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 죽이는 ‘12인 회의’

"측근 실세들의 득세는 조기 레임덕 불러온다"

열린우리당이 사면 밥상을 차린다고 분주하다. 우스개 소리로 고기를 밑에 깔고 면발만 위에 엊어 놓으려다보니 아무래도 티가 난다.

열린우리당이 제시한 정치인 사면기준을 보면, 정대철 이상수 등 측근 실세 의원들이 사면될 것같고, 가신(家臣)이었던 안희정과 최도술은 제외될 것 같다.

가신(家臣)은 가고 측근 실세(實勢)들이 득세하는 세상이 오는것 같다.

정승의 집안일을 맡아보던 사람을 통칭하여 가신(家臣)이라 부른다. 가신들은 측근 실세와 틀리다. 주군(主君)의 권력의 정도에 따라서 가신들의 역할이 결정되고 주군을 견제하기보다는 충성과 봉사를 맹세하는 관계이다.

그러나 측근 실세는 주군을 견제하고 권력균형을 꾀하고 상황에 따라서는 주군을 밀어내고 그 자리를 노리는 세력들이다. 그래서 주군과 측근 실세의 관계는 늘 불편하고 긴장되어 있다.

현대 민주정치에서는 가신이나 실세는 필요가 없지만 존재한다. 가신이나 실세는 권력을 갉아먹는 좀과 같은 존재라서 국민의 뜻에 따르려는 국가 지도자의 자유로운 권력행사를 방해한다.

가신 정치든 측근 실세 정치이든 국민이 비집고 들어갈 공간이 없는 비민주적 정치 형태이다. 사실 가신 정치나 측근 실세정치는 권력게임이지 진정한 의미의 통치나 정치방식은 아니다.

어쨋던 전(前) 정권들의 가신 정치는 몰락하였고 노무현 정부 중반기에 들어서 측근 실세정치가 떠오르고 있다.

가신 정치의 몰락과 함께 측근 실세 정치가 뜨는 이유는 노무현 정권의 탄생배경과 무관하지 않다. 일종의 권력분점을 토대로 권력을 잡은 노 대통령은 권력의 독점적 지위를 갖고 있지 못한 한계를 가졌었다.

그런데 권력자가 독점적 권력을 쥐고 있거나 행사하려면 가신들의 역할이 중요하다. 그러나 노무현 정권에서 가신들은 측근 실세들의 견제때문에 자연스럽게 몰락하고 말았다.

노 대통령이 입버릇처럼 말하는 ‘힘없는 대통령’론은 보수 기득권 세력들의 저항때문도 아니고, 언론의 딴지걸기때문도 아니며, 더군다나 권력구조때문에 생긴 일은 아니었다.

참여정부는 노무현 후보를 내세워 측근 실세들이 탄생시킨 정권이었다. 그러니 아무리 대통령이라해도 권력을 독점할 수 없었고 측근 실세들을 견제하고 때로는 눈치도 봐야하는 것이다.

‘힘없는 대통령’의 원인 제공자는 권력분점식 정권창출 구조였다. 국민도, 언론도, 보수세력도 대통령을 힘없이 만들지 않았다.

정권탄생 배경이 이처럼 깔려있는 상황에서 ‘가신들은 물렀거라. 측근 실세들만 들어오라’는 소위 ‘12인 회의’가 시작된 것이다.

가신들의 몰락과 측근 실세 중심의 ‘12인 회의’의 위험성은 화랑제도와 삼국시대의 귀족회의를 통해서 밝혀질 수 있다.

귀족연합적인 정치 성격때문에 삼국은 고유의 회의제도를 갖고 있었는데, 신라는 화백(和白)제도, 백제는 정사암(政事巖), 고구려는 제가회의(諸加會議)를 두고 있었다.

삼국시대 회의제도들은 부족연맹시대 씨족 또는 족장회의가 발전한 형태이다. 이러한 제도들은 국가가 성립된 뒤 국왕을 중심으로 귀족들이 함께 모여 국가 중대사를 의논하는 회의기구로 발전하게 되었다.

먼저, 신라의 화랑 제도는 왕권의 강화와 군사력 증대를 위한 통치 도구였다. 그러나 삼국을 통일하고나서 전쟁의 필요성이 사라지자 신라는 내부적으로 왕실의 권위 강화와 중앙집권체제의 구축이란 시급한 과제에 직면하였다.

결국 통일 신라는 화랑 제도를 왕권 강화의 걸림돌로 인식하게 되었고, 화백제도는 6세기 이후 왕권강화와 체제변화에 따라 국왕 통제하의 백관회의로 전락하고 말았다.

화백제도의 경우, 귀족들의 단결심과 집단체제의 강화를 위해서, 또한 왕권과 귀족간의 권력균형을 위해서 만장일치 제도가 이용되었다.

귀족들의 힘이 왕권보다 강하면 이러한 회의에서의 결정은 왕권을 무력화시켰다. 분점된 권력이냐 집중된 권력이냐에 따라서 회의의 성격이 달랐다.

노무현 대통령이 이른바 ‘12인 회의’에 또 참석했다고 한다. 이 회의는 당,정,청 (黨政靑) 측근 실세들의 비공식적 모임이다.

‘12인 회의’에서는 ‘~하라’는 지시적 명령은 없다. 노 대통령의 ‘영(令)이 안선다’의 말은 다름아닌 ‘12인 회의’ 상황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통령의 명령이 먹히지 않고 영이 안서는 회의를 대통령은 왜 참석하는가의 이유에 대해서 고려대 임혁백 교수는 “토론을 통한 의사 결정이라는 현 정부의 원칙과 맞는다”고 말하지만 ‘12인 회의’를 화백제도와 견주는 것이 보다 덜 순진한 것일 것이다.

대통령이 확실한 명령 체계가 있는 공식 국무회의를 마다하고 토의형식의 비공식 회의를 주도하는 것은 불안정한 대통령 권위와 측근 실세들의 견제때문이라고 보는 것이 보다 설득력이 있다.

측근 실세들의 득세는 대통령을 무력화시키고 조기 레임덕을 불러오게 한다. 측근 실세들에 의해서 국정운영이 비공식 라인에서 합의되고 결정된다면 대통령이나 국민들은 불행해질 수 밖에 없다.

힘있는 대통령을 원한다면 측근 실세들을 냉정하게 쳐내는 용기도 필요하다.

(데일리안 / 나기환 논설위원 2005-7-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