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석] 광복60돌 ‘대국민 호소’ 나선 김국주 광복회장

15일 서울 광화문 앞에서 펼쳐진 화려한 광복 60주년 행사를 누구보다 감격 어린 눈길로 지켜봤을 사람이 있다. 김국주(金國柱·81) 광복회장이다. 그는 올해 6월 3년 임기의 광복회장에 취임했고 광복 60주년 기념행사의 주빈이 됐다. 그 특별한 소회를 듣기 위해 18일 서울 마포구 합정동 독립유공자복지회관 3층 광복회 임시 사무실을 찾았다. 그런데 그의 목소리에선 영광과 환희가 아니라 고뇌와 우려가 가득 배어 나왔다.

“제 딴에는 몇 날 며칠 밤을 새우며 광복절 기념사를 준비했습니다. 그런데 귀 기울여 들어주는 사람이 없더군요….”

그가 심혈을 기울인 기념사는 60년 전 광복을 맞을 때의 심정으로 돌아가 ‘다시 시작한다’는 마음으로 그동안 축적된 사회 병폐를 제거하고 윤리도덕을 회복하는 일대 정신운동을 펼치자는 제안을 담고 있었다.

“요즘 나라 꼴을 보세요. 정치권은 좌우로 나뉘어 이념 싸움에 바쁘고, 경제단체들은 집단이기주의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국민은 황금만능주의에 젖어 주가가 조금만 내려가도 뭐가 잘못될 것처럼 호들갑을 떨고, 사회의 목탁 기능을 해야 할 언론은 서로 싸우기에 바쁘고…. 이게 우리가 목숨 바쳐 가면서 이룩하고자 한 모습입니까?”

김 회장은 한 나라가 정상적으로 발전하려면 정신과 물질의 발전이 양 바퀴로 함께 굴러가야 하는데 한국이 물질적 성장에만 치중하면서 정신적으로 타락하고 있다고 한탄했다. 그러면서 광복 60주년을 맞았는데 어느 누구도 그런 이야기를 하지 않아 결국 광복회가 나설 수밖에 없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광복회가 무슨 힘이 있고 돈이 있어 그런 일을 하겠다고 나선 건 아닙니다. 그렇지만 누군가는 나서 독립운동의 정신으로 돌아가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자’고 외쳐야 합니다. 독립운동 정신이 뭐겠습니까. 나라를 위해 자신의 재산과 생명을 모두 내놓는 무한 희생정신입니다.”

나라의 독립과 주권을 지키는 데 헌신해 온 노(老)독립투사의 목소리가 다소 떨리는 듯했다. 일제강점기인 1924년 함남 원산의 몰락한 한의사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태어날 때부터 노예 신분”이라고 말할 만큼 식민치하의 삶에서 희망을 발견할 수 없었다.

열아홉 나이에 만주를 거쳐 중국 상하이(上海)를 찾아간 것도 ‘자유세계를 찾아 막연히 외국으로 탈출하겠다’는 생각에서였다. 거기서 만주에서 독립군 활동을 펼쳤던 장조민 씨를 만난다. 당시 조선인들에게 독립군은 아득히 먼 전설로만 존재했다. 축지법을 쓰고 신출귀몰한 능력을 지닌 동경의 대상이었지만 현실에선 존재할 수 없는 무엇, 슈퍼맨과 비슷한 존재였을 뿐이었다.

장 씨에게서 만주 독립운동사를 처음 전해 들은 그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존재한다는 사실도 그때 처음 알았다. 장 씨와 의기투합한 그와 친구들은 1943년 8월 중일전쟁의 최전선이던 안후이(安徽) 성 푸양(阜陽)에서 병사들을 모집하던 광복군 3지대(지대장 김학규)에 투신한다.

고된 훈련 속에서 국내 진입을 준비하던 그는 일본의 패망 소식을 듣고 아쉬움 속에 1946년 6월 미 해군 대형수송선을 타고 상하이를 거쳐 인천으로 귀국했으나 광복군은 해체됐다.

김 회장은 이후 육군사관학교에 특별 입교해 6·25전쟁 내내 중대장과 대대장으로 최전선에서 생사를 넘나드는 전투를 치렀다.

“낙동강 전선에서 북한 2군단을 정면으로 막으면서 숱한 전우들이 죽어가는 것을 봤고 평양을 점령할 때 가장 먼저 평양에 진입했지. 평북 운산에서 중국군과 첫 전투를 치른 것도 우리 부대였어요.”

8·15민족대축전에 참석한 북측 대표단이 국립묘지를 참배한 것을 지켜본 그의 소감은 어떨까.

“우리도 북측에 묻혀 있는 조소앙 선생이나 김규식 선생의 무덤은 충분히 참배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아직 전쟁 상태가 해소되지 않았는데 김일성의 시신이 안치된 금수산기념궁전 같은 곳을 참배할 사람은 없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김 회장은 친일 진상 규명 논란과 관련해 “나라가 새로 설 때는 파사현정(破邪顯正)의 기풍을 보여야 하거늘 우리는 그런 기회를 갖지 못했다”면서 “모든 사람들이 인정할 수 있는 확고한 증거를 제시하고 민족화합에 걸림돌이 되지 않는 방식으로 이를 슬기롭게 해결해 가야 한다”고 말했다.

“손자 손녀들에게 역사 교과서를 가져와 보라고 하니까 국사과목이 없어져 사회과목에 들어가 있더군요. 중국의 동북공정이나 일본의 역사교과서 왜곡 파동을 보면서 역사를 지키자는 목소리가 높지만 이래서는 안 됩니다. 먼저 역사를 알아야 역사를 지킬 수 있는 법입니다.”

(동아일보 / 권재현 기자 2005-8-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