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 고구려史 왜곡 공식화

중국은 지난해 우리 측의 고구려사 왜곡 방지 요구에 합의했음에도 불구하고 이후 지방정부 차원에서 더 노골적으로 고구려사를 자국의 역사로 선전하고 있는 사실이 확인됐다. 중국은 특히 자국민을 대상으로 고구려사가 자국사라는 것을 주입하는 것은 물론, 외국 관광객에게 고구려가 중국의 고대 지방정권이라고 적극적으로 선전하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최근 중국의 고구려 유적을 답사하고 돌아온 서경대 서길수(전 고구려연구회장) 교수는 2일 “지린(吉林)성 지안(集安)시 등 중국의 지방 정부가 ‘고구려는 한나라의 지방정권’이라는 내용을 담은 관광안내책자를 중국어, 영어, 일본어, 한국어 등 4개 국어로 제작해 호텔에 비치토록 하고 관광안내원에게 할당량을 제시해 의무적으로 판매하고 있다”고 말했다.

서 교수에 따르면 ‘중국지안(中國集安)’ ‘퉁화관광(通化旅游)’ 등의 책자는 ‘한(漢) 원제(元帝) 건소(建昭) 2년(기원전 37년) 고구려는 정권을 구성하여 우리나라 역사에서 한대 현도군의 관할 아래 있는 하나의 지방 민족정권이 되었다’며 고구려를 완전히 중국의 역사로 기술했다. 또 ‘고구려가 망하고 250년이 지난 뒤 고구려 유민들은 완전히 원래의 민족 특성을 잃어버리고 다른 민족에 융합되었다’며 고구려 멸망 이후 고구려의 계통이 중국사에 완전히 통합된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서 교수는 “최근 중국은 책자와 고구려 유적지 안내문, 인터넷 관광안내 사이트를 이용해 ‘고구려와 고려는 관련이 없다’ ‘고구려인은 결코 조선인이 아니다’고 적극적으로 선전하고 있다”며 “이 같은 중국정부의 행태는 고구려, 고려를 당연히 한국과 같은 것으로 생각하는 자국민들의 인식 자체를 교정하겠다는 의도”라고 우려했다

(한국일보 / 김범수 기자 2005-8-2)

[고구려 유적] <上> 中의 계속되는 역사왜곡

중국 선양(瀋陽) 땅을 꽤 오랜만에 다시 밟는다. 7월 23~29일 농어촌 청소년 답사단 30여 명을 인솔해 1년 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중국의 대표적인 고구려 유적 도시 랴오닝(遼寧)성 환런(桓仁)과 지린(吉林)성 지안(集安)을 찾았다. 중국 동북지방의 관문인 선양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세계유산 고구려 유적-환런’이라는 선전 간판이 우리를 맞는다.

고구려 유적에 몰리는 관광객 행렬

고구려 첫 수도 환런은 마침 휴일이어서 시장터처럼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관광객을 이끄는 수많은 가이드들이 앞 다투어 휴대용 마이크를 들고 유적을 설명하는 바람에 한참을 기다려서야 오녀산성의 유적을 제대로 볼 수 있었다. 산성 입구에는 ‘고구려는 중국의 지방정권’이라고 쓴 메달을 팔았고, 지난해 이미 확인한 사적진열관의 고구려사 왜곡 문구는 한 자도 바뀌지 않았다.

인파가 몰리기는 고구려의 두 번째 수도이며 유적의 보고인 지안도 마찬가지였다. 세계문화유산 등재 신청을 앞두고 광개토대왕비에 둘러 쳤던 방탄유리창을 열어 비석을 직접 볼 수 있도록 하는 등 언뜻 보기에는 고구려 문화를 모든 사람들이 자유롭게 감상할 수 있는 세계유산으로 개방하는 분위기다.

하지만 그 자유는 한국인에게만은 제한된 것이었다. 전시(戰時)용 왕성인 지안의 환도산성을 둘러보고 내려오던 우리 답사단은 중국의 공안 요원들에게 모두 여권을 제출해야 했다. 호텔에서 여권을 신고했는데 관광 중 또 여권을 검사하는 것은 극히 이례적이다.

중국에서는 호텔에 투숙할 때 여권을 검사 받는데, 관광하고 있는 한국인에게 자신들의 공무 집행 신분증을 제시하며 특별히 여권을 검사하는 것은 고구려를 연구하는 한국 학자를 압박하기 위한 계산된 행동이고 밖에 볼 수 없다. 산성과 무덤 떼를 관람할 때도 3명의 요원이 앞뒤로 따라다니며 우리 팀을 사진으로 찍고 비디오로 촬영했다. ‘사찰’은 비밀리에 하는 것이 상식 아닌가. 아무리 생각해도 노골적이다.

관광안내책자 통해 고구려사 왜곡 여전

중국은 도대체 왜 이렇게 한국 학자들의 고구려 유적 방문에 신경을 쓰는 걸까? 답은 호텔 방에 들어서자마자 바로 찾을 수 있었다. 지안의 호텔에는 방마다 지난해에는 보지 못했던 제법 두꺼운 책 두 권이 놓여 있었다. 지안시 인민정부에서 낸 ‘중국 지안(中國 集安)’(2004년 6월 발행, 116쪽)과 퉁화(通化)시(지안은 광역시에 해당하는 통화시에 속한 행정구역이다) 관광국에서 낸 ‘퉁화관광(通化旅游)’(2004년 8월 발행, 254쪽)이다. ‘중국 지안’은 중국어, 영어, 일본어, 한국어 4개 국어로 펴낸 것으로 지안을 세계에 알리기 위해 지안시에서 출판한 것이다. 이 책은 지난해 이 호텔에 들었을 때는 없던 것으로 올해부터 모든 투숙객에게 소개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전체가 컬러판으로 화려한 장정을 한 이 책은 언뜻 사진을 위주로 한 지안시 안내책자 같아 보인다. 그러나 책장을 넘기다가 깜짝 놀랐다. ‘한(漢) 원제(元帝) 건소(建昭) 2년(기원전 37년) 고구려는 정권을 구성하여 우리나라 역사에서 한대 현도군의 관할 아래 있는 하나의 지방 민족정권이 되었다’는 대목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과거에도 나왔던 주장 같지만 이것은 분명히 한국은 물론 중국의 학술적 연구 성과를 한참 넘어선 내용이다. 지금까지 중국의 학자들은 한국의 고구려 전문가들이 고구려현과 주몽이 세운 고구려가 다르다는 것을 강조하면, 사실을 인정하거나 두 나라 관계를 모호하게 설정하여 슬그머니 넘어가는 정도였다. 그런데 중국의 지방정부가 공식으로 펴낸 책자에서 학자들보다 훨씬 과감하게 ‘고구려는 한나라 지방정권’이라고 선전하고 나온 것이다. 목적은 두말할 것도 없이 국내는 물론 세계에 그것을 알리겠다는 것이다.

지방정부의 노력은 집요했다. 지안에서 제법 고급인 찻집에 들어가 비싼 차를 마시고 있는데, 종업원이 지안을 잘 소개했다며 사라고 권하는 책이 있었다. 한글로 된 ‘중국 지안’이었다. 일본 관광객이 오면 일본어판을 내놓고, 아시아인이 아닌 관광객에게는 영어판을 내놓을 것이다. 지안 관광이 끝날 무렵에는 가이드가 책을 한 보따리 들고 와 팔았다. 할당량을 모두 판매해야 한다며 “지안을 세계에 알리기 위해서”라며 내놓은 책도 바로 ‘중국 지안’이었다. 188위안(2만5,000원) 짜리 안내 책자를 팔아 “고구려가 중국 역사임을 세계에 알리”는 것은 물론 돈 벌이까지 톡톡히 하는 셈이다.

가이드가 팔고 있는 책이 한 권 더 있었다. ‘고구려 역사시대 군왕상(高句麗歷代君王像)’이란 36쪽 짜리 책인데 이렇게 얇은 책도 98위안(1만 3,000원)씩이나 받고 있었다. 고구려 왕의 초상화가 실린 이 책은 초상의 고증은 다른 문제로 치더라도 도저히 읽어갈 수 없을 정도로 한글 번역이 엉망이었다. ‘역대’라는 제목을 ‘역사시대’로 잘못 옮긴 것은 물론이고, 본문 내용은 마치 초등학교 가기 전 한글을 며칠 공부한 어린이가 쓴 것과 같았다.

예를 들어 미천왕을 설명하는 대목은 ‘고주가다과의 아들이자 봉상왕의 조긔카로서 이름이 을불 봉상왕이 다고를 죽인 후 을불이 도망갔는데 수실촌에서 하인으로 일햇기도 하고 동츤 츤민과 함께 소금을 판매했기도 하였다. 봉상왕을 페하게 된 후 임금었다. 즉으로 옹립되엇돠 슥위 이후…’ 식이다. 이 책 역시 가이드는 물론 지안 시내 모든 관광지에서 팔고 있었다. 선양공항에서 출국할 때 공항 서점 판매원이 자신 있게 권하는 책도 바로 ‘고구려 역사시대 군왕상’이었다.

“고구려는 고려와 다른 중국의 고대지방정권”

지안 호텔에 비치한 다른 책 ‘퉁화관광’에는 좀 더 구체적인 고구려사 왜곡 작업이 나타나 있다. 고구려와 (왕씨)고려가 다르다는 설명을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이 책은 ‘고구려 역사 개황’이라는 대목에서 ‘고구려 역사에 대하여 흔히 조선반도의 고려 왕조와 혼동하여 같은 것으로 말하는 사람이 있다. 사실은 이 두 개의 정권은 연대로 보나, 통치 지역으로 보나 왕족의 성씨로 보나, 속하는 민중으로 보나 모든 것이 완전하게 다른 것이다.

고구려와 고구려 왕조는 두 가지가 서로 다른 것이다. 고구려국은 우리나라 북방 소수민족이 건립한 지방정권으로 서기전 37년에 건국되었다. …고구려 국가가 망하고 250년이 지난 뒤 고구려 국가의 유민들은 이미 완전히 원래의 민족적 특징을 완전히 잃어버리고 다른 민족에 융합되었다. …고려 왕조는 918년 왕건이 조선반도 북부에 건립한 국가이다. 왕씨 고려정권의 통치 아래 있던 신하와 백성은 남방의 신라인과 후백제인, 또한 전쟁 때 조선반도로 들어간 당ㆍ5대에서 송ㆍ원 때의 한인(漢人)도 포괄하고 있다’고 설명한다.

이런 중국의 노력은 다른 곳에서도 볼 수 있다. 중국의 관광지 영상을 제공하는 인터넷 사이트(www.chinavr.net/jilin/jian)는 지안의 고구려 유적을 소개하면서 ‘고구려 정권은 서기 전 37년 시작하여 서기 668년에 망했는데, 중국 동북지구에 영향이 꽤 큰 소수민족 정권 가운데 하나이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 사이트는 또 ‘고구려와 고려는 관계가 없다’는 제목의 글을 특별히 실어 중국 학자들의 말을 인용해가며 ‘왕씨 고려와 고구려는 결코 계승관계가 없다’고 강변하고 있다.

‘오랫동안 우리는 고구려 역사를 외국사로 취급해왔는데 사실상 잘못 알고 있었던 것이다.’ ‘고구려가 멸망하고 250년 뒤 조선반도에 고려라는 정권이 나타나는데 통치자의 성이 왕씨이기 때문에 학계에서는 왕씨고려라고 부른다. 비록 한자를 그대로 쓰고 있지만 왕씨고려와 고구려는 계승관계가 없다.’ ‘고구려 문화는 중화문화의 중요한 구성부분 가운데 하나이다.’

24시간 누구나 들어가서 볼 수 있는 이 사이트에 나온 글은 고구려가 중국 역사라는 일반적인 논의도 담고 있지만 ‘고구려≠고려’를 특별히 강조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중국이 고구려사를 자기 역사로 하기 위해서는 주변국 보다 우선 ‘고(구)려는 바로 조선이고 지금의 한국’이라는 자국민들의 일반적인 인식을 바꾸는 것이 우선이라는 계산이 작용한 결과이다. 지금까지 중국인은 모두 고구려사를 당연히 한국의 역사이고 조선족의 역사인 것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세계문화유산 등재 이후 중국이 얼마나 용의주도하게 고구려사를 왜곡하고 있는지 잘 알 수 있다.

[고구려 유적] <下> 유적현장의 역사왜곡 실태

고구려 유적 답사를 마치고 백두산을 거쳐 옌볜조선족자치주의 주도 옌지(延吉)로 가는 차 안에서 재중동포(조선족) 가이드가 느닷없이 이런 말을 꺼냈다. “고구려인은 조선족이 아니다.” 옌볜(延邊)과 옌지를 안내하던 가이드가 앞뒤 설명도 없이 내뱉은 말에 듣는 사람들이 적잖이 당황하고 말았다. 도대체 가이드는 왜 맥락도 없이 이런 말을 불쑥 꺼냈을까?

힌트는 고구려 산성 중 가장 북쪽에 있는 지린(吉林)성 지린(吉林)시 용담산성 입구의 안내판에서 얻을 수 있었다. ‘현재 우리나라 안에 사는 조선족은 모두 일본이 무력으로 조선반도를 침탈한 뒤 그 압박을 견디지 못해 강을 건너 우리나라 경내에서 사사로이 개간한 조선의 빈곤한 유민이지 결코 고대 고구려 또는 고려의 후손이 아니다.’ 바로 이 내용인 것이다.

가이드의 말도 우연히 나온 것이 아니라 고도로 계산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행동은 두 가지로 추측해 볼 수 있다. 우선 2002년부터 옌볜에서 실시하고 있는 ‘3관교육(三觀敎育)’의 결과가 아닌가 하는 것이다. 이는 ‘조선족의 조국은 중국이고, 조선족은 중국민족이며, 조선족 역사는 중국역사’라는 조국관, 민족관, 역사관 교육이다.

중국 내 55개 소수민족 가운데 3관교육을 받은 것은 조선족이 유일했다고 한다. 3관교육의 내용에 ‘고구려인은 결코 조선인이 아니다’는 슬로건이 있어서 가이드가 무의식 중에 그런 말을 했을 수 있다는 것이다. 다른 한 가지는 옌볜의 모든 가이드에게 한국인 관광객들에게 “고구려인은 결코 조선인이 아니다”라고 선전하도록 강요했을 수 있다. 지안(集安) 가이드들에게는 책을 할당하고, 옌볜에서는 이런 관점을 전파하도록 했다는 것이다.

어쨌든 가이드의 엉뚱한 설명을 듣고 마음이 아팠다. 중국에 있는 조선족이야 말로 엄연히 고구려의 후손이 아닌가. 중국에 사는 조선족들, 특히 압록강과 두만강 가에 사는 조선족들은 다수가 함경도와 평안도에서 살던 동포들이고 그들은 누가 뭐라 해도 고구려의 후손이다. 고구려가 멸망한 뒤 고구려인들은 압록강 북녘에서는 발해, 여진, 만주족으로, 압록강 남녘에서는 발해, 고려, 조선 사람으로 살아왔다. 압록강 남쪽에서 살던 고구려 후손이 압록강 북쪽으로 넘어갔을 뿐인데 어찌하여 “고구려인은 절대 조선인이 아니다”는 것인가.

일제시대 만주의 인구는 2,000만 명, 조선반도의 인구는 3,000만 명 정도였다. 만주에 중국의 한인(漢人)들이 대거 이주해 온 것은 중국이 처음으로 만주를 완전히 차지한 일제 패망 이후의 일이다. 한족들은 이후 만주족과 조선족이 살던 땅에 엄청나게 밀려들어 지금은 절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그런 한족이 고구려 후손들에게 ‘고구려인은 조선인이 아니다’고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용담산성 앞에는 최근 4개의 안내판이 새로 섰다. 그 중 2개는 이 산성을 자세하게 설명한 것이다. 나머지 둘 중 하나는 ‘고구려의 역사 연원’이라는 제목을 달고 고구려의 기원을 소개하고 있다. 이 중에는 주몽이 나온 부여가 중국의 소수민족 계통이라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다른 하나는 ‘고구려인은 결코 조선인이 아니다(高句麗人幷非朝鮮人)’는 제목으로 고구려인의 계통을 학술적으로 설명한 것이다. 내용은 이렇다.

<고대 동북에는 상(商), 동호(東胡), 숙신(肅愼), 맥예(貊穢) 같은 4개의 큰 종족이 있었다. 고구려는 과연 어떤 종족에서 비롯되었는가? 많은 연구자들의 관점이 일치하지 못하고 있지만 최신 연구에서 고구려는 은(殷) 또는 상(商) 계통의 사람이라고 확정하였다. …이러한 주장은 옛 조상이 남긴 단순한 말귀가 아니고 수많은 발굴 가운데서 찾아낸 것으로, 문헌과 유물을 아울러 나온 인식이다.

몇몇 학자들은 이미 고구려 문화와 은상 문화 사이의 밀접한 관계에 주목했으며 아울러 저작과 논문에서 거듭 주장하였다. 지린성 지안 경내 고구려 무덤 벽화 가운데 용과 뱀의 그림, 기악비천(伎樂飛天), 복희여왜(伏羲女娲), 신농황제(神農黃帝) 및 4신 같은 그림과 형상은 염황문화(炎黃文化)의 내용을 표현한 것이다. 최근 퉁화(通化)시 부근 왕팔발자(王八脖子) 유적과 퉁화현 여명(黎明) 유적 같은 대표적인 옛 유적에서 옛 문헌에 나오는 삼환제단(三環祭壇)이 발견되었다.

이 제단은 문화 구조상 모두 삼환계단식(三環階段式) 전방후원(前方後園) 구조로 하늘과 태양을 숭배하는 데 삼중천(三重天)과 천인합일(天人合一)의 관념을 구현한 것이다. 이것은 중국 원시 본원 철학사상의 정수이며, 또 지역적으로도 서로 가깝고 시간적으로도 서로 이어져 있다. 많은 역사문화의 구성 요소들이 고구려인은 상인(商人)에서 나왔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고구려는 상인이 건국하거나 상인이 중원으로 들어가기 전후 동북방으로 옮겨온 한 종족일 수 있다. 고구려의 근원은 상인(商人)으로 5제(五帝) 계통이고 염황문화(炎黃文化)의 후예이다.

몇 년 전에 나온 ‘중국동북사’ 1권 6장에는 여러 문헌자료를 인용하여 ‘고구려는 고조선이 아니다’라고 명확하게 설명하고 있다. ‘한서(漢書)’ 지리지에 ‘현도, 낙랑은 (한나라) 무제 때 설치하였는데 모두 조선, 예맥, 구려 같은 오랑캐(蠻夷)다’고 되어 있다. 조선과 구려를 함께 쓴 것은 고조선과 고구려가 당시 두 개의 서로 다른 부족이라는 것을 매우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후한서’ 고구려전에서 고구려 남쪽과 조선이 맞닿아 있다고 나와 있어 고구려는 당시 조선을 영유하지 않았고, 조선도 고구려를 포괄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고구려의 앞 세대 사람들이 일찍이 한 번 위씨조선에 예속된 적이 있지만, 그것은 기원전 128년까지 60~70년 정도밖에 안 되어, 중원 정권에 신복(臣服)한 600~700년이란 시간에 비하면 차이가 매우 크다. 그렇기 때문에 수많은 학자들이 모두 고구려족과 그 조상들은 고조선과 지리상으로 보나 정치상으로 모두 연대(連帶)와 종속관계가 확실하지 않다고 인정한다.>

고구려의 근원에 대한 이런 관점은 중국에서도 주류로 대접 받지 못하는 황당한 내용이다. 지금까지도 이건재(李健才), 장박천(張博泉), 쑨진지(孫進己), 동동(佟冬) 같은 주요 학자들은 대부분 고구려의 기원을 예맥(濊貊)에 두고 있다. 1990년대 초에 리더산(李德山)이란 젊은 학자가 “고구려는 염제족(炎帝族) 계통이고 산둥(山東)반도에서 옮겨왔다”고 했는데, 당시 중국의 학자들은 마치 재야사학자의 주장처럼 황당하게 생각하였다.

이어 겅톄화(耿鐵華)가 몇 가지 고고학적 사례를 붙여 “랴오서(遼西) 지방에서 발생한 홍산문화가 서쪽으로 가서 은나라를 세우고, 동쪽으로 옮겨와 고구려와 부여 같은 나라의 기원이 되었다”고 구체화하였을 때도 극히 소수 의견으로 받아들였다. 여전히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은 중국 내에서 학술적으로는 극소수에 불과하다. 고구려의 기원을 홍산문화까지 거슬러 올라가 전설인 3황5제에 결부시켜 말하기로 한다면 ‘시베리아와 동아시아는 물론 아메리카 인디언도 모두 고아시아인이다’는 논리가 훨씬 더 그럴싸하다. 고구려의 근원을 전설과 연결하는 것은 진실을 규명하려는 학문적인 태도가 아니다.

그렇다면 왜 이런 소수 의견이 당당하게 고구려 유적을 설명하는 안내판에 등장할 수 있는가? 이것은 중국의 특성이나 중국 국가 연구기관의 태도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중국 국책연구기관으로 동북공정을 진행하고 있는 중국사회과학원 변강사지연구중심에서 ‘고대 중국 고구려 역사’라는 제목으로 총론(2001년)과 속론(2003년) 두 권의 책이 나왔다. 이 책의 여러 필자 중에는 앞서 언급한 저명한 중국의 고구려사 전문가가 한 명도 들어있지 않다. 겅톄화만이 ‘속론’의 저자로 등장한다. 중국의 국가연구기관이 바로 ‘고구려 상인 후예설과 염황문화설’을 선택했다는 것이다. 겅톄화는 2002년 ‘중국고구려사’라는 저서에서 이런 주장을 폈고, 용담산성 안내문은 대부분 그 책에서 발췌한 것이다.

고구려 유적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고, 한ㆍ중 양국이 고구려사 왜곡을 방지하기로 구두양해한 지 1년이 지난 오늘까지 중국은 역사침탈작업을 계속 해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1년 동안 중국은 이제 연구 단계를 지나 그 결과를 유적 현장에서 알리는 단계로 진전했다. 이 작업은 지방 정부가 주도해서 진행하고 있어 중국의 중앙 정부는 외교적으로는 언제든지 변명할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용의주도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막상 역사를 강탈당하고 있는 우리는 대책도 없이 세월만 보낸 건 아닌가. 한국과 중국의 처지는 다르다. 중국은 시간을 벌면서 지금까지 왜곡한 역사를 이제 기정사실로 만들면 된다. 지방 정부가 나서서 그 동안 만들어 놓은 교육장(박물관)을 통해 국민들의 의식을 바꾸고, 여러 가지 출판물과 유적지 안내판, 관광 안내원을 통해 그 단계로 한걸음씩 나아가고 있다. 이렇게 몇 년이 지나면 고구려사는 과연 누구의 역사가 될지 불을 보듯 뻔하다. 서길수 서경대 교수ㆍ전 고구려연구회장

외형이 가장 온전한 형태로 보존된 고구려 무덤인 지안의 장수왕릉 널방 입구에 관람객들이 서 있다. 중국은 세계문화유산 등재 이후 주요 고구려 유적을 가까이서 자유롭게 구경할 수 있도록 최대한 개방했다.


<서길수 서경대 교수ㆍ전 고구려연구회장>

(한국일보 2005-8-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