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해주 발해 온돌 발굴] “발해는 고구려 후예” 입증

“나왔습니다,나왔어요! 이사장님,볼딘 박사님!”

발해시대의 안방 온돌이 1000여년 만에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이었다. 온돌 쌍구들이 발견된 지난 21일 오후. 발굴단 본부가 갑자기 술렁이기 시작했다. 김정배 고구려연구재단 이사장에게 추카노프강 건너 발굴현장으로부터 긴급연락이 왔다. 김 이사장과 볼딘 박사는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한 채 발굴현장으로 내달렸다.

뗏목을 타고 강을 건너 습지와 갈대숲을 지났다. 몽골 초원같은 평야를 15분 정도 헤치고 발굴현장에 도착했다. 발굴지역 34지점 책임자인 예브게니야 겔만(46) 등 러시아인 20여명과 ‘발해 3박’으로 불리는 김은국(45) 임상선(45) 윤재운(35) 박사가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온돌 쌍구들이 발견된 크라스키노 성터(여의도의 절반 정도)는 연해주에서 가장 넓은 발해 유적지. 유물이 발견된 곳은 성터 가운데 가장 높은 지대로 행정 종교 군사 등의 중심지로 추정된다고 발굴단은 설명했다.

고구려연구재단의 구난희(42) 대외협력실장은 “발해 말기 이곳은 모피,철,주석 등 집산지로 중국과 일본에 생산품을 실어보내는 하역센터 역할을 했을 것”이라며 “크라스키노 성지에서 온돌 쌍구들이 출토된 것은 발해가 고구려의 영향을 받은 사실을 입증하는 중요한 사료”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같은 성과를 거두기까지 발굴환경은 열악했다. 성터내 사원지 남쪽의 두 구역을 선택해 상당 면적을 파놓았는데 태풍이 두번이나 몰아닥치는 등 기후 조건이 특히 좋지 않았다. 게다가 조사단이 사람 키 높이의 풀들을 직접 베어내 만든 길에는 군데군데 물이 고여 있어 장화를 신지 않고는 이동이 불가능할 정도였다.

지난 1958년 발견된 크라스키노 성터는 연해주의 발해 유적 가운데서도 중요한 곳이다. 북한과 러시아 국경에서 북동쪽으로 약 40㎞ 떨어진 이곳은 발해의 행정구역인 5경15부62주 중 동경(東京) 용원부(龍原府) 염주(鹽州)의 중심지로 알려져 있다. 염주는 일본과 신라로 향하는 사행선이 드나들던 곳으로 행정과 상업의 중심지였다.

지난해 이곳에서 출토된 목탄을 측정한 결과 ‘해동성국’으로 불리던 11대왕 대이진(大彛震·831∼857) 시대에 해당하는 서기 840년의 연대가 나와 이같은 사실을 뒷받침하고 있다. 발해 유적지는 한국전통문화학교 발굴조사단(단장 정석배 교수)이 참여하는 체르냐치노 고분과 크라스키노 성터 두 곳이 전부다. 크라스키노 성터는 1994년 한·러 공동으로 사원지를 발굴한 뒤 1998년 일본의 아오야마 대학 발굴팀이 슬쩍 들어와 동문을 발굴했고,최근엔 중국 당국이 러시아와 공동으로 조사하고 있다.

‘동북공정’을 통해 고구려사를 자국의 역사로 편입하려고 시도하는 중국은 현재 발해를 자국의 동북 변방민족인 말갈족의 역사로 규정, 역사 교과서에도 발해를 중국사의 일부로 기술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나 2005년 연해주의 여름은 고구려 온돌 발굴로 중국의 역사기술이 허구였다는 점을 보여주기에 충분했다. 김정배 이사장은 “이번 온돌 발굴로 러시아 연해주가 우리 역사의 일부라는 사실을 입증하는 근거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역사적인 사건”이라고 말했다.

 (국민일보 / 윤중식 기자 2005-8-25)

 

 

발해 온돌 발굴 ‘발해 삼총사’…“발해 유적 일·러·중국도 눈독 ”

“크라스키노의 발해 성터는 일본뿐만 아니라 중국,러시아까지도 눈독을 들이고 있어요. 앞으로 강대국들의 ‘역사의 각축장’이 될 수 있지요. 우리가 방심하면 발해역사도 빼앗길 수 있습니다.”

1000여년 전 발해의 온돌 쌍구들 발굴 현장을 종횡으로 누비고 있는 고구려연구재단의 임상선(45) 김은국(45) 윤재운(35) 연구위원은 ‘발해 삼총사’로 통한다. 이들은 각각 발해의 정치사회사와 대외교류 및 유민사,그리고 사회경제사를 전공한 학자.

하지만 지난해 발해발굴팀에 참여한 세 사람은 처음에는 막막하기만 했다. 국내에 발해 관련 유적과 사료가 전무하다시피한 현실도 그렇지만 분명 우리의 역사이면서도 이제는 중국 땅에 묻힌 발해 유적 현장을 답사하기란 말처럼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삼총사 가운데 막내인 윤씨는 “그렇게 힘들고 기약도 없는 연구를 왜 하느냐”는 주변의 근심어린 시선을 여러번 느꼈다며 활짝 웃어보였다. 발굴단의 분위기가 침체될 때마다 윤씨의 생글생글한 웃음은 늘 활력소가 되어 왔다. 서태지의 ‘발해를 꿈꾸며’라는 노래가 유행하던 10여년 전부터 발해를 처음으로 꿈꾸기 시작했다는 그는 언제부터인가 힘이 들때마다 “진정 나에겐 단 한가지 소망하고 있는 게 있어…”로 시작되는 이 노래를 따라 불렀다고 털어놓았다. “올 봄에 결혼했는데 아이를 낳으면 ‘발해’라는 이름으로 부르고 싶어요. 귀국하는대로 아내와 상의해 볼 작정입니다.”

올 여름의 발굴환경은 지난해보다 더 열악했다. 크라스키노 성터내 사원지 남쪽 31구역 등 두 구역을 선택해 상당한 면적을 파들어갔으나 태풍이 두 번씩이나 덮치는 등 기후 조건이 최악이었다.

그러나 삼총사는 거기서 좌절할 수 없었다. ‘임고집’으로 통하는 임 연구원은 “분명히 뭔가 있을 것이니 발굴면적을 배로 늘이자”며 지난해 눈독을 들였던 34지점에 다시 삽을 댔다. ‘임고집’의 예상은 적중했다. 파들어간 지 9일 만에 육안으로 확실히 구분할 수 있는 온전한 ‘ㄷ자 구들’ 형태가 나왔다.

하지만 발굴현장에서 본부로 돌아오던 지난 21일 삼총사가 탄 뗏목이 뒤집히고 말았다. 임 연구원과 윤 연구원은 재빨리 빠져나왔지만 카메라를 들고 있던 김 연구원은 위기였다. 김 연구원은 거푸 물을 먹으면서도 뒤집힌 뗏목 한 귀퉁이에 카메라를 올려 놓은 채 안간힘을 썼다. 다행히 무사히 구조됐고 발굴현장을 기록한 카메라도 이상이 없었다. 김 연구원의 책임의식이 강물에 사라질 뻔한 발해온돌 사진을 건져낸 것이다.

1000여 년 전 발해의 안방을 세상에 보여준 ‘발해 삼총사’는 이날 어깨동무를 하고 외쳤다. “발해는 중국이 아니라 우리의 역사다!” 오는 31일 귀국하는 ‘삼총사’는 ‘쉽게 풀어쓴 발해의 역사’를 9월중에 출간할 예정이며 연말쯤 크라스키노 발해 성터 발굴 성과를 담은 보고서를 펴낼 계획이다.

(국민일보 / 윤중식 기자 2005-8-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