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준정책 '국가 어젠다'로 채택

국가표준 정책이 청와대가 직접 챙기는 '국가 어젠다(agenda)'로 채택돼 범정부 차원의 대책이 마련된다.

청와대 고위 관계자는 31일 "노무현 대통령이 중앙일보의 '표류하는 국가표준' 시리즈 기사가 나간 뒤 산업자원부로부터 국가표준 정책의 현황에 대한 보고를 받은 뒤 이를 국가 어젠다로 삼도록 했다"고 밝혔다. 이 관계자는 "노 대통령은 차세대 성장동력의 세계시장 선점을 위해 표준 역량의 강화가 시급하다며 총리가 주재하는 '국가표준심의회'를 중심으로 범 정부 차원의 대책을 마련하라고 지시했다"고 덧붙였다.

정부는 이에 따라 2006~2010년 시행을 위한 '제2차 국가표준 기본계획'에 국가표준 정책 개편 방안을 반영키로 했다.

(중앙일보 / 정경민 기자 2005-9-1)

[표류하는 국가 표준] 세계는 표준 전쟁 한국은 표준 외면 메인

▶문 : 지하철 객차에 불이 나 정전이 됐다. 어둠 속에서 수동으로 출입문을 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답 : 제각각이므로 일률적으로 얘기할 수 없다.

서울의 2.5.7호선이라면 출입문 오른쪽 좌석 밑에, 1.3.4.8호선이면 왼쪽 혹은 오른쪽 좌석 밑에, 6호선은 출입문 위에 있는 비상 레버를 당겨야 문이 열린다. 손잡이는 2.3.4호선의 경우 문 중간에, 나머지는 문 아래쪽에 있다. 지방 지하철은 이와 또 다르다. 서울 지하철 1호선이 개통된 지 31년이 지났지만 국내에는 아직 지하철 비상 장비의 위치나 자재에 대한 국가표준(KS)이 없다.

어렵게 만든 국가표준이 외면당하는 일도 비일비재하다. 지난해 1월 제정된 교통카드 국가표준이 대표적인 예다. 정부는 전국을 하나의 교통카드로 여행할 수 있는 시대가 왔다고 했다. 그러나 여전히 서울 교통카드는 부산이나 대구에서 쓸 수 없다. 국가표준 제정 전에 제각기 교통카드를 만들어 써 온 각 지자체가 "설비 교체 비용을 안 대주면 카드를 못 바꾼다"고 버티고 있기 때문이다.

정부도 뒤늦게 국가표준의 중요성을 깨닫고 2000년 제1차 국가표준 기본계획을 수립했다. 표준정책의 최고기구로 국무총리를 위원장으로 하는 국가표준심의회도 신설했다. 하지만 국가표준심의회는 2000년 11월 23일 1차 기본계획을 확정한 뒤 5년 동안 단 한번도 열리지 않았다.

◆ 정부조차 외면하는 KS = 국제적으로 공인된 한국의 산업표준은 KS다. 그러나 지난해 말 현재 19개 부처가 86개 법령에 따라 1만6094종의 정부규격을 만들어 쓰고 있다. 이 가운데 4분의 1은 KS와 어긋난다. 국제표준과 안 맞는 것은 물론이다.

정부규격이 중구난방이니 이를 인증하는 제도가 난립하는 것은 당연하다. KS 외에 각 부처가 독자 운영하고 있는 인증은 65개다. 인증은 아니지만 법으로 강제하고 있는 기술규정도 1만6000여 종에 이른다. 그러나 태반이 각 부처의 외면으로 국제 공인을 받지 못했다. 대한상공회의소는 최근 "국내기업은 까다로운 각종 국내 인증과 시험.검사를 받고도, 수출을 위해 다시 해외 인증과 시험.검사를 받아야 하는 이중 부담을 지고 있다"며 이의 개선을 정부에 촉구했다.

◆ 세계는 표준 전쟁 중 = 휴대전화 통신기술은 일본이 세계 최초로 개발한 PDC방식이 유럽연합(EU)의 GSM방식이나 미국의 CDMA방식보다 기술적으로나 효율성에서 앞선 것으로 평가받았다. 그러나 국제표준기구에서 적극적인 활동을 펼친 EU가 GSM 방식을 먼저 국제표준으로 만드는 바람에 PDC방식 휴대전화는 시장에서 밀려났다. 반면 유럽의 노키아는 세계시장 점유율 35%의 세계 1위 기업이 됐다.

기술을 먼저 개발한 기업이나 국가보다 국제표준을 선점하는 쪽이 시장을 장악하는 시대가 왔다. 이 때문에 국제표준을 선점하려는 세계 각국과 기업의 경쟁은 갈수록 치열해지고 있다. 그러나 대표적인 국제표준기구인 국제표준화기구(ISO)와 국제전기기술위원회(IEC)의 2만2000여 건의 국제표준 가운데 한국이 주도적으로 제안한 표준은 고작 51건에 그친다. 한양대 윤덕균 교수는 "표준을 선점당하면 시장을 잃는 시대가 오고 있으나 우리는 표준정책 자체가 실종 상태"라며 "청와대가 나서서 범국가적인 표준전략을 마련하는 게 시급하다"고 지적했다.

◆ 국가표준이란 = 한 나라가 국민 편의와 기술 개발의 촉진을 위해 공업제품이나 서비스 등의 규격과 생산방법, 기술, 용어 등을 규정해 놓은 것을 말한다. 한국의 국가표준은 공산품의 경우 산업자원부 기술표준원이 관리하는 KS, 정보통신 분야에선 정보통신부가 관장하는 KICS가 있다.

(중앙일보 / 정경민.김종윤.허귀식.김원배 기자 2005-8-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