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에선 망치로 한국인 내려쳐도 괜찮다?

최근 영국에서 한국인에 대한 인종차별을 의심할만한 판결(결정)이 잇따라 나와 교민사회에 큰 충격을 던져주고 있다.

7월 말 부부싸움 도중 숨진 한국인 아내를 토막내 유기하고 도주했던 영국인 남편에 대해 영국 법원이 '5년형'이라는 가벼운 형량을 내린 데 이어, 지난 3일에는 넉 달 전 영국인 청소년으로부터 모욕적인 욕설은 물론 그가 휘두른 망치테러로 피해를 입고 한국 유학생이 응급수술을 받아야 했던 사건에 대해 영국검찰이 '불기소' 결정을 내린 것.

영국인 청소년, 한국유학생을 망치로 내려치다

지난 4월 23일 오후 6시30분 경, 런던 근교 뉴몰든 지역 머이브리지가에서 교회 친구들의 이사를 도와주던 전호중(가명·남·25·신학전공 유학생)씨는 그곳을 지나던 네 명의 영국인 십대들과 마주쳤다.

자전거를 타고 다가오던 이들 중 맨 앞에 오던 제이슨(가명·남·16)은 전씨를 향해 "염병할 아시아 놈 (중국인을 빗대어), 여길 떠나라, 집으로 돌아가라(Fucking Chinky, Leave here, Back home)"라고 욕설을 내뱉었고, 뒤따르던 다른 십대들도 한두 마디씩 욕설을 하고 지나갔다. 심한 모욕감을 느낀 전씨는 사과를 요구하기 위해 제이슨을 뒤따라갔지만 이미 자전거로 도주한 후였다.

놀라운 일은 그 다음에 벌어졌다. 공교롭게도 이사하던 교회 친구들과 같은 주택가에 살고있던 제이슨이 집에서 망치를 들고 다시 나타난 것.

자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도 다칠 수 있을 거라 위협을 느낀 전씨는 제이슨에게 다가가 진정시키려 했다. 전씨에 따르면, 당시 제이슨에게서는 심한 술냄새가 풍겼다. 전씨는 "망치 내려놓고 진정해라"라는 말을 되풀이하며 상대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사태가 심각해지자 주변에 있던 목격자 이모씨가 명확한 증거를 남기기 위해 휴대폰으로 사진을 찍었고, 또다른 목격자 정모씨는 경찰에 신고했다.

경찰이 온다는 말에 제이슨은 자기 집 쪽으로 달아났고 전씨는 그를 뒤따라가 사과를 요구했다. 순간, 제이슨은 전씨의 멱살을 잡고 위협하면서 옆에 있던 정모씨의 가슴을 밀쳤다. 이어 전씨의 오른쪽 이마를 망치로 내려치고 인근 주택 창고 지붕에 망치를 던진 후 도망쳤다. 주변에 있던 전씨의 교회친구 2명이 뒤따라가 제이슨을 붙잡고 망치를 꺼내 내려왔다.

옷과 운동화를 흠뻑 적실만큼 피를 흘린 전씨는 신고를 받고 출동한 앰뷸런스에 의해 병원 응급실로 후송돼 6바늘을 꿰매는 봉합 수술을 받았다.

사진·망치·증인진술 수두룩... 그런데 증거불충분?

어이없는 '테러'를 당한 전씨는 제이슨이 반성하지 않는다고 판단해 합의를 거부, 영국 법정에 정식으로 재판을 신청하기로 했다.

조사는 순조로운 듯 보였다. 가해자 제이슨은 자신이 오히려 전씨와 그 주변인들로부터 집단 폭행을 당했으며 자신의 집에 전씨 등이 무단 침입했다고 주장했으나 담당 수사관들에 의해 거짓임이 드러났다. 담당 수사관은 이후 공정한 처벌을 받게 될 것이라고 말하며 전씨를 위로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례적으로 석 달 반 동안이나 끌어오던 사건은 결과적으로 제이슨의 손을 들어주는 식으로 마무리됐다. 8월 3일, 사건담당 통역관이 "검찰이 증거불충분에 따른 불기소 처분을 내렸다"고 전해온 것.

검찰의 기소로 재판을 통해 정당한 대가를 치를 것으로 예상했고 담당 수사관도 그렇게 암시를 했었지만, 법원 판결을 받을 기회조차 없어지게 된 것이다.

필자와의 전화 통화에서 전씨는 "피해자, 목격자의 정확한 진술은 물론 나를 공격한 망치, 당시 상황을 보여주는 사진까지 있는데 도대체 어떻게 증거 불충분이 될 수 있느냐"며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매우 혼란스럽다"고 항변했다.

또하나의 사건

이에 앞서 7월말, 영국법정은 부부싸움 도중 사망한 한국인 아내를 토막 내 유기하고, 도주했다가 자수한 영국인 남편사건에게 '5년형'이라는 가벼운 형량을 내려 한인 사회를 들끓게 했다.

2004년 6월 8일, 한국 여성 강모씨(당시 38세)가 자신의 집 냉동고에서 토막난 사체로 발견됐다. 이어 13일 뒤인 21일,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받던 영국인 남편 폴 달튼(35)이 히스로 공항에서 체포돼 1급 살인혐의로 기소됐다.

조사내용은 이랬다. 폴 달튼은 부부 싸움 도중 순간적으로 감정이 폭발해 주먹으로 아내 강씨의 안면을 공격, 턱뼈가 부러진 채 실신해 쓰러진 강씨를 방치한 채 위층으로 올라갔다. 폴 달튼이 아래층으로 다시 내려왔을 때 이미 강씨의 호흡은 정지한 상태였다(부검결과는 출혈로 인해 기도가 막혀 질식사한 것으로 나왔다). 그는 강씨의 사체를 토막낸 뒤 비닐에 담아 냉동고에 넣은 뒤 일본으로 도주했다가 13일 만에 경찰의 설득이 담긴 이메일을 받고 히스로 공항으로 입국하는 길에 체포된 것으로 알려졌다.

1급살인 사건으로 기소돼 당초 중형이 예상됐던 폴 달튼에게 영국법정은 1년여 간의 재판을 거쳐 지난 7월 25일 최종형량을 선고했으나 살인혐의는 인정되지 않았다. 과실치사 혐의로 2년형, 사체유기 혐의로 3년형. 배심원들이 달튼에게 살인의도가 없었다고 인정하며 살인죄에 대해 무죄를 평결했고, 담당판사도 '살인'에 대해 무죄를 선고한 것.

"제도화된 인종주의 때문"

위 두 사건에 대한 잇따른 이례적 처리(판결)에 대해 영국 내 한인사회에서는 소수인종에 대한 인종주의적 시각이 적용돼 가해자 편들기를 한 게 아니냐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특히 '망치사건'의 경우, 사건 당시 사진과 가격한 망치 등 명백한 증거물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검찰이 증거불충분을 이유로 불기소 처분을 내린 것은 소수인종에 대한 차별, 자국민 편들기라는 것. 더욱이 흉기(망치)를 이용한 의도적 공격일 경우, 일반 폭행죄보다 훨씬 죄질이 무겁다는 게 상식적인 판단이기 때문이다.

피해자 전씨는 이번 결과에 대해 "영국 내 소수인 한국인이기 때문에 불리했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며 검찰의 시각이 공정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지적했다. 전씨는 이어 "(사건관련) 정확한 자료를 남기는 일에 힘쓰려고 한다"며 "기회가 되면 이번 사건이 영국 내 인종차별과 영국경찰과 검찰의 인종차별적 조치의 실례로 사용되어질 수 있다면 좋겠다"고 밝혔다.

강모씨 사건의 경우, 최종 형이 확정된 후 열린 사건 설명회에서 서튼경찰서 강력계 수석형사 폴 맥칼리넌은 "영국 법체계 하에서 5년형은 과실치사 혐의로 받게 되는 평균적인 형량"라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과연 공정한 수사와 재판과정을 통해 그런 형량이 나온 것인지에 대한 지적이 제기되고 있다. 최근 이 사건을 취재한 MBC 이동희 피디는 재판장에 참석해 지켜봤던 대부분의 교민들은 이번 재판이 불공정하다고 느꼈다고 전했다. 검사가 제시한 증인은 달튼의 부모와 달튼과 불륜관계에 있던 모 여성뿐이었으며, 검사는 변호사의 변론에 적극적으로 대응하지도 않고 중대반론도 제기하지 않았다는 것.

이런 상황에서 피의자 달튼은 '노예'라는 표현을 사용하며, 평소 강씨가 거친 성격의 소유자였으며, 언어 폭력 등을 통해 자신에 많은 고통을 주었다고 진술했다. 재판과정을 취재한 영국의 중앙, 지역언론들도 앞 다투어 강씨가 얼마나 '못된' 여자였는지 보여주는데 집중했다. 사건 자체가 가십으로 되어버린 것이다.

영국사회에서 소수인종으로 살아간다는 것

위 두 사건과 관련해 5년째 영국에서 의문의 교통사고로 사망한 아들의 의문사 문제와 싸우고 있는 고 이경운군의 부친 이영호씨는 "영국 내 공공기관 특히 사법기관, 경찰에 잠재해 있는 '제도화된 인종차별' 태도를 고려할 때 충분히 발생할 수 있는 결과"라고 견해를 밝혔다.

이씨는 "제도화된 인종 차별은 공공 기관 내 깊숙히 뿌리박힌 관행이어서 업무를 처리하는 당사자 자신도 자각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며 "이를 밝혀내고 잘못을 시인하도록 하는데 어려움이 많다"고 평했다.

영국 내 제도화된 인종차별 문제는 스테판 로렌스 사건을 통해 극명하게 드러난 바 있다. 1993년 흑인 청년 스테판 로렌스(18)는 버스 정류장에서 백인 불량배들의 칼에 찔려 사망했으나 용의자 백인들에게는 모두 무죄가 선고됐다. 6년간 유가족의 끈질긴 싸움 끝에 영국 경찰이 인종주의적 시각으로 수사를 진행하고 사건을 처리했음이 드러났고, 이로서 영국 공공기관에 잠재해 있는 '제도화된 인종차별' 문제가 낱낱이 밝혀진 바 있다. 당시 경찰 고위 관리 11명이 해직 당하는 파장을 일으키기도 했다.

또 지난 달 리버풀에서는 흑인 고등학생 앤소니 워커(18)가 백인 청년이 휘두른 도끼에 머리를 맞아 숨지는 사건이 발생해 엄청난 충격을 던져줬다. 당시 유가족들은 사건 발생 후 추모 집회에서 "범인들이 길거리를 더이상 걸어다녀서는 안된다, 반드시 정의가 구현되어야 한다"는 내용의 성명서를 발표했다. 또 3천 여명이 참가한 촛불시위가 열리며 영국 주요 언론의 머릿기사로 퍼져나가기도 했다.

이번 한국 교민들이 겪은 두 사건은 영국 내 사법, 행정 등 공기관을 중심으로 자행되는 제도화된 인종차별이 여전히 그 힘을 발휘하고 있다고 의심케 만들고 있다. 또 한인사회에는 한국교민들이 사건을 당했을 때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과제를 남겨주고 있다.

"한국인이기 때문에 불리한 판결 받았다"
망치 폭행 피해자 전호중씨 인터뷰

- 현재 건강 상태는 어떤가.
"지금은 괜찮다. 정상적으로 생활하고 있다."

- 이 사건에 대해 검찰은 증거 불충분으로 불기소 처분을 결정했는데 어떻게 생각하나.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다. 피해자, 목격자의 정확한 진술은 물론 (나를) 공격한 망치, 당시 상황을 보여주는 사진까지 있는데 도대체 어떻게 증거 불충분이 될 수 있나. 도착했던 경찰도 내가 피를 많이 흘리는 것도 봤다."

- 불기소처분을 공식적인 문서나 담당 검찰 측으로부터 통보받은 것인가.
"통역관을 통해 전화로 들었다. 검찰 공식 문서는 아직 받지 못했다. 담당 수사관도 장기(5주) 휴가 중이라 당장 연락이 닿질 않는다. 경찰 측에서는 이 건은 이미 경찰 손을 떠난 것이라고 하더라."

- 이런 결과가 영국내 인종주의와 상관있다고 보는가.
"영국 내 소수인 한국인이기 때문에 불리한 판결을 받았다는 생각이다. 아울러 영국 내 우리나라의 위상과도 관계있다고 본다. 영국 내 한국인들이 풀어야 할 숙제일 수도 있다. 일례로 모 한국인이 교통사고를 당했는데 변호사가 '한국인이기 때문에 승산없다'며 수임을 포기한 경우도 있다."

- 가해자와 사건 후에도 만난 적이 있나.
"사건 다음날도 만났다. '어제는 즐거웠다'고 말하더라. 전혀 반성하는 기색이 없다. 얼마 전에는 '한국인 몇 명을 데려온다고 해도 될 줄 아냐?'고도 했다."

- 가해자들을 처벌할 다른 대안은 없나.
"영국 법상 대민 피해자에게 퇴거 명령이 가능하나 이 또한 현재로선 불투명하다. 담당 경찰관은 계속 위협을 주게될 경우 가해자를 퇴거시킬 수 있도록 도와주겠다고 했으나 실제로 그렇게 할 수 있는 가능성은 높지 않다. 카운슬(지방정부)에 정식 민원을 신청하고 그것이 받아들여지려면 명확한 근거가 있어야 하는 데 현재로선 그냥 무마된 상황이라 불가능할 것 같다."

- 대사관의 도움을 받을 수도 있었을 텐데.
"주영한국대사관에 형사쪽의 영국법상의 자문을 구할 수 있는 변호사가 없어 아쉬웠다."

- 지금 심정은 어떤가.
"머리 속이 복잡하다. 내가 인터넷에 직접 사진을 올리고 이 사실을 알려 볼까도 생각해봤지만 객관적으로 문제를 보고 해결하고 싶다. (사건관련) 정확한 자료를 남기는 일에 힘쓰려고 한다. 기회가 되면, 이 사건이 영국 내 인종차별과 영국경찰과 검찰의 인종차별적 조치의 실례로 사용 되어질 수 있다면 좋겠다."

(오마이뉴스 / 박성진 기자 2005-8-11) 

영국 백인의 1/3은 인종주의자?

대규모 파시스트 정당이 나온 적이 없는데도 왜 인종차별문화가 퍼졌을까

런던 테러의 가해자가 영국에서 태어난 이민자 2세대라는 게 밝혀진 뒤 이슬람 사회가 영국 사회로 잘 통합됐다는 믿음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무엇이든 이유가 있게 마련이다. 그들은 브리튼 친구들에 대해 왜 그렇게 무자비했을까. 영국인이 된다는 것은 무엇일까, 갖가지 배경을 가진 이민자들은 어떻게 해야 더 잘 통합되고 그들이 소속된 사회에 감사할 줄 알게 될까. 이런 갖가지 의문이 떠오른다.

카디프, 리버풀, 브리스틀, 런던 같은 항구도시에는 선원들의 가족으로 구성된 이민자 사회가 오랫동안 있었다. 1950년대 후반에는 보수당 정부가 전쟁 이후의 노동자 부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식민지에서 사람들을 데려와서 교육하는 프로그램을 시작했다. 특히 이들은 의료와 운송업계에서 일했다. 주로 남자들로 이루어진 수십만명의 이민자들이 서인도제도, 파키스탄, 인도 북쪽 지방과 방글라데시에서 왔다.

대부분의 이민자들은 집에 돌아가기 전에 많은 돈을 벌자는 꿈을 안고 왔다. 그들은 머지않아 영국 여자나 남자와 결혼해서 아이를 낳거나, 그들이 살던 지역으로 아내와 아이들을 불러왔다. 서인도 제도 사람들은 제국적 고향인 ‘어머니 나라’의 환영을 바라고 왔다. 대부분이 기독교인이었고 영어를 할 줄 알았고 제2차 세계대전에 자발적으로 참여했었다. 이에 반해 인도 아대륙 사람들은 좀 다른 문화와 종교를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독립적인 사회를 만들기 시작했다. 이 이민자 사회 사이나 백인 영국인간에는 거의 결혼을 하지 않았다. 그들은 고향에서 아내와 남편을 찾기를 바랐다. 그들은 주로 농촌 지역에서 왔기 때문에 도시 생활에 익숙해지지 않았고 영어도 잘하지 못했다. 여성은 더 심했다. 그들은 영국이라는 나라에서 외따로 떨어져 살았다.

이 첫 이민자들은 제국의 몰락과 함께 있었던 전쟁 복구를 위해 왔다. 이 사람들이 대량 이민 프로그램으로 받은 것도 없는데, 대다수 영국인들은 공개적으로 보수주의자들의 인종적 우월주의를 지지하고 이민에 분개했다. 이민자들은 제국의 대도시 런던, 리버풀, 맨체스터, 버밍엄에 그들만큼 가난한 사람들이 꽉 찬 슬램가를 보고 충격을 받았다. 집집마다 ‘흑인 사절, 개 사절’이라는 문구가 붙어 있었다. 날씨는 추웠고 환영 인사는 차가웠다. 도시는 공장과 산업시설에서 나오는 연기로 가득 찼다. 차별은 널리 퍼져 있었다. 교회조차 흑인 형제자매들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1970년대부터는 세계 곳곳에서 온 망명자들이 이민자 대열에 합류했다. 1990년대에 영국은 세계에서 가장 다문화적인 나라가 되었다. 논쟁의 여지가 있는 수이긴 하지만, 현재 영국에는 비유럽 가계가 500만을 헤아린다. 이민자 사회는 도시의 깊숙하고 가난한 지역에 모여 있다.

1959년에 런던 서쪽 노팅힐에서 백인 노동자 계급 ‘테디 보이스’와 ‘서인도인’ 갱 사이에 싸움이 벌어졌다. 싸움은 백인 젊은이들의 공격으로 시작됐지만 ‘흑인 코먼웰스’(제국 신민으로서 영국에 올 수 있는 권리를 가진 사람들)의 수를 제한하는 법이 즉각 통과됐다. 1962년에는 일련의 이민법을 이어 국적법이 통과됐다. 국적법은 영국인 조부를 두어야 영국 여권을 발행하도록 제한하는 법이었다.

1960년대와 70년대에 정부는 인종차별법에 대항하는 법을 만들고 인종평등위원회를 만들었다. 1964년 총선거에서 보수당의 일부 의원이 인종차별 캠페인을 과도하게 펼쳤다. 1968년에는 영국 이민자를 받아들인 데 책임이 있는 전 보수당 수장인 에노크 파웰이 유색인종 이민정책을 비난하는 연설을 했다. 그는 여기서 이 정책이 인종 전쟁과 ‘피의 바다’를 불러온다고 말했다. 보수당 의장인 에드워드 헬스는 그를 당에서 쫓아냈다.

영국은 유럽에서처럼 대규모 파시스트 정당이 나온 적이 없다. 주요 정당은 인종 문제에 대해 여론을 주시했다. 우파적 움직임이 있긴 했다. 어쨌든 영국 국민당은 10명의 시의원만이 있고 하원의원은 없다. 그럼에도 인종차별 문제는 대중적이다. 이는 폭행, 모욕, 그리고 스티븐 로렌스, 최근의 앤서니 워커 살해와 같은 사건으로 드러났다. 여론조사에서는 백인의 3분의 1이 그들 스스로를 인종주의자라고 생각한다고 말한다. 제국주의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는 인종적 우월성이라는 신화가 세월과 함께 사라졌다고 생각했는데 말이다.

런던= 줄리언 체인 전문위원

(한겨레21 2005-1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