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제국은 이미 해체 수순을 밟고 있다"

알카에다가 지난 19일 인터넷 성명을 통해 "1개월 내 이라크 철군하지 않으면 유럽 국가를 또 공격하겠다"고 발표하는등 서구가 이라크 침략의 결과를 톡톡히 치르고 있는 가운데 26일 중국 베이징(北京)에서는 제4차 6자회담이 열린다. 끝나지 않는 이라크 전쟁과 심화되는 이슬람 세력의 급진화에 미국은 과연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또 미국이 2개의 전선을 만들 수 없는 상황에서 모처럼 성사된 6자회담의 평화 무드를 한반도가 어떻게 전략적으로 이용할 것인가. 김민웅 프레시안 기획위원과 박노자 교수가 18일 <프레시안> 사무실에서 만나 약 2시간에 걸쳐 이야기를 나눴다. 오늘날 세계의 기류를 읽는 데에 큰 도움이 될 이 대담을 소개한다. <편집자>
  
  "이라크는 미국이 스스로 판 '무덤'"
  
  김민웅(이하 김) : 오늘날 미국 문제는 미국으로 끝나는 게 아니다. 세계 인류의 앞날을 결정하는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 베트남 전쟁 때만 해도 미국 제국주의의 본질에 대한 논쟁과 인식이 일부에 국한됐지만 이라크 전쟁까지 이른 지금은 보다 광범위한 차원에서 논의되고 있다. 이라크 침략전쟁의 과정 전체가 미국 제국주의 정책과 식민지배 전략의 한계를 압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혹자는 이라크 전쟁이 미국의 발목을 잡는 '수렁'이라 하지만 이는 미국이 스스로 판 '무덤'이다. 이라크 침략이 미국의 힘을 키워주기는커녕 부메랑처럼 '미국 제국주의의 해체'를 촉진시키고 있지 않은가 보인다. 이런 현실 앞에서 미국은 자신의 진로를 새롭게 결정하지 않을 수 없는 갈림길에 있는 것 아니겠는가?
  
  박노자(이하 박) : 미국이라는 세계 패권 국가의 내부 구조가 가진 문제의 소산이다. 미국은 일부 재벌들이 정치자금을 통해 행정부의 정책 결정에 과도한 영향을 끼칠 수 있는 구조적 결함을 안고 있다. 이번 이라크 침략의 경우 이라크 약탈에 동참해 이득을 보는 재벌은 핼리버튼 같은 극소수이고, 전체적으로는 득이 되지 않음에도 이러한 결정으로 제국 해체의 촉진제가 되는 계기를 스스로 만들었다.

그러나 핼리버튼의 돈을 받아먹는 딕 체니 같은 정치인을 막을 수 있는 구조의 부재 자체가 제국의 구조적 약점이다. 실제로 이라크 침략 직전만 해도 일부 CIA와 펜타곤 관리들이 이 침략은 결코 성공할 수 없다고 경고했고, 미국 안에서도 침략 반대 목소리가 있었음에도, 결국 침략을 막아내지 못한 것은 미국의 정책 결정과정이 얼마나 심각한 모순을 갖고 있는가를 드러내는 것이다.
  
  김 :바로 그러한 모순이 지금 적나라하게 나타나고 있다. 앞서 언급했듯 제국이 자신의 위력을 강화하려 하면 할수록, 역설적이게도 오늘날의 세계체제 안에서 제국의 해체를 스스로 앞당기는 과정에 들어가게 된다. 동시에 주목해야 할 것은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일극적 패권 체계에 경쟁적으로 도전하고 이를 무너뜨리려는 다극화된 국제적 질서가 빠르게 전개되고 있다는 점이다. 아메리카 제국의 관리역량이 내외적으로 약화돼가는 셈이다.
  
  미국의 진보적 역사학자 윌리암 애플만 윌리암즈(William Appleman Williams)가 쓴 <미국외교의 비극(Tragedy of American Diplomacy)>에서 강조됐던 것처럼, 미국은 지금 자신이 처해 있는 외교적 비극과 모순에 대한 인식이 부재하거나 또는 혼돈에 빠져 있다. 안타까운 것은, 베트남 전쟁 당시처럼 미국의 대외정책에 비판적인 목소리를 내 왔던 힘들이 지금은 잘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지난 시기 사실 미국에는 반동적 성격의 보수화가 상당히 빠르게 전개돼 왔고, 이러한 흐름에 안주해버리는 경향이 높아졌다.  막상막하의 대치를 보이기는 했으나 부시를 둘러싼 미국 사회 내부의 대립은 미국의 대외노선을 바꾸는 데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지 못하고 있다. 
  
  김민웅 "미국, 빠른 속도로 늙어가" 박노자 "미국 무기생산 경제 곧 파국"
  
  미국에서 20여년 살았지만 미국은 지금 빠른 속도로 '늙은 사회'가 되어가고 있다. 물론 그간 엄청난 역량 축적이 있었기 때문에 당장 흔들리는 것은 아니지만, 변화를 추구하는 사회적 역동성도 매우 약해지고. 비판적 사회 운동의 열정도 소멸돼버린 상태다. 그래서 자신의 미래를 어떻게 감당해야 할지 잘 모르는 상태에 들어서고 있는 게 아닌가 싶다. 미국은 지금 새로운 모델로서의 매력을 잃어가고 있으며, 인류의 희망을 훼손시킬 뿐인 제국주의적 기득권을 놓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노쇠한 제국의 역사'를 반복하고 있다. 역사의 엄중한 교훈을 경청하지 않은 것이다. 

박 :마르크스주의적으로 접근한다면, 지금 지적하신 '미국의 역설'은 바로 '지속적인 무기생산 경제의 함정'이다. 미국의 패권적 위치의 기반은 물리력이었다. 미국이 세계의 패권을 잡은 계기도 역시 제2차 세계대전이라는 고도의 살육이 끝난 뒤였고. 결국 미국이 이라크 침략을 감행하게 만든 게 소수의 재벌인데, 이들이 무기생산을 통해 미국 산업경제의 한 축을 뒷받침하고 있다. 미국의 군산복합체가 떠받드는 무기생산 경제는 미국에서 일종의 자본주의적인 경쟁의 완충지대다. 경기가 침체되면 무기생산 경제를 통해 회복시키는데 그 무기생산을 촉진시키는 데 필요한 것이 전쟁이다. 그런데 결국 그것이 자본의 고갈과 제국의 고립, 궁극적으로 제국의 약화와 몰락을 이끌 것이다. 이것이 '지속적 무기생산경제'의 함정이다. 지금 미국이 완벽하게 그 함정에 빠져있는 게 아닌가 한다.
  
  더구나 미국은 현재 생산기지가 중국, 인도 등으로 많이 이전돼 생산이 상당히 공동화된 상태다. 금융자본의 중심지라지만 외자를 부단히 끌어들여 금융을 메꾸고 있고. 이 상태로 무기생산 체제를 계속 유지하는 것은 궁극적인 파국으로 치닫는 길이다. 그러나 미국 재벌들은 쉽게 진로 이탈을 할 수 없고, 브레이크와 출구가 없어 파국으로 달려가고 있는 형편이다. 제국 몰락의 불가피성의 근거가 바로 지속적 무기생산의 구조적 모순이다.
  
  게다가 미국은 대안적 이데올로기를 생산하지 못할 뿐 아니라, 생산해도 대중화시키지 못하고 늘 탄압해서 주변화 시키는 사회다. 100년 전에 유진 뎁(Eugene Debs)같은 사회주의자가 대선에 출마하면 100만표를 얻던 시절도 있었고, 제2차 세계대전 때만 해도 미국 공산당이 수만명에 이르렀는데, 미국이 패권국가가 돼가면서 대안적 이데올로기를 집중 해체하고, 매카시즘을 통해 대안세력을 실제로 무력화시켰다. 지적하신 역동성의 상실이 바로 이것이다. 베트남 침략 반대운동 때 일종의 대안 이데올로기가 어느 정도 생산됐지만, 재벌 미디어 등이 지배하는 사회에서는 그것은 게토화되고 분열된다. 환경운동, 여성운동으로 부문화되면서 전체적인 대안 이데올로기로 기능하지 못하는 것 같다.
  
  미국의 '자승자박'
   
  김 :미국의 세계적 패권국가로서의 사상적 한계가 확인되는 현실을 한번 주목해보자. 미국이 베트남 전쟁의 교훈을 받아들이는 방식은 크게 두 가지다. 오늘날 신보수주의자들의 논리인 우파적 견해는 '전쟁에서 패배해버린 것만이 유일한 교훈'이라는 관점이다. 일본의 우파들이 태평양 전쟁을 인식하는 방식과 일맥상통한다. 충분히 이길 수 있는 전쟁이었는데, 힘을 제대로 쓰지 못한 전략적 오류를 비판적으로 돌아봐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베트남 전쟁 이후 미국 사회에 집단 무의식화한 '패배주의'를 극복하는 것이 미국의 국가적 정체성을 새롭게 하는 길이라는 것이다. 자신의 군사력을 과감하게 사용하는 것에 주저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에 따르면 제국의 압도적 지위를 힘으로 회복하는 것이 답이다. 이라크 침략은 이 답의 현실적 실천이다. 

진보적 입장에서 바라보는 베트남 전쟁의 교훈은 다시는 미국의 젊은이들을 그와 같은 식민지 전쟁에 희생시킬 수 없다는 것이다. 미국의 제국주의 정책과 본질에 대해 논란을 제기할 수 있는 인식이었다. 그러나 현실에서 이런 논리는 베트남 전쟁의 민족해방적 성격을 강조하거나 제3세계의 희생을 주목하기보다는, 정당하지 못한 전쟁에 미국인들을 희생시킬 수는 없다는 쪽으로 기울고 말았다. 말하자면 어디까지나 자신들의 희생이 더 중요한 것이다. 제3세계 인민들의 희생을 절박하게 여기거나 전쟁의 성격을 신랄히 규명해 미국의 체제적 본질에 대한 질문을 계속하진 못했다.
  
  물론 미국에서 비판적 논의를 주도하고 있는 지식인이나 사회운동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대중적인 영향력은 크지 않다. 미국 대중의 의식이 이렇게 된 데에는 아무래도 1950년대의 매카시즘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흔히들 매카시즘을 '빨갱이 아닌 사람을 빨갱이로 몬 정치사회적 선동과 조작'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으나 보다 중요한 대목은 매카시즘 정치를 통해 미국의 좌파 또는 진보운동의 맥과 숨통을 끊어버린 것이다. 이것이 유럽의 경우와는 달리 사회주의 세력을 약화시키고 좌우 논쟁의 생산적 발전을 가로막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아까 박 선생께서 '유진 뎁'을 언급하셨지만, 사실 미국은 <노동절>을 만든 역사를 갖고 있을 뿐만 아니라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사회주의 운동이 맹렬하게 전개되던 나라였다. 세계적 대공황기에 미국 공산당은 사회적 안전망의 확충과 노동자들의 삶의 질을 바꿔나가는 노력을 통해 미국사회를 진보시키는 데에 역동적 에너지를 공급했고, 미국의 제국주의적 모순에 대해 비판하고 견제력을 발휘하는 역할을 한 바 있다. 미국이라는 자본주의 체제에서 일어났던 이 진보운동의 맥락은 미국의 다른 면모를 우리에게 일깨우고 있으며, 이 과정에서 형성된 중요한 논의와 운동의 성과는 오늘의 미국을 새롭게 살려내는 데 중요한 의미를 가질 수 있다. 스탠리 아로노위즈(Stanley Aronowitz) 같은 진보적 사회학자는 이러한 미국의 노동운동 내지 진보적 사회운동의 기초를 회복하는 작업에 힘을 기울이고 있다. 
  
  그러나 이런 역사를 갖고 있고 일부에서 주목할 만한 노력이 진행되고 있음에도, 오늘날 미국 사회는 세계가 다음 시대를 새롭게 전망하면서 기대를 걸 수 있는 대안 이데올로기를 제출하고 내부에서 끊임없이 노선 교정을 시도할 수 있는 능력을 상당 정도 잃어버렸다. 그나마 앞섰다고 여겨지는 정치적 세력들은 어떻게 세계인류와 공생하면서 평화롭고 정의로운 미래를 만들어갈 수 있을까 고민하고 미국의 제국주의적 본질을 해체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게 아니라, 가급적 미국인들의 희생은 줄이는 선에서 논의의 가닥을 잡아나가는 한계를 보이고 있다. 
  
  그렇지 않아도 최근 미국은 자신의 대외군사전략의 틀을 수정하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두 개의 전선에서 동시에 승리'하겠다는 전략적 원칙을 포기하고, 한 개의 전선으로 역량을 집중시키겠다는 것이다. 사실 이것도 제국주의에 대한 본질적인 수정은 결코 아니고 현재의 역량이 가진 한계를 감안해 희생을 줄이는 방향으로 푸는 것일 뿐이다. 때로 미국이 외교적 해법을 강조하고 나서기도 하는데, 외교란 전쟁을 막기 위한 과정이기도 하고 전쟁으로 가는 길을 여는 선택이기도 하다. 미국은 후자 쪽에 보다 많은 힘을 쏟아 왔다는 것은 이라크의 경우에서도 확인되는데, 여러 가지 국제정세의 변화로 인한 압박을 미국이 어떻게 풀어나갈 것인지 주목된다. 거듭 강조하거니와, 문제는 미국이 자신의 체제적 본질에 대한 직시와 비판적 극복의 과정을 통과하지 못할 경우 선택하게 되는 일체의 해법이 미국의 세계적 처지를 점점 더 어렵게 만들고 말 것이라는 점이다. 
  
  박 :미국 노조의 역사가 비극적인 게 100년 전만 해도 IWWIWW(Industrial Workers of the World, 세계산업노동자동맹 : 1910년대를 중심으로 활약한 미국 최초의 노동조합)처럼 전투적이고 반체제적인, 자본주의 체제 전복을 목적으로 하는 노조가 있었지만 1차대전 중 공권력에 의해 많이 해체됐다. 그렇게 해체된 뒤 지금의 AFL-CIO는 개량주의로도 볼 수 없고 기득권화돼서 거의 미 제국주의의 하수인 역할을 하고 있는 형편이다. 특히 남미와 중미의 진보 노조를 무력화하고 보수적인 노조를 심기에 급급한 CIA의 보조원으로 전락한 노조다. 미국 진보주의의 대중적 기반은 현재 거의 상실됐다.
  
  그리고 정치적으로는 민주당이 일부의 개량주의적 진보주의자를 자장으로 끌어들여 진보주의자들을 분열시키고 급진파를 주변화해 몰락시켰다. 이데올로기 분야를 보더라도 실제로는 가장 급진적인 노암 촘스키 같은 이데올로그도 자본주의의 발전적 해체와 대안적 세계에 대해서는 분명하게 말하지 못하고 있다. 제국에 대한 비판은 하지만 제국의 해체는 말하지 못하고 현존 세계체제의 해체와 대안적 세계체제의 창출에 많은 관심을 보이지 않는 것은 저들 이데올로기의 근본적 약점이 아닌가 싶다.
  
  김 :노암 촘스키가 대안적 세계의 논의에 다소 한계를 보인다는 지적에 일견 동의하면서도, 그가 하고자 하는 작업의 일차적 의미는 미국 제국주의가 입고 있는 이데올로기의 허상을 벗겨내고, 그 권력 질서의 모순을 해부하는 것에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우선 그러한 비판적 분석과 논의가 사회적 동의를 광범위하게 얻어나갈 때 비로소 대안체계로 가는 길이 보다 역동적으로 열리지 않겠는가? 
  
  "미국을 뒤흔든 '칼 로브' 사건"
  
  최근 미국 부시 정권을 맹타하고 있는 '칼 로브' 사건은 취재원 보호를 둘러싼 언론의 자유, 국가 기밀과 관련된 안보의 문제, 부시정권의 정치적 타격 등에 대한 논란을 불러 일으키고 있다. 그러나 이 사건은 그 외에도 침략전쟁을 주도하는 권력의 위선을 폭로하고 있다. 이는 노암 촘스키의 지속적인 작업과도 연결되는데 칼 로브는 부시 재선에 중요한 역할을 했던 인물로서 침략적 정치문화를 전폭적으로 주도했던 인물의 허상이 공개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이는 미국과 부시정권의 본질적 성격을 해부하는 과제로 이어져야 한다. 부시체제가 작동해 왔던 대중 선전술의 진상이 이로써 폭로돼야 하는 것이다. 
   
  이라크 상황을 봐도 미국의 통제권은 바그다드를 벗어나서는 거의 무력(無力)한 수준이다. 저항세력의 전략도 이집트 대사의 납치와 살해사례에서 볼 수 있듯, 미국이 의도하는 이라크 신정부의 대외적 관계를 차단하고 있다. 미국만 고립되는 게 아니라 미국과 관계를 맺고 있는 나라의 고립으로까지 이어지면서 미국의 패권체제가 구축해 온 관계망이 소멸 위기에 처해 있는 것이다. 이걸 역전시킬 수 있는 수단이 거의 없다는 데에 미국의 현재 고민이 읽혀진다. 미국의 군사적 영향력이 확대되는 중앙아시아에서도 이를 견제하려는 새로운 블록이 형성되고 있다. 미국이 이토록 내외적으로 중대한 위기와 기로에 서 있음을 미국인들이 명확히 알 때 상황의 변화도 가능해질 것이다.
  
  박 :재미있는 것은 미국 내부적으로는 관타나모의 고문사건, 이라크에서 계속되는 양민 학살보다 칼 로브 사건이 미국 시민들한테 훨씬 충격적으로 다가온다는 것이다. 이 자체가 '이중 표준'이다.
  
  김 :칼 로브 사건과 관타나모 사건은 서로 분리된 것이 아니다. 칼 로브의 정치적 영향력이 주도하고 있는 미국의 현실이 바로 관타나모의 비극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 아니겠는가. 그리고 관타나모 수용소 문제를 인권유린의 차원에서만 보는 것도 문제다. 이는 인권탄압을 포함해서 침략행위의 결과와 그 증거라는 면에서 파악할 필요가 있다. 다시 강조하지만 칼 로브와 관타나모, 또는 이라크 이 두 가지를 하나의 체계 속에서 이해하는 일이 중요하다. 우리의 언론도 이 문제에 그렇게 접근할 때 국제 현실의 실상이 드러나게 될 것이다.
  
  "전세계 이슬람을 급진화시켜 테러투사로 만드는 미국"
  
  박 :미국 내에서는 칼 로브 사건이 더 충격이겠지만, 제3세계에서는 관타나모 사건이 인종주의, 군사주의, 불법행위 이 세 가지에 미국 기독교 근본주의자 특유의 이슬람 증오까지 얽혀 더 충격적이었다. 사실 관타나모와 이라크 침략은 세계 이슬람 신도들을 급진화 시키고 계속 무장투쟁의 전선으로 내몰고 있다. 다만 미국 제국주의와의 투쟁이 좀 더 미래지향적인 이데올로기의 기치 아래 진행되지 않고 불필요하고 희생적인 테러 방식으로만 분출되는 것이 안타깝다.
  
  그러나 알려지지 않아서 그렇지 실제로 런던의 수많은 이슬람 신도들이 지금 새로운 진보정당인 Respect Coalition에 가입해 있다. 이 정당은 노동당에서 뛰쳐나온 전투적 사회주의자들과 이라크 침략 반대자, 그리고 이슬람 단체들이 만든 정당연합이다. 이슬람 신도들이 사회주의자와 손잡아 진보정치에 진출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엄청난 것인데 세계는 거기에 전혀 주목하지 않고 런던 테러에만 신경쓰는 게 안타깝다. 그러나 수많은 이슬람 신자들이 사회주의 정치로 나가도 그래도 상당한 부분이 테러리즘에 치우쳐 있다. 미국이 지금같이 불법무력행위를 계속하며 인간생명을 파괴한다면 이슬람 쪽은 방법이 없다는 식으로 테러를 계속할 텐데 안타깝다.
  
  김 :테러 행위가 대안적 사회상과 연결되지 않았다고만 말할 순 없다. 물론 테러는 무고한 사람들의 목숨을 빼앗고 무모하고 불필요한 희생들을 양산하지만 테러가 절규하고 있는 메시지는 분명히 있다. 그것은 거대한 제국주의의 폭력이 종식되고 약소국의 자주와 그 구성원들의 인권, 생명, 평화를 존중하는 대안적 세계에 대한 절박한 요구다. 이 요구를 듣지 않는 세상에 대한 처절한 몸부림과 외침에 주목해야 한다. 또한 미국을 비롯한 서구 언론들이 테러에 의한 희생자들을 주목하는 것만큼 이라크에서 강대국의 국가테러로 무고하게 죽어가고 있는 무수한 민간인들의 비극도 보라는 것이 이 테러의 정치적 메시지다. 테러라는 수단의 선택 자체를 정당화하는 아니지만 이 메시지를 멸시해버릴 때 테러는 중단되지 않을 것이다.
   
  테러와 관련해 또 하나 주목할 바는, 미국의 침략전쟁이 이슬람권을 급진적화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는 단지 이라크 한 지역에 국한되지 않는다. 종국적으로 미국에게도 결단코 유익한 일이 아니다. 미국은 이슬람권 전체와 계속해서 적대적 대립을 감당할 수 있을 것인가? 절대로 그럴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미국의 전쟁행위가 엄청나게 무모한 행위였다는 점이 계속 환기돼야 한다. 세계가 이러한 인식을 갖게 될 때 테러를 불러오는 이슬람권의 깊고도 깊은 좌절감과 분노도 극복될 것이며, 테러행위도 소멸될 것이다. 원인과 결과를 은폐하는 테러방지법 같은 것으로 이러한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고 본다면 그것은 오판이거나 자기기만이다. 가령, 이스라엘에서 테러 방지책과 장치가 없어서 테러가 빈발하는가? 팔레스타인의 문제를 근본에서부터 해결하지 못해서 그런 것이 아닌가? 
   
  "서구시민들은 제국주의에 좀더 적극적으로 싸워야" 

박 :서구 시민들이 깊이 고민해야 할 것은 과연 왜 이슬람 지식인들(자살폭탄테러에 나서는 사람들은 대부분 지식인일 것) 사이에서 불특정 서구 시민을 향한 테러가 정당화되냐다. 결국 서구 대중들이 제국주의를 과연 어떻게 인식하느냐의 문제다. 알게 모르게 제국주의에 계속 부역하지 않는냐는 말이다. 과연 서구 시민들이 제국주의의 종식을 위해 어떤 노력을 하는가. 만약 서구의 대중이 제국주의에 훨씬 더 전투적으로 싸우는 모습을 보인다면 그들에 대한 이슬람의 시각도 다를 수 있다. 런던 테러 당시 한 런던시민이 놀라서 하는 말 중 하나가 '런던이 가장 이라크 전쟁 반대 데모를 열심히 했던 곳인데...'였는데 반전 데모만 가지고는 제국주의와의 투쟁에 한계가 있다. 데모는 일회적이다. 좀더 적극적인 수행방법을 고민해야 한다. 전쟁에 반대하는 정당에 대거 가입해 노동당을 대신하게 한다든가, 미 제품과 이라크 전쟁에서 이득을 보는 영국 재벌들의 제품을 보이콧한다든가 하는 행동은 생각해볼 수 있다. 현재 서구 대중은 너무나 '순치'돼 있고 외부에도 그렇게 보인다.
  
  김 :앞서도 말했듯이 런던 테러에서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이 이 시간에도 대량으로 희생되고 있다는 것을 세계가 눈감고 있다는 것이 이번 테러를 가져온 요인 중 하나다. 따라서 미국의 침략행위는 서구에게도 자해적 결과를 가져온다는 사실, 다시 말해 제국 내부 시민의 목숨과 미래의 안전을 위해서도 자멸적 선택이자, 인류 전체에 공멸의 위기를 가져올 수 있다는 점이 뼈저리게 인식돼야 한다. 인류가 서로를 살육하고 자신도 파괴돼버린 경험을 통해서만 비로소 진로를 바꾸었던 제1차, 제2차 대전의 어리석음을 되풀이하지 않아야 한다.
  
  박 :안타까운 것은 제1, 2차 세계대전의 패배를 겪고 채권국에서 채무국으로 바뀌면서 해체된 영국처럼 미국도 이라크에서의 결정적인 패배를 경험치 않고는 제국의 해체 과정이 본격적으로 촉진되지 않을 것 같다. 실제 지금도 미국의 영향력이 어느 정도 해체되고 있다는 증거는 있다. 미국이 중동에서 식민주의적 전쟁에 열중하는 동안 지금 미국의 뒷마당이라고 할 수 있는 남미, 중미에서는 하나하나 독립해나가고 있다. 베네수엘라가 노골적으로 카스트로와 손잡고 노골적으로 반미 중심지임을 드러내고 있고, 그 뒤엔 온건하고 개량적이지만 아르헨티나 브라질 정권들이 미국과의 거리두기에 상당히 힘을 쓰고 있으며, 친미정권들이 차례차례 무너져온 볼리비아에서는 8월 대선에서 차베스 베네수엘라 대통령의 제자를 자처하는 급진적 인권운동가가 대통령이 될 상황이다.
  
  이렇게 지금 미국의 뒷마당에서는 제국 해체가 어느 정도 진행되고 있긴 하지만 미 제국의 해체에 가장 강력하게 영향을 줄 부분은 중동의 친미 괴뢰정권 이집트, 요르단이고, 동아시아의 남한이다. 이 나라들이 어떻게 미국으로부터 독립할 수 있을까가 중요하다. 특히 동아시아 지역의 경제적 의미를 생각한다면 남한이 미국으로부터 독립해서 자주적인 외교를 펼칠 수 있는 힘이 어느 정도 형성될지가 관건이다.
  
  "현재 이라크 전쟁이 다른 지역의 평화를 보장해주는 꼴"
  
  김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이라크 저항세력의 반제(反帝) 항쟁이 다른 지역의 평화를 보장하고 있다는 점이다. 현재 이라크에서 힘을 소진하고 있는 미국으로서는 동북아시아에서 새로운 전쟁을 기도하기 어려우며, 이것은 우리에게 평화의 계기를 포착하도록 해주고 있다. 그런 점에서 우리의 자이툰 부대 파병은 우리 자신의 평화를 위해서도 자해적 선택이다. 이라크에서 미국의 패배는 동북아시아에서의 평화정책을 미국에게 강제할 것이다. 우리의 평화는 어쩌면 이라크인들의 피를 대가로 하는 측면이 있다는 점에서 이들 이라크 민중들과 우리는 연대 관계를 맺어야 옳을 것이다.
  
  박 :맞다. 우리는 이라크 독립군에게 큰 절이라도 올려야 한다. 이라크 상황이 없었다면 미국은 분명히 이란과 북한에 침략을 감행했을 것이다.
  
  김 :이라크가 미국에 저항하고 중남미가 미국에 맞서 자신들의 독자적 결속력을 강화하며 미국의 활동반경을 최대한 압박하고 있는 것은 이 지역만의 한정된 의미를 넘어서서 세계 평화의 진전을 불러오고 있다고 봐야 한다. 동아시아도 이 상황을 최대한 활용해야 하는 시기가 왔다.
   
  박 :남한이 미국으로부터 독립해서, 더군다나 중국의 힘을 커져가는 상황에서 등거리 외교를 펼칠 수 있는 황금 기회가 오고 있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김 :그런 면에서 보자면 미국이 현재 대북 적대정책을 근본적으로 수정하고 있진 않지만, 예전보다는 여지를 보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일차적인 이유는 2개의 전선의 군사적 긴장을 견딜 수 없다는 점이다. 이는 6자회담의 내부 역학이 달라지는 것으로서, 남북간의 결속이나 독자적 움직임의 여지가 커지고 있음을 뜻한다. 이러한 추세가 앞으로도 지속적인 힘이 될 수 있을 것이냐는 문제는 남아 있으나, 일단은 시동이 걸린 셈이다.
   
  김대중 정권 당시 남북간의 독자적 활동 범위를 일정하게 확보했으나 노무현 정권이 이를 발전적으로 계승할 의지나 전략이 분명치 않았던 점이 국제상황의 변화로 인해 정리되고 있는 것이다. 북한도 이 시기의 의미를 깨닫고 있고, 이 기회를 놓칠 수 없음을 직시하고 있다고 본다. 실로 대단히 중요한 변화가 동북아에서 이뤄지고 있다. 일본도 이러한 변화에 합류하는 것이 자신이 살 길임을 아마 절감하고 있을 것이다. 지금 이 시기 세계의 변화를 주도하고 있는 힘은 중동과 동아시아에서 나오고 있다. 그리고 잘만 하면 우리는 그 중심에 설 수 있다. 부국강병 차원이 아니라 제국주의의 패권체제에서 해방돼 세계평화를 전진시키는 차원에서다.
   
  박 :대단히 영감을 주시는 말씀이지만 미제국의 힘이 중동에 묶여 있고 중국이 급성장하고, 북한도 적극적인 경제협력을 모색하는 이 때에 남한이 적극적인 등거리외교를 펼쳐 조금씩 미국의 군사보호령을 벗어나야 하는데 남한이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있다는 느낌이다. 레토릭 차원에서는 균형자론을 말하며 상당히 합리적인 자세를 보이려 하지만, 자이툰 부대 파병이라는 치명적 오점도 있고 지금 미군의 한반도 철수를 위해 노력하는 것이 거의 없다. 최근 평택 시위도 있었지만 평택의 초대형 기지가 장기적으로는 대중국 침략기지가 될 것이 분명한데, 남한 정권이 어떤 수단으로도 이것을 막지 못하며 미국의 군사보호령으로 남는다는 것이 결국 한반도 전쟁의 불씨가 된다는 점에서 우려스럽다.
  
  이것은 노무현 정권 탓으로만 돌릴 수도 없고 남한 지배계급의 구조부터 파고들어야 한다. 엘리트 관료 세력들이 어느 정도 미 제국세력과 유착되어 있는지부터. 한국에서는 관료 세력들이 미 제국의 하수인을 자처하는가 하면 남한 대자본의 예속성도 너무 심하다. 실제 미국을 위시한 여러 국제 투기자본들이 대기업의 상당 지분을 갖고 있기도 하다.
  
  "대부분의 언론, 평택 미군기지에 외면으로 일관"
   
  김 :그러한 구조적 문제도 있겠지만 우리 사회 내부의 일종의 패배주의도 큰 요인이다. 미국과 어긋나면 우리가 매우 고달파지고 미래를 예측할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는 식의 무의식적 좌절감 말이다. 노무현 정권도 잘 나가다가도 "한미동맹을 축으로" 라는 식의 단서를 꼭 달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을 반복하는 것도 그런 현실의 반영이다.

  당장 평택 미군기지에 대한 우리사회의 대응은 무관심 쪽에 가깝다. 이 과정에서 곡창지대가 붕괴되고 이에 항의하는 시민들이 국가 공권력에 짓밟히고 있는데도 대부분의 언론들은 외면하고 있다. 한반도에 미국의 동북아 공군사령부가 설치되는 것에 대해서도 이 사회의 지식인들이나 정치지도자 또는 시민사회가 심각하게 문제제기를 하지 않는 것은 깊이 우려스러운 상황이다. 
   
  한반도 내부에 미국의 제국주의 지배정책이나 군사전략이 어떤 내용으로 관철되고 있는지 끊임없이 알리고 인식시키는 것이 중요하다. 박 선생께서 미국의 대북, 대중 포위전략을 거론하셨지만, 바로 그 전략에 기초해서 한반도 남쪽의 미군의 군사기지화가 진행되고 있고 일본의 군사대국화가 강력하게 추진되고 있다. 게다가 우리는 중국과 대적관계에 들어설 수 있게 된다. 얼마 전 중국의 한 고위 장성이 미국이 대만문제와 관련해서 중국을 공격할 경우 핵전쟁도 불사할 것이라고 발언했다. 중국정부의 공식적인 입장은 아니지만 우리로서는 위협적일 수밖에 없는 입장 천명이다. 그 공격의 목표에 우리가 포함될 수 있기 때문이다. 미국의 패권정책에 우리가 휘말려 들어가면 안 될 국가 생존차원의 이유가 명백하지 않은가?
  
  박 :남한은 냉전시기부터 계속된 여러가지 대미종속적 기제의 해체 문제에 고민해야 한다. 자이툰 부대 파견만 해도 한국 2000년 역사상 가장 큰 오점로 기록될 것이다. 식민지 경험이 있는 한국이 왜 미국의 이라크 식민화전쟁에 동조하는지, 한국군이 왜 존재하는지 물어볼만한 시점이다. 이러한 오점에 기여한 것이 현 외교부와 국방부의 관료집단이다. 이들은 정책적 측면에서의 미국과의 유착관계를 자녀의 미국 국적 문제에서부터 치밀하게 따져야 한다. 예전에 노 대통령이 '미국을 한국보다 더 가깝게 생각하는 한국인들이 있다'고 발언한 적도 있었는데 발언에 머물게 아니다. 예속화된 관료 문제는 학벌과도 연관이 있다. 부유층 자녀들이 특정 학벌을 가지고 고시를 통해 외무부를 장악할 수 있는데, 이를 해체하지 않고서는 미국과의 유착 욕망이 강한 강남 출신들이 외무부 주요부처를 계속 장악할 것이다.
  
  김 :그런 측면에서 지식인과 언론의 역할이 중요하다. 사실 지난 20여년 간 우리 사회의 미국에 대한 인식은 상당한 변화를 경험해 왔다. 미국이 우리에게 시혜를 베풀었다는 식의 인식은 거의 정리된 느낌이다. 이제는 미국이 동북아시아에서 기획하는 바의 전체적 흐름을 보여주고 이를 논의할 수 있는 공론의 장을 언론이 제공해야 한다. 미국과 관련한 비판적 논의가 급진적이거나 좌파의담론으로 한정될 것이 아니라, 우리 일상의 상식적인 논의로 받아들여져야 한다. 이 문제를 명확하게 짚어나가지 않으면 우리의 미래는 안전할 수 없기 때문이다. 
  
  지식인사회도 과거 민주화운동 할 때의 열정과 자세를 확대 심화시켜, 아메리카 제국주의의 지배전략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고민하면서 제국의 지배장치를 해체하는 노력을 다양한 방식으로 펼쳐나가야 한다.
  
  "친미파의 산실, '힘을 숭배하는' 한국의 대형 기독교 교회"
   
  박 :동아시아의 평화를 위협하는 대미 관계를 해체시킬 수 있도록 대안언론의 힘도 키워야겠지만, 대미종속구조 청산에 있어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종교 문제다. 대미 종속관계의 대중적 기반은 무엇보다 대형교회다. 이들이 갖는 왜곡된 개신교적 신앙을 보면 결국 하느님을 숭배하는 게 아니라 힘을 숭배한다. 미국을 최고의 힘으로 보고 하느님보다는 이 미국의 힘에 대해 숭배심을 갖고 있다. 이 대형교회가 유포하는 논리를 우리가 해부하고 이 신앙이 갖는 반인륜적인 부분에 대한 대중의 자각을 불러일으키지 않고서는 대미종속, 전쟁지향적 구조의 대중적 기반이 해체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 왜곡된 기독교에 대한 비판은 결국 안으로부터 나와야 한다. 최근 유상태씨의 <한국 기독교는 예수를 배반했다>라는 책도 냈는데, 이같은 양심선언들이 부단히 나와야 한다.
  
  김 :대형 교회뿐만이 아니다. 소형 교회도 대형 교회의 종교적 이데올로기를 그대로 따르고 있다. 대형이나 소형이냐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 교회 전반에 걸쳐 있는 아주 심각한 신학적 오류다. 예수가 2000년 전에 로마 식민지였던 팔레스타인 땅에서 누구를 껴안고 무엇을 위해 살아갔으며, 목숨을 걸고 외치려 했던 바가 무엇인지를 정직하게 직시하려는 노력은 한국 교회에서 보기 드물다. 지난 가을에 20년 만에 정식으로 귀국해서 여러 교회를 볼 기회가 있었는데 개인적으로는 사실 경악스러웠다. 멀쩡한 사람들을 우민화하는 종교폭력의 현장에 절망스러운 느낌마저 들었다. 
   
  우리 현실의 아픔들을 절절히 껴안고 그 고뇌를 함께 나누면서 하늘의 정의의 평화가 이 땅에 이뤄지기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 하는 복된 소리를 듣기가 어렵더라. 하나님의 정의와 평화, 사랑에 대한 확신보다는 힘에 대한 열망과 맹목의 교리적 확신이 한국사회의 정신적 현실을 마비시키는 데 일조하고 있다. 미국이 폭력으로 장악하고 지배하는 세계구조를 아무런 비판도 없이 도리어 찬양하는 종교지도자들은 누구의 사도(使徒)인지 모르겠다. 
   
  박 :불교계의 병역 거부자인 오태양씨를 지원하지 않는 한국 불교계도 부처님 말씀과 관계없긴 매 한가지지만 한국의 기독교를 보면 저들이 예수님을 정말 이해하고 있는지 의구심이 든다. 저는 예수를 일종의 아나키적인 공산주의자로 파악한다. 그 당시 약자운동 초기에 교회 신도의 다수는 중산층이었지만 예수님과 그 제자들을 보면 어디까지나 약자운동이었고 매우 급진적이고 반체제적인 정신이 있었다.
   
  김 :아나키즘이란 흔히들 생각하듯 무정부주의로 번역되기보다는 한사람 한사람이 그 자신의 독자적이고도 생래적인 자율적 의지와 생명력을 최대한 존중하는 정신과 자세가 아닌가. 예수 운동은 바로 이 힘을 하늘의 뜻과 일치시키는 결단과 확신의 공동체를 만들어가는 노력이라고 할 수 있다. 
  
  "체제 비판을 무력화하고 우민화하는 교회들"
  
  박 :예수의 정신이 바로 그것이다. 예를 들면 심판관에게 가지 말라는 것이 결국은 물신화, 타자화된 권력에 대한 자율주의의 도전이다. 왼뺨을 맞으면 오른뺨을 대라고 하는 것도 그렇다.
   
  김 :그렇게 해서 내미는 뺨은, 보통 맞았을 대 나오는 의례적이고 상식적인 대응 방식이 아니다. 세상의 논리로는 전혀 상상할 수 없는 대안으로 문제를 풀라는 의미다.
  
  박 :결국 대안적 사회는 폭력으로 만들 수 없다는 거다.
   
  김 :바로 그렇다. 그런 차원에서 보면 한국 교회가 대안을 모색치 않고 기존 질서의 논리나 주장을 수용, 심화, 세뇌시키는 게 문제다. 종교뿐 아니라 우리 사회 전체의 정신적 성향 자체가 그런 경향을 지닌 게 아닌가 한다. 교육도 대안의 세계를 꿈꾸고 이를 위해 필요한 상상력과 능력, 그리고 인간관계를 훈련시키는 내용을 담지 못하고 있다. 자본주의 시장에서의 무제한적인 경쟁력을 추구하는 비인간적 품성을 길러내고 있는 셈이다. 한국의 기독교가 이에 합류하거나 조장하고 있는 현실은 실로 개탄스럽다. 
   
  박 :예전 미국 선교사들이 기독교를 들고 들어왔을 때 그것은 이미 그 당시 한국의 신흥부르주아 엘리트들을 미국 주도의 세계 자본주의 질서에 편입시키는 역할을 했다. 그리고 남한이 미국 제국의 군사적 보호령이 되고 나서는 미 제국의 지배를 합리화하고 미 제국에 친화적인 엘리트를 키우는 역할을 한국의 기독교 교회가 해 왔다. 물론 교회는 대중들에게 해체된 마을 공동체를 대체하는 역할을 해주었다. 이농해서 도시에 온 사람들에게 따뜻함을 제공하는 것이었는데 문제는 그게 위장된 것이라는 얘기다. 진정한 따뜻함은 부정의한 체제를 전복시키고 대안을 주는 데서 오는 것인데 그게 아니라 어떻게 이 체제에 붙어서 잘먹고 잘살까 그런 차원의 궁리만 하게 하는 것이다. 그리곤 결국 불합리한 체제를 합리화하고 어려운 사람들을 이 체제 속에 편입시키고 이 안에서의 생활을 정신적으로 안락하게 해주는 역할만 하고 있다. 이것은 예수님의 정신과는 정반대다.
  
  6자회담의 과제 : 어떻게 미국을 압박하는 다중의 대안을 도출할까

김 :아까도 언급했듯 이번 6자회담에서는 과거에 비해 나름대로 우리 역할의 여지가 넓어졌다. 1차적으로는 강화된 남북의 경제협력 속에 한반도 문제의 평화적 해결의 가능성은 높아졌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백두산 개발' 제안 등 일련의 사건은 남북 경제 결속에 대한 의지와 함께 북한의 개방에 대한 정치적 자신감도 담고 있다. 이러한 작업들이 축적돼 일단 동력을 얻으면 다른 데서 간섭하기 쉽지 않은 틀이 만들어져 갈 것이다. 다만, 북한이 지속적으로 요구하는 안보상의 불안 해소 요구에 미국이 여전히 분명하게 답하지 않아 불안한 측면 또한 상존하고 있다.
   
  우리가 아무리 많은 경제적인 성과를 거둬도 이 문제가 제대로 풀리지 않으면 어렵게 이룩한 성과가 한순간에 파괴될 수 있다. 따라서 어떻게 이에 대한 보호장치를 만들 수 있느냐가 최대 과제다. 애초 6자회담에 대한 미국의 구상은 북한에 대한 다중적 압박이었는데, 지금은 이것이 반전됐다. 미국이 6자회담 참석국가들의 다중 압박에 대안을 제출해야 하는 상태 아닌가. 미국은 이라크 정세의 압박을 덜기 위해 6자회담의 새로운 돌파구를 찾아야 하는 처지지만, 우리 입장에서는 어떻게든 이 기회를 살려야 한다는 점에서 남북 사이에 오가는 이야기가 더욱 중요해졌다.
   
  박 :미국의 구상은 중국을 동원해서 북한을 압박하려는 것이었는데 회담이 중국 주도로 재편되면서 북한을 어떻게 달래서 북한 경제를 안정화시킬 것이냐는 바람직한 구도로 재편됐다. 지금 북한 상황을 보면 남한과 중국이 북한 경제에 가장 중요하다. 북한에 유입되는 것이 중국과 남한 자본이고 북한의 주요 무역 상대 또한 그 두 국가다. 결국 우리가 미래의 비전을 제시한다면 한반도와 중국을 아우르는 하나의 평화벨트가 아닐까 싶다.
   
  김 :향후 동북아시아에서 미국의 위상이 어떻게 될 것인지 흥미롭다. 지금 같은 독점적인 패권 체제 유지는 비현실적이 것이 될 것이다. 따라서 미국이 새롭게 조성되는 동북아시아 경제 블록에 적극 합류치 않고서는 동북아에서 정상적인 위치를 유지하기 힘들 것이다. 미국은 과거의 발상과 기득권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 이러한 전망을 분명하게 해나가는 것이 자신을 위해서도 유리할 것이다. 일본도 지금 같은 방식으로 아시아의 미래적 의미를 가진 일원이 되기는 힘들 것이다.
  
  미국의 영향력이 쇠퇴하고 이 과정에서 자칫 중국과 한반도가 여러 가지 차원에서 주종관계가 될 가능성도 최대한 견제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동북아시아에서의 평화적인 경제벨트를 그려나가려는 의지가 보다 중요하다. 그것은 중국과의 관계에서 우리의 자주적 역량을 키워나가는 데에도 근본적으로 요구되는 민족적 덕목이다. 이 그림을 아시아의 미래로 만들어 나가면서 미국이나 일본도 이에 합류해 자신의 이익을 취할 수 있게 만든다면 6자회담 이후의 현실도 우리에게 한 단계 높은 수준의 열정을 불러일으키는 과제가 될 것이다. 
  
  "일본도 미국처럼 기로에 서 있다"
  
  박 :사실 일본도 미국처럼 기로에 서 있다. 지금 일본의 보수적인 지배층이 생각할 수 있는 전략은 두 가지다. 하나는 미국의 헤게모니 약화 과정에서 일본 군사력을 키워 미국의 세계적 경찰 역할을 동아시아에서 대행하면서 헌법을 수정해 재무장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새로운 기류를 인정하고 경제적 이득 위주로 중국, 남한의 동아시아 블록에 편입되는 것이다. 패권보다는 중국을 정치적으로 견제하고, 평화적으로 협력하고 견제하는 체제다. 이 두 가지 노선에서 일본 지배층이 과연 어떤 걸 택할까. 자민당의 독수리파는 고이즈미보다 전통적인 입장이고, 후자는 민주당의 칸 나오토가 대표적이다. 일본도 현재 그 두 그 노선을 둘러싸고 상당한 정치적 투쟁을 벌이고 있다.
  
  김 :현재의 일본 정치지형을 바꾸는 것도 결국 한반도 상황이다. 고이즈미가 미국의 견제에도 불구하고 평양을 방문하고 관계 정상화의 구상을 실천에 옮기려했던 대목은 중요하다. 그 뒤 미국의 압박에 철회되긴 했지만 완전한 폐기는 아니었고 그 선택은 아직 살아 있다고 보인다. 반동적 군사 대국화를 통해 아시아의 미래를 구축해나갈 건지 아니면 우호적 관계를 심화시키면서 일본의 평화와 번영, 그리고 인류사회에 이바지하는 일본의 국제적 역할을 추구할 건지가 결정될 것이다. 한반도의 평화가 보장되고 이를 기반으로 새로운 동북아 협력시대가 펼쳐지면, 일본 내부의 정치지형의 주도권도 달라지고 현실적인 대세를 판단하는 각도에도 바람직한 변화가 오리라고 본다.
  
  박 :고이즈미의 북한 방문도 남한 재벌들이 북한의 노동력과 시장을 장악하기 전에 일본 몫을 확보하려는 일본 재벌을 대변하러 간 것이지만, 그렇더라도 우리로서는 다행스러운 일이다. 그런데 또 한가지 간과되면 안될 것은 중국이 지금은 평화지향적인 국가고 적어도 10~15년은 경제발전에 집중해서 군사적 팽창을 지향하지 않을 테지만 중국 지배세력의 성격은 어디까지나 사회주의 간판 떼놓고 보면 극우라는 점이다. 중국의 지배세력은 노동자의 단결권, 즉 민주노조를 만들 권리를 무시하고 있다.
   
  김 :중국 이야기까지 확대해서 하자면 오늘 아마도 한이 없을 것이다. 다만, 중국은 현재 해안과 대륙내의 빈부 격차, 정치적 민주주의에 대한 중국 공산당의 경직된 자세, 자본주의 경제의 팽창적 추진, 이로 인한 사회적 모순의 발생 등으로 중국 내부에서 정치적 홍역을 겪지 않을까 싶다. 러시아 못지않게 중국은 정치지도부가 우파적 보수화의 경향을 보이고 있다는 점에서 경계되는 점이 없지 않다. 좌파정당의 우파정치라는 모순을 언제까지 지속시킬 수 있을 것인지 주목된다. 
  
  한반도가 대안적 경제체제를 이뤄내는 데 성공한다면, 이는 중국을 비롯해서 동북아시아 전체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지 않을까 싶다. 남북간의 경제적 결속은 경제협력이나 민족경제의 균형 발전의 차원에서 그치지 말고, 매우 새로운 대안의 정치경제적 체제를 창조적으로 성취해내는 방향으로 밀고 나가야 할 것이다. 일본의 메이지유신, 중국의 사회주의 혁명에 이어, 우리는 이들의 역사가 모순과 한계에 봉착했던 바를 극복해 세계사적 의미를 가진 미래를 만드는 일에 열정을 쏟아 붓는 시대를 열었으면 하는 희망을 가지고 있다.
   
  박 :중국이 홍역을 겪지 않고 동북아 경제를 계속 주도한다면 동북아에 정치적 보수화를 가져올 것이다. 현재 중국에서 한국 재벌들이 장사 제일 잘한다. 한국 재벌들이 중국 관료의 유착 관계를 제일 잘 활용한다. 중국예찬론자들을 가만히 보면 다 한국 재벌이다.(웃음)
  
  "기껏 남북 경제협력해서 미국과 일본 자본의 놀이터 되면 안돼"
   
  김 :그런 측면에서 한반도의 미래가 자본의 전면적 지배로 귀결되는 것을 장기적으로 극복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클린턴 당시의 미국이 김대중 대통령의 주도 아래 남북관계에 대한 일정한 변화를 용인했던 저변에는 자본으로 한반도 전체의 장악이 가능하다는 계산이 있었다. 부시 정권이 보이는 최근의 미묘한 변화 밑바닥에는 군사적 공세의 한계를 예감하고 클린턴 당시의 복안같이 자본으로 남과 북을 총체적으로 지배할 수 있다면 그쪽으로 손을 돌려보자는 나름대로의 계산이 느껴진다.

우리로서는 당장의 군사적 압박을 피하는 쪽이 상책이다. 그러나 딜레마는 있다. 군사적인 해법을 저지하면 평화를 얻을 수 있으나 길게 보면 남쪽이 지난 시기에 겪었던 것처럼 미국과 일본의 자본이 주도하는 상황이 올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기껏 남과 북의 경제적 통로 개설과 통일의 기반을 우리 민족이 어렵게 구축한 위에 이들이 뛰어놀 수 있는 놀이터를 제공해주는 결과를 불러올 수 있다. 따라서 이러한 상황이 조성되지 않도록  민족경제 통합과정에서 융합 체제의 미래를 깊이 고민해야 한다. 단기적으로는 평화지향, 장기적으로는 경제체제의 내용을 심도 있게 논의해야 한다는 얘기다.
   
  박 :외국 자본이 이북에 들어가서 착취행각을 벌이는 것도 문제지만 과연 국내자본은 얼마나 다를까? 지금도 통일 이후의 문제를 예고하는 것이 남한 내의 탈북자 문제와 중국 내의 탈북자에 대한 남쪽의 의식이다. 남한 내의 탈북자 상당 수는 취직하기가 힘든다. 이처럼 남한 내의 탈북자들은 이미 내부적으로 식민지화하고 있고, 중국 내에서 떠도는 수만명 탈북자에 대해서는 남한의 소위 민족주의적 좌파들도 거의 신경쓰지 않고 경제난민으로 치부하고 그들의 정착, 국내 입국 지원에 무심하다. 이는 결국 민족적 당위가 인권보다 우선이라는 잘못된 인식이다. 남한 좌파가 북한 탈북자 개개인의 고통을 보지 않고 북한 정치체제의 위협으로만 생각하는 게 잘못이다. 탈북자를 인권을 가진 인간 한명 한명으로 볼 필요가 있다. 또 개성공단에 진출한 한국 자본이 북한 노동자에게 임금을 얼마나 주고 어떤 노동조건을 만드는가도 생각해봐야 한다. 한달 월급이 30달러 이하다.
   
  "북한 사람들, '값싼 노동력'으로 불리는 거 싫어해.."
  
  김 :그렇지 않아도 북쪽 분들이 남쪽에서 흔히 쓰는 '남한의 자원과 기술, 북한의 값싼 노동력'이라는 표현에 상당히 불만을 가지고 있다고 들었다. '값싼 노동력'이라는 말은 의도치 않더라도 노동에 대한 착취의 관점이 드러나는 대목일 수 있다. 노동의 인간적 가치를 존중하는 자세가 없는 남북 경협은 북한을 내부 식민지화하는 전략의 시발점이 될 수 있고, 그것은 한반도 전체의 통합에 지속적인 모순으로 작용할 것이다. 중요한 것은 남이나 북이나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는 행복한 사회를 건설하는 데에 그 소명이 있지 않겠나. 이제 마무리 정리를 해보자. 그렇다면 남쪽에서는 어떤 희망이 발견되고 또 이를 길러낼 수 있을까.
   
  박 :희망은 민중들의 계급 투쟁에 있다. 민중 한사람 한사람의 인권에 대한 자각에 희망이 있다. 남한 민중이 계급 투쟁을 통해 무상교육, 무상 의료를 쟁취해 편하게 숨쉴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게 통일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북한은 이제 다 무너졌지만 명목상으로는 무상교육과 의료가 남아 있다. 남한사회가 그와 비슷한 사회를 제공한다면 통일한국에서도 이북 출신들에게 좋은 질의 삶이 보장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려면 결국 노동계급의 투쟁밖에 없고, 비정규직을 보다 조합해서 강력한 투쟁노선으로 가야 할 것이다. 비정규직 투쟁에 희망이 있다고 본다.
   
  김 :나는 젊은 세대에 희망을 가지고 있다. 요사이 젊은이들이 자본주의 시장의 소비 주도세력으로 길러졌음에도 이들 내면의 자유로운 에너지는 역사의 요구에 제대로 결합되기만 하면 엄청난 힘을 발휘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정치적 민주주의가 상당히 진행됐고 세계적 변화에 상당히 노출되어 있으며, 이로써 이들 세대의 발상과 시선은 무한대로 자유롭다. 대학에서 가르치는 학생들과 대학원의 젊은 세대들을 보면 그 의지가 순수하고 아름다운 열정을 가지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바로 이 세대의 활력과 꿈에 민족적, 인류적 과제를 의식하고 있는 기성세대가 어떻게 다가갈 수 있을 것이냐는 것이 중요하다. 세대를 뛰어 넘어 하나의 힘으로 결합되면 적어도 앞으로 20-30년간은 한반도 역동적 변화의 대세를 주도해나갈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미국도 그렇고 다른 나라에서도 쉽게 볼 수 없는 엄청난 폭발력이 한국사회에 있다. 외국에서 오래 산 사람에게는 이 기운이 바로 느껴진다. 젊은 세대의 열정적 에너지가 소비적으로 흐르지 않도록 하면서, 오늘의 역사가 요청하고 있는 여러 가지 과제들을 자신의 인생의 목표로 삼아나갈 수 있길 희망한다. 
   
  박 :그런 역동적인 에너지를 체제에 편입되는 데에 쓰기보다는 체제를 바꾸는 데 썼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그런데 과연 기성세대가 체제변혁 방향의 매력적인 이데올로기를 제공해 그 에너지를 체제 변혁적인 방향으로 이끌 수 있느냐가 관건이다. 그 지점에서 남한 좌파들이 반성해야 한다. 남한 좌파는 너무 구시대적인 민족주의로 일관해 왔는데, 그것은 더 이상 젊은이들의 에너지를 담을 그릇이 못된다. 좀 더 탈권위주의적이고 개인중심이어야 한다. 그런 방향의 이데올로기를 제공한다면 젊은이들의 에너지를 좋은 방향으로 이끌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김 :지난 격변의 시대를 거쳐 온 70-80년 세대들이 오늘날 이제 이 사회의 중추인 40, 50대가 되었는데, 이들의 인식과 요즘 젊은 세대의 에너지가 생산적이고도 인간적인 소통에 성공한다면 개인의 문제부터 민족, 인류의 문제까지 끌어내는 공론의 장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오늘의 이 시간이 그러한 일을 해내는 데에 작으나마 힘을 보태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오늘 함께한 시간, 기쁘고 고마왔다.

(프레시안 / 최서영 기자 2005-7-23)