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산 정계비의 토문은 토문강”

백두산 정계비터에서 바라본 서쪽 풍경. 바로 아래가 토문강 발원지이고, 멀리 봉우리 너머 두만강 발원지가 있다.

백두산 정계비에 표기되어 있는 ‘토문’(土門)강은 중국의 주장처럼 두만강이 아니라 발원지가 다른 토문강이라는 사실을 남북 공동 조사단이 확인했다.

고구려연구재단(이사장 김정배)은 지난달 19일부터 30일까지 북한측 학자들과 함께 북한에 있는 유적을 공동조사한 결과,‘토문’은 두만강이 아니라 토문강이라는 점을 직접 확인할 수 있었다고 3일 밝혔다. 남측 연구진은 광복 이후 처음으로 북한에 있는 정계비터에 갈 수 있었다.

백두산 정계비는 조선 숙종 38년(1712) 조선과 청 양국이 국경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백두산 천지 아래 세운 것으로, 그동안 비문 해석을 두고 한·중간에 논란이 일었다. 쟁점은 ‘서쪽으로는 압록, 동쪽으로는 토문을 경계로 삼는다.(西爲鴨綠 東爲土門)’는 구절. 이 ‘토문’을 두고 중국과 한국은 각각 두만강과 토문강이라는 상반된 해석을 내놨다.

‘토문’이 두만강이면 간도는 중국땅, 토문강이면 우리 땅으로 해석할 수 있기 때문. 따라서 어느 쪽도 쉽게 주장을 굽히지 못했다. 그러나 일제가 남만주 철도 부설권을 얻기 위해 1909년 간도를 중국에 넘긴 뒤, 만주사변을 일으키면서 정계비를 철거했다는 사실로 미루어 ‘토문’이 토문강을 의미한다는 것은 학계의 정설로 되어 있는 상태다. 다만 정계비 터가 중국과 긴밀한 관계에 있는 북한측 영토에 있다 보니 남측은 이를 실제 확인해볼 방법이 없었는데, 이번에 남북 공동조사의 형태로 이같은 사실을 처음으로 실측할 수 있었다.

재단측이 공개한 사진에 따르면 정계비 서쪽 아래는 압록강 발원지다. 반면 정계비 동쪽을 보면 바로 아래쪽은 토문강의 발원지이고 두만강 발원지는 멀리 보이는 봉우리(대연지봉) 너머에 있다. 동서 양쪽의 국경이 서로 맞닿는 지점에 정계비를 세웠을 것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토문’은 두만강이 아니라 토문강이어야 한다는 결론이다.

이외에도 이번 공동조사에서 황해도의 안악3호분, 평양 인근의 태성리3호분 등의 고구려시대 고분이 처음 남측 학자들에게 공개됐다. 또 실측 결과 널리 알려진 강서소묘의 도면이 사실과 다르다는 사실도 발견했다. 재단측은 이번 공동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북한과 공동학술대회 등을 추진하기로 했다.

(서울신문 / 조태성 기자 2005-8-4)

백두산 정계비 터 위치 첫 확인

최근 북한 방문을 마치고 돌아온 고구려연구재단이 3일 공개한 백두산 정계비터에 세운 표석 사진.
북측은 만주사변때 일제가 철거했다고 전해지는 백두산 정계비(사진 아래)터에 이 표석을 세웠다.

1712년 조선과 청나라가 국경을 구분하기 위해 세운 백두산정계비 터의 구체적 위치가 확인됐다. 북한의 고구려 유적을 조사하기 위해 지난 7월 19~30일 방북한 고구려연구재단(이사장 김정배) 조사단은 백두산 동남쪽 4㎞ 지점 천지 등정길에 위치한 산록에서 북한이 세운 백두산정계비 표석을 촬영, 3일 공개했다. 백두산 정계비 터를 남측 학자들이 직접 확인한 것은 해방 후 처음이다.

조사단이 찍어온 사진 자료에 의하면 백두산 병사봉(북한명 장군봉)과 대연지봉 사이 중간지점에 위치한 백두산 정계비 자리는 북한 당국이 1980년 세워둔 흰색 표석(높이 45㎝, 폭 25㎝의 사각기둥 형태)과 정계비를 받치던 받침돌만 남아 있었다. 표석이 위치한 곳은 행정구역상 양강도 삼지연군 신무성 노동자구로, 백두산 아래 주차장 인근의 군초소 뒤편이다.

백두산정계비는 조선 숙종 38년(1712년) 백두산에 세운 조선과 청나라 사이의 경계비로 기록상으로 1931년 7월28일까지 존재가 확인되고 있으나 이후에 사라졌다. 만주사변 당시 일제가 철거했다는 등 설이 분분하다.

김이사장은 “표석은 아무 글자가 새겨져 있지 않은 무자비(無字碑)였다”면서 “북한이 중국과의 외교 갈등을 염려해 백두산정계비 터임을 밝히지 않은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또 북한의 중국어판 관광지도에도 정계비 터는 ‘정계비’가 아닌 ‘백두산사적비’로 나와있다고 덧붙였다.

재단의 배성준 연구위원은 “지도상으로 정계비의 위치는 대략 알려져 왔으나 이번 조사는 송화강의 지류인 토문강과 압록강 사이의 분수령에 위치하고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직접 확인했다는 데 의미가 있다”고 설명했다.

한편 고구려연구재단은 방북기간 중 덕흥리고분, 강서3묘, 수산리고분 등 평양과 황해도 일대의 고구려 고분들을 실측하고 벽화를 촬영하는 데 성공했다. 또 대성산성·안악궁 등 평양성 일대의 고구려 유적을 조사, 대성산성의 남문터·현무문·동암성 등 옛터를 확인했다.

이번 조사에서는 남측 학자들에게 처음으로 안악 3호분과 태성리 3호분이 공개돼 이들 고분 및 벽화에 대한 근접 촬영이 실시됐다. 황해도 안악군에 위치한 안악3호분은 ‘동수묘(冬壽墓)’라고도 하며 북한의 국보 제28호다. 태성리 3호분은 2000년 12월 평양 근교에서 발견됐으나 고분은 거의 파괴되어 벽화의 흔적만 남아 있었다.

최광식 재단 상임이사는 “일부 고분은 훼손된 흔적이 있었으나 안악 3호분 등 대부분은 보존상태가 양호해 벽화의 색상 등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면서 “고분 벽화 내 설치된 유리벽 안에 들어가 촬영, 벽화의 현재상황을 세밀하게 확인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재단 측은 또 이번에 강서소묘의 고분 구조를 확인하는 과정에서 연도에서 널방에 이르는 계단이 없고 관대도 없다는 사실을 새로 확인했다. 지금까지 강서소묘는 일제시기 작성된 실측도면을 근거로 강서대묘의 구조와 같은 것으로 알려져 모든 자료에서 잘못된 도면을 표기해왔다.

김정배 이사장은 이번 남북공동 조사에 대해 “북한 학자들과 함께 숙식하는 등 신뢰를 쌓으며 많은 얘기를 나눌 수 있었다”면서 “이번 조사를 기반으로 앞으로 남북 학계가 교류하며 좋은 연구사업들을 같이 추진할 수 있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고구려연구재단은 이번 학술조사를 토대로 향후 보고서를 내는 한편 남북공동학술토론회도 추진할 계획이다.

(경향신문 / 조운찬 기자 2005-8-3)

'조·중 경계〓토문강' 확인

1712년(숙종 38년) 조선과 청이 국경 확정을 위해 세운 백두산 정계비의 위치를 한국 학자들이 확인했다. 현장 확인 결과, 정계비에서 두 나라의 경계라고 밝힌 ‘토문강(土門江)’은 두만강이 아닌 송화강(松花江) 지류임이 분명해졌다.

고구려연구재단(이사장 김정배·金貞培)은 3일 지난달 19일부터 30일까지 북한 학자들과 북한 내 고구려 유적을 공동조사한 결과를 발표하며 “백두산 등반길에서 정계비가 있었던 곳을 확인했다”며 사진을 공개했다.

정계비 터가 있던 곳은 백두산 정상으로 올라가는 길, 주차장의 군 초소 뒤편이었다. 이곳에는 원래 정계비를 세워놓았던 받침돌과 북한이 1980년 그 옆에 세운 글자 없는 흰 비석(높이 45㎝)이 있었다. 김정배 이사장은 “주차장 근처에 정계비 터가 있다는 증언과 주변 지형, 중국어판 북한 지도에 천지에서 동남쪽 4㎞ ‘백두산 사적비’로 표기된 지점과 일치한다”고 말했다.

조사에 참여했던 고구려연구재단 배성준 연구위원은 “정계비 터에서 동쪽으로 바라봤을 때 송화강의 지류인 마른 물줄기가 보였고, 두만강 상류인 홍토수(紅土水)와 석을수(石乙水)는 전방의 대각봉(大角峰) 너머에 있었다”고 말했다. 백두산 정계비는 “서쪽으로 압록, 동쪽으로 토문(土門)으로 경계를 삼아 그 분수령에서 돌에 기록한다”고 쓰여 있었으나 1931년 만주사변 때 없어졌다. 중국은 토문강이 두만강의 다른 이름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조선일보 / 유석재 기자 2005-8-4)

고구려硏 백두산정계비 위치 확인

1712년 청과 조선이 국경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세운 백두산정계비 자리와 비석을 세웠던 받침돌을 남한 학자들이 처음으로 확인했다.

북한 고구려 유적 조사를 위해 7월 19~30일 북한을 방문하고 돌아온 고구려연구재단 김정배 이사장은 3일 “원래 백두산정계비를 세웠던 자리로 알려진 백두산 정상에서 남동쪽 4㎞ 지점(해발 2,200m)에서 정계비 받침돌을 찾았다”고 밝혔다.

광복 이후 정계비 자리를 남한 학자들이 눈으로 확인한 것은 물론 사진까지 찍어 온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 대석(臺石)은 폭 40㎝ 크기의 타원형 화강석이며, 옆에 북한이 정계비 자리를 확인해 두기 위해 1980년에 세운 하얀 표석이 있다.

이번 확인은 역사적인 사실을 단순히 고증했다는 의미를 넘어선다. 백두산정계비는 조선과 청의 국경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청이 거의 일방으로 세운 비석이다. 그러나 간도 문제를 풀어가는 가장 중요한 역사 자료일 뿐 아니라, 향후 국경분쟁을 우려한 누군가가 1931년 9월 감쪽같이 없애야 했을 만큼 폭발력을 지닌 유물이다.

북한 학자들과 고구려 유적을 공동 조사하기 위해 방북한 김 이사장, 최광식 상임이사, 임기환 실장 등 고구려연구재단 학자들과 전호태(울산대) 강현숙(동국대) 여호규(한국외국어대) 교수 등 10명의 조사단이 올린 성과다. 이들은 백두산 답사 중 북한 안내원 등에게 물어 정상인 장군봉 등정로에 있는 주차장 인근에서 정계지의 위치를 확인할 수 있었다.

그 동안 백두산을 다녀온 남한 사람들이 적지 않지만 정계비 자리 근처에 군 경비 초소가 있어 일부러 보자고 해서 찾지 않으면 확인하기 어려운 위치였다. 중국과의 외교적 마찰을 우려해 그 존재를 공식으로 확인하지 않는 북한도 아무 글이 없는 작은 표석을 세웠다. 또 북한이 제작한 현행 중국어판 관광 지도에는 ‘백두산사적비’라는 표시를 했다고 한다.

고구려연구재단이 정계비 지점에서 동과 서를 보며 찍은 사진을 보면 ‘서로는 압록강, 동으로는 토문강’(西爲鴨綠 東爲土門)으로 국경을 정했다는 정계비의 내용을 한눈에 알 수 있다. 서쪽으로는 압록강의 마른 줄기가, 서쪽으로는 쑹화(松花)강으로 합류하는 토문강의 줄기가 이어져 있기 때문이다.

고구려연구재단 배성준 연구위원은 “고지도는 물론이고 현재의 지도에서도 정계비 자리에서 바로 이어지는 강은 쑹화강의 지류”라며 “중국은 토문강을 두만강이라고 주장하는 데 두만강 발원지인 홍토수, 석을수는 토문강이 휘감아 흐르는 대학봉 뒤쪽으로 훨씬 멀리 있어 정계비 지점에서는 보이지 않는다”고 말했다.

고구려연구재단은 또 북한 사회과학원 등의 학자 5명과 함께 안악 3호분, 태성리 3호분, 진파리 무덤, 덕흥리 무덤, 강서 대묘ㆍ중묘ㆍ소묘, 수산리 고분 등을 실측하거나 내부 벽화 등을 근접 촬영한 것을 비롯해 평양성 축성자를 기록한 내성 남벽의 석각을 처음 확인했다.

또 일제 시기 작성한 도면을 근거로 강서소묘가 강서대묘와 구조와 같다고 잘못 알던 것도 실측을 통해 바로 잡았다. 강서소묘에는 연도에서 관을 비치한 널방에 이르는 계단과 관대가 없는 것을 확인했다. 김 이사장은 “이번 조사의 성과를 기반으로 해 향후 남북 공동 학술토론회를 추진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사진 고구려연구재단 제공>

(한국일보 / 김범수 기자 2005-8-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