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자않는 나라 한국

뛰는 세계, 멈춘 한국.

세계 주요국들의 경제는 활황인데 한국 경제만 나홀로 침체를 지속하고 있다. 지난해 국내총생산(GDP)이 11조6675억달러로 한국(6797 억달러)의 17배가 넘는 미국이 올 2분기까지 9분기 연속 3% 이상의 경제성장률 (전기비)을 지속했고, 한국보다 GDP가 7배 가까이 큰 일본(4조6234억달러)도 올 1분기 4.9%로 한국(1.6%)보다 훨씬 높은 성장률을 기록했다.

경기 과열 때문에 걱정하는 중국은 지난해 4월부터 기업 대출을 억제하고 철강 , 시멘트, 알루미늄 등 분야에서 투자 과잉을 단속하며 금리 인상이라는 카드 까지 썼지만 약효가 제대로 먹혀들지 않은 채 올 상반기 9.5%의 높은 성장률을 기록했다.

한 나라의 성장동력을 결정하는 핵심 요소는 소비와 투자, 수출이다. 특히 미래의 성장잠재력을 결정짓는 요소는 바로 설비투자다. 기업들이 생산능력을 키우기 위해 장비나 기계를 설치ㆍ보강하고 연구개발 등에 돈을 많이 투입해야 성장잠재력도 높아지는 법이다.

그런데 한국의 설비투자가 장기 답보 상태에 빠져 있으니 걱정이 아닐 수 없다 . 3저 호황기였던 86~89년에 설비투자는 연평균 18%의 높은 증가율을 기록했고 , 외환위기 직전인 94~96년에도 연평균 증가율이 17.3%에 달했다. 그러나 96년 을 정점으로 투자는 급속히 둔화됐고 특히 2001년 -9%, 2003년 -1.2% 등 투자 가 감소하는 해가 속출하고 있다. 올 6월에도 설비투자 추계가 2.8% 감소했다.

다른 나라들은 어떤가. 25년 만에 최대 설비투자 붐을 맞고 있는 일본은 자동차, 철강, 공작기계 등에서 기업들이 설비를 대대적으로 확충하고 있다. 경제 산업성에 따르면 일본 제조업체들은 올해 설비투자를 21% 늘릴 것이라 한다. 중국은 고정자산투자가 2003~2004년 연속 20% 이상 늘었고, 올 상반기에도 25% 증가했다. 미국도 올 2분기 설비투자가 전분기 대비 9%나 늘었다.

우리와 경쟁국의 투자 증가율 격차가 이처럼 벌어지고 있으니 한국의 경제적 위상은 갈수록 약화될 수 밖에 없다.

재삼 강조하지만 우리 정책당국은 기업들이 움켜쥐고 있는 70조원의 현금자산 을 투자 쪽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백방의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수도권 공장총량 규제니 출자총액 규제니 현 정부가 금과옥조로 여기고 있는 실익없는 규제 는 과감히 풀어야 한다. 규제 때문에 파주 LCD단지 등에서 수조 원대 투자가 실행에 옮겨지고 있지 못하다니 실로 안타깝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정책당국 은 이런 규제를 붙들고 있는가.

정부는 자산 5조원 이상 대기업집단에 적용되는 출자총액제한제도라는 굴레 때문에 기업들이 더 이상 덩치를 키우려 하지 않고, 이 때문에 자산 4조원대에 10개 그룹이 몰려 있는 사실을 알고 있는가. 국내 기업들이 세계 정상에 올라서려면 투자를 통해 덩치를 더 키워야 한다. 한국의 최대 기업인 삼성전자의 지난해 매출액은 553억달러로 세계 1, 2위인 월마트(2882억달러)나 BP(2851억달러)의 5분의 1밖에 되지 않는다. 또 도요타자동차(1636억달러)의 3분의 1에 불과하다.

한국 기업들이 투자에 적극 나서지 못하는 큰 이유 중 하나는 바로 한덕수 경제부총리가 최근 지적했듯이 수익모델을 찾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느 분야에 투자하면 돈이 될지 불확실해서다. 그러나 이는 어디 우리만의 문제인가. 세계가 하나의 시장이 된 상황에서는 다른 나라 기업들도 동일한 문제를 안고 있다. 그런데도 우리만 유독 투자 부진이 장기화되고 있으니 다른 데서 이유를 찾을 수밖에 없다.

외국인 지분율이 높아 사실상 외국기업이라 할 수 있는 대기업들의 경우 최고 경영자(CEO)들이 배당과 단기 실적, 주주 이익 등을 중시할 수밖에 없어 장기적 안목을 갖고 투자하기 힘든 측면도 있다. 이 문제도 물론 개선해야 하지만 시간이 걸린다. 따라서 지금은 정책당국이 의지만 있으면 즉각 실행에 옮길 수 있는 일부터 해야 한다. 바로 규제 제거다. 정책당국은 많은 기업이 규제 때문에 투자를 하지 못한다는 하소연에 귀 기울이고 적절한 조치를 취해야 한다. 그것이 거짓이니 엄살이니 하며 면박만 줘서는 곤란하다.

한국이 산업강국의 꿈을 실현하려면 청와대와 정부, 정치권이 먼저 변해야 한다. X파일과 같은 문제로 과거 파헤치기에만 몰두해선 곤란하다. 정치적 계산에만 눈을 번득여서는 안된다.

지금은 과거에 축적해 놓은 것으로 우리가 먹고 살고 있다. 그러나 축적해 놓는 것이 고갈돼 가는 상황에서는 더 이상 미래의 삶을 보장할 수 없다. 약체국 으로 전락하기 전에 제발 정신 좀 차리자.

(매일경제 / 온기운 논설위원 2005-8-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