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전 풍토병 테러…‘생명건 외교’ 아시나요

험지 외교관들의 애환

“초등학교 1학년생인 진아의 등에는 간장·된장 몇 통을 지우고 네살을 갓 넘은 둘째 민아에게도 기저귀 가방과 간장 두 통을 들게 해서 ‘죽음의 언덕’이 될지도 모를 곳으로 향하였다. 유럽의 공항을 거쳐 아프리카로 가는 여로는 왜 그렇게도 멀고 험 하던지.”

6·25 당시의 피란얘기가 아니다. 내전과 풍토병, 열악한 생활여건 때문에 모두 근무를 기피하는 험지(險地)로 가는 외교관들 얘기다. 외교통상부 근무규정에 따르면 특수지 ‘가’ 지역 근무는 일반인들의 상상을 뛰어넘는다. 화려해 보이는 외교관 생활의 그늘은 생각보다 어둡다. 2005년 8월 현재 우리나라의 해외공관 총 141개중 40개 공관이 특수지다. 중앙아프리카·중동·남아시아·중남미 지역 공관들이다.

말라리아에 걸려 3개월반 동안 몸을 못 움직였다는 외교관들의 경험담은 쉽게 들을 수 있다. 한 여성 외교관의 회고담. “몇년 전 중앙아프리카 한 국가에서 근무하던 서기관 한 분이 휴가를 맞아 귀국했다. 깡마른 체구에 눈 흰자위가 유난히 붉게 핏발이 서 있었다.

알고 보니 풍토병을 예방하기 위해 장기적으로 약을 복용하는데 그 부작용 때문이라고 했다. 그 서기관은 아이들이 너무 안쓰럽다고 했다. ‘조그만 놈들이 눈이 벌게지고 열도 나고. 아비 때문에 고생하는 것 같아서 미안하다’고. 4년 넘게 근무해 이제 한국으로 돌아오고 싶다고 했는데 그만 아프리카 귀환 후 업무차 이동중 차 사고로 숨졌다. 서울 복귀를 앞두고 갑자기 아프리카 발령을 통보받고 내전중인 임지로 가야 하는 것도 외교관의 인생이다.

통상교섭본부 한 팀 장의 경험. “점점 수도로 근접하는 반군들 소식 때문에 항상 라디오를 옆에 낀 채 BBC 월드서비스에 귀기울던 상황은 영화 장면 그대로였다. 생필품은 바닥나고 다른 외국인들은 다 떠난 뒤 마지막 탈출을 위해 공항으로 갔으나 그나마 항공편이 취소됐다.

다행히 미국대사관의 협조를 얻어 옷가방 하나만 들고 비행기를 탔지만 대사님과 영사님은 남아 있어야 했다. 끝없는 폭탄테러의 연속인 이라크의 상황은 최악이다. 현지를 다녀온 외교관의 말. “대사를 포함한 전직원이 수용소에 갇힌 난민 꼴이다. 사방에 차단장치가 설치돼 있는 대사관 밖을 나가려면 반드시 방탄조끼에 무장경호원을 동반한다. 납치되어 험한 꼴을 당하지 않으려면 자살용 권총을 휴대해야 한다는 얘기도 종종 한다.” 총성이 하루 종일 허공을 가르고 거대한 폭발음 뒤에는 반드시 자살폭탄공격 소식이 들려오는 바그다드에서 방탄차량은 필수적이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고위당국자의 하소연. “이라크, 사우디아라비아에서 폭탄테러가 터지지만 방탄차 한대에 20만달러 하는데 세 대 사라고 30만달러밖에 안주니까 전부 중고를 사는 수밖에 없다. 얇은 방탄차를 사든지….” 89년 외교부에 들어온 김형길 과장의 동기는 모두 20여명이다.

이중 한 명은 92년 한·중 수교 이후 외교관계가 단절된 대만에서 93년 괴한에게 습격 당해 목에 칼을 맞고 구사일생으로 살아 났다. 또 한명의 동료는 아프리카 근무중 해변에서 실종됐다. 험지근무를 못견딘 부인과 이혼한 경우도 있다. 자녀가 크게 다친 경우도 있고 교통사고를 당한 동료도 있다.

그래도 외교관들은 떠난다. 단신으로 가는 경우도 있다. 예산 제약 때문에 대사관을 두지 못하는 험지에는 단 한사람의 외교관이 가야 한다. 8월말 9월초에도 몇사람의 외교관들이 험지로 떠난다. 가족들이 사는 집을 사무실로 함께 쓰며 고군분투해야 한다.

내전 혹은 준내전 상태, 그리고 테러조직이나 범죄조직들이 활 개치는 곳이지만 국익을 위해 가야 한다. 험지로 가는 외교관들은 지금도 묵묵히 이삿짐을 꾸리고 있다.

(문화일보 / 최형두 기자 2005-8-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