에서 한 해 7만4000건 시위... 해마다 17%씩 늘어

당시 진압을 하면서 현 정부는 "장쩌민 동지의 3개 대표론과 현 전체의 광대한 인민들의 이익을 위해서 하는 일인데 누가 감히 반대하는가"라고 협박했다고 한다.

3개 대표는 장쩌민 전 중국 국가 주석이 내세운 것으로 '중국 공산당은 선진 생산력, 선진 문화 그리고 광대(광범위)한 인민의 이익을 대표해야 한다'는 이론이다.

지난해 10월 27일 쓰촨성 한위안현에서는 푸부거우 수력발전소를 둘러싼 농민 시위는 1949년 중국 공산당 정권 수립이후 최대 시위로 유명하다. 이주비가 턱없이 적은 것에 항의하는 농민 4만명(일설에는 최대 15만명)이 1만명 이상의 폭동진압 경찰과 유혈 충돌을 벌였다.

한둥팡은 "관리 및 이들과 결탁한 소수가 겨우 목숨을 부지할 정도인 농민들의 작은 토지를 빼앗는다"며 "토지를 그냥 가져갈 수 없으면 속이고, 속여서 안되면 강제로 빼앗고, 이것도 안되면 공권력을 동원해 폭력으로 진압한다"고 비판했다.

한둥팡은 "토지를 잃은 농민들은 유리걸식하게 되는 데 이것이 중국 역사상 농민 봉기의 중요한 조건 가운데 하나였다면, 오늘날의 중국을 볼 때 이런 시기가 머지 않았다"고 결론을 내렸다.

한편 중국 공안당국에 따르면 지난해에만 중국 전역에서 모두 7만4000여 건의 시위가 있었다. 하루 평균 202건이다. 총 시위 참가자는 370여만명인데 50명 이상이 참가한 시위가 6만 건을 넘었다. 10년 전에는 한 해 시위가 1만 건 정도로 해마다 17%씩 증가하고 있다.

현재 중국은 농민 봉기의 역사적 의미를 강조해 '반란'이나 '봉기'가 아닌 기의(起義)로 표현하고 있다. '의로움을 위해 일어났다'는 뜻이다. 현재 중국농민들의 시위가 '반란'으로 끝날 지 아니면 '기의'가 될 지 현재로서는 판단할 수는 없지만 중국 정부에 큰 부담이 되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오마이뉴스 / 김태경 기자 2005-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