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 고구려사 왜곡 현장을 가다] <상> 지안시박물관

지난해 9월 “중앙 및 지방정부 차원에서 고구려사를 왜곡하지 않겠다”는 중국 외교 당국의 구두 약속은 말 그대로 ‘립 서비스’에 지나지 않았다. 고구려의 옛 도읍 중국 지린(吉林)성 지안(集安)과 랴오닝(遼寧)성 환런(桓仁)의 박물관이 고구려 역사를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지 분석한다.

지난 해 고구려 유적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전후해 새 단장한 중국 지린성 지안시 박물관은 아침 일찍부터 관람객들의 발길이 줄을 잇는다. 올 들어서만 1만5,000여 명. 중국 각지에서는 물론, 한국에서도 많은 답사객들이 찾아든다.

이곳에서 답사 안내자나 박물관 직원의 설명을 들어보면 고구려는 영락없는 중국 역사다. 정문을 들어서면 천장까지 닿는 광개토대왕비 탁본이 한 눈에 들어온다.

고구려의 강건하고 영화로웠던 시대를 증언하는 이 비문 복제품 앞에 1.5m 높이의 돌모양 표지판이 서 있다. 박물관 전체를 안내하는 ‘머리말(前言)’이다. ‘고구려는 중국 동북지방의 고대문명 발전과 탄생과정에 중요한 영향을 끼친 중국 동북지방의 소수민족이며 지방정권 가운데 하나이다.’ 박물관은 고구려가 중국의 역사임을 잘라 말한다.

좌우로 이어지는 유물 전시실 중 오른쪽에서 먼저 눈에 띄는 것은 ‘고구려 조공책봉 조견표’다. 고구려가 이른바 ‘중원’의 각국에 조공을 바치고 벼슬을 받았던 14차례 기록을 표로 만든 것이다. 표는 기원후 12년 유리왕 때 왕망(王莽)의 신정권에서 ‘고구려 왕의 이름을 하구려(下句麗)로 바꾸었다’로 시작, 624년 영류왕 때 당(唐)이 ‘상주국(上柱國) 요동군공 고구려왕을 책봉했다’는 대목으로 이어진다.

중원이 어디인가? 청(淸) 이후에야 쓰기 시작한 ‘중국’이 중원인가? 지금의 중국이 2,000년 전의 고구려와 무슨 관계란 말인가? 고구려연구회장을 지낸 서길수 서경대 교수는 “고구려는 705년 동안 안정적으로 지속한 반면 ‘중국’에서는 그 동안 35개국이 이합집산했다”며 “당시 동아시아에서 조공과 책봉이란 지배, 피지배 관계가 아니라 독립성을 유지하면서 교류하는 외교 수단”이라고 말했다.

전시실에는 ‘고구려 유민 이주 상황’ 표도 내걸려 있다. 나라 멸망 뒤 고구려인 대부분이 중국 땅에 들어갔다는 기록을 사서(史書) 여기저기서 끌어 모은 것이다.

당회요(唐會要)를 인용해 ‘당 정관(貞觀ㆍ당 태종의 연호) 19년(645년) 당 태종이 고구려를 친 뒤 요주, 개주, 암주 3주로 호구를 옮겨 중국에 들어간 자가 7만 명이었다’거나, 구당서(舊唐書) 고종기(高宗紀)의 ‘당 총장(總章) 2년(669년) 당이 고구려를 멸한 뒤 고구려의 2만8,200호를… 내지로 옮겼다’는 대목을 갖다 놓았다.

서 교수는 “동북공정을 주도하는 중국사회과학원 변강사지연구중심 인터넷 홈페이지도 ‘원래 고구려에는 인구 70여 만이 있었는데 멸망 후 절반 가까운 30만이 중원으로, 10만 정도는 신라로, 또 10만 정도는 발해로 옮겨가고 나머지는 전장에서 죽었다’고 설명하고 있는데, 이는 70만 호를 잘못 계산한 것”이라고 말했다.

가구 구성원을 5인으로 잡으면 멸망 당시 고구려 전체 인구는 350만 명. 중국의 주장대로 30만 명이 중원으로 갔다 해도 300만이 넘는 나머지의 행방은 해명되지 않는다. 대부분은 살던 그 자리에 남아 발해인이 됐다는 것이다.

특히 ‘고구려 역사 중요 기술’은 대표적인 역사 왜곡이다. 박물관 왼편 전시실에 있는 이 안내문은 한서, 후한서, 삼국지, 태왕비, 위서 등을 인용해 ‘고구려는 한나라가 세운 현도에서 일어났으므로 중국 역사’라고 주장한다. 한사군의 하나인 현도군에 ‘고구려현’이 있었기 때문에 자칫 혼동하기 쉽다.

그러나 서 교수는 “삼국사기에는 ‘주몽이 졸본부여에 이르렀다’고 하여 고구려가 나라를 세운 지역은 한나라의 지배를 벗어나 부여 영역에 편입된 것으로 돼 있다”며 “쑨진지 등 중국의 고구려사 전문가들도 한의 고구려와 주몽의 고구려를 명확히 구분한다”고 지적했다.

[中 박물관서 본 고구려사 왜곡] <하> 오녀산성 사적 진열관

고구려의 첫 도읍으로 알려진 랴오닝(遼寧)성 환런(桓仁)에는 ‘오녀산 산성 사적진열관’이 있다. 오녀산과 인근에서 출토된 고구려 유물을 전시하는 일종의 박물관이다.

우뚝하고 웅장한 모습이 마치 고구려의 기상과 국력을 상징하는 듯한 오녀산 사진을 배경으로 이 진열관 입구에도 ‘머리말(前言)’이라는 안내문이 걸려 있다.

‘문헌에 흘승골성이라고 기재된 오녀산성은 오녀산 위에 자리잡은 중국 동북지구의 고대 소수민족 고구려가 창건한 초기의 수도이다. …오녀산성은 중국 북방 선주민들이 구축한 산성의 전통을 계승하여… 아주 특수한 산성 건축형식을 형성하였다.
중국 고대 성(城) 건축사에서 찬란한 한 페이지를 남겼다.’ 한사군을 물리치고 수(隋), 당(唐)과 싸운 보루였던 200 여개 고구려 산성, 그 성의 들여쌓기, 그랭이공법 등 독특한 축성법이 모두 중국 고대 문화사의 일부로 둔갑했다.

그 옆에 있는 ‘고구려사 중요 연표(高句麗重要史事年表)’는 중국의 왕조에 따라 고구려사를 분류하고, 중국사에 따라 고구려의 왕과 재위기간을 쓴 뒤, 중요 사실이라며 중국과 관련된 내용만 뽑아 적어 놓았다.

기원전 108년 한(漢)이 현도를 세워 기원전 82년 현도를 고구려현으로 옮겼으며, 바로 그 현도에서 주몽이 고구려를 세웠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또 지안(集安)시박물관처럼 고구려가 조공하고 책봉 받은 사실을 부각시켰다.

전시실 내 ‘고구려 건국(高句麗建國)’과 ‘현도군과 고구려 건국(玄菟郡與高句麗建國)’이라는 설명문은 이 연표의 부연 설명이다. ‘한 무제 원봉 3년 현도, 낙랑, 진번, 임둔 4군을 설립하였는데, 그 가운데 현도군 아래 고구려현이 설치되었다. 오녀산 주위 땅은 바로 고구려현에 속했다.

…기원전 37년 부여왕자 주몽이 졸본 지구에서 고구려를 세우고 오녀산 위에 성을 쌓고 도읍을 정하였다.’(‘고구려 건국’) ‘고구려 왕은 (중국의)중앙정권이 내린 조복(朝服)을 받고 그 호적을 고구려 현령이 관장하였다. 여기서 고구려 민족정권과 중앙 왕조의 예속관계가 확립되었다.’(‘현도군과 고구려 건국’)

‘고구려는 중국 역사상 한부터 당까지 활약한 동북 소수민족이다. 중앙 왕조에 예속됐던 고구려 지방정권은 700년 남짓 존속하며 중국과 동북아 역사에서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맺는말(結束語)’이라는 마지막 안내문까지 중국은 이곳을 찾는 수많은 중국과 한국 방문객들에게 일관되게 고구려를 자국의 역사로 선전하고 있었다.

(한국일보 / 김범수 기자 2005-8-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