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상 최강의 고구려, 이유 있다(1)

우리나라 사람들이 고구려에 대해 강한 매력을 갖는 것은 현재 중국의 영토로 되어 있는 광대한 지역을 한민족으로 구성된 강한 군대로 마음껏 뛰어다녔다는 데 있는 것 같다. 특히 현재의 중국의 수도 북경지역까지 고구려가 진출하였다는 사실은 한민족으로 깊은 자부심을 느끼게 해주기에 충분하다.

대부분의 한국인들이 가장 안타깝게 생각하는 것은 신라가 당나라와 연합하여 삼국을 통일하면서 고구려를 멸망시켰다는 대목이다. 그보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고구려 멸망이 국가의 운명을 건 치열한 전투에서 패배했다던가 하는 불가항력적인 것이 아니라 당나라와 전투에서 불패의 신화를 갖고 있던 연개소문이 사망하자마자 그의 아들들 간에 권력싸움이 일어나 국가를 당나라에 바쳤다는데 원인이 있다는 점이다.

물론 신라가 당나라와 연합하여 고구려를 멸망시킨 후 곧바로 당나라와 결별하고 독자노선을 걸었다는 점을 크게 인정하더라도 아쉬움이 배어있는 것은 어쩔 수 없다.

한국인들이 고구려의 멸망을 얼마나 안타깝게 생각하는가는 'EBS공사창립5주년특집 다큐멘터리' 설문조사의 ‘역사학자 100인이 말하는 우리 역사의 희노애락’의 결과를 보아도 알 수 있다.

동천왕의 벽비, '동천왕(재위 227~248) 11년 명(銘)'이 적혀있어 광개토대왕비보다 160여년 앞섰다는 고구려 최고(最古)의 비문이다.
설문에서는 가장 기뻤던 순간, 가장 슬펐던 순간, 가장 분노했던 순간을 적시했는데 고구려의 멸망은 가장 슬펐던 순간 중 세 번째로 꼽혔다. 한국인들은 가장 슬펐던 순간 첫 번째로 경술국치를 꼽았고 두 번째로 한국전쟁을 선정했지만 이 사건들은 근대에 일어난 일이다. 그러므로 한국 5천 년 역사에서 고구려멸망을 세 번째로 꼽았다는 것은 고구려의 멸망이 그만큼 한국인들에게 가장 안타까운 역사의 순간이었음을 의미한다.  

참고적으로 가장 기뻤던 순간은 8ㆍ15광복, 세종대왕의 한글창제와 6ㆍ10민주항쟁이며 가장 분노했던 순간은 5ㆍ18광주항쟁, 삼전도 치욕, 동학농민군 패배이다.

함석헌 선생의 “신라는 너무 값비싼 값을 주고 통일을 샀으나 그 통일은 참으로 보잘 것 없는 통일이었다. 청천강 이북을 가보지 못한 통일이다. 통일이 아니요 분할이다.”라는 한탄이 더욱 가슴에 닿는다. 그 기저에 깔린 아쉬움은 고구려가 사상 최고의 강대국이자 정복국가였기 때문이다.

<열악한 환경을 이겨낸 고구려>

진수(233〜279)가 편찬한 『삼국지』<위지동이전>은 고구려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고구려는 높은 산과 깊은 계곡이 많고, 평원과 호수는 없다. 산과 계곡을 따라 주거를 하고 계곡물을 마신다. 좋은 밭이 없으므로 비록 힘써 농사를 짓기는 하지만 배불리 먹기에는 부족하다. 그들의 풍속은 음식을 절약하면서 궁전이나 주거지를 성대하기 짓기를 좋아한다. (중략) 그곳 사람들의 성정은 사납고 급하며 약탈과 침략을 좋아한다. (중략) 상제ㆍ안제 연간(106〜124)에 구려왕 궁(宮, 고구려 태조왕, 53〜146)이 자주 요동군을 공격했다. 궁이 죽자 아들 백고가 즉위한 후 순제와 환제 시대(126〜167)에 다시 요동군을 침범하고, 신안과 거향을 약탈하였으며 또 서안평을 공격하여 도중에 대방령을 죽이고 낙랑태수의 처자식을 빼앗았다.’

진수는 위ㆍ촉ㆍ오 삼국이 대립하던 시대에 촉나라에서 태어난 사람이다. 그런데 촉은 진수의 나이 31세 때 위에 정복되었다. 그 위마저도 수년 후에는 진에게 멸망해 망국의 국민이 되었지만 삼국에 대한 정사를 편찬하면서 한국의 근간이 되는 한반도 주변의 국가들에 대해 많은 자료를 남겼다.

그러면서도 중국인 사가답게 중국을 괴롭힌 고구려에 대해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았다는 것은 앞의 기록으로도 알 수 있다.

그런데 진수의 설명대로라면 농사를 짓기도 어렵고 배불리 먹기에도 부족한 고구려가 중국을 공격할 수 있었던 실력은 어디에서 나왔는지 의아하지 않을 수 없다.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중국을 공격하여 승리하기 위해서는 중국을 공격할 수 있는 전력이 확보되어 있어야 하며 이들이 역습해 올 때 격퇴시킬 수 있는 전력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나오는 고대의 전쟁은 그야말로 영웅담으로 채워져 있기 일쑤다. 용감한 장수 한 명이 나서서 몰려오는 적병을 줄줄이 베어버리는 것은 물론 하늘을 뒤덮을 정도로 발사되는 화살망을 뚫고 적장을 쫓아가 죽이기도 한다.

태조왕의 군사활동도.


그러나 실전에서 이런 식으로 전투가 벌어지지 않는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용맹스럽고 유능한 장군들이 전투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거나 사기를 높일 수는 있지만 혼자서 수 만 명의 적병을 물리치고 승리하는 경우는 없다. 그러므로 고구려가 사상 최고의 강력한 국가가 될 수 있었던 것은 한 두 명의 영웅이 있어서가 아니라 강력한 국가가 될 수 있는 필요충분조건이 갖추어져 있었기 때문으로 볼 수 있다.

고구려가 사상 최강의 국가가 될 수 있었던 요인을 과학이라는 틀에서 6회에 걸쳐 설명한다. 이 글은 최 태용, 황 원갑, 이 희진, 민 승기, 이 진수, 김 후, 임 용한 등의 글에서 많은 부분을 인용했다.

<고구려는 정복국가>

한국의 과거사를 읽을 때마다 짜증이 난다고 말하는 한국인이 많다. 약소국가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한, 당, 몽골, 청나라 등에 국토가 유린당했고 일본에 의해 강제합병까지 당했다는 대목에 이르러서는 한국의 과거는 부끄러움의 역사라고까지 매도한다.

그러나 이러한 비난이 전적으로 옳지 않다는 것은 고구려의 역사만 읽어도 알 수 있다.

1세기 중엽에 고구려는 소국통합을 기본적으로 끝낸 후 왕성한 정복활동으로 고조선 옛 땅의 수복에 착수했다. 태조왕 53년(105)에 요동군, 현토군에 대한 일대 공세를 취했고 요동지방의 6개 현을 함락시켰다. 105년에 진행된 고구려군의 요동공격이 후한에 얼마나 큰 타격을 주었는가는 106년에 후한이 요동지방의 군현들을 대폭 개편한데서 찾아볼 수 있다.

물론 이와 같은 고구려의 공세는 마침 중국의 내ㆍ외부에서 일어난 복잡한 정세 때문이라는 시각도 있다. 1세기말부터 2세기 초에 고구려의 부용세력인 북방기마민족 선비족의 침입 등으로 후한의 동북방면 주, 군들이 많은 피해를 입었다. 또한 과중한 세금과 노역 등으로 백성들의 원성이 높아지는 등 내부에서의 혼란이 일어나 중국의 국력이 자동적으로 저하되었기 때문에 외부 세력에 적절하게 대처할 수 없었다는 설명이다. 그러나 중국이 내부 사정으로 다소 혼란된 상황에 처해 있었다하더라도 고구려가 이 기회를 적절히 활용했다는 것도 저력임은 틀림없다.

태조왕, 태조대왕으로도 불리는 태조왕은 90년이 넘는 통치기간 동안 왕성한 정복활동으로 고조선 옛 땅의 수복에 착수했다(그림 성병예).
고구려의 역사를 보면 고구려의 정복 활동 때 선비를 활용하는 기록이 자주 나타난다. 박 경철 박사는 고구려가 선비 등 흉노에서 파생된 유목국들을 자신이 의도하는 전투에 동원할 수 있었던 것은 선비가 고구려의 부용세력(附庸勢力)이었기 때문으로 설명했다.

여기에서 부용세력의 의미는 로마제국의 예를 들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당시 로마의 해방노예들은 그들의 옛 주인인 자유민을 보호자(patronus)로 삼는 대신 노역 및 군역에 봉사했다. 이는 로마의 피정복지 통치방식 중에 하나로 부용민(clientes) 제도라고도 부른다. 부용은 원래 소국 그 자체를 의미하면서 그것이 대국에 복속되어 있는 상황을 나타내기도 하는데 고구려와 선비의 경우가 그와 같은 맥락이라는 것이다. 이 부분은 (「고구려와 흉노의 친연성에 관한 연구」, 이종호, 백산학보 제 67호, 2003)을 참조하기 바란다.

이 당시 전쟁은 태조왕의 동생 수성(遂成, 차대왕)이 주로 전담했는데 그는 고구려의 전략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고구려 땅의 넓이와 인구수가 한나라에 미치지 못하나 고구려는 큰 산과 깊은 골짜기의 나라이므로, 웅거하여 지키기에 편리하여 적은 군사로도 한의 많은 군사를 방어하기에 넉넉하며, 한은 평원광야의 나라이므로 침략하기가 용이하다. 고구려가 비록 한꺼번에 한을 격파하기는 어려우나 자주 틈을 타서 그 변경을 시끄럽게 하여, 피폐하게 한 뒤 이를 격멸하면 우리가 중국을 이길 수 있다.’

차대왕의 이 말은 고구려가 중국을 멸망시키는 것이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선언한 것이나 다름없다. 고구려의 인물이 이렇게 호방한 말을 했다는 것이 다소 의아할지 모르지만 차대왕은 결코 허세로 말한 것이 아니다.

고구려의 중국에 대한 공격은 계속되어 118년에는 고구려군이 ‘예맥’의 군사들과 함께 한나라 현토군을 습격하고 화려성을 공격하였다.

고구려의 공격에 참을 수 없었던 후한의 안제(安帝)는 기원 121년 유주자사 풍환, 현도군수 요광, 요동태수 채풍에 명하여 고구려를 공격하라고 명령했다. 이때도 태조왕은 동생 수성을 보내 역습하게 했다.

수성은 기만 작전을 구사해서 승리를 거두었다. 즉 사신을 보내 거짓 항복하는 척하면서 풍환과 요광의 군사를 묶어두고는, 비밀리에 잠입한 3,000명의 군사로 현도군과 요동군을 기습 공격해 성곽을 불사르고 2,000여명을 죽이거나 사로잡았다.

이에 놀란 요동태수 채풍이 다급하게 군사를 거느리고 신창(新昌)으로 나와 싸웠지만, 고구려군의 예봉을 당해내지 못하고 전장에서 살해되었다. 공조연 용단, 병마연 공손포가 몸으로 채풍을 보호했지만 끝내 막아내지 못하고 모두 죽었다고 하니 당시 상황이 얼마나 급박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한(漢)으로서는 치욕스러운 패배였고 고구려로서는 대(對) 중국 투쟁사에 길이 남을 전설적인 승리였다.

2세기 말에도 후한은 격동의 시기로 대규모의 ‘황건족 반란’이 일어났고 선비족들이 끊임없이 공격해왔다. 이러한 복잡한 정세 속에서 현토군의 한 하급관리였던 공손도가 189년에 요동태수로 임명되었다. 그는 요동에 오자 자신의 출신과 경력이 미천하다는 것을 알고 업신여기는 토호들을 가혹하게 탄압하면서 요동, 요서, 산동 반도의 일부까지 통제하는 큰 세력으로 성장했다.

고구려의 서안평 공격과 위의 고구려 침입 경로.


공손도는 자기 역량이 미약했던 초기에는 고구려와 협력하여 요하 서쪽 법고현 서북쪽 일대에 있는 ‘부산적’을 공격하여 승리를 취하기도 했다. 그러나 때마침 고구려에서 197년에 고국천왕이 죽고 왕위문제로 어수선해지자 과거의 은혜를 배신하고 고구려를 침공하다가 대패한다.
공손도가 대패하여 물러났지만 이들에게 배신을 당한 고구려는 그들의 재침을 방지하기 위해 198년에 연나부지역에 환도성(국내성)을 쌓고 방비를 강화하였다. 204년에 공손도가 죽고 그 아들 공손강이 그 뒤를 이었다. 그는 197년의 침공실패를 만회하려고 집권하자마자 고구려에 대한 새로운 침략전쟁을 일으켰으나 또 다시 실패한다. 공손 씨의 세력이 고구려를 계속 압박하자 고구려는 서북지방의 주요길목과 그 부근의 성들을 새로 쌓거나 보수하였으며 산상왕 13년(209)에는 수도를 국내성으로 옮기기까지 한다.

<중국 삼국(오, 초, 위)시대의 강자 고구려>

220년, 중국에서는 후한이 망하고 나관중의 『삼국지』로 유명한 위나라(220-265), 촉나라(촉한 221-263), 오나라(222-280)로 분리된다. 공손강의 아들 공손연은 위나라와 오나라 간의 대립을 이용하여 서기 237년에 자립하여 국호를 연이라고 했다. 이때 위나라의 왕은 조조의 아들 조비였다.

조비는 관구검을 유주자사로 임명하여 공손연을 공격케 했으나 쉽게 승부가 나지 않자 238년 제갈량의 숙적이자 위나라 최고의 전략가인 사마의를 파견하여 공손 세력을 멸망시켰다. 사마의가 공손연을 격파할 수 있었던 것은 고구려의 동천왕이 주부와 대가로 하여금 수천 명을 이끌고 사마의를 지원토록 했기 때문이다.

문제는 위나라의 배신이었다. 연나라가 멸망하자 위나라는 약속을 어기고 고구려가 차지한 지역까지도 내놓을 것을 요구했고, 동천왕은 이들의 배신을 응징하기 위해 239년부터 240년 사이에 요동군의 북부와 남부에 대한 공격을 감행했다. 242년에는 요동군 서안평현에 다시 진격하여 현성을 함락시켰다.

서안평은 현재의 신의주 바로 건너편인 요녕성 단동현 구련성공사 첨고성(尖古城)으로 추정되는데 이곳은 북한과 요동을 이어주는 길목으로 지금도 이곳을 따라 심양과 장춘으로 연결되는 철도가 놓여 있을 정도로 중국에 있어 중요한 요충지이다.

중국의 길목을 점령당한 위나라는 곧바로 관구검으로 하여금 즉시 반격하여 고구려 정벌에 나서도록 했다. 이 당시에 현도태수 왕기와 선비족 계통으로 유명한 흉노계열의 오환의 병력도 합세했다. 이들에 대항하여 동천왕은 철기군(개마무사) 5,000명을 포함하여 20,000명의 대군을 동원했다.

한국의 각궁(15세기), 한국의 전통 활은 그 휘는 정도가 만궁 중에서 가장 심하며 활줄을 풀었을 때 거의 완전한 원을 이룬다.
일반적으로 고구려의 1차 저지선은 양맥 지방이었는데 관구검의 군대는 이곳을 쉽게 통과한 후 비류수(혼강 상류)에서 고구려군과 대치했다. 그러나 지형지물을 적절하게 이용하는 고구려군에게 3,000여 명의 사망자를 내는 등 대패하고 오던 길로 후퇴했다. 고구려군은 위군을 추격하여 양맥 골짜기에서 다시 위군 3,000여 명을 섬멸하면서 계속 추격했다.

이때 고구려로서는 천추의 한을 일으키는 대악수가 두어진다. 동천왕이 위군의 추격에만 급급하여 철기군 5,000명만 데리고 쫓아가다가 위군의 역습에 밀려 오히려 대패한 것이다. 원래 대오를 잃고 마구잡이로 도망치는 군대를 섬멸하는 것은 기병의 몫이지만 기병이 단독으로 보병진지에 정면으로 돌격한다면 상황이 어떻든 항상 위험해지는 것이 전투의 기본 상식이다. 그런데 동천왕은 위군이 궤멸 직전이라 판단하고 기병만으로 추격에 앞장섰다가 위군의 역습을 받아 대패한 것이다. 이 부분은 후에 다시 설명한다.

고구려의 철기병은 구성 요원 자체가 고구려의 상층부 인원으로 고구려의 주력부대라고 볼 수 있으므로 이 패배는 고구려로서는 치명적이었다. 다행한 것은 관구검도 고구려를 더 이상 공격하지 못하고 철수했다는 점이다.

그러나 관구검은 다음해 10월 군사를 재정비하고 또 다시 공격해 왔다. 이때 고구려의 수도인 국내성이 점령되고 동천왕은 국가 지도부만 데리고 곧바로 함경도 산맥지역인 옥저로 피신하는 등 고구려의 운명이 풍전등화와 같았다.

승세를 잡은 관구검은 고구려를 완전히 멸망시킬 기회라고 판단하고 현도태수 왕기를 시켜 동천왕을 추격케 했다. 왕기의 추적은 집요하여 드디어 동천왕은 황초령 부근으로 추정되는 곳에서 왕기의 한 부대에게 포착되었다. 공격을 받은 고구려군은 산산이 흩어졌는데 동부 출신 밀우가 결사대를 이끌고 추격군 속으로 돌격하여 적을 저지했다. 덕분에 동천왕은 고개를 넘어 도주할 수 있었다.

패잔병을 수습하여 진형을 갖춘 동천왕은 특공대를 보내 밀우를 구해오게 했는데 다행하게도 밀우는 부상을 입고 적진 속에 쓰러져 있다가 구출되었다. 동천왕이 결코 장병들을 헛되게 죽이지 않는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자 장병들의 사기가 올라가지 않을 수 없었다.

이때 고구려의 유유가 계교를 냈다. 유유는 음식을 준비하여 적장을 찾아가 항복의사를 밝혔다. 적장은 유유의 항복을 진심으로 믿고 그를 맞이하자 유유는 음식을 꺼내면서 그릇 속에 감추었던 단검을 꺼내 적장을 찔러 죽이고 자신도 그 자리에서 자결했다. 지휘관을 잃은 현도군은 후퇴했고 동천왕은 포위를 벗어날 수 있었다.

왕기는 그 뒤에도 동천왕을 계속 추격했지만 숙신 땅의 경계(간도 지방으로 추정)에서 회군했다. 왕기가 철수하자 동천왕은 수도로 귀환했으나 고구려의 근거지인 국내성과 그 일대는 크게 파손된 상태였다. 새 근거지를 위해 동천왕은 평양을 개발ㆍ육성했는데 이것이 나중에 평양이 고구려의 수도로 성장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설명이다.

위나라는 259년에도 울지해로 하여금 고구려를 공격케 했지만 고구려의 기병 5,000명에게 양맥골짜기에서 공격을 받아 8,000여 명이 살해되는 등 대패한다. 이와 같이 고구려가 위나라와 쫓고 쫓기는 혈투를 계속했다는 것은 고구려가 동북 지역에서 중국과 대등한 제국으로 성장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고구려의 기본 전력>

고구려가 사상 최강의 국가로 발돋움할 수 있었던 것은 우선 기본 전력이 타국에 비해 앞섰기 때문이다. 한민족의 장기인 활, 화살 등 기본 장비가 중국보다 월등했다. 특히 안장 밑에 다는 발받침인 등자를 사용하여 화살을 전후좌우로 발사할 수 있는 파르티안 기사법을 구사했다. 또한 이들 기본 전력을 보다 극대화시킨 개마무사도 활용했다. 이들 기본 전력을 먼저 설명한다.

① 맥궁(각궁)

고구려 고분벽화인 무용총에서 말을 타고 동물들을 사냥하는 무사들의 활은 각궁으로 만궁 중에서도 예맥각궁(복각궁)과 형태가 매우 흡사하며 동 시대 중국이 사용하던 활과는 분명하게 구분된다.

활은 모양에 따라 직궁(直弓)과 만궁(彎弓)으로 구분한다. 직궁은 탄력이 좋은 나무를 적당한 길이로 잘라 양쪽에 줄을 걸어 약간 휘게 만든 단순한 형태의 활이다. 이에 비해 만궁은 활줄을 걸치지 않을 경우 보통 활이 휘는 방향과는 반대로 뒤집어져 휘게 된다. 활줄을 풀었을 때 만궁이 뒤집어져 휘는 각도가 활에 따라 다른데 한국의 전통 활인 ‘국궁’은 그 휘는 정도가 만궁 중에서도 가장 심하여 활줄을 풀었을 때 거의 완전한 원을 이룬다.

훈족(흉노)의 기마 전투 장면, 고구려의 수렵도에서의 무사와 같은 활을 사용하고 있다(이탈리아 아퀼레이아 소재 크리프타 아프레시 교회의 프레스코 벽화).


이런 만궁을 누가 처음으로 사용했는지에 대해서는 아직 정확하지 않지만 한국인의 조상인 예맥인으로 추정한다. 고대 중국인들이 예맥(濊貊)인을 부르는 호칭인 동이(東夷)의 ‘이(夷)’자는 ‘큰 대(大)’자에 ‘활 궁(弓)’자를 연결한 것으로 ‘사람이 활을 쏘는 모습’으로 설명하기도 한다.

활에 관한 한 고대 한국인들의 기술은 대단하여 우선 『진서(晉書)』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돌로 만든 살촉과 가죽과 뼈로 만든 갑옷, 석자 다섯 치의 단궁과 한 자 몇 치쯤 되는 길이의 고시가 있다. 그 나라의 동북쪽에 있는 산에서 산출되는 돌은 쇠를 자를 만큼 날카로운데 (그 돌을) 채취하려면 반드시 먼저 신에게 기도해야 한다. 주(周) 무왕 때 그 고시와 석노를 바쳤다.’

또한 『삼국지』〈위지동이전〉에 나오는 활과 화살에 대한 기록만 해도 다음과 같다.

〇 부여(夫餘) : 활ㆍ화살ㆍ칼ㆍ창을 병기로 삼고 집집마다 갑옷과 휴대 가능한 무기를 갖추고 있다.

〇 고구려(高句麗) : 고구려의 다른 성이 작은 물에 의지하여 나라를 세우고 그 이름을 소수맥이라 하였다. 소수맥은 좋은 활을 생산했는데, 이른바 ‘맥궁(貊弓)’이란 것이 그것이다.

〇 읍루(挹婁) : 그곳 사람들은 활쏘기에 뛰어나 사람을 쏠 때에는 모두 눈을 적중시킨다. 화살에는 독이 칠해져 있기 때문에 적중되면 모두 죽는다.

〇 예(濊) : 낙랑의 단궁(檀弓)이라 불리는 활은 이 땅에서 생산 된다.

〇 진한(辰韓) : 진한은 국명을 방(邦)이라 하고 궁(弓)을 호(狐)라 부른다.

『진서(秦書)』에 의하면 ‘고구려는 부견이 즉위하자 사신을 파견하여 낙랑단궁을 보냈다.’라는 기록이 있다. 여기에서 낙랑단궁은 맥궁과 같은 것으로 추정한다. 당시 중국인들이 낙랑이라고 할 때의 낙랑은 한사군 중의 낙랑군이 있던 곳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한반도 전체를 가리킨다.

각궁은 물소의 뿔로 만들어진다. 열대에 사는 동물인 물소는 과거에도 고구려 등 기마민족이 있는 북방지역에서는 살지 않으므로 물소 뿔은 결국 지금의 태국이나 베트남, 중국 남부에서 수입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학자들은 이 사실을 들어 과거에도 우리 선조들이 이들 지역과 활발한 무역을 했음이 틀림없다고 설명한다.

물소뿔을 구하기 힘든데도 불구하고 활의 기본 재료로 사용한 것은 물소뿔을 활채의 안쪽에 붙여서 활을 당겼을 때 당시에 어떤 재료보다도 탄력이 좋고 오래 활용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물소뿔은 가공하기도 좋고 활채의 한쪽 마디를 이음매 없이 댈 수 있을 정도로 길이가 길었다.

물론 각궁의 강력한 힘의 비밀이 반드시 물소뿔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각궁은 활채의 바깥쪽에 소의 힘줄을 붙이는데 이 힘줄은 활을 당겼을 때 강한 인장력으로 활채를 당겨서 활이 부러지는 것을 막고 활의 복원력을 극대화시켜준다고 민 승기는 적었다.

여하튼 일반적으로 각궁을 만드는데 최소한 5년 이상이나 걸리는 등 제작하는 것이 매우 어렵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럼에도 고구려에서 이들 활을 사용한 것은 크기가 작아 다루기가 편리한데다가 위력이 대단하기 때문이다.

고구려의 활은 기병용과 보병용이 다소 다른데 기병용은 보통 80센티미터(다 폈을 때의 길이이므로 실제로 사용할 때의 길이는 60센티미터), 보병용은 120〜127센티미터 정도이다. 위력은 사수의 힘에 따라 큰 차이가 나지만 가까운 거리에서는 갑옷도 꿰뚫는다. 어떤 장수는 화살 한 발로 사람과 말과 안장을 함께 꿰뚫었다는 기록도 있다.

물론 고구려에서 만궁만 사용했던 것은 아니다. 고구려와 친연성을 갖고 있는 흉노(훈족)의 활동 무대에서 만궁과는 다른 한식궁(뼈(뿔)로 만든 활고자를 부착한 한나라 고유의 중형 활)도 발견된다.

『전한서』〈흉노전〉에 따르면 선제(宣帝, 재위 기원전 74~49)는 흉노의 호한연 선우에게 ‘활 한 구와 화살 네 개’를 선물했다는 기록이 있으며 후한 대에 와서도 이러한 관례는 지속되었다. 활과 화살의 숫자가 적은 것을 볼 때 두 국가 간의 의례적인 행사로 볼 수 있지만 흉노가 어떠한 방법으로든 한식궁을 도입했다면 고구려도 이들 활을 사용했을 가능성도 있다고 임용한 박사는 적었다. 특히 고구려가 한군(漢軍)과의 수많은 전투 과정에서 한식궁을 노획하여 이를 사용했음직도 하다. (계속)

이종호 / 과학저술가

(국정브리핑 2005-7-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