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내 한사군설 주장은 거짓말

(질문) 한사군의 위치가 어디인가요 ?

끊임없이 들어오는 질문이라 다시 한번 답변합니다


① 교육인적자원부 장관 답변내용

→ 2001년 11월 3일 국회 답변자료(한완상 장관)
- “한반도내에 한사군이 있었다” 라고 주장하는 학자는 없다

→ 2002년 2월 26일 국회 답변자료(이상주 장관)

- 한반도 대동강 고조선설을 고착화 시킨자는 ‘이병도’
- 이병도 설을 보완 증빙한자는 ‘김정배, 김정학’
- 이설을 취하는 자는 ‘서영수, 노태돈, 조법종, 송호정’

참고로
김정배는 ‘고구려연구재단 이사장’이고
송호정은 ‘국내 고조선 1호박사’ 이며
100% 국비지원대학인 한국교원대학 역사교육과 학과장이다
(4년 전액 국비지원. 유치원/초등/중등교사 양성)








② coo2.net 의 해설

정부 공식입장은 한반도내 한사군설을 주장하는 학자가 없다인데
위 이상주 장관의 답변처럼 학계의 주류는 한반도내 한사군설을 정설로 주장하고 있다

고구려연구재단의 수장인 김정배도 한반도내 한사군설을 주장하고
국립대학에서 선생님들을 양성하는 교원대학에서도 한반도내 한사군설을 정설로 주장하고 있다

③ coo2.net 의 우려

사서의 기록을 보아도 한사군은 하북성 유역에 있어야한다
정부의 입장도 한반도내 한사군설을 부정하고 있다

그런데
학계는 한반도내 한사군설이 정설이라며 역사를 전공하는 학생들 뿐만이 아니라
선생님을 양성하는 국립대학 조차도 그렇게 교육한다

coo2.net은 사서의 기록을 볼때 학계보다 정부의 입장이 맞다고 본다
한사군이 한반도내에 있었다고 하는 것은 어디에도 근거를 찾을수 없다

그런데
왜 대학교육에서는 정부의 입장과 배치되는 한반도내 한사군설을 정설이라고
교육하는 것일까 ?

이제 정부가 나서서 바로 잡아야 한다

정부나 대학 둘중하나는 거짓말을 한다는 것 아닌가 ?
바로 하나는 ‘역사사기꾼’이라는 결론이다

중국학자들은
‘한국의 통설이 한반도내 한사군설’이라며
중국장성을 보부도 당당하게 평양까지 그린다

동북공정에 엄청난 이론적 배경을 제공해주는 고구려 연구재단 예산이 얼마인지 아는가?
역사왜곡의 댓가에 국민의 혈세가 굴러들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을 알면 정부관계자들 잠이 올것인지 궁금하다

국립한국교원대에서 만들어내는 책들이 전국에 뿌려지고 있다
바로 송호정 ‘고조선 1호박사’가 만든 책들이 말이다
그기에 한사군이 한반도 정중앙에 표기되어있다

정부가 미치지 않은 이상 이제는 바로잡아야 한다
교육부 장관의 답변이 맞다면
국민의 혈세가 ‘역사사기꾼’을 양성하는데 사용되고 있다는 것 아닌가 ?  

관련 정부관계자나 정책입안자는 이를 반드시 바로잡아야 한다
이제는 국민이 눈먼 봉사가 아니기 때문이다

‘혈세’ 낭비를 추적하여 ‘원금’은 물론 ‘연체이자’까지 징구하여도 모자랄 것이다
역사조작 / 왜곡의 댓가는 반드시 치루게 하여야 한다

아래 역사왜곡의 원흉 이병도가 ‘국사대관’에 그린 한사군을 올려본다
3대 제자인 송OO이 그린지도와 쌍둥이이다

광복 60년 그들은 변한게 하나도 없다

정부가 나서서 정리를하라

‘이를 어찌할꼬 ~’

(이병도)



(고구려연구재단)


- 3세기 전반 고구려(고구려 연구재단 자료)

(1954년 일본인들이 그린지도= 학계 통설 = 고구려연구죄단하고 동일하다)
-> 이들을 어찌해야 한다는 말인가 ?




(자료) 사서에 나오는 조선5군(한사군)

- 사서에 나오는 하북성 유역에 있어야할 강역을 한반도내에 있는 것으로 날조하고있다





(완)



(교육부 장관의 답변) 한사군은 한반도내에 설치된 것이 아니다

(답변서)

















(질의서)












(교육부 장관의 답변) 고조선의 강역을 한반도로 고착시킨 사람은 이병도





















중국 정사 사기 朝鮮傳 중에

장안(長安)이 말하기를

"조선에는
습수(濕水)
열수(洌水)
산수(汕水)의 세 물이 있어

이것이 합쳐서 열수가 되었다"고 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강이 고조선의 중심강이라는 말입니다

이중 습수(濕水)의 위치가 중국 고지도에 아래와 같이 표시되어 있고
수경주라는 물에 관한 중국 사서에 정확히 중국 산서성에서 발원하여
하북성을 거쳐 발해로 흘러 들어가는 강이라 증빙하고 있습니다




즉, 산서성 하북성 일대가 고조선의 주강역이었는데

일제 강점기 시절
역사왜곡의 원흉 이마니시 류[今西龍]가
동이의 강역을 축소하기 위해

하북성 산해관 유역 갈석산에 있던 비석(점제현신사비)를
정으로 찍어 파내 배로 평안남도 온천군으로 끌고와 세워놓고

여기가 한의 낙랑군이라 조작하여
고조선의 강역을 한반도로 끌여 들였다는 사실입니다

(이동경로)




해방이후에는 이병도씨가

하북성에 있었던

사기조선전에 나오는
"열수"가 대동강이고
"패수"를 청천강이라 확정함으로써

고조선의 강역을 한반도로 고착 시키게되는데 결정적 역활을 하게됩니다.

 

(우리역사의 비밀 coo2.net 운영자 / 게시판 2005-8-12) 

 

(참조)

이마니시 류 (今西龍 1875∼1932)

일본 한국사학자. 기후현[岐阜縣(기부현)] 출신. 1899년 도쿄제국대학[東京帝國大學(동경제국대학)] 사학과를 졸업한 뒤 1903년 같은 대학의 대학원에서 한국사를 전공하였다. 1925년 조선총독부 조선사편수위원, 1926년 경성제국대학 교수, 조선총독부 고적조사위원이 되었다. 재직중 <단군설화(檀君說話)> <백세국도한산고(百濟國都漢山考)> 등 많은 논문을 발표하였으며, 점제현신사비를 발견하는 등 각지의 유적조사보고를 했다. 주로 신라·백제사 연구에 힘썼는데, 저서로는 《조선고사연구(朝鮮古史硏究)》 《신라사연구》 《백제사 연구》 등이 있다.

이병도 (李丙燾 1896∼1989)

역사학자. 호는 두계(斗溪). 경기도 용인(龍仁)출생. 1915년 보성전문학교 법과 졸업 후 일본으로 건너가 1919년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조도전대학)] 사학과·사회학과를 졸업하고 귀국하였다. 중앙불교전문학교·이화여자전문학교 강사를 거쳐 1925년 조선총독부 조선사편찬위원 등을 지냈고, 1934년 진단학회(震檀學會) 창립에 참여하였다. 광복 후 서울대학교 교수가 되었고, 1952년 서울대학교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1954년 서울대학교 대학원장, 학술원 회원이 되었다. 이듬해 국사편찬위원, 1956년 진단학회 이사장, 1960년 교육부장관, 1966년 성균관대학교 교수를 거쳐 1967년 미국 프린스턴대학에서 명예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는 문헌적·비판적 합리성을 전제로 한 고증사학 및 실증주의 사관을 도입하여 근대 한국사학의 수립에 공헌하였다. 학술원공로상, 국민훈장 무궁화장 등을 받았다. 수필집으로 《두계잡필(1956)》 《너와 나의 조국(1966)》 외에 저서로는 《고려시대의 연구(1948)》 《한국사 대관(1948)》 《한국사(1959)》 《한국고대사회와 그 문화(1973)》 등이 있다.

조선총독부 조선사편수회 (朝鮮史編修會)

일제강점기에 일본이 식민 통치의 일환으로 조선 역사를 편찬하기 위하여 설치한 한국사 연구기관. 역사교육을 통해 한국인의 민족의식을 말살하고 일본민족의 우월성을 입증하고자 1922년 조선사편찬위원회를 창설하였다. 조선총독부 정무총감을 위원장으로 하고 일본·한국의 학자 몇 명을 위원 또는 고문으로 하였다. 1923년 사료수집·편찬방법 등을 심의하고, 방침에 따라 《조선사》 편찬에 착수하였으나, 보다 완벽을 기하고 권위있는 기관을 설치할 필요를 느껴 1925년 조선사편수회관제를 공포하여 조선사편수회가 설치되었다. 이 회는 회장·고문·위원·간사로 조직하고 수사관(修史官) 3명, 수사관보 4명, 서기 2명을 두어 1932년부터 1938년까지 《조선사》 37책, 《조선사료총간》 20종, 《조선사료집진》 3책을 간행하였다. 그러나 이 책들은 식민사관에 입각한 내용들로서 한국인을 우민화(愚民化)하고 자기비하시키는 등 역사의식이 왜곡된 악서였다. 조선사편수회는 광복 후 자연 해체되었다.

 점제현신사비 (黏蟬縣神祠碑)

평안남도 온천군(溫泉郡) 성현리(城峴里)에 있는 낙랑시대 고비(古碑). 1914년 조선총독부 고적조사단의 이마니시 류[今西龍(금서룡)]에 의하여 발견, 조사되었다. 현재 전하는 한국 금석문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으로, 건립연대는 85년으로 추정된다. 비신은 상부가 결손되었고, 남은 부분은 높이가 약 1.7m, 나비 약 1.1m, 두께 0.12m인데, 화강암 자연석의 한 면을 갈아 가장자리는 장방형의 테두리를 만들고 그 안에 세로로 괘선 7행을 등분하여 예서체로 글자를 새겼다. 현재 판독할 수 있는 글자는 59자이다. 비문은 점제현의 태수가 현민을 위해 산신에게 제사를 드리는 내용으로서 <신이 점제를 도와주어 바람과 비가 순조롭고, 곡식이 풍성하게 잘되고, 백성이 오래 살고, 도둑이 일어나지 않고, 무서운 짐승들이 나타나지 않고, 출입을 함에 무사하여 모두 신의 혜택을 받게 해달라>고 되어 있다. 그 동안 낙랑군에 소속된 25개 현의 위치를 정확하게 파악할 수 없었는데, 이 비의 발견으로 점제현이 지금의 용강(龍岡)임이 밝혀졌으며, 점제현의 어을동고성(於乙洞古城-土城)의 성지가 당시의 치소(治所)이며 그 유적이라는 것이 판명되었다. 북한의 국보급문화재 제16호.

 

(야후 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