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균동 "한국 영화판의 생태계 완전 교란"

여균동 감독은 요즘 사면초가다.
    
영화진흥위원회로부터 3억원을 지원받아 어렵사리 만든 영화 <비단구두 사가지고>는 배급사를 못찾아 극장에 걸지 못하고 있다. 돈 때문이다. 이 영화에 참여한 스탭 3명은 밀린 임금을 달라며 여 감독 재산에 대해 법원에 가압류 신청을 냈다. 이 일 역시 돈 때문에 빚어진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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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균동 ''이라고 하면 꽤나 유명한 인물이지만 1994년 <세상밖으로>로 데뷔한 이후 지난 10여년간 장편영화를 고작 5편밖에 찍지 못했다. 돈돈돈. 여균동 감독의 한숨 속에는 이 말이 담겨져 있다. 한국의 중견감독이 집도 없고 절도 없고, 무엇보다 영화를 만들고 싶지만 그럴 수가 없다.
    
감독이 찍고 싶은 영화를 찍지 못하고 있는 현실. 이러고도 자칭 타칭 한국 제일의 유력지는 <친절한 금자씨>와 <웰컴 투 동막골> <박수칠 때 떠나라> 등의 영화 세 편만으로 한국영화 시장점유율이 60%대를 넘었다며 좋아라 한다. 이건 정상인가 비정상인가. 한국영화는 위기인가 아닌가. 여균동 감독과 얘기를 나눠봤다.

 - 극히 몇편의 영화가 대박이 나고 시장을 쓸어 가는 현상이 잦아지고 있다. 한국영화의 앞날을 어떻게 보나?
    "잘 모르겠다. 그냥 난 무서울 뿐이다. 한국영화시장을 보고 있으면 공포감이 든다."
    
- <비단구두 사가지고>의 극장상영은 어떻게 추진되고 있나?
    "주로 예술영화를 수입배급하고 상영해 온 이광모 감독에게 조언을 들으러 찾아간 적이 있다. 이 영화의 배급을 위해. 결론은? 꿈이 산산조각 났다는 것이지. 이제 한국에서 비상업영화나 저예산영화를 만들어서 관객을 만나는 일은 점점 난망해지고 있다. 한국영화계는 생태계가 완전히 교란돼 있다. 나 같은 사람은 은폐엄폐물이 없다. 엄호해 주는 아군도 없는 상황이다."
    
- 소송문제는 어떻게 할 건가?
    "스탭 전원과 갈등이 빚어진 건 아니다. 그 중 세 사람이 문제를 제기한 건데, 일단 이것도 방법이 없다. 그래서 영화가 시장에 나가는 게 중요하다. 이 영화에 대해 상영금지가처분신청을 한다는 소리도 들었다. 임금체불 문제를 해결하고 나서 상영을 하라는 얘긴데 영화상영이 이뤄져야 임금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 전체 예산은 얼마가 들었나.

    "3억원을 지원받았고 현재까지 3억6000만 원, 앞으로 더 들어가야 할 비용이 1억 원 정도 있다. 배급비용, 마케팅비용을 생각하면 돈이 더 들어갈 것이다. 걱정이다. 그래서 지금 부산국제영화제 한국영화파노라마 부문에 출품되는 걸 기다리고 있다. 그렇게 해서라도 관객들을 만나고 싶다."
    
- 새 영화는 치매에 걸린 노인을 거짓으로 개마고원에 데리고 간다는 이야기다. 이건 얼마 전에 개봉한 <간 큰 가족>과 설정이 닮아 있다.
    "시나리오 개발 과정에서 <간 큰 가족>이라는 영화가 있다는 걸 알았다. 그 영화의 제작자인 윤제균 감독, 연출을 한 조명남 감독을 만났다. 나가 그랬다. 한 해에 연애영화가 수십 편이 만들어진다면 분단의 아픔을 다룬 영화가 서너 편 만들어져야 하는 거 아니냐고. 그래야 분단이 극복되는 거 아니냐고. 그 일루젼을 가질 수 있는 거 아니냐고."
    
- 어디서 모티프를 얻었나?
    "한 선배와 술을 먹으면서 들은 실제 얘기가 모티프가 됐다. 아버지가 정말 개마고원 출신이고 치매에 걸렸는데 이 선배는 남한에서 한 50년 살았으니 앞으로 30년은 북한에서 산들 그게 무슨 그리 죄가 되겠냐며 월북을 계획했다는 거였다."
    
- 진짜?
    "정말로 월북할 생각으로 이렇게 저렇게 루트를 알아보고 그랬다니까?"
    
- 그래서?
    "그래서는 뭘. 시도도 못하고 끝낸 다음에 나한테 그 얘기를 한 거지. 그런데 그게 그렇게 재밌더라구. 그래서 월북하는 얘기를 다르게 풀어가는 식으로 이야기를 만든 거였다. 하룻밤 사이에."
    
- 영화를 보고 많이 웃고, 동시에 많이 가슴 아프고 그랬다. 치매 할아버지를 속이기 위해 스탭들을 동원해 가상현실을 만드는 영화 속의 영화감독은 꼭 당신 모습을 닮아 있다. 그래서 이 영화는 두 가지 중층적인 주제를 가지고 있다. 분단과 이 땅에서 영화만들기. 전혀 이질적인 주제같지만 이상하게도 영화를 보다 보면 그게 다른 얘기가 아니라는 걸 깨닫게 된다. 분단을 고착화 하는 정치사회경제적 모순이 사실 영화를 만들려는 영화감독을 짓누르는 현실로 작용한다. 매우 흥미롭게 지켜봤다.
    "맞다. 그 두 가지를 동시에 그리려고 했다. 그래서 내 나름대론 <세상밖으로>와 <죽이는 이야기>의 실제 후속작이라고 생각한다. <죽이는 이야기>는 철저하게 영화만들기에 대한 영화니까. 하지만 그런 건 있다. 난 내 내면, 이른바 작가의 의식이라는 걸 그리는 데 익숙치가 않다. 좀 불편해. 그래서 이번 영화에서도 내 쪽 부분, 감독쪽을 그리는 걸 의도적으로 조금씩 죽였다."
    
- 영화 속 영화감독이 차를 타고 가다가 ''영화 망한 게 내 책임이야, 내 책임이냐구''하면서 발광하는 모습이 있다.
    "내가 하고 싶었던 얘기가 아니냐는 거지? 그러니까 나 자신의 내면을 그리는 데 난 참 서툴다니까. 어쨌든 미루어 짐작하기 바란다."
    
- 제목이 좋다. 많은 실향민들이 그랬을 것이다. 비단구두 사가지고 온다고 약속하고 50년 넘게 헤어지게 됐을 것이다.

    "맞다. 그 실향민들의 아픔, 분노는 사라진 게 아니다. 그 다음 세대인 우리에게 고스란히 전해지고 있는 것이다. 나가 영화에서 하고 싶었던 얘기의 초점도 바로 그것이다. 실향민 1세대의 얘기가 아니라 그 다음 세대에 대한 것. 전후세대에게도 실향의 아픔이 있을 수 있을까? 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건 바로 그 점이다. 원래 제목은 ''기념촬영''이었다. 배우 이경영 이 너무 딱딱하다며 제목을 바꿨다. 이경영에게 고맙다."
    
<비단구두 사가지고>는 어떤 영화?
     
여균동 감독의 신작 <비단구두 사가지고>는 중층적인 이야기 구조를 갖고 있는, 중견의 노련한 연출력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이야기의 외형적 얼개는 일단 분단과 실향민의 문제다. 한 치매노인이 있고, 이 노인에게는 조폭두목 아들이 하나 있는데 이 아들이 어느 날 주인공인 영화감독(만드는 영화마다 족족 망해 딱한 상황에 처해 있다)을 불러 자신의 아버지를 개마고원에 모시고 간 것 같은 상황을 만들라고 지시하는 것에서부터 이야기가 시작된다.
     
강압적인 분위기에 몰려 마지못해 일을 시작한 이 영화감독은 그러나, 스탭들을 동원해 세트를 만들고 배우들로 하여금 마치 북한에 온 것처럼 연기를 시키는 과정에서 점점 더 일에 빠져들어 가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여균동의 영화는 이 두 가지, 그러니까 분단을 뛰어 넘으려는 한 노인과 거짓현실의 환상을 만들어 내야 하는 영화감독의 이야기가 교차되며 얽힌다.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이야기의 이 두가지 설정은 그러나 기묘하게도 그 맥이 맞닿아 있다. 분단이 고착화된 이 땅의 현실은 결국 영화작가들을 억누르는 억압기제다. 계급의 양극화가 극단화된 자본주의적 체제의 모순은 결국 상업영화가 아니면 영화를 아예 할 수 없는 상황을 만들어 내기 때문이다.
     
노인이 치매에 걸려 있다는 것 역시 이 영화에서 주의해서 봐야 하는 부분이다. 치매의 의식 속에서 북에 남겨 둔 자신의 어머니와 누이동생을 만나게 되는 이 노인은 역설적으로나마 어쩌면 지금의 현실에서 스스로 유일하게 분단을 극복한 인물일 수 있다.
     
진짜 치매는 무엇인가? 진짜 거짓말은 무엇인가? 분단의 상황을 아무런 문제의식 없이 인정하며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이 진짜 치매에 걸려 있는 것이라고 감독은 말하고 있다.
     
비교적 무거운 주제를 영화속 영화만들기의 각종 해프닝을 통해 경쾌하고 발랄한 보폭으로 재미있게 풀어 나갔다. 저예산 예술영화 같지만 나름대로 상업성이 강한 작품이다. 극단 차이무의 단원들이 이 영화를 위해 전원 동원됐다.

     

(프레시안 / 오동진 영화전문위원 2005-8-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