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학술원’ 북 ‘과학원’ 은 한뿌리였다

대한민국 학술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과학원. 남북을 대표하는 이들 국가 학술기관이 하나로 통합될 수 있다면? 전면 통합이 당분간 어렵다면, 산하 분과소위원회 차원의 부분 통합만이라도 이뤄진다면? 예컨대 역사학이나 고미술 등 문화유산 연구분야의 남북 통합이 이뤄진다면, 한반도의 역사지평은 엄청나게 넓어지고 식민사관은 설 자리를 잃게 될 것이며 동아시아사 전체를 다시 쓸 수밖에 없게 될지 모른다. 남북한의 상호 부정 속에 외면당하거나 왜곡됐던 고대사나 중세사의 많은 부분, 근대 항일운동사 등이 온전히 복원되면서 일본의 역사 비틀기나 중국의 동북공정 따위는 맥을 추지 못하게 되고, ‘코리아’에 대한 국제적 인식수준이나 그 위상은 지금과 사뭇 달라질지도 모른다.

도대체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 요즘의 남북관계 변화 추세를 보건대 불가능하다고 지레 단정할 필요는 없다. 대한민국 학술원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과학원은 원래 출발점이 같았고 뿌리가 하나였으며 구성주체도 다르지 않았다.

조선후기농업경제사연구로 한국사의 내재적 발전론의 토대를 세운 김용섭(74) 전 연세대 사학과 교수는 최근에 쓴 <남북 학술원과 과학원의 발달>(지식산업사 펴냄)에서 “올해는 해방 60주년이 되는 해이고 동시에 조선학술원 설립 또한 갑년이 되는 해”라며 “해방 전후의 과학자들이 조선학술원을 설립하고 좌우합작으로 통일된 신국가를 건설하려 한 사실이, 남의 일이 아니라 바로 현재 우리들 자신의 일”이라고 말했다.

‘조선학술원’이라니? 김 전 교수에 따르면, 일제 패전 선언 바로 다음날인 1945년 8월16일 서울에서 조선학술원 설립 준비회의에 이어 총회까지 열려 잠정 규장(규약)을 통과시키고 기구 위원까지 선정했다. 도봉섭, 안동혁, 김양하, 이균, 허달, 허규, 홍명희, 이원철, 김봉집, 최윤식, 백남운, 윤행중, 신남철, 조백현, 윤일선, 김성진, 최용달, 김계숙, 윤일중 등이 참여했다. 아직 정부 및 국가조직이 정비되기도 전의 민립기관인 조선학술원의 사업목표의 일절은 다음과 같았다. “본원은 과학의 제부문에 걸쳐서 진리를 탐구하며 기술을 연마하야, 자유조선의 신문화건설을 위한 연총이 되며 나아가서 국가의 요청에 대한 학술동원의 중축이 되기를 목적으로 함.”

조선학술원은 나중에 위원장에 연희전문 교수(경제사) 백남운, 서기장에 김양하, 역사철학부장에 이병도 등을 앉혔으며 최현배, 이병기, 김준연, 최호진, 박종홍, 전석담, 이북만, 김상기, 우장춘 등도 참여했다. 분단은 상상도 할 수 없던 그 시절에 그야말로 좌파, 우파, 중도 가릴 것 없이 총집결했다. 김 전 교수는 학술원이 논문집 <학술>까지 간행하면서 “신국가 건설과 관련하여 해방공간에서 여러 가지 큰일을 많이 수행하였다”고 밝혔다.

그러나 미-소 냉전 진행과 함께 남북에 각기 따로 정부가 서고 사회주의계열 학자들이 대거 북상한 뒤 한국전쟁까지 터지면서 조선학술원은 단명으로 끝났다. 그 뒤 남쪽에서는 전쟁중에 ‘전시과학연구소’를 거쳐 학술원으로, 북쪽에서는 ‘정치경제학 아카데미야’를 거쳐 과학원으로 각기 분화·발전하게 되는데 그 주요 멤버들은 대부분 조선학술원 출신들이었다. 전시과학연구소의 연구위원·회원수 총 74명 가운데 조선학술원 출신은 15명에 지나지 않았으나, 이 연구소의 창립위원만을 보면 24명 가운데 11명이 그들이었다. 북쪽의 정치경제학 아카데미야를 주도한 것도 <임꺽정>을 쓴 벽초 홍명희와 백남운 등이었으며, 나중에 과학원의 초대 원사와 후보원사 중에도 이들 외에 이승기, 도상록, 계응상, 도봉섭, 김양하 등 조선학술원 출신자들이 많았다.

김 전 교수는 조선학술원의 뿌리는 1935년 다산 정약용 서거 100년을 맞아 백남운 백낙준 등이 주도한, 해방 준비와 신생국가 창건 이후의 국립 학술원 창립을 겨냥한 ‘중앙 아카데미’ 창설구상까지 거슬올라간다는 사실을 실증했다.

현재 학술원 회원인 김 전 교수는 학술원운동을 정리하는 일은 “앞으로 있을 수 있는 통일정국의 호전과도 관련, 남북의 학술원과 과학원이 새로운 통합 학술원을 설계하게 될 경우에도 필요한 일”이라며 “조선학술원 시절의 좌우합작에 따른 학술원운동이 소중한 경험으로 참작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한겨레신문 2005-8-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