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민사관 퇴출에 내 인생 걸었다"

20종 30권. 이 숫자는 역사학자 이덕일(44·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이 낸 책의 종수와 권수이다. 1997년 <당쟁으로 보는 우리 역사>(석필)를 첫 책으로 신고하고, 매년 서너 권 이상 펴내면서 10년도 안 돼 이룬 결과이다.

독학으로 공부한 '재야' 역사학자와 달리 제도권에서 제대로 교육과정을 밟아가며 박사학위를 받은 그는 학위를 받자마자 동료들에게 약속한 대로 대학 교수직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홀연히 제도권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역사평론가'라는 명함의 소유자로 활동하면서 고대에서 근현대까지 한국사를 전방위적으로 종횡무진하며 다작이다 싶을 만큼 책을 쓰고 있다. 어느덧 출판가에서 '베스트셀러 제조기'로 통하고, 출판잡지에서 그의 인기비결을 분석하는 기사를 다룰 만큼 일가를 이루어가고 있다.

그런 그가 새 책을 준비하는 틈틈이 예전에 나왔던 두 종의 개정판을 최근 냈다. <조선왕 독살사건>(다산초당)과 <교양한국사>(3권, 휴머니스트)가 그것이다. 지난 달 말 수유리에 있는 집필실에서 이덕일을 만났다.

황국, 중화사관에 원형 훼손당한 우리 역사

"지난 20세기 일본의 황국사관과 일제가 남긴 식민사관에 의해 그 원형을 심하게 훼손당한 우리 역사가 이젠 '동북공정'이라는 중화사관의 강력한 공격에 직면해 있습니다. 동아시아라는 지역을 공유하고 있는 일본과 중국의 이런 정치화된 역사충돌이 어느 때보다 치열합니다. 그렇다면 한국의 역사는 중국과 일본 사이에 끼인 징검다리에 불과한지, 황국사관과 중화사관의 강한 대외팽창적 역사관을 극복하는 길은 무엇인지 따져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덕일은 최근 중국에 있는 고구려 유적지를 답사하고 왔기에 더더욱 우리 역사의 길을 성찰하지 않을 수 없다고 했다. 고구려 유적에 대한 접근이 작년보다 쉬웠는데, 그건 한국관광객에 대한 배려가 아니라 이미 입장 정리가 끝나 중국 역사로 편입시켰기 때문이었다.

"황국사관과 중화사관, 두 사관의 공통점은 한국사의 시간을 단축하고, 한국사의 공간을 축소하는 것입니다. 고조선의 역사를 아예 말살해버리고(황국사관), 중국사로 편입시켜 버리는(중화사관) 데서 시간단축의 음모를, 한국사의 강역에서 대륙과 해양을 말살시키는 데서 공간 축소의 기도를 엿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덕일은 한국 역사가 맞이한 21세기적 상황과 조건은 방어적인 한국사 기술을 넘어 동아시아라는 세계사 속의 한국의 역사와 선조들의 역동적인 대륙성과 해양성을 복원해내야 하는 것이라고 강하게 주장했다.

"대륙과 해양을 상실하고 좁은 반도에 갇힌 채 그 반도마저 남북으로 가르고 다시 동서로 갈라 싸우는 이 분열의 시대에 대륙성과 해양성의 복원은 미래를 향한 통합적 지향점이 되기에 충분합니다. 우리 선조들이 말 달리고 배 달렸던 그 광활한 대륙과 해양을 온전히 후손에게 물려주는 것 또한 우리 시대의 임무가 아니겠습니까."

원삼국실은 또 뭡니까?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초기 역사에 대한 우리의 일반적 인식과 역사학계의 통설 사이에는 커다란 괴리가 있습니다. 국립중앙박물관에 가면 '원삼국실'이라고 있는데, 삼국이면 삼국이지 원삼국은 또 뭡니까? 이는 고조선을 말살하려는 일제의 식민사관에 따른 결과일 뿐입니다."

이덕일은 국립중앙박물관에 설치된 '원삼국실'을 없애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일반인들은 <삼국사기>에 기록된 대로 고구려·백제·신라가 기원전 1세기경부터 존재했던 것으로 인식하고 있지만 한국사학계는 이를 부인하는 것이 정설이라는 것. <삼국사기> 초기 기록을 불신하기 때문이라는 게 그의 설명이다.

그렇다면 <삼국사기>의 기록은 믿을 만하다는 얘기일 터, 이는 김부식의 역사관은 문제가 있다는 우리의 상식과 배치되는 주장이다.

"김부식은 합리적인 유학자입니다. <삼국사기>에는 황당한 이야기가 많이 실렸지만 어디까지나 없는 얘기를 지어낸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를 썼습니다. 다만 너무 신라 중심적이라는 신채호 선생의 지적처럼 그런 점은 비판받아 마땅하다고 봅니다. 그렇지만 <삼국사기>를 믿을 수 없다는 식의 주장엔 동의할 수 없습니다."

이덕일은 일연의 <삼국유사>는 어디까지나 <삼국사기>를 보충한다는 개념으로 쓰인 것이지 <삼국사기>가 틀렸다고 한 것은 아니라고 말했다. 그래서 우리 역사의 대륙성과 해양성을 복원하는 의미에서 <오국사기>(전3권·김영사)를 썼다고 했다. 고구려·백제·신라 3국에다 당(또는 수)과 왜(또는 일본)을 포함해야 한국고대사를 제대로 바라볼 수 있다는 게 그의 역사관이다.

친일사학자들의 영향력 아직도 막강

이덕일은 필생의 학문적 과업이 식민사관의 극복이라고 말했다. 정설의 역사학 뿌리가 일제 식민사학에 있다는 점에서 우리 사회는 아직도 식민사학 극복이라는 현재적 임무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이 그 이유다.

이덕일은 누구인가

1961년 충남 아산에서 태어난 이덕일은 집안 형편이 어려워 뒤늦게 숭실대 사학과 들어갔다.

박사학위가 있어야 행세할 수 있다는 한국사회 구조를 간파하곤 학비가 심히 걱정이 됐지만 내친 김에 대학원에 진학하는데, 인문학 분야에선 전무후무한 기록인 7학기만에 문학박사 학위를 받는다.

박사학위를 받은 그는 곧바로 대학에서 나와 독자적인 길을 걷기 시작했다. 자유정신을 가진 그는 한번 물고 늘어지면 근본까지 파고 들어가는 특유의 끈질김으로 역사 대중화에 앞장서고 있다.

1997년 <당쟁으로 보는 우리 역사>를 첫 책으로 시작된 그의 저술은 <사도세자의 고백> <우리 역사의 수수께끼> <송시열과 그들의 나라> <아나키스트 이회영과 젊은 그들> <역사에게 길을 묻다> <오국사기> <정약용과 그의 형제들> 등 다수가 있다.

수유리에 있는 한 연립주택에 마련된 연구실 겸 집필실을 출퇴근하면서 그는 역사 자료 더미 속을 헤집으며 행복한 시간여행을 하고 있다. / 조성일 기자

"일제는 우리의 조국(나라세움)정신 부활을 막기 위해 조선사편수회를 만들잖습니까? 그 조선사편수회가 우리 역사를 타율성, 정체성, 사대성으로 포장해 민족의 뇌리에 주입시켰습니다. 그런 조선사편수회에 일본 역사학자들의 참여는 당연했겠지만 문제는 이완용의 친척이었던 이병도 같은 한국학자들이 가담했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일부 한국학자들은 부역을 넘어 조국정신 부활을 저지하는 데 큰 공헌을 하며 이 땅에 식민사학을 잉태시켰고, 그 식민사학은 일제 패망 후에도 죽지 않고 놀라운 생명력으로 살아남은 것이 문제라고 이덕일은 지적했다.

"우리는 함석헌 선생이 <뜻으로 본 한국역사>에서 '얼마나 많은 역사가들이 공정한 객관적인 과학적인 역사를 쓰려다가 죽은 뼈다귀의 이름만을 적어놓고 말았나?'고 한 탄식을 되새겨봐야 합니다."

그런데 더욱 심각한 것은 자국사를 실증주의라는 논리로 죽은 뼈다귀 이름 외우기로 전락시키는 것을 생존전략으로 삼은 이들이 한국사에서 주류를 형성하고 있는 점이라고 이덕일은 말했다.

"실증사학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식민사학은 우리의 역사 연구에서 주도적 역할을 하면서 인용자료나 주석의 개수를 가장 중시하는 서지학 비슷한 것으로 전락했고, 대중으로부터 유리되어 갔습니다. 재야사학자들이 그 빈 공간을 메우려 했지만 역부족이었고, 결국 자국사 대중과 괴리된 채 소수학자들의 전유물로 전락한 채 또 다시 중화패권주의적 사학의 공격을 받게 된 것이죠."

'조광조 거리두기'... 사림 아닌 민중의 역사에서 바라봐야

이덕일은 우리 역사학계에 주류를 형성하고 있는 왕조 중심의 시대구분법에도 이의를 제기한다. 왕조교체만을 중심으로 역사를 서술할 경우 왕조가 교체되지 않은 상태에서 벌어지는 중요한 정치적, 사회적 변화를 간과하기 쉽기 때문이다.

해서 그는 사림파의 집권이나 인조반정체제 등을 중요한 시대구분점으로 제시한다. 광해군을 내몰고 왕권을 능가하는 서인-노론이 집권하는 인조반정체제는 사실상 왕조국가 체제의 종말을 뜻하기 때문이다.

그는 사림파의 거두 조광조에 대해서 일정 부분 거리두기를 하고 있다. 조광조의 도덕성이야 의심할 바 없지만 그가 궁극적으로 만들고자 했던 사회는 결국 주자학적 사회가 아니었겠느냐는 것이다.

"사림이 아닌 민중의 입장에서 역사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보세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사림들은 어떻게 했습니까. 다 도망가지 않았습니까. 주자학적 사회란 사대부 선비가 지배하는 사회를 말하는데 여기서 민중은 배제되지요."

정조가 화성 신도시를 건설하려 할 때 농업혁명과 상업혁명적 요소도 함께 넣었던 것은 노론 중심의 막강한 서울집중 현상을 약화시키기 위함이었듯 지금 노무현 정부의 행정도시 건설도 그런 정치적 목적에다 21세기에 걸맞은 수도를 건설하겠다는 의지가 포함되어야 한다고 그는 지적했다.

박사학위 논문이 <동북항일연군 연구>로, 한국현대사가 전공인 그의 저술목록에 정작 현대사에 대한 저술이 빠져 있다고 묻자 "이제 해야 할 텐데, 시간이 없어서…"라며 말끝을 흐린다.

이덕일은 지금 고구려 유민에 관한 책을 준비하고 있다고 했다. 고구려가 멸망하자 20만 명의 유민이 중국으로 갔는데, 이들에 관한 이야기란다.

학문에서 넓이와 깊이를 동시에 추구하기란 결코 쉽지 않은 형용모순의 관계임에도 그는 용케도 둘의 조화를 이루며 역사학 대중화에 앞장서고 있다. 이웃집 아저씨 같은 수더분한 그였지만, 역사 이야기를 할 땐 한 점 흐트러짐 없는 영락없는 역사학자였다.

(오마이뉴스 / 조성일 기자 2005-8-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