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해 재건을 꿈꾼다 <무영검> 중국 로케이션 현장

<와호장룡>이나 <영웅>, <연인> 같은 호쾌하고 화려한 액션 무협물이 한국에서도 나올 때가 됐다. 927년 발해의 격변기를 살았던 슬픈 영웅들을 그리는 <무영검>의 중국 촬영현장을 찾았다.

발해의 마지막 왕족 대정현(이서진)을 비호하는 호위 무사 연소하(윤소이)가 발해를 멸망시키려는 음모에 맞선다. 거란군의 핵심 세력 군화평(신현준)과 매영옥(이기용)은 끈질기게 정현과 소하의 뒤를 쫓고, 피비린내 나는 싸움의 덧없음을 깨닫고 왕위를 거부하던 정현은 점차 자신의 의무가 무엇인지 깨닫게 된다.

927년 발해. 아직까지 한국영화에서 보여진 적 없는 낯선 시공간. 중국 동쪽과 한반도 북쪽에 위치했던 이 나라는 과연 어떤 이미지로 그려질까. <비천무>로 데뷔했던 김영준 감독의 두 번째 작품 <무영검>은 2월 14일 크랭크인한 후 지금껏 영화의 디테일을 꼭꼭 숨긴 채 촬영 회차만 100회를 훌쩍 넘어설 정도의 강행군을 거듭해 왔다. 지난 5개월 동안 장이모우의 <영웅>을 찍었던 횡점 세트장, 베트남 근처 고원 지대의 리장 세트장, 신창 세트장 등을 거치며 각기 다른 컨셉과 스타일의 무수한 액션 신을 완성한 <무영검>은, 요즘 중국 무석 세트장에서 영화의 하이라이트가 될 홀한성 전투 신을 남겨둔 채 막바지 촬영에 박차를 가하는 중이다.

7월 4일 중국 상하이 공항에 내려서는 순간 훅 끼치는 습한 더위는 각오했던 것 이상이었다. 수은주는 이미 38도를 기록하고 있었고, 지긋지긋한 한국의 장마마저 그리워질 지경이었다. 무석 세트장으로 향하는 버스 안에서 바라본 마을 주민들은 대부분 반바지 하나만 달랑 입은 채 버스가 오거나 말거나 상관없다는 듯 나른하게 도로 한복판을 활보했다. <무영검>은 이런 악조건 속에서 어떻게 촬영을 강행하고 있는 걸까. 근심스런 마음으로 도착한 현장에서 마주친 스탭들의 모습은 의외로 활기찼다. 일주일 뒤면 무려 6개월만에 한국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설레임 때문인지 살인적인 무더위 속에서도 유쾌하고 기민하게 움직인다.

가장 힘들어 보이는 사람들은 아무래도 배우들이다. 특히 엑스트라 전원은 현지인들을 기용하고 있는데 영화 속 배경이 겨울이다 보니 두꺼운 털가죽 옷에 풀어헤친 머리, 털모자 등으로 완전무장한 채 모닥불까지 쬐고 있어야 하는 설정이다. 카메라가 멈추는 그 순간 바로 나무 그늘부터 찾아들어 머리에 물수건을 얹고 아예 누워버린다. 거란군에게 점령당한 발해의 국경 외곽 마을을 둘러보며 슬픔에 잠기는 장면을 촬영 중인 두 배우 이서진과 윤소이 역시 중국풍 겨울 의상을 겹겹이 입은 채다. 리허설이 한 번 끝날 때마다 땀으로 번들거리는 배우들의 얼굴을 수정하는 의상팀과 분장팀의 손길이 바쁘다. <다모> 때부터 퓨전 액션 사극의 로맨틱한 주인공으로 강렬하게 각인된 이서진과, <아라한-장풍대작전>에서 격렬하고도 섬세한 액션 연기를 선보였던 윤소이조차 비교적 단순하고 정적인 오늘의 촬영 신이 가장 힘든 것 같다고 하소연할 정도다. 가능한 한 빨리 낮 장면을 마치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같지만 구름 속으로 수시로 사라지는 태양 때문에 촬영이 자꾸만 늦춰진다. 초조해진 서근희 촬영감독과 송재석 조명감독은 자주 카메라 앞에서 뛰쳐나와 해리슨 팬(harrison pan, 관측 글래스의 종류)을 눈에 대고 태양 광선을 가늠한다.

시나리오와 프로모 테이프만으로도 <반지의 제왕>을 제작했던 뉴라인시네마 측을 매혹시킨 <무영검>은 한국영화로는 최초로 뉴라인 시네마의 선 투자와 더불어 북미 전역 개봉이라는 활로까지 뚫어놓은 상태다. 여기에 또 하나의 중요한 성과가 있었으니, 중국 올 로케이션과 함께 진행된 중국과의 조화로운 협업이다. 최근 아시아 국가 간의 합작이 잦은 상황에서 <무영검> 로케이션 촬영은 주목을 요하는 부분이다. 지금이야 촬영 막바지이기 때문에 많이들 돌아갔다고 하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현장에 있던 200여 명의 스탭 중 120명이 중국 쪽 스탭이었다. 그러니까 조명과 카메라, 소품, 미술, 의상, 무술 분야에서 한국과 중국의 양쪽 스탭들이 공동 작업을 진행하는 합리적인 운용 모델의 가능성을 열어놓은 셈이다.

아쉬운 건 이번 현장에서 중국 최고의 무술감독으로 칭송받는 마옥성의 액션 연출을 볼 순 없었다는 것. <비천무>에도 참여했던 마옥성은 <동방불패>나 <천녀유혼>의 무술팀을 이끌었던 장본인이다. 주연배우들은 지난 10월부터 우슈 국가 대표 출신 박찬대 무술감독으로부터 혹독한 무술 훈련을 받은 뒤 마옥성의 특별 지도를 거치면서 액션의 미학적 날을 더욱 세울 수 있었다고 한다. 윤소이 역시 “소하와 영옥이 붉은 천을 사이에 두고 대결하는 장면과 와이어를 맨 채 수중에서 격렬한 전투 신을 소화했던 장면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며 호기심을 부채질한다. 김영준 감독은 데뷔작이었던 <비천무>에서의 아쉬운 시행착오를 거울삼아, 그리고 <비천무>에서 시도하지 못했던 호쾌한 상상 속의 이미지를 이번에는 제대로 구현해볼 수 있었다며 "행복하고 자신 있다"고 다부지게 말한다. 하늘과 땅뿐 아니라 물까지 이용한 새로운 무협 액션을 보여 줄 것이라는 포부를 확인하기 위해선 조금 더 기다려야 할 것 같다. 그 파워풀한 이미지를 스크린에서 볼 수 있는 건 11월 경이다.

"한국 액션은 절제와 리얼리티"

김영준 감독 인터뷰

어떻게 시작하게 되었나?

발해는 200여 년이라는 짧은 역사를 누렸지만 고구려 이후 유일하게 중국에 당당하게 맞섰던 강한 나라이기도 하다. 발해의 세자가 살해당했던 실제 사건에 관한 글을 읽다 ‘만일 세자가 하나 더 있었으면?’ 하는 질문을 떠올리게 되었다.

여성 호위 무사라는 소재가 독특하다.

특정 인물을 지켜야 한다, 혹은 없애야 한다는 한 가지 목표만 입력되어 있는 터미네이터의 설정이 <무영검>과 결합되면서 소하의 캐릭터가 구체화됐다.

제목은 무슨 뜻인가?

검의 그림자가 보이지 않을 만큼 속도가 빠르다, 혹은 맑고 투명한 정신이라는 뜻이다.

<비천무> 이후 또다시 무협을 선택했는데.

<비천무>는 한국에서 거의 20년만에 만든 무협물이었다. 모든 것이 처음이었고 모험이었기 때문에 많은 걸 시도하지 못했다. 그때 쌓였던 노하우가 버려지는 게 아깝기도 했다. 지금은 무협 액션 판타지에 길들여지고 액션에 대한 관용도가 확장된 젊은 관객들이 많아졌다. 형태에 대해선 부담이 없어졌고, 펼치면 된다고 생각한다. <비천무> 때보다는 오히려 액션보다 드라마를 중요시하며 진행하고 있다.

뉴라인시네마의 선 투자와 북미 개봉 때문에 부담은 없는지?

아무래도 서구 관객들의 시선을 배제할 순 없다. 홍콩이나 미국 액션은 화려한 판타지를 선호하지만 한국적인 액션은 절제와 리얼리티를 중시한다. 어떤 방향으로 갈 것인지 고민을 많이 했고, 결국 수위를 조절했다. 특히 수중 액션은 어느 영화에서도 나오지 않은 독특하고 새로운 느낌을 줄 것이라 기대한다.

(필름2.0 / 김용언, 김선태 기자 2005-7-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