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나라칼럼] 으랏차차! 치우천황!

 

붉은 악마, 그리고 치우천황

 

어제(8 7-일요일) 한일전, 붉은 악마의 열띤 응원이 있었지만 일본에 1:0 으로 지고 말았습니다. 경기 결과는 안타깝지만, 붉은 악마의 응원은 열정, 희망 그 자체였습니다.

  3년 전, 한일월드컵의 해에 붉은 악마만큼 우리들에게 벅찬 감동을 안겨준 것은 없을 것입니다. 그들은 새로운 스포츠문화뿐만 아니라 우리 민족의 뜨거운 열정, 그리고 무엇보다 민족의 얼과 뿌리를 되찾는 희망을 안겨주었습니다. 우리는 펄럭이는 붉은 악마의 깃발에 그려진 치우천황(蚩尤天皇)을 통해 우리 민족의 뿌리와 기원을 다시금 생각해 볼 수 있었습니다.

  흔히 치우천황은 올림푸스의 아테나 여신처럼 용맹하고 병기를 잘 다루었던 군신(軍神) 또는 전쟁의 神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또한 재야사학자들이나 붉은 악마는 치우천황이 배달국의 14대 천황으로 『한단고기(桓檀古記)』에 따르면 기원전 2707년에 즉위, 109년간 나라를 통치했으며 자오지환웅(慈烏支桓雄)이라고도 불리며, 한민족의 선조로 보고 있습니다.

 

우리 내부에서도 정리되지 못한 上古史

 

그런데, 문제는 단순히 신화와 전설에 불과한 것인지, 아니면 과연 치우천황이 역사상 실존했던 인물인지, 과연 한민족의 조상인지에 있습니다. 이 문제를 두고 우리 역사학계와 재야사학계는 서로 다른 시각을 견지하고 있습니다. 치우천황을 비교적 구체적으로 기술하고 있는『한단고기』에 대한 위서(僞書) 논쟁은 양측의 대립된 시각의 대표적인 예로 들 수 있을 것입니다.

 

양측의 논박에 대한 것은 논외로 하더라도, 꼭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바로 우리 상고사에 대한 연구와 정리입니다. 우리 상고사 연구를 통해 민족의 뿌리를 되찾고, 정체성을 확립하는 것은 세대가 바뀌고 세상이 바뀌어도 가장 중요한 일 중의 하나일 것입니다. 정부ㆍ여당이 적극 나서야 할 것은 현대 과거사보다 민족 상고사에 관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상고사에 대한 정립 없이는 첫째로 대외적으로 한민족의 기원을 내세울 수도 없으며, 우리 조상들의 역사와 신화까지도 영원히 잃어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둘째로는 대내적으로는 뿌리에 대한 혼돈이 지속될 것이고, 앞으로 다음 세대에 대한 교육에 있어서도 명확한 잣대를 제시해 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중국사에 편입되고 있는 치우천황

 

지난 7월 중국 베이징에서 북서쪽으로 차량으로 세 시간여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는 허베이성(河北省) 쟝쟈커우(張家口)市 줘루(?鹿: 탁록)현 일대를 둘러보고 왔습니다. 현재 중국은 이 일대에 남아있는 치우(蚩尤)와 황제(黃帝), 그리고 염제(炎帝)의 유적지를 문화유산으로 지정하고, 그들만을 위한 역사를 복원하는데 주력하고 있습니다  

그간 중국은 사마천의『史記』를 토대로 황제헌원(黃帝軒轅)을 자신들의 시조로 삼고, 또 황제의 자손으로 내세웠습니다. 하지만 20여년 전부터 염제 신농(炎帝 神農)을 자신들의 선조로 삼더니 10여년 전부터는 아예 치우까지 포함시켜 염황치자손(炎黃蚩子孫)이라 떠들고 있습니다. , 황제(黃帝), 염제(炎帝), 그리고 치우(蚩尤)가 중화민족의 공동시조라는 것입니다. 그에 따라 황제와 치우천황이 결전을 벌였던 탁록(?鹿)에 중화삼조당(中華三祖堂)까지 만들어 두고 있었습니다.

 

 

중화삼조당 정문: 내부에는 황제, 염제, 치우상을 모셔놓고

자신들의 조상으로 알리고 있습니다.

 

史記』에는 치우천황과 황제헌원과의 탁록대전이 기술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각종 중국사서에는 치우가 구려(九麗)의 군주이며, 구려는 곧 동이(東夷)에 속한다라고 적고 있습니다. 하지만, 『사기』는 치우천황에 대해 난폭하기 이를 데 없다는 식의 곱지 않은 시선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오늘날에는 황제와 신농에 치우까지 끼워넣어 그들의 할아버지라고 하고 있으니, 참으로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한때는 물론 한()나라 유방(劉邦)이 승리를 기원하며 치우에게 제사를 올렸다고 합니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 남의 집에서 우리 조상 제사도 지내주고 사당처럼 지어놓고 모시고 있는 것을 우리는 강건너 불구경하듯 팔짱끼고 구경만 하는 것은 자식된 도리가 아닐 것입니다.

 

독도를 일본에 내줄 수 없듯이 치우천황을 중국에 내줘서는 안 될 것

 

중국이 동북공정이라 해서 고구려사를 자국의 역사로 편입하려 하고 있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역사와 신화 속의 조상까지 자신들의 조상으로 끌어 당기고 있다는 사실은 아직 잘 모르는 분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중국이 최근 역사문제에 소름이 끼칠 정도로 공을 들이고 신경을 쓰는 이유 중의 하나는 소수민족에 의한 독립을 미연에 방지함으로써 분열없는 하나의 중국을 유지해 나가는 데 있다고 생각합니다. 앞으로 경제발전과 민주주의의 확대, 그리고 민족주의의 확산이 심화될 경우, 중국으로서는 민족분열의 걷잡을 수 없는 소용돌이에 휘말릴 위험을 안고 있기도 합니다. 따라서 가능한 중화민족을 하나로 결집시키고, 또 이를 위해 매개체를 바로 역사에 두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중국에서는 이러한 커다란 맥락 하에서 중국의 신화와 역사가 모두 새롭게 단장되고 있습니다. , 중국은 신화와 역사를 중화인의 자존심과 정체성을 유지관리하기 위해 놀라울 정도로 공을 들이고 있는 것입니다.

  

귀근원

 

※ 탁록현 황제성 구역의 입구. 사진처럼 귀근원(歸根苑)’이라 적어놓았는데,

중국의 모든 민족의 뿌리가 하나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는 듯합니다.

 

그러나, 치우천황까지 중국에 내주는 일은 절대 있을 수 없습니다. 과거 정말 힘이 없어서 땅을 빼앗긴 적도 있습니다만, 지금처럼 조상을 빼앗길 지경이니 참 요지경이기도 합니다. 선조를 잃고, 할애비를 빼앗긴다면 도대체 무슨 낯으로 후손을 대하겠습니까?

 

天地人의 기운을 모아야 할 때

 

19세기말 20세기초 우리 역사는 수탈과 이에 대한 항쟁, 그리고 고난의 역사로 점철되었습니다. 그 사이 빼앗긴 것은 나라뿐만 아니라, 역사까지도 잃었습니다. 간도협약으로 만주지역이 중국의 영토로 넘어가버린 것뿐만 아니라, 만주의 역사도 고구려의 역사도 도적질 당했습니다.

그리고, 오늘날 2천년대에 들어와서도 유사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우리 이야기를 남이 자기 이야기라 하고, 우리 조상을 자신의 것으로 우기고, 우리의 역사를 이미 자신의 역사로 만들어 세계에 홍보하고 있습니다. 과거와 다른 점은 총칼이 보이질 않을 뿐, 한민족의 역사는 심각한 위기에 놓여 있습니다.

天地의 기운에 힘을 얻고, 人의 하나된 마음으로 이러한 위기에 대응해야 할 때입니다. 무엇보다 우리 역사에 대한 관심과 우리 조상에 대한 모든 이야기들에 더 큰 관심을 기울어야 하겠습니다. 역사학자인 E. H. Carr는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대화’라 했습니다. 그 대화를 위해서 우리 상고사에 대해서도 마음을 열어보면 어떨까요

(한나라칼럼 / 정문헌 의원 2005-8-8)

치우천황을 중국의 할아버지로 만들

지난 달 중국 탁록현을 방문했을 때 탁록현 인민정부가 발행한 책을 한 권 샀습니다. 그 책에는 역시 황제, 염제, 그리고 치우를 소개하고 있었습니다. 책 제목에서부터 『탁록-中華三祖聖地: ZHUOLU- The Divine Land of Three Ancestors in China』라고 해서 치우천황을 자국 역사에 편입시켜 놓고 있었음을 쉽사리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막상 책을 펼쳐보니 그 내용은 더 기가 막힌 것이었습니다. 치우천황을 소개하면서, 치우는 중국의 옛 구리 동이의 최고족장이다(蚩尤是中國古九黎東夷的最高族長). 치우는 황제, 염제와 더불어 중화문명의 삼대시조라 할 수 있다(蚩尤炎帝黃帝可幷稱爲中華文明三大始祖).라고 적고 있었습니다. 옛날 사마천의 『사기』에서는 구리(九黎)의 군주인 천자(天子) 치우천왕으로 적고 있지만, 현재엔 중국의 九黎이고, 중국의 치우천왕이라고 적고 있으니 참으로 개탄스러웠습니다.

여기서 구리()는 고조선 이전 치우천황 때의 국호를 지칭하는 것으로 ‘구이라고도 하였습니다. 구리라고도 읽히고, 九夷또는 九麗로 표기되기도 했던 이 국호는 句麗로 그 맥이 이어졌고, 결국 구리의 후예로 高句麗로 거듭나게 된 것입니다.

또한 東夷는 말 그대로 중국사람들이 동쪽의 오랑캐東夷라 불렀고, 현재 대부분 중국사람들도 東夷를 중국 영토 내의 한족이 아닌 동쪽지방의 이민족을 가리키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東夷는 우리 민족을 뜻하는 말입니다. 는 단순히 오랑캐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자와 자가 합쳐져 동방의 대인으로 활을 잘 다루는 민족이라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공자(孔子)께서는 『論語』의 자한편(子罕篇)을 통해 九夷에 가서 살고 싶다(子欲居九夷)고 했고, 공자의 7대 손인 공빈(孔斌)동방예의군자지국(東方禮儀君子之國)으로 일컬었던 것이 왜국(倭國)이었겠습니까, 몽고였겠습니까?  

탁록대전

※ 탁록대전이 펼쳐졌던 벌판

한 번 잃어버리면 되찾기 힘든 역사 

이처럼 중국은 , 九麗, 九夷, 東夷, 高句麗 등 모두 자신들의 역사로 만들어 가고 있습니다. 어찌보면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 작업은 上古史부터 시작된 것이고 동일한 맥락에서 진행되고 있는 것으로 보여집니다. 고조선 이전의 역사까지도 흔들린다면 민족역사의 큰 뿌리가 흔들리는 것이고 그렇다면 고조선과 고구려의 역사도 아무런 토대도 없이 그냥 공중에 떠버리게 됩니다. , 한 순간에 한민족의 몇 천년 역사를 상실하게 된다는 겁니다.

이렇게 될 경우 통일 이후의 통일한국과 발생할 수 있는 만주지역의 영토분쟁 문제도 문제지만 그 보다 더 큰 문제는 역사분쟁이 더 심각해 진다는 것입니다. 역사분쟁은 민족 정체성의 문제이고 또 뿌리의 문제이며, 후손에게 어떤 역사를 가르치느냐하는 자존심까지도 개입된 문제입니다. 그 만큼 역사문제는 영토분쟁만큼이나 양보나 타협조차도 있을 수 없는 영역입니다. 

치우천

※ 치우의 군사들이 탁록대전을 벌일 때

이용했던 우물이 바로 치우천입니다.

 

그래서 역사와 관련된 모든 것들에 대해서는 어느 나라든 부당한 것일지라도 다시 되돌려 주려고 하지 않는 못된 습성을 갖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프랑스에 약탈당한 직지심경돌려준다’, ‘영구임대 해준다등의 많은 이야기도 들렸지만 아직도 프랑스는 꿈쩍도 하지 않고 있습니다. 또한 일본의 야스쿠니 신사에 도조 히데키(東條英機)와 같은 A급 전범과 함께 합사(合祀)된 한국인 희생자의 위패를 돌려달라는 우리의 요구에도 일본을 지키는 신이 되었다는 식으로 못들은 척하고 있습니다. 그나마 임진왜란 때 함경도 의병의 전승을 기린 기념비인 북관대첩비의 반환 작업은 조금씩 진척을 보이고 있지만 좀 더 지켜봐야 할 일입니다.

 

역사의 반복(?) 

우리의 역사가 침탈당하고 있는 지금이야말로, 19세기부터 시작된 서세동점(西勢東漸)의 파고(波高), 그리고 일본의 제국주의적 욕심에 나라를 잃어야 했던 역사를 다시금 되새겨야 할 때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당시 열강의 침탈 의도는 극에 달했고, 국세(國勢)는 기울어 가기만 했고, 결국 35년의 치욕을 강요당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오늘날 동북아에서는 중국과 일본의 자국 중심의 역사기술로 인해 갈등의 회오리가 감돌고 있습니다. 중국과 일본 사이의 역사문제도 문제지만, 중국과 일본 사이에 위치한 우리나라의 역사는 양국으로부터 공히 침탈당하고 있습니다. 특히, 역사교과서를 둘러싼 한중일 갈등은 지금의 역사분쟁을 대변하고 있는 듯합니다. 더욱이 이런 상황은 역사문제와 관련해서는 구한말의 역사가 반복되는 느낌마저 들게 합니다.

예를 들어, 고조선에 대한 내용 기술은 우리나라 교과서에만 있는 것입니다. 아예 중국 교과서의 지도는 漢의 영토를 거의 충청지방까지 이르는 것으로 표시해 두었습니다. , 고조선이라는 나라는 존재하지도 않고 모두 중국의 영토였다는 겁니다. 마찬가지로 일본 교과서 연표에는 고조선에 대한 기술 없이 곧바로 한국 역사의 시작을 낙랑군과 고구려로 표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임나일본부설에 따라 일본이 임나와 연대해 고구려, 신라와 싸웠고, 조선남부를 군사적으로 지휘하는 권리를 중국으로부터 인정받기 위해 몇 번이나 사신을 보냈다고 적고 있습니다.

나아가 발해사를 중국사라고 주장하는 중국, 왜구에는 조선인도 다수 포함돼 있었고 조선이 왜구의 금지와 통교를 요청해 막부가 응해 무역이 시작되었다고 하는 일본. 우리의 상식을 초월하는 우스개 소리 같은 이야기들이 남의 나라에는 역사로 서술되고 있습니다. 우리의 역사가 아무렇게나 짓밟히고 있는 현실이 구한말과 다를 바 없습니다. 너무나 애통하기만 합니다.

기록을 찾는 것, 그리고 앞으로 기록을 남기는 것 

찬란한 실제의 역사를 만드는 것도 어렵지만, 있었던 역사를 있는 그대로 지켜가기도 참으로 어렵기만 한 것이 현실입니다. 우리 上古史를 찾고 치우천황을 찾아내고 우리 것을 지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왜냐하면 고증해야 할 유물ㆍ유적을 찾기도 어려울뿐더러 기록도 풍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결국, 심도 깊은 연구조사의 뒷받침이 없이는 불가능할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날과 같은 역사분쟁의 격랑(激浪) 극복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소중한 우리의 기록을 찾아내고 다시금 가슴에 되새기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우리 자신부터 우리 역사에 대한 확고한 신념과 정체성을 확인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역사는 사실의 기록입니다. 정확한 기록이 보전된다면 역사의 침탈로부터 굳건히 지켜낼 수 있습니다. 또한 역사는 사실의 기록을 찾아내고 후세에 전달되고 가르침을 줌으로써 그 진가를 드러내게 되는 법입니다. 우리 현시대를 살아가면서도 다음 세대를 위해 기록을 남겨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기록과 발자취는 우리들만의 것이 아니라, 곧 후손에게는 소중한 교훈이자 자산(資産)이 될 것임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한나라칼럼 / 정문헌 의원 2005-8-16)

동아시아 고대사의 열쇠 ‘치우천왕’ 논쟁

(신동아 2003-1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