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음하는 고구려]‘고구려’가 中國서 두 번 운다

《“어, 저거 물방울 아냐? 벽화에 습기가 가득 찼잖아.” 5일 오전 중국 지린(吉林) 성 지안(集安) 시 고구려 다섯투구무덤(오회분) 앞에 있는 관광 안내실. 사신도(四神圖)로 유명한 이곳 고구려 벽화를 구경하러 온 한국인들은 중국 측에서 폐쇄회로(CC) TV를 통해 보여 주는 벽화를 보다 놀랐다. 벽화에 물방울이 가득 맺힌 것이 화면으로 생생히 보였기 때문이다.》

특히 벽화 바로 앞에 세워져 있는 에어컨 근처의 습기가 심했다. CC TV 촬영을 위해 켠 라이트의 뜨거운 열기와 에어컨의 찬 공기가 만나 물방울을 만드는 듯했다. 그뿐 아니라 라이트의 빛과 열기는 1500여 년간 어둠 속에서 숨 쉬어 온 벽화를 훼손할 게 불 보듯 뻔했다. 하지만 중국인 관리인은 “카메라를 하루에도 수백 차례 돌린다”고 말할 뿐 습기에 대해서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중국 내 고구려 유적이 지난해 7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후 무분별한 관광과 ‘고구려사의 중국사 편입’이라는 중국 정부의 정치적 목적의 홍보물로 이용당하면서 신음하고 있다.

중국 당국은 2003년부터 광개토대왕비에 씌워 놓은 유리 보호각의 출입문을 6월 30일부터 개방했다. 누구나 비석 바로 앞까지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게 된 것. 문화재 전문가들은 비석을 유리 속에 가둬 놓음으로써 공기의 흐름을 차단한 것도 문제지만, 폐쇄된 공간에 수많은 관광객이 드나들면 사람의 입김 때문에 비석의 부식이 가속될 수 있다고 우려했다.

비석을 자세히 살펴본 서영수(徐榮洙·단국대 교수) 고구려연구회 회장은 “비석이 갈라지는 걸 막기 위해 갈라진 틈새에 본드를 주입했는데 그 본드가 흘러나와 비석을 검붉게 물들이고 있다”며 “심지어 시멘트로 바른 흔적까지 보인다”고 말했다.

비석 앞엔 관광객들이 소원을 빌며 던진 동전과 지폐가 어지럽게 널려 있다.

‘동북아의 피라미드’로 손꼽히는 장수왕릉(장군총)의 동북 사면은 무덤을 지지해 주는 호석(護石)이 하나 빠진 상태에서 급증하는 관광객의 발길에 짓밟혀 심하게 침하돼 있다.

장수왕릉보다 규모가 2배나 큰 태왕릉은 돌 틈새로 잡초가 무성하게 자라면서 무덤의 돌멩이들이 계속 무너져 내리고 있다.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등재되지 못한 고구려 유적들의 훼손은 더욱 심각하다. 랴오닝(遼寧) 성 랴오양(遼陽) 시 교외의 고구려 백암성(연주산성)은 인근 석회암 채석장이 100여 m 앞까지 파고들어 왔지만 중국 당국은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고 있다.

[신음하는 고구려]中 리안-랴오양-환런 유적지를 가다

중국 역사 왜곡의 ‘살아있는 교과서’

고구려의 첫 수도인 홀본성(오녀산성)이 위치했던 중국 랴오닝(遼寧) 성 환런(桓仁) 시와 두 번째 수도인 국내성이 있었던 지린(吉林) 성 지안(集安) 시에 딱 들어맞는 표현이다.

지난해 8월 24일 한국과 중국 정부는 고구려 문제로 양국 관계가 훼손되는 것을 차단한다는 내용의 5대 양해사항을 합의했다. 한국은 이를 중국이 고구려가 중국사의 일부라는 주장을 중국 교과서에 싣지 않겠다고 사실상 약속한 걸로 받아들였었다.

그러나 중국은 그 후 지안과 환런의 고구려 유적을 관광 상품으로 대대적으로 개발함으로써 관광 수입을 거두는 동시에 중국인들에게 고구려사가 중국사의 일부라는 교육을 주입하는 일거양득의 효과를 얻고 있다. KTF고구려역사유적답사단을 인솔하고 3∼9일 지안과 환런 지역 등을 둘러본 서길수(전 고구려연구회 회장) 서경대 교수는 “중국이 고구려 유적과 박물관을 ‘다목적 발전소’처럼 이용하고 있다”고 표현했다.

○ 한국인보다 많아진 중국 관광객

장수왕릉(장군총)과 태왕릉 등 1만2000여 기의 고구려 무덤과 국내성, 환도산성, 광개토대왕비 등이 남아 있는 지안 시 관광업계에 따르면 7월까지의 올해 관광객 수가 이미 지난해 전체 관광객의 3배를 넘어섰다.

특히 한국인 관광객보다 중국인 관광객이 급증하고 있다. 지난해의 경우 지안박물관을 찾은 관광객 중 한국인이 6700여 명으로 중국인 4000여 명보다 많았으나 올해 들어선 7월 말 현재 한국인 1만5000여 명 대 중국인 2만여 명으로 역전됐다. 이들 중국인 관광객 중 30%가량은 남방지역 등 동북 3성 외 지역에서 찾아오고 있다.

지린 성에 비해 경제규모가 훨씬 큰 랴오닝 성에 위치한 데다 주변 풍광이 아름다운 홀본성의 경우 주말이면 하루 평균 3000명 이상의 관광객이 찾는다고 현지 매표소 관리자가 전했다. 또 전체 관람객 중 중국인의 비율이 85%에 이를 정도로 압도적이다.

실제 4일 오전 8시경 홀본성에는 이른 시간인데도 대학생들과 직장 단위로 온 중국인 단체관람객들이 줄을 이었다. 현지 가이드의 설명에 따르면 이들 관광객 중 일부는 정부와 기업의 보조를 받고 있다.

이 같은 추세는 중국 당국이 2003년 중국 10대 명산을 발표하면서 백두산을 전통적 5대 명산에 이은 여섯 번째 명산으로 발표한 뒤 백두산 관광객의 80%를 차지할 만큼 전국 각지의 중국인들이 모여드는 현상과 마찬가지로 더욱 가속화할 것으로 보인다.

○ 박물관 교육을 통한 역사왜곡

이들 유적을 답사하는 관광객들이 빠지지 않고 방문하는 곳이 오녀산성 사적진열관과 지안박물관이다.

2003년 8월에 세워진 오녀산성 사적진열관의 경우 안내판의 머리말(전언·前言)과 맺는말(결속어·結束語)에서 ‘고구려는 중국 동북지구 고대 소수민족이 세운 국가’라고 못을 박고 있다. 또 ‘고구려 건국’과 ‘현토군과 고구려’라는 두 설명문에서 ‘기원전 108년 한무제가 설치한 현토군에 고구려가 세워졌다’고 강조함으로써 중국 땅에 세워진 중국 국가라고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현토군이 세워진 연도는 기원전 107년이 정확하며 그 영역은 고조선의 영토였다. 게다가 당시 세워진 것은 고구려라는 국가가 아니라 고구려현이었으며 고구려가 건국된 기원전 37년 당시의 영토는 졸본부여 또는 원(原)고구려 세력의 영토였다. 역사적 사실을 외면한 채 정치적 목적 아래 쓰인 설명문임을 알 수 있다.

2003년 전시물의 90%가 바뀔 정도로 새 단장을 한 지안박물관의 안내문들은 더욱 심하다. 박물관 내 5개의 안내판 중 ‘고구려는 중국 동북 소수민족이며 지방정권 중 하나’라고 밝힌 머리말과 ‘고구려 역사 중요기술’, ‘고구려 조공책봉 조견표’, ‘고구려 유민의 정착 현황’ 등 4개의 안내판이 고구려가 중국사의 일부라는 주장을 뒷받침하는 내용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중국은 지린 성 퉁화(通化) 시 완파보쯔(萬發撥子)의 대형 고구려 유적지에서 발굴한 7000여 점의 유물을 전시할 박물관을 올해 말 개관할 계획이다. 여기에 선양에 새로 세워진 랴오닝성박물관 3층의 고대관 정비가 끝나고 현재 새로 건립 중인 창춘(長春)의 지린성박물관에 고구려관이 들어설 경우 중국의 고구려사 침공이 ‘박물관을 동원한 게릴라전’처럼 전개될 것으로 전문가들은 우려하고 있다.

[신음하는 고구려]“中, 고조선 부여 발해도 넘봐”

“중국은 고구려뿐 아니라 고조선, 부여, 발해 등 우리 민족의 북방사 전부를 겨냥한 문명사적 도전을 해 오고 있는데 우리는 겨우 고구려 지키기에 급급할 뿐입니다. 고구려를 지키기 위해서는 좀 더 스케일을 크게 해 동아시아사를 다시 쓰겠다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서길수(徐吉洙·전 고구려연구회 회장·사진) 서경대 교수는 지난해 환갑을 넘긴 나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중국 내 고구려 유적 답사 강행군을 펼치고 있다. 6박 7일 일정으로 중국 선양∼단둥∼환런∼지안∼퉁화∼백두산∼투먼∼랴오양∼선양을 돌고 난 뒤 한국에서 하룻밤만 자고 다음날 새벽 다시 새로운 답사단을 이끌고 중국을 향해 떠난다. 이런 식으로 지난달부터 벌써 세 번이나 고구려 유적을 답사했고 이달 중 한 번이 더 남아 있다.

“1980년대 후반부터 중국 내 고구려성 130여 개를 발로 뛰어 찾아 나서면서 고구려를 내 여생의 마지막 화두로 삼았습니다. 그런데 그 고구려가 중국의 입 속으로 들어가려 하는데 내가 어찌 나이 먹었다고 쉬고 있을 수 있겠습니까.”

지난해 10년간 이끌어 오던 고구려연구회 회장 자리를 서영수(徐榮洙) 단국대 교수에게 넘겨준 서 교수는 “최근의 고고학적 발굴 결과에 따르면 중국 황허문명과 전혀 다르지만 빗살무늬토기와 돌무덤, 알타이어족의 언어를 사용한 문명이 우리뿐만 아니라 중앙아시아 몽골 터키 등 방대한 영역에 걸쳐 존재했다”면서 고구려사를 실마리 삼아 이런 문명사를 수놓아 갈 수 있는 후학들의 등장을 학수고대하고 있다.

“한국인들은 늘 사이즈 콤플렉스에 시달렸는데 고구려를 발견함으로써 이를 극복할 수 있었습니다. 이제 만주벌판뿐 아니라 시베리아와 중앙아시아 일대까지 아우르는 문명사적 관점에서 우리 역사를 다시 정립해야 합니다.”

(동아일보 / 권재현 기자 2005-8-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