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장상인들 반응] "경제 살아났다 말하면 욕 먹죠"

2분기 GDP 3.3% 성장… 정부는 "경기지표 회복세"라는데
구두 한켤레 5000원 '제살깎기' 권리금 없는 상가매물 쏟아져

“싸게 드릴게요” “물어보고 가세요”….

26일 오전 서울 용산 S전자상가. 상가 안에 들어서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여기저기서 상인들 목소리가 터져 나온다. 상가 복도는 손님이 너무 없어 그냥 지나치기 민망할 정도였다.

이곳 상우회 관계자는 “공실률(空室率)이 40%나 된다”면서 “영업 중인 상인들도 상당수가 월세를 내지 못해 보증금을 까먹고 있는 실정”이라고 말했다. 용산에서만 10년째 장사를 하고 있다는 A가전의 박성철(42) 사장은 “경제가 살아났다고 말하면 여기선 정말 욕 먹는다”고 말했다. “경기지표가 회복세”라는 정부 발표와 달리, 밑바닥 현장에서 느낀 체감온도는 여전히 냉랭했다. 시장 상인들은 “경기가 나아진 게 아무것도 없다”고 입을 모았다.

이날 오후 서울 종로3가 귀금속 밀집 상가. 30평 남짓한 ‘K귀금속’ 매장은 직원 2명을 빼곤 텅 비어 있었다. 직원 김선희(27)씨는 “다음주부터는 오후 5시에 가게문을 열 생각”이라며 “아침부터 가게문 열어봤자 손님도 없고 인건비랑 전기세만 나간다”고 했다.

종로3가 피카디리 극장 근처에서 소시지 장사를 하는 최모(35)씨도 “하루 종일 한여름 땡볕에서 장사해도 하루 매출이 5만원밖에 안 된다”며 “재료값 빼면 정말 애들 공책 사줄 돈밖에 남질 않는다”고 하소연했다.

종로에서 4년째 오징어를 팔고 있다는 방석훈(52)씨는 “작년 매출의 30%도 안 된다”면서 짜증나는 듯 부채질만 해댔다. 그는 “사람들이 영화만 보고, 군것질은 안 한다. 주머니에 돈이 있어야 입으로 먹을 게 좀 들어갈 텐데…”라며 말끝을 흐렸다.

같은 시각 용산역 인근의 신계동 먹자골목. 점심 시간이었지만 길거리는 한산했다. 칼국수집 주인 최광진(65)씨는 “작년 대비 매출이 30~40%씩 줄었다”면서 “식당을 접겠다는 사람이 수두룩하다”고 말했다. D부동산 정문진 대표는 “권리금은 안 받아도 좋으니 팔아만 달라는 상가 매물이 수십곳”이라고 전했다.

서울 을지로입구 지하철역 광장에 들어서니 ‘여자 구두 5000원’ ‘여성 의류 3000원’ 등 가격 파괴 플래카드가 여기저기 나붙어 있다. 구두 한 켤레를 5000원에 팔아 남는 게 있냐고 묻자 “마진은 하나도 안 남지만, 그래도 재고로 쌓이는 것보다는 낫다”(C구두가게 김종락씨)는 답이 돌아온다.

마포구 성산동 ‘오머리방’ 여사장은 “커트비를 3900원으로 확 낮춰서 손님을 끌려 보려고 하지만, 여전히 손님이 많지 않다”고 말했다.

불황을 모른다는 로또, 경마 등도 불황의 쓴맛을 톡톡히 보고 있다. 한국마사회(KRA)의 올 상반기 매출액은 작년 상반기에 비해 6% 이상(2조3978억원→2조2474억원) 줄었다. 로또 판매액도 2002년 발매 이후 주당 평균 680억원에 이르렀으나 최근엔 500억원대로 주저앉았다. 불황의 그림자는 여전히 생활 곳곳에 똬리를 틀고 있다.

(조선일보 / 이경은, 신지은 기자 2005-7-27)

한국경제 성장엔진 '경고음'

한국 경제를 이끌어 나가야 할 '성장엔진'에 경고음이 울리고 있다. 기업의 설비투자 부진이 예상보다 길어질 뿐 아니라 전망치에서도 크게 빗나가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옛 안기부(현 국정원) 불법 도청 테이프 파문까지 터지면서 후폭풍을 염려하는 목소리가 커지는 등 기업 경영의 불확실성이 크게 높아지고 있다.

26일 한국은행은 2분기 국내총생산(GDP)이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3% 늘어나는 저성장을 나타냈다고 밝혔다.

하지만 설비투자 증가율이 2.8%에 그쳐 전문가들의 예상치를 크게 빗나갔다.

불과 10여 일 전에 한국개발연구원(KDI)이 추정한 2분기 설비투자 증가율 5.2%의 절반 수준에 그칠 정도다.

사실 최근 정부와 한국은행이 발표한 올 하반기 한국 경제 전망도 이처럼 꺼져가는 성장엔진에 대한 심각한 고민이 이미 묻어 있다.

지난 5일 올해 성장률을 4.0%에서 3.8%로 하향 조정한다고 발표한 한은 보고서에서 가장 눈여겨 볼 대목은 설비투자 증가율을 크게 낮춰잡은 부분이다.

내수경기의 다른 축인 소비나 건설투자 부문은 오히려 전망치를 상향 조정했지만 당초 올해 5.3% 증가를 예상했던 설비투자는 예상보다 부진해 무려 0.7%포인트나 낮은 4.6%로 크게 하향 조정했기 때문이다.

문제는 설비투자 부진이 장기화 양상을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경제 규모가 환란 이후 2배 가까이 늘었지만 기업들의 설비투자는 환란 전의 73% 수준에 머물 정도로 부진한 상태다.

기업을 둘러싼 경영 환경은 설비투자 촉진과는 거리가 멀다. 불법 도청 테이프 파문에 따른 불똥이 어디로 튈지 모르는 상황에서 선뜻 하반기 투자계획을 세우는 게 부담스러워졌기 때문이다.

27일 예정했던 경제5단체장 간담회가 전격 취소된 것이 단적인 예다. 당초 경제5단체장들은 기업 투자 부진의 심각성과 투자 촉진을 위한 대안 그리고 정부의 정책 뒷받침을 요구하는 대정부 건의문을 채택할 예정이었다.

한국은행 관계자는 "하반기 가장 염려되는 것은 낮은 설비투자"라며 "당장 저성장 국면으로 우리 경제가 빠졌다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5% 증가율에도 못 미치는 낮은 설비투자가 계속된다면 성장동력 상실에 따른 경기침체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고 지적했다.

◆ 꺼져가는 성장엔진=기업들의 투자 부진 현상은 외환위기 이후 줄곧 지속되고 있다.

벤처투자 이상과열 현상으로 2000년 33.6%나 급증했던 설비투자(국민계정 기준)는 2001년(-9.0%) 급속하게 위축된 후 2002년 7.5%, 2003년 -1.2%, 지난해 3.8%로 나 타났다. 월드컵이 열렸던 2002년을 제외하면 단 한 차례도 성장률은 물론 잠재성장 률조차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

최근 한은 조사에 따르면 지난해 제조업체들의 설비투자 규모는 외환위기 이전 73% 수준에 그칠 정도로 낮게 나타났다.

국내 설비투자 부진은 자본 축적에도 심각한 문제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87년 이후 96년까지 자본축적에 의한 경제 성장은 연평균 4.92%포인트에 달했지만 2000년 이후는 2.23%포인트에 그쳐 절반 이하 수준으로 추락했다.

반면 해외직접투자로 기업 자금이 몰리고 있다. 지난해 설비투자는 4%에도 못 미칠 정도로 둔화됐지만 해외직접투자 증가율은 무려 50%에 달할 정도였다.

오문석 LG경제연구원 상무는 "지난 몇 년 동안의 내수 부진과 투자 부진이 우리 경제를 저성장으로 몰고 있다"며 "투자 부진은 수출경쟁력 악화로 이어지고, 이것이 다시 성장률을 낮추는 악순환의 고리를 만들 가능성이 있다"고 지적했다.

◆ 설비투자 왜 부진한가=두드러진 한국 기업들의 경영 보수화 현상을 꼽을 수 있다. 외환위기를 거치면서 기업들은 차입을 통해 과감하게 투자하는 종전 패턴에서 부채비율과 같은 재무적 안정성을 크게 중시하는 쪽으로 바뀌었다.

산업환경 변화에 적응하지 못한 기업들이 신규 투자에 대한 위험 부담을 꺼리면서 안정성을 위주로 한 소극적 투자를 선호하는 현상이 심화되고 있다.

게다가 내수침체가 장기화되면서 내수의존형 중소기업이나 서비스산업에서 설비투자 부진 현상이 지속되고 있다.

실제로 97년만 해도 상장기업들의 영업이익 대비 설비투자율은 149.5%에 달했지만 이후 급속히 줄어 지난해에는 68.6%에 그쳤다. 반면 총자산 대비 현금보유 비율은 같은 기간 6.4%에서 9.9%로 급증했다.

'사상 최고 수준의 현금보유 규모, 사상 최저 수준의 부채비율'로 대변되는 한국 기업들의 현주소가 극심한 투자 부진을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 해법은 없나…'돈', 길을 터줘라=전문가들은 마땅한 국내 투자처를 찾지 못해 넘치고 있는 '돈'이 흘러갈 길을 터줘야 한다고 입을 모으고 있다.

정부가 하반기 투자 확대 계획을 발표했지만 민간 부문 스스로 적극적인 투자에 나서지 않는 이상 정부 부문의 노력은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적극적인 규제완화와 함께 정부가 경기부양 신호로 해석될 수 있는 투자에 우호적인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유병규 현대경제연구원 경제본부장은 "설비투자가 안 좋은 것은 기업들의 경영환경 불확실성이 크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며 "각종 규제 개혁과 일관된 정부 정책이 설비투자 회복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신민영 LG경제연구원 연구위원은 "수도권 투자규제 완화 등은 그 자체로도 의미가 있지만 정부가 경기 부양책의 신호를 준다는 점에서도 투자 활성화에 도움이 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신석하 한국개발연구원(KDI) 부연구위원은 "외국으로 기업들이 나가면서 설비투자 증가율이 떨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고 하더라도 외국 기업들이 우리나라에 투자 할 수 있는 여건을 갖추는 것이 시급하다"며 "산업별로 다를 수 있겠지만 국내에서 설비투자를 할 수 있는 여건이나 환경 개선은 아직까지 미흡하다고 본다"고 말했다 .

(매일경제 / 송성훈, 이승훈 기자 2005-7-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