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의
멸망과 서 만주 왕조의 복귀
[홍원탁의
동아시아역사 바로보기]
757년에 안록산과 사사명의 난을 진압 해준 위구르는 당나라에게는 없어서는 안될 동맹국이 되었다 하지만
위구르 제국이 840년에 키르기스 돌궐족에게 멸망 당하자, 당나라는 보호자를 잃고 명맥만을 간신히 유지하다가 다시 한번 반란이 일어나자 그대로
와해되었다 924년에 키르기스 돌궐족을 예니세이 초원지대로 쫓아내 버릴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서 만주의 거란족이었다 926년에 요(遼)에 의한
발해의 멸망은, 만주 역사에서 한국을 제외시켜버린 전환점이 된 것이다. 요사(遼史)가, 거란족의 요는 선비족의 후예로, 고조선의 옛 땅에서
나왔으며, (고조선 모양) 기자 팔조(箕子八條) 가르침의 유풍(流風)과 유속(遺俗)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는 것을 보면, 선비족과 예맥 퉁구스와의
관계는 상당히 밀접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송과 고려는 상당히 불규칙적인 관계를 유지했는데, 그 한가지 이유는, 소동파(蘇東坡)를 위시한 송나라
대신들 상당수가, 고려가 “만주적”인 특성으로 오염되어 있기 때문에, 동맹 상대로는 효용가치가 없다는 견해를 가졌기 때문이었다. 본 연재는
영문과 국문번역을 동시에 제공한다. Text In PDF .../편집자 주
당의 멸망과 서 만주 왕조의 복귀
선비(鮮卑) 후예인 거란족의 요(遼)
홍원탁 (서울대 교수)
당 왕조의 쇠망
지중해, 북아프리카, 동아시아 전역에 걸쳐, 300-400년 사이와 800년을 전후해서 두 차례 가뭄이 최고조에 달했었다. 정교하게 만들어
놓은 관개시설에 의존해 농사를 지어오던 지역들 중 많은 곳이 장기간의 가뭄 결과로 유기되었다. 1
당나라의 쇠락과 멸망은 8세기 중엽에 시작된다.
현종 (713-55) 치하의 당나라는 웅장한 위엄과 번영을 과시했지만, 당시 위구르의 카간들은 당나라로부터 막대한 양의 비단과 공물들을
빼앗아 가고 있었다. 2 소그드족과 돌궐족의 피를 반반씩 받은 안록산은 북서쪽 변방의 군대를 지휘하고
있었는데, 755년에 반란을 일으켜 낙양을 점령하고 756년에 스스로 대연(大燕)의 황제라 칭하였다.
아버지 현종으로부터 왕권을 찬탈한 숙종(肅宗, r.756-62)은, 반란군으로부터 수도를 탈환하기 위해, 위구르 돌궐족의 도움을
호소하면서, “땅과 백성은 명목상 나의 소유이지만, 옥과 은, 어린 사내와 여자 아이들은 위구르에게 줄 것”이라고 말했다. 3 757년에 안록산과 사사명의 난을 진압 해준 위구르는 당나라에게는 없어서는 안될 동맹국이 되었다.
그러나 반란은 763년까지 중국 전역에서 계속되었으며, 그 이후 당나라의 중앙권력은 회복될 수가 없었다 당나라는 위구르의 군사적 지원
덕택으로 겨우 명맥을 유지하였다. 4 Barfield(1989: 151)는 “위구르 제국이 840년에
보다 야만적인 키르기스 돌궐족에게 멸망 당하자, 당나라는 보호자를 잃고 명맥만을 간신히 유지하다가 다시 한번 반란이 일어나자 그대로
와해되었다”고 말한다. 당나라와 위구르는 흥망성쇠를 함께한 것이다. 924년에 키르기스 돌궐족을 예니세이 초원지대로 쫓아내 버릴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서 만주의 거란족이었다.
서 만주 왕조의 복귀
야율(耶律) 부족의 지도자 아보기(阿保機)는 10개의 거란 부족들을 통합하여 연맹체를 만들고, 요서의 초원지대에서 주도권을 잡았으며, 요하
유역의 몇 개의 도시를 장악 함으로서 요 나라(916-1125)의 기초를 닦았다. 5 거란족 본거지의
핵심은 요서의 초원지대 특히 시라무렌 강 유역에 위치했었다. 거란족은 바로 이 장소에 상경(上京)과 중경(中京)을 세웠고, 요하(遼河)의 강
명칭을 취해 그들 왕조의 이름을 지었다. 6 아보기는 죽기 바로 전 해인 926년에 발해를 정복하였다.
중세 유럽인들이 북중국을 카타이라고 부르게 된 것은 거란이라는 명칭에서 비롯한 것이다. 요 나라는 만주, 몽골, 그리고 북중국의 일부를
정복하여, 대동(大同)에는 서경(西京)을, 오늘날 북경이라고 부르는 전방 수비대 주둔 지역에는 남경(南京)을 설치했다
요사(遼史)가, 거란족의 요(遼)는 선비족의 후예로, 고조선의 옛 땅에서 나왔으며, (고조선 모양) “기자 팔조(箕子八條) 가르침”의
유풍(流風)과 유속(遺俗)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는 것을 보면, 선비족과 예맥 퉁구스와의 관계는 상당히 밀접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7
요 나라도 이원(二元)제도를 유지하여, 한편으로는 과거제도를 통해 문관을 선발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부족의 군사를 동원 해 군대의 중추를
구성하였다. 동원된 거란 부족들은 (영어의 "horde"라는 단어의 어원이 된) “오르도”라 부르는 단위 부대에 복무했다 요나라는 실제로 이원제
국가이었다. 남부의 북경 주변 16개 현(송나라에는 300개의 현)에 살고 있는 3백만 명의 중국인들은 중국식 관료제로 다스리고, 북방에 사는
백만여 명의 거란족들은 전통적인 부족 법으로 다스렸다. 8
몽골 초원지대 혹은 만주로부터 온 정복자들은 이원제를 통해 자기들 자신의 중국화를 방지하려 했다 그들 자신은 부족 전통을 계속 지키면서,
한족은 그들 고유한 삶의 방식을 유지하도록 허용했기 때문에 중국문화의 전통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이다.
Ledyard (1983: 346)는 “926년 발해의 멸망은, 압록강 북쪽의 강역에 대한 한국인들의 연고권 주장에 최후의 일격을 가한
것이다. ... 발해의 멸망을 전환점으로 한국은 오늘날까지 만주 역사에서 제외 된 것이다”라고 말한다. 9
전연(前燕, 349-70)은 고구려를 정복하지 못하고 요서와 요동 지역만을 점령한 다음 북중국을 공략한 반면에, 거란은 발해를 멸망시켜
만주 전역을 통일한 다음 북중국을 공략할 수 있었다
당 나라의 후계자임을 자처한 송(宋)
907년에 완전히 멸망하기 이전에도 당나라는 이미 반란에 의해 산산조각이 나 있었다. 당 멸망 이후 전개된 북 중국에서의 오대(五代,
907-60)와 중부와 남부 중국에서의 십국(十國, 902-79)의 상황은 한나라의 멸망 이후 전개된 오호십육국(五胡十六國, 304-439)의
상황과 구조적으로 흡사하다. 특히 317년에 서진이 남쪽으로 달아나고, 439년에 탁발 북위(北魏)에 의해 북 중국이 통일되기 이전까지의 상황과
상당히 유사하다. 10 북 중국에서는 대부분 비 한족 출신의 장군들이 계속 황제 자리를 차지 한데
반해, 남쪽은 한족 제후들이 분할 점거 하였다. Ledyard (1983: 323)는 “그러나 오호십육국 당시에는 온갖 명칭의 (선비족)
연(燕) 나라가 고구려와 힘의 균형을 이루며 대치했었지만, 오대십국 당시의 거란은 재빨리 (926년에) 동부 만주의 경쟁자 발해를 처치할 수
있었다. 결과적으로 유사이래 최초로 만주 대륙 전체가, 동쪽 끝에서 서쪽 끝까지, 단일 국가에 의해 통치된 것이었다”고 말한다.
북 중국에서는 5개의 왕조가 빠른 속도로 교체되다가, 960년에 와서 후주(後周)의 금군(禁軍) 총사령관인 조광윤(趙匡胤, 宋太祖)이
부하들에 의해 황제로 추대되었다. 송 태조(960-76)의 선조들은 오랜 기간 황제의 자리를 놓고 다투는 사람들 밑에서 장수 노릇을 해왔기
때문에, 조광윤은 젊은 시절부터 승마와 궁술에 매우 능했다.
거란은 송과 적대적인 대치상태를 지속하다가, 결국 1005년에 송나라가 매년 20만 필의 비단과 10만 량의 은을 거란에게 제공한다는
조건으로 평화조약을 맺었다. 거란은 북경과 대동을 점령하는 것으로 만족하였다. 1005년 조약과 1042년에 개정된 조약은 근 백 년간 평화를
지속시켰다. 송나라 조정은 열등한 지위를 수용하고, 계속 “조공”을 바쳤다. 11
송나라의 인구는 약 8천만에 달했으나, 티벳으로부터 몽골의 초원지대를 거쳐 만주에 이르는 북방 전 지역에는 대략 5백만 명 정도가 살았다.
963년 이후, 난폭한 군 지휘관들이 장악하던 송 나라 지방정부는 과거제도를 통해 선발된 관료들로 대체되기 시작했다. 개봉(開封)에 수도를 둔
북송(960-1127)의 167년간은 중국 문화사에서 가장 창조적인 시기중의 하나였다. 12
한반도
Ledyard(1983: 323)에 의하면 “고구려의 후예를 자처하는 고려는 만주에 있는 북방 영토에 대해 자신이 적법한 소유권을 가자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발해를 정복한 거란은 전혀 딴 생각을 하고 있었다. 결국 고려는 옛 발해의 압록강 이남의 땅만을 확보하는데 그쳤는데,
993년부터 1018년까지 지속된 고려와 요 사이의 일련의 전쟁들의 핵심 쟁점은 바로 이 영역 다툼이었다” 13
1005년에 평화조약을 체결해 송과의 전투가 종료되자, 요는 1010년부터 10년 동안 고려(918-1392)와 전면전을 벌였으나, 뚜렷한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1010년에는 황제가 직접 지휘하는 요 나라 군대가 고려를 공격하여 수도를 함락시켰었다. 하지만 보급로가 차단될 것을
우려한 거란군은 특별히 얻은 것도 없이 갑자기 철수하였다. 거란은 1018년에 다시 10만 대군으로 침입하였으나, 고려의 강감찬 장군에 의해
귀주에서 거의 전멸되었다. 거란의 고려 침공은 번번히 실패로 끝났으나, 고려 조정은 1020년에 거란에게 더 이상 적대적 자세를 취하지 않겠다고
약속을 하였고, 그 이후 양국의 관계는 평화로웠다. 요 나라에게 철저하게 굴욕을 당한 북송 (960-1127) 조정은 신생 고려의 역동성을 높이
평가해, 고려와의 통상과 문화적 교류를 증진시켰다.
송과 고려는 상당히 불규칙적인 관계를 유지하였는데, 그 이유는, 부분적으로는 거란과 여진의 개입 때문이었고, 부분적으로는 송나라 조정이
고려에 대해 상당한 의구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Ledyard (1983: 347)는 “소동파(蘇東坡)를 위시한 대부분의 송나라 대신들은
여전히, 고려가 ‘만주적’인 특성으로 오염되어 있기 때문에, 동맹 상대로는 효용가치가 없다는 견해를 가졌다. 그러나 후피를 대변자로 하는 다른
그룹은 현실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고려가 만주 세력에 대항하는 믿을 수 있는 실질적 적대세력이며, 북방의 적들에
대항해 중국적인 문명을 수호하는 한반도의 세력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소동파 등 주류의 견해가 대세를 결정했다”고 말한다.
Ledyard(1983: 324)에 의하면 “한족들의 관점에서 보면, 요와 금 나라는 ‘야만적’으로 보이겠지만, 요와 금의 외교와
정치제도는 근본적으로 중국 체제이었다. 그들은 왕조를 세워 자신들의 역법을 만들고, 사신을 교환하며 중국에서 유래한 의식과 전례(典禮) 절차를
따랐다.”
동아시아 역사 강의: 3-2 (2005. 7. 30.) 정리: 강현사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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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ng All rights reserved BIBLIOGRAPHY http://www.EastAsianHistory.pe.kr http://www.WontackHong.pe.kr
[각주]
1. Lamb (1995: 156-69)
2. 630년에 당 태종에 의해 멸망 당한 동 돌궐은, 7세기말에 와, 전통적인 칸 제국을 재건하였다. 서
돌궐도 당나라 조정이 임명한 칸에 반란을 일으켜 독립을 되찾았다. 이후 돌궐족 내부에 내란이 일어나 신복(臣服)하던 부족 하나가 동 돌궐 제국을
장악하고, 같은 오르콘강 상류지역에 위구르 돌궐 (744-840) 제국을 수립했다. 돌궐 제국 하나가 다른 하나의 돌궐 제국으로 대체된 것을
의미한다
3. 新唐書 卷二百一十七上 列傳 第一百四十二上 回鹘上 肅宗卽位 使者來請助討祿山… 代宗卽位 …請助天子討賊 …
德宗立 … 先帝 … 土地人衆歸我 玉帛子女子回紇
4. Barfield (1989: 166)
5. 5세기 중엽부터 거란족들은 오늘날의 열하 인근지역인 요하 서쪽을 점거하였다. 696년, 거란족은
산해관으로 내려와 북경 평야를 공격하였다. 측천무후가 동 돌궐의 카간에게 도움을 요청하자, 동 돌궐은 거란족을 철저하게 쳐 부수어 200년 이상
북중국을 위협하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6. Janhunen (1996: 145) 참조. 거란족은 반(半) 유목민으로, 어느 정도는 농작물 재배,
특히 수수에 의존하였다. Fairbank and Goldman (1992: 113) 참조.
7. 遼史 地理志一 遼國其先曰契丹 本鮮卑之地…上京道 上京臨潢府 本漢遼東郡西安平之地…名曰皇都 遼史
卷四十九 志第十八 禮志一 遼本朝鮮故壤 箕子八條之敎 流風遺俗 蓋有存者
8. Fairbank and Goldman (1992: 113) 참조. Tao Jing-shen (in
Rossabi, 1983: 78)은 “후피가 … 거란은 한족의 제도를 채택했을 뿐만 아니라, 한족이 가지지 못한 엄청난 군대 조직을 보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였다”고 말한다. 거란족 조정의 이원제도를 말하는 사료가 된다.
9. 고려는 고구려-발해 왕조의 잔존 세력들을 통합하였을 뿐만 아니라, 이들이 전통적으로 지배했던 압록강
남쪽 영토도 확보하였다. Ledyard (1983: 346)는 “고려 사람들은 자신들 왕조의 역사적 성격을 놓고 내부적으로 논쟁을 벌였다.
일부는 고려가 고구려의 전통과 법통을 물려받았다고 믿었으며, 일부는 고려가 신라의 진정한 후계자라고 믿었다. 시조 왕건이 택한 국명을 보면 알
수 있듯이 고려를 세운 사람들은 명백히 전자의 의견이었다. 그러나 사회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고구려의 역사적 운명은 북쪽의 개경으로 떼를 지어
몰려든 수 많은 신라 관료들에 의해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 12세기 전반에 이들 두 가지 극단적인 견해가 대립을 계속 하다가 결국 신라의
전통이 승리를 했던 것”이라고 말한다. 압록강 이불 만주 땅에 남아있던 예맥 퉁구스는 결국에 가서는 여진-만주 퉁구스에 완전히 흡수 동화
되었다.
10. Rossabi(1983: 5-6)는 “남 중국을 지배한 10국의 지배자들은 주로 한족이었고, 북
중국을 통치한 5개 왕조의 지배자들은 대부분 이민족 출신이었다 .. 남 중국의 지배자들은 ‘황제’라는 직함을 사용하지 않았고, 오로지 북 중국의
국가들만이 중화 제국 전체를 통치하려고 경쟁하였다”고 말한다.
11. Barfield (1989: 174) 참조. 1042년의 조약은 형제관계를 확인 했으며, 매년 바치는
세폐(歲幣)도 은 20만 량과 비단 30만필로 증가하였다. Jagchid 와 Symons(1989: 132)는 “안정적인 관계가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송이 순순히 매년 막대한 양의 재화”를 거란과 서하(西夏)에게 바쳤기 때문이었다”고 말한다.
遼史 卷十九 本紀第十九 興宗二 十一年 [1041] 閏月癸未 … 宋歲增銀絹十萬兩匹 文書稱貢
Tao Jing-shen(1983: 69)은 “양국의 황제들 사이에는 가공적인 혈연관계가 상정되어....
한쪽의 황제가 죽었다는 소식이 전해지면 양쪽 조정에서 동시에 장례식을 거행하였다”고 말한다 두 나라는 종종 서로를 “ 북조”와 “남조”로
칭하였다.
12. Fairbank and Goldman (1992: 88)
13. 992년, 소손녕(蕭遜寧)의 지휘아래 거란군은 압록강을 건너 침입해왔다. 하지만 서희(徐熙)의 외교적
활약으로, 고려는 거란군을 설득해 자발적으로 철수시켰을 뿐만 아니라, 압록강까지 고려 영토에 편입시키는데 동의를 얻어냈다. 거란은, 고려가
고구려의 후예이기 때문에 만주에 있는 옛 고구려 땅에 대한 영유권이 있다는 서희의 주장을 반박할 수가 없었다. 하긴 당시 거란은 북송과 아직
전투 중이었기 때문에, 고려에 모든 군사력을 집중시킬 수가 없었다. Lee (1984: 125) 참조.
Fall of Tang and the Return of the Western
Manchurian Dynasty
The Qidan Liao of xianbei provenance
Wontack Hong Professor, Seoul University
The decline and fall of the tang dynasty
The periods of drought in the Mediterranean, North Africa and far
to the east into Asia had two high points, between 300-400 and around 800. Many
places where agriculture had been carried on with elaborate irrigation networks
were abandoned due to widespread drought.1 The decline
and fall of the Tang dynasty began in the middle of the eighth century.
Under the Xuan-zong (713-55), Tang displayed grandeur and
prosperity, and yet the Uighur khagans were extracting huge amounts of silk and
other gifts from Tang.2 An Lu-shan, a half Sogdian and
half Turk general who had commanded the northwestern frontier army, rebelled in
755, captured Luo-yang, and proclaimed himself emperor of Greater Yan in
756.
Su-zong (r.756-62), who usurped power from his father, appealed to
the Uighur Turks to help him in recovering the capital, stating that: “the land
and people belong to me; the jade and the silver, the boys and the girls will be
given to the Uighurs.” 3 The Uighurs became indispensable
allies of the Tang, putting down the rebellion of An Lu-shan and Shi Si-ming in
757.
Rebellion, however, raged across mainland China until 763, and the
central power of the Tang dynasty never fully revived thereafter. 4 The Tang owed its continued existence to the Uighur military
support.4 Barfield (1989: 151) notes that: “When the Uighur empire was destroyed
by a more savage Kirghiz Turks in 840, the Tang lost its protection and fell in
all but name to the next revolt in China.” The fates of Tang and Uighur waxed
and waned together. It was the Qidan who could thrust the Kirghiz Turks back to
the Yenisei steppes in 924.
return of the western manchurian dynasty
The leader of the Yelu tribe called A-bao-ji had laid the foundation for the
Liao dynasty (916-1125) by uniting ten Qidan tribes into a federation, gaining
hegemony over the Liao-xi steppe, and establishing control over a number of
cities in the Liao River basin.5 The original core of the
Qidan native territory was located on Liao-xi steppe, especially in the basin of
the Shira Mören (Xar Moron). This is the region where the Qidan established
their Supreme and Central Capitals, and the hydronym Liao became the basis of
their dynastic name.6 A-bao-ji conquered Parhae (Bohai),
in 926, just before his death. The Qidan (from whom North China got the medieval
European name Cathay) came to occupy Manchuria, Mongolia and the northeastern
part of China, and established their western capital at Datong and their
southern capital at the border garrison city nowadays called Beijing.
The relationship between the Xianbei and the Yemaek Tungus was, however,
close enough for the History of Liao to state that the Oidan Liao, the
descendants the Xianbei, had originated from the old Chosun land, having the
identical customs and tradition of “the Ki-ja (Ji-ji)’s Eight Clauses of
Instruction” as the Chosun.7
The Liao dynasty also maintained the dual system, recruiting civil
administrators through examination, and enlisting tribal troops to constitute
the backbone of the army. The Qidan tribes were mobilized to serve in the
military units called ordo (from which derives “horde”). It was indeed a dual
state: the southern area of three million Chinese in sixteen prefectures around
Beijing (compared to 300 in the Song) was governed through the Chinese style
bureaucracy, while the northern area of less than one million Qidan people was
governed by the traditional tribal law.8
Through the dual system, the invaders from the Mongolian steppes or Manchuria
attempted to resist sinification. While preserving their own tribal tradition,
they let the Chinese people maintain their own way of life, allowing the
cultural heritage of Chinese civilization to survive.
Ledyard (1983: 346) contends that “the defeat of Parhae in 926 was the final
blow to Korean pretensions to the territory north of the Yalu … and … its defeat
takes Korea out of Manchuria for the rest of history up to the present time.”
9 The Qidans had conquered the Parhae and unified the
entire Manchuria, while the Former Yan (349-70) could occupy only the Liao-xi
and Liao-dong, without conquering the Koguryeo, before launching their attacks
on North China.
The Song, the self-claimed heir to the tang
The Tang dynasty had been fragmented by rebellions before it was extinguished
in 907. The situation of the Five Dynasties in North China (907-60) and the Ten
Kingdoms in Central and South China (902-79) following the collapse of Tang was
structurally similar to that of the Five Barbarians and Sixteen States (304-439)
after the fall of the Han Chinese dynasties, especially to the situation after
the southward flight of the Western Jin court in 317 until the unification of
North China by the Tuoba Wei in 439.10 A succession of
warlords, usually of non-Chinese origin, claimed the Imperial throne in the
north while the south was divided among the Han Chinese satraps. Ledyard (1983:
323) notes: “However, unlike the earlier case, in which the various Yan
[Xianbei] states and Koguryeo had ended up in a standoff, the Qidans now quickly
disposed of their eastern Manchurian rival, Parhae (926). Thus, for the first
time in history, all of Manchurian, east and west, was controlled by a single
state.”
After the rapid succession of the Five Dynasties in the north, the commander
of the palace guard, Zhao Guang-yin (趙匡胤 Song Tai-zu), under the last of the
dynasties (Later Zhou) was elevated to emperor by his troops in 960. Tai-zu
(r.960-76) was a highly skilled archer and horseman in his youth, and his
forebears had been military leaders under one or another Imperial claimant.
he Qidans had maintained hostile confrontations against the Song, eventually
concluding a peace treaty in 1005 which called for the Song to deliver 200,000
bolts of silk and 100,000 ounces of silver annually to the Qidans. The Qidan
were content to occupy Beijing and Datong. The peace by the treaties of 1005 and
1042 was preserved for a hundred years. The Song court was made to accept
inferior status and continue to pay “tribute.”11
The population of the Song Empire amounted to about 80 million, while only
about five million people lived in the area from Tibet through the Mongol
steppes and Manchuria. After 963, the administration of the prefectures began to
be transferred from the unruly military to civil officials recruited through the
examination system. The century and a half of the Song dynasty (960-1126), with
its capital at Kaifeng, became one the most creative periods in Chinese
civilization.12
The Korean peninsula
Ledyard (1983: 323) notes: “As the self-proclaimed successor to Koguryeo …
Koryeo considered the northern territories in Manchuria its rightful legacy. The
Qidans, as conquerors of Bohai …. obviously had other ideas. Koryeo was
ultimately successful in laying claim to and holding the old Bohai lands south
of the lower Yalu, which were the bone of contention in a series of Koryeo-Liao
wars lasting from 993 to 1018.”13
After concluding the peace treaty with the Song in 1005, the Liao launched
full-scale campaigns against Koryeo (918-1392), beginning in 1010 and lasting
for about ten years, but they gained no real success. The Liao army under the
personal command of its emperor invaded Koryeo in 1010, and captured the
capital. Fearing that their supply lines might be cut, however, the Qidan
suddenly withdrew without gaining any particular advantage. The Qidan invaded
again with 100,000 men in 1018, but almost the entire army was annihilated at
Kui-ju by the Koryeo general Kang Kam-chan. Every Qidan invasion of Koryeo ended
in failure, but in 1020 the Koryeo court promised to abandon its hostile stance
against Qidan and thenceforth their relationship was peaceful. The Northern Song
court (960-1127), which was thoroughly humiliated by the Liao, admired the vigor
of the new Koryeo kingdom and promoted commercial and cultural exchanges.
The Song and the Koryeo maintained rather irregular relations with each
other, partly because of Qidan and Ruzhen interventions, and partly because of
the reservation harbored by the Song against the Koryeo. According to Ledyard
(1983: 347), “a substantial body of Song opinion, led by Su Tung-p’o, still
considered Koryeo tainted with a ‘Manchurian’ character that in their view
utterly impaired its usefulness as an ally. But another Song group, for which Fu
Pi can serve as the spokesman, seems to have grasped the reality that Koryeo was
a valid and credible enemy of the Manchurian forces – in other words, that it
was now a peninsular power defending a Chinese style of civilization against
northern enemies. But Su’s views largely prevailed.”14
Ledyard (1983: 324) further notes: “However ‘barbarious’ were Liao and Jin
from a Chinese point of view, their diplomatic and political institutions were
of a basically Chinese mold. They founded dynasties, established their own
calendars, exchanged ambassadors, and followed ceremonial and protocol
procedures of acknowledged Chinese origin.”
BIBLIOGRAPHY
1. Map of Liao (Khitan, Qidan) Fairbank and Goldman
(1992: 114)
1 Lamb (1995: 156-69)
2 In the late seventh century, the eastern Turks who had
been destroyed in 630 by Tang Tai-zong restored their traditional khanate. The
western Turks, also, revolted against the khans appointed by the Tang court,
regaining their independence. There followed civil war, and one of the vassal
tribes took over the eastern Turkic khanate, establishing the empire of Uighur
Turks (744-840) in the same upper Orkhon region. It was the substitution of one
Turkic khanate for another.
3 新唐書 卷二百一十七上 列傳 第一百四十二上 回鹘上 肅宗卽位 使者來請助討祿山… 代宗卽位 …請助天子討賊 …
德宗立 … 先帝 … 土地人衆歸我 玉帛子女子回紇
4 Barfield (1989: 166) 5 From the mid-fifth century, the
Qidan tribes had occupied the western bank of the Liao River near modern Jehol.
In 696, the Qidan tribes came down through Shan-hai-guan and raided the plain of
Beijing. Empress Wu sought help from the khagan of eastern Turks who were able
to so thoroughly destroy the Qidan as to eliminate their threat to North China
for more than two centuries.
6 See Janhunen (1996: 145).
The Qidan had been only semi-nomadic, relying to some extent
on agricultural crops, especially millet. See Fairbank and Goldman (1992:
113)
7 遼史 地理志一 遼國其先曰契丹 本鮮卑之地…上京道 上京臨潢府 本漢遼東郡西安平之地…名曰皇都
遼史 卷四十九 志第十八 禮志一 遼本朝鮮故壤 箕子八條之敎 流風遺俗 蓋有存者
8 Fairbank and Goldman (1992: 113)
Tao Jing-shen (in Rossabi, 1983: 78) notes that: “Fu Pi …
pointed out that the Qidans … had not only adopted Chinese institutions but also
had a formidable military machine, which the Chinese did not have.”
9 Koryoe pulled together the fragmented members of the
Koguryeo-Parhae dynasties as well as their traditional territory south of the
Yalu. Ledyard notes (1983: 346) “Koryeo people themselves debated the historical
nature of their dynasty: some considered it to have inherited the tradition and
legitimacy of Koguryeo, others believed that it was the true successor of Silla.
Koryeo founders doubtless took the former view, as is suggested most directly by
their choice of the name of their state. But socially and politically,
Koguryeo’s fortunes were subverted by the host of Silla officials that swarmed
north to Kae-gyung, and after the confrontation between the two polar views in
the first half of the twelfth century, there was no question but that the Silla
tradition had won.” Those Yemaek Tungus who remained in Manchuria became to be
thoroughly absorbed into the Ruzhen-Manchu Tungus.
10 Rossabi (1983: 5-6) notes: “Ten Kingdoms, whose monarchs
were generally Chinese, ruled South China, and Five Dynasties, whose potentates
were usually of foreign origin, governed North China. … The rulers in South
China generally did not lay claim to the title of ‘emperor.’ … Only the Northern
states competed for control of the whole Chinese empire.”
11 See Barfield (1989: 174). The treaty of 1042
confirmed the brotherly relationship, and increased the annual payments to
200,000 units of silver and 300,000 units of silk. Jagchid and Symons (1989:
132) note: “stable relations…were maintained only because the Song were willing
to annually present vast amounts of Chinese wealth to” the Qidans, and also to
the Tangut Xia.
遼史 卷十九 本紀第十九 興宗二 十一年 [1041] 閏月癸未 … 宋歲增銀絹十萬兩匹
文書稱貢
Tao Jing-shen (1983: 69) notes that: A fictitious kinship
relationship was established between the emperors of the two states. … On
receiving the news of the death of an emperor … funeral ceremonies were held at
both courts …” The two states often addressed each other as the “northern
dynasty” and “the southern dynasty.”
12 Fairbank and Goldman (1992: 88)
13 In 992, the Qidans sent an invasion force across the Yalu
under Xiao Sun-ning. Through the diplomatic maneuvers of Seo Hui, however,
Koryeo could not only persuade the Qidan army to make a voluntary withdrawal,
but also obtain Qidan consent to incorporate the area up to the Yalu into its
territory. The Qidan could not deny Seo Hui’s assertion that Koryeo was the
successor to Koguryeo and thus could lay claim to the Manchurian territories
formerly under Koguryeo dominion. After all, the Qidans were engaged in a battle
against the Northern Song at that time, and hence were unable to bring their
full strength to bear on Koryeo. See Lee (1984: 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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