압수 테이프, 지도층 ‘벌거벗은 모습’ 담겼을 것

200여개의 압수 도청 테이프와 녹취록은 도대체 무슨 내용을 담고 있었기에 이건모 전 국가정보원 감찰실장은 ‘소름이 쫙 끼치는’ ‘끔찍한’ ‘대악재’ ‘핵폭탄’ 등의 극한적인 표현까지 썼을까. 이씨는 너무 충격적인 내용을 담고 있어 고심 끝에 도청 테이프 등을 전량 소각했다고 해명서에서 28일 밝혔다. 그러면서도 일부 회수되지 않은 테이프가 있을 가능성은 남겨놓았다. 이래저래 테이프 내용에 대한 궁금증이 증폭되는 양상이다.

그가 언론에 보낸 해명자료와 언론과의 인터뷰 내용에 따르면 이씨는 압수 테이프를 받아들고 수개월 동안 고민을 거듭한 것으로 보인다. 이씨는 “테이프가 과연 내 선에서 폐기해도 되는 것인지 판단이 안 설 정도로 엄청난 내용을 담고 있었다”고 밝혔다.

그는 정보기관 고위 관리로서 항상 특수한 정보를 접할 수 있는 위치였다. 따라서 웬만한 고급 정보에는 내성(耐性)이 생겨 꿈쩍도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테이프 소각 뒤) 6년 세월이 지나고 정권이 바뀐 지금에도 혼란이 이 정도인데 그때 당시 더 많은 테이프가 노출됐다면 어떤 상황이 벌어졌을지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고 말했다. 나라가 발칵 뒤집힐 정도의 도청 내용이 담겨 있음을 짐작케 하는 부분이다.

이런 이씨의 발언과 “대통령 빼고 다 도청했다”는 공운영 전 안기부 미림팀장의 언급으로 미뤄볼 때 도청 자료에는 당시 우리나라 정·관·재·언론·법조계 등 분야에서 소위 ‘잘 나가는’ 인사들의 결정적인 치부나 벌거벗은 모습 등이 고스란히 담겨 있을 것으로 보인다.

또 정치권의 중상모략, IMF(국제통화기금) 사태를 전후한 기업의 로비 실태와 정경유착, 언론사 고위층과 정치권의 밀실 야합, 비린내 나는 정치자금 거래실태 등의 내용이 망라돼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각계 고위층 인사들의 여성편력이나 가정사, 재산문제, 인간관계, 외화밀반출 등 ‘은밀한’ 부분까지 돋보기를 들이댔을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큰일났구나. DJ 정권이 이제 걸음마를 하는 때인데 이게 터지면 모든 분야가 다 붕괴되겠구나라는 판단에서 소각을 단행했다”는 그의 설명에는 DJ 정권 출범과정에서 적지 않은 인사들이 ‘결정적으로’ 연루됐을 가능성을 암시한다.

상상을 벗어난 도청 내용 때문인지 이씨는 공씨로부터 2박스 분량의 녹취록과 테이프를 회수하면서 “이렇게 많을 줄 알았으면 ‘(거둬들인) 척만 하고 회수하지 말 걸’ 하는 만감이 교차했다”고 당시의 심정을 털어놨다.

해명서에서 나타난 “이 원망과 저주스런 불법의 산물이며 도둑질한 장물이며, 나라에 씻지 못할 위해를 가할 수도 있었던 요물은 20세기로 보내자는 심정으로 전량 소각처리했다”는 해명은 당시 그가 받은 충격을 대변한다.

그렇다면 과연 문건 내용은 영원히 묻힐 수 있을까. 이씨는 가슴에 묻고 갈 요량이지만 그의 기억 속엔 분명히 YS정권 하에서 자행된 수많은 도청의 흔적들이 남아 있다. 또 불법도청에 가담한 적지 않은 관계자들이 있는 이상, 문건 내용이 세상에 등장, 우리 사회를 뒤흔들 개연성은 충분하다.

(경향신문 / 권재현 기자 2005-7-29) 

[분석] ‘핵폭탄’ 테이프 274개에 들어 있는 것은...

과연 '판도라의 상자'는 열릴 것인가.

안기부 비밀 도청팀 ‘미림’의 팀장이었던 공운영씨 경기도 분당 자택에서 불법 도청 테이프와 녹취록이 무더기로 발견됨에 따라 그 안에 담겨진 내용이 무엇일지 세간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현재 검찰은 스스로 통신비밀보호법을 위반할 수 없다며 이 테이프와 녹취록을 공개할 수는 없다고 밝히고 있다.

정치권도 열린우리당과 민노당이 압수된 테이프와 녹취록을 전면 공개하라고 주장하고 있는 반면 한나라당과 민주당은 신중하게 생각해야 한다고 상반된 입장을 보이고 있다.

공개 여부가 불투명한 상태이긴 하지만 이 내용이 공개될 경우 그 파장은 상상 이상이란 점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MBC를 통해 보도된 것이 삼성 관련 테이프 하나와 녹취록 3권이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274개의 테이프와 200~300쪽 분량의 녹취록 13권이 가지는 파괴력 가히 ‘핵폭탄급 이상’이 될 것은 뻔하다.

당시 안기부 감찰실장이였던 이건모씨가 “확인했던 내용만으로도 우리 사회가 붕괴할 만한 끔찍한 내용들”이었다고 밝힌 만큼 그 테이프에 담겨진 내용이 공개될 경우 사회에 미칠 파급 효과가 엄청나다는 것은 짐작하고도 남는다.

가히 판도라의 상자에 비견될 만한 이 테이프와 녹취록이 아직 공개되지 않은 상태지만 개략적인 추론은 가능하다.

앞서 보도된 ‘X파일’과 그를 둘러싼 관계자들의 말 등에 비춰보면 공개되지 않은 테이프와 녹취록 안에 담겨진 내용은 92년 대선 당시 이회창 후보에게 줄을 섰던 삼성을 제외한 재벌들, 그리고 '이회창 만들기'에 앞장 섰던 조선일보 등 수구언론들, 그밖에 법조계 등 그동안 한국 사회의 최상위계층을 자임해 왔던 기득권층과 이회창 측과의 불법자금 수수 등 검은 커넥션과 치부 등이 담겨 있을 가능성이 크다.

특히나 ‘미림’팀장 이었던 공운영 씨가 “대통령만 빼고 모두 도청했다고 보면 된다”고 언론 인터뷰에서 밝혔듯이 도청 테이프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그간 ‘X파일’보도로 세간의 입에 오르내렸던 삼성과 중앙일보, 이회창씨외의 다른 재벌과 언론, 정치인일 가능성이 높다.

더욱이 공 씨가 “언젠가는 도태당할지 모른다는 생각이 앞선 나머지 이를 대비, 중요 내용은 은밀하게 보관키로 작심 끝에 일부 중요내용을 밀반출, 보관했다”고 26일 자술서에서 밝힌 바와 같이 테이프에 담겨 있을 내용은 중요도에 있어서도 일상적 대화에 관한 도청 내용이 아닌 모종의 거래나 개인 및 특정 집단의 치부와 같은 핵심적 내용이 담겨있을 것으로 예측할 수 있다.

이와 더불어 미림팀이 김영삼 대통령 당선 이후 해체됐다가 94년 재구성됐고 김대중 대통령의 당선으로 다시 해체된 시점을 따져봤을 때 이번에 발견된 테이프는 97년 대선 직전의 상황이 정계, 재계, 언론계 등의 움직임이 고스란히 담겨있을 것으로 전망된다.

또한 공씨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조선, 동아 자기들은 정도를 걸어온 것처럼 하는데 정말 그거 보고 역겹다”라며 “내가 입을 열면 안 다칠 언론사가 없다”라고 말한 것과 이건모씨가 “큰일났구나, DJ정권이 이제 걸음마 하는 때인데 이게 터지면 모든 분야에 다 붕괴현상이 오겠구나 하는 판단이 서더라”라고 밝힌 내용만으로도 97년 대선 당시 일부 언론이 정치인에 대한 ‘줄서기’를 하며 모종의 거래를 한 대화내용 등도 담겨있을 것이라고 추론할 수 있다.

아울러 전 안기부 직원 김기삼 씨가 26일 공운영 전 안기부 미림팀장의 자해와 관련해 “자해라는 극한 방법을 선택하는 것을 접하고 무거운 마음을 주체할 수 없다”면서 “죽어야 할 사람은 공 팀장이 아니라, 국민들을 속이고, 부패하고, 타락하고, 조국을 반역한 몇몇 정치 지도자와 그들에게 부역한 무리”라고 밝힌 것으로 미루어 정·경·언 유착과 관련된 내용이 고스란히 담겨 있을 것이라고 추측하는 것은 더 이상 새로운 것도 아니다.

심지어 안기부에서 연예계를 관리했다는 세간의 소문들마저도 이번의 사건을 통해 실체적 진실로 받아들여지는 분위기다.

또 역대 권력자들이 정적들의 은밀한 사생활을 정치적으로 악용했다는 알려진 비밀마저도 이번 테이프를 통해 힘을 얻고 있다. 다시 말해 이번에 입수된 테이프에는 기득권층의 여성편력 등의 개인적 치부도 포함돼있을 것이란 추측이다.

이러한 추측과 설들을 뒤로 한 채 검찰은 현재 테이프 내용은 일절 공개할 수 없다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그러나 방대한 양의 테이프를 분석하고 분류하는데만에도 상당수의 인원이 투입되어야 하는 상황에서 테이프 내용이 외부로 유출되지 않을 것이란 보장도 없다.

더욱이 이미 특정 재벌과 언론, 정치인이 언론보도를 통해 공개된 상황에서 수사의 형평성을 따지고 봤을 때 이번에 압수된 테이프 내용을 그냥 덮고 넘어갈 수도 없는 것이 검찰의 괴로움이기도 하다.

노무현 대통령은 29일 ‘대연정’의 취지를 설명하는 기자간담회에서 “진실만이 답이고 진실만이 내 편으로, X파일 문제는 진실대로 갈 것”이라고 밝혔다.

정답은 진실이지만, 이 진실이 밝혀졌을 때의 충격과 파장을 감안해 진실을 감추려 하는 검찰의 몸부림이 어떤 귀결을 맞을지 귀추가 주목된다.

(서프라이즈 / 이응탁 기자 2005-7-29) 

“당신도 정보관?” 직원끼리도 몰라

I/O들의 25시

옛 안기부의 비밀도청 조직 ‘미림팀’ 실체가 폭로되면서 국정원 직원들의 정보활동에 대한 관심이 높아 지고 있다. 국내외 정보를 총괄하는 국가정보원은 원장 산하에 크게 해외파트(1차장), 국내파트(2차장), 대북파트(3차장)로 구성돼 있다. 또 각 파트는 크게 정보와 수사로 나누어진다.

정보파트는 정치·사회·경제·문화 등 팀으로 구성돼 있으며, 각 팀은 완전히 점조직 형태로 운영된다. 이중 국내 주요기관의 정보를 수집하는 사람들은 ‘정보관(I/O·Intelligence Officer) ’으로 불린다. 국정원의 기초 첩보 및 정보 수집의 최일선에 있는 이들은 평소 어떻게 정보활동을 펼치고 있을까. ‘정보관 25 시’를 들여다 본다.

◈국내 정보관(I/O), 그들은 누구인가=20년간 국정원에 몸담고 있는 국내 정보관 A씨는 정치 파트에 속해 있다. 그는 평일 오전 7시~7시30분쯤 서울 서초구 내곡동 본사(국정원 직원들은 국정원을 회사라고 부른다)로 출근, 팀별 회의를 가진다. 회의에서는 그날 정보수집 일정에 대한 토론을 하고, 상부로부터 현안에 대한 ‘긴급 정보수집 요청(SRI·Special Requirement for Informat ion)’을 하달받기도 한다. 출입처에 대한 동향 정보도 나눈다.

오전 9~10시쯤 출입 기관으로 향한다. 이후 A씨의 일정은 언론사 취재기자와 대체적으로 비슷하다. 기관장과 주요 인사들을 만나 정보 수집 및 교환을 하며 대부분의 시간을 보낸다.

점심식사도 해당 출입처 직원들과 함께 한다. 그는 점심과 저녁을 포함, 1주일에 적어도 10 차례 이상 식사약속을 잡고 있다.

특히 저녁 때 출입처 핵심 인사와 술을 곁들인 자리가 많은데, 이는 허심탄회하게 속깊은 얘기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1주일에 3~4번의 저녁 술 약속이 있다.

‘첩보’와 ‘정보’는 분명 다르다. 한 정보관에 따르면 특정 현안에 관련한 1차 정보를 들었을 경우, 제2, 제3의 취재원을 통해 이를 거듭 확인하는 ‘객관화’ 작업을 한다. 정보 확인을 위해서는 신분을 숨기는 일이 적지 않다. 학교 동창, 동향 사람 등 지인을 통해 정보를 얻기도 한다. 또 정부정책을 어떻게 이해하고, 어떻게 받아들이는지 파악하는 것도 주요 임무다. A씨의 경 우 매일 접촉하는 사람들이 15~20명에 달한다. 또 각 기관이 발행하는 자료를 열람하거나, 공식적으로 기관에 정보를 요청하기도 한다. 공식 자료를 통해 얻는 정보는 전체 정보의 절반 가량에 달한다.

하루 일과는 일일보고서 작성으로 끝난다. 매일 1건 이상의 보고를 올리도록 돼 있다. 1주일에 최소 15건 가량은 보고해야 한다.

정보가 없을 때는 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리기도 한다. 통상 지득 (知得)한 정보는 당일 보고를 원칙으로 하고, 전화와 문서 등 유 무선을 통해 보고한다. 다만 저녁 식사 때 파악한 정보 등은 다음날 보고서를 올린다.

정보관의 보고서는 직접적인 평가 대상인 만큼, 국정원 조직 내 다른 팀과의 ‘정보경쟁’이 벌어지는 경우도 허다하다. 기자들 의 취재경쟁과 유사한 셈이다. 동일한 정보에 접근, 수집활동을 벌이는 경우가 적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예전에는 별도의 망 원(정보원)을 두고 정보수집에 나서는 일이 많았지만 최근에는 이런 경우가 크게 줄어들었다”고 했다.

◈가족도 모르는 정보관 신분=국정원 직원 B씨는 15년 동안 국정원에서 일했지만, 자식들에게 그동안 자신의 신분을 밝히지 않아 왔다. 그는 “아이들에게 부모 직업란에 ‘공무원’으로만 적도록 해왔다”고 말했다. 그는 아이가 고3이 된 올해 들어서야 불러다놓고, 사실을 얘기했다. 국정원에서 일하며 대인관계가 깨져 친구도 많이 떨어졌다.

B씨는 신분을 밝힐 수 없는데다 동일한 대화 화제가 없어서 자연스럽게 예전의 친구들이 멀어졌다고 했다. “기본적으로 회사일 은 나가서 얘기하지 않도록 교육받았기 때문에도 입이 무거워졌다”고 했다.

정보관 대부분은 가명을 사용한다. 명함이 아예 없는 정보관도 많다. 간혹 명함을 사용해도 가명과 휴대전화 번호 외에는 다른 내용은 일절 표기하지 않는다. 이같은 상황은 정무직인 국정원장 과 1, 2, 3차장, 홍보관리관 등 주요 인사를 제외한 국정원 직원 전체에 해당된다. ‘음지에서 일하고 양지를 지향한다’는 옛 중앙정보부의 부훈이 아직도 그대로 적용되는 예다.

이렇다보니, 국정원 직원끼리도 서로의 신분을 모르는 일이 많다 . B씨는 90년대 말 1년간 해외연수를 갔다가 팀에 복귀했을 때, 후배들이 “어디서 근무하던 분이냐”고 물은 적도 있었다고 했다.

10여개 국으로 돼 있는 국정원은 각 국간에 ‘정보차단의 원칙’ 이 적용돼 서로의 일을 알지도 못하고, 알려고 하지도 않는다.

(문화일보 / 박수균 기자 2005-7-30) 

국정원 ‘정보 먹튀’ 설친다

1979년 10월26일 궁정동 안가에는 중앙정보부 요원들이 여럿 있었다.

박선호 의전과장, 박흥주 부장수행비서, 유성옥, 김태원, 이기주씨 등 중정 요원들은 바로 몇시간 전에 떨어진 김재규 부장의 지시에 한마디도 이의를 제기하지 못한 채 ‘거사’에 참여했다. 그리고 김 부장과 함께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이들은 공판 과정에서 “부장의 지시에 무조건 따를 수밖에 없는 중정의 조직 기강”을 방어 논리로 내세웠다. 상관이나 조직의 불법 지시에 따르는 것이 옳으냐, 그르냐는 논란은 뒤로하더라도, 당시 정보기관의 내부 분위기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그로부터 26년이 지난 2005년, 전 국가안전기획부(중정의 후신, 현 국가정보원) 미림팀장 공운영씨는 자술서를 통해 “언젠가는 또다시 도태당할지 모른다는 생각이 앞선 나머지, 중요 내용은 은밀히 보관하기로 작심한 끝에 일부 내용을 밀반출해 임의 보관했다”고 밝혔다.

정보기관의 요원이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조직에서 취득한 정보를 ‘팔아먹는’ 행태는 외부의 시선으로 좀처럼 이해하기 어렵다. 하지만 공씨의 사례말고도 국정원 직원들이 조직을 ‘배신’하는 일은 이제 일상사가 돼 버렸다.

2002년 대통령 선거 국면에서 국정원 직원들은 유력 후보 진영에 개인적으로 줄을 댔다. 지금도 국정원 출신 정치인들이나 면직된 전직 직원들의 모임인 ‘국사모’ 쪽으로 유출되는 정보가 상당하다. 국정원 내부에서 정보를 끊임없이 빼돌리는 사람이 있다는 얘기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딸 문제를 방송사에 제보한 사람도 전직 국정원 간부라는 주장이 있다. 최근에는 활동비 삭감에 불만을 품은 국정원 직원이 자기 상사의 ‘문제점’을 조사해 외부로 알리는 일까지 벌어지고 있다고 한다. 이쯤 되면 요지경이다.

국정원 관계자들은 내부 기강의 붕괴가 국정원이라는 조직이 직원 개인을 더는 ‘보호’할 수 없게 된 상황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분석했다. 그리고 그 시기는 대체로 김영삼 정부 때부터 시작됐다고 보고 있다. 전두환·노태우 정부에서도 국정원은 ‘정권의 하수인’ 노릇을 했지만, 내부 정보를 외부로 빼돌리는 일은 좀처럼 없었다고 한다. 김영삼 정부에서 정치인들이 국정원 내부에 대한 간섭을 시작하면서, 국정원 간부들이 정권 실세들에게 이리저리 줄을 대는 풍토가 생겨났다는 것이다. 이런 분위기는 김대중 정부에서도 이어졌다. 국정원의 호남 인맥 중 일부는 동교동 ‘실세’인 권노갑 고문 등에게 접근했고, 실제로 몇몇 사람은 그런 방식으로 차장이나 경제과장 등 요직을 차지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ㅁ고 출신 직원 ㅈ아무개씨는 ‘동교동 사람들’과 식당에서 고스톱을 치며 정보를 유출해 구설에 올랐지만, 이종찬 당시 국정원장은 동교동과 가까운 그를 손댈 수 없었다. 그는 1999년 천용택 원장이 취임한 뒤 면직됐는데, 천 원장은 동교동의 반격을 우려해 그를 면직시킨 직후 김대중 대통령에게 즉시 보고하는 ‘선수’를 쳤다. 원장이 직원 한 사람 면직시키는 것이 그렇게 부담스러웠다는 얘기다. ㅈ씨는 최근 공운영씨의 후견인이었던 것으로 드러났는데, 이종찬 원장 시절 공씨 복직 로비를 하면서 공씨에게 다시 ‘일’(도청 업무)을 맡겨야 한다고 주장한 일도 있다고 한다.

내부 기강과 관련해선 감찰실 직원이었던 ㄱ아무개씨 사건도 유명하다. 97년 대선을 앞두고 ㄱ씨는 국정원의 선거개입 의혹 자료를 들고 나와 ‘양심선언’을 시도한 일이 있다. 국정원은 우여곡절 끝에 자료를 회수하고 그를 면직시켰다.김대중 대통령이 당선되자, ㄱ씨는 복직을 요구했다. 이종찬 원장은 직원의 복직은 전례가 없고, 어쨌든 정보를 외부로 유출했다는 이유로 복직을 거부했다. 그러나 ㄱ씨는 99년 천용택 원장이 취임한 뒤 김대중 대통령의 ‘지시’로 국정원에 결국 복직했다. 국정원 관계자는 “직원들의 기강 해이가 더 심해지는 계기로 작용했다”고 전했다.

(한겨레신문 / 성한용 기자 2005-8-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